[클래식 ABC]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음악가들은 베토벤으로 환호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꼭 20년 전, 음악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무너진 장벽 앞에서 조용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동독 주민들을 초청해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교향곡 7번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사에 뜨겁게 남아 있는 장면을 꼽으라면, 1989년 12월 25일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해 성탄을 맞아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영국의 런던 심포니, 미국의 뉴욕 필하모닉, 구(舊)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 극장 오케스트라와 패전국 독일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그리고 나치 치하에서 해방을 맞은 프랑스의 파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1821년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가 초연된 역사적 장소이며, 냉전 당시에는 동베를린에 속해 있던 샤우스필하우스(현 콘체르트하우스)가 무대였습니다.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성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영국·미국·소련·독일·프랑스의 명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베토벤의‘합창’을 연주하며 뜻을 기렸다. 당시 공연을 담은 실황음반 표지./유니버설 뮤직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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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고른 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입니다.
번스타인은 교향곡 4악장에 붙어 있는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 대신 이날만큼은 '자유의 송가'라는 제목을 달았지요.
2차 세계대전에서 비롯한 냉전 체제를 종식하고, 음악을 통해 화합을 빚는다는 구상을 단원 구성부터 곡 선택까지 분명히 한 것입니다.
춤추듯 지휘봉은 허공을 가르고 때로는 지휘대를 마구 발로 밟는 번스타인의 열정적인 몸짓에 따라 울려 퍼지는 '합창'에는 분명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깔려 있습니다.
역사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음악의 감동 역시 언제나 예상 밖이긴 매한가지입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은 사랑이나 증오 등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일절 금지된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불온' 예술품을 파괴하던 요원 존 프레스턴(크리스천 베일 분)은 단속 도중 턴테이블에 꽂혀 있는 낡은 레코드판을 우연히 발견합니다.
차디찬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가 굳어 있던 얼굴 선을 깨뜨리고, 서서히 감동에 젖어드는 곡이 바로 '합창'입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경제·사회 지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지는 결산 작업이 한창입니다.
하지만 20년 전 뜨겁게 노래했던 자유와 인류애는 이 대차대조표에서 빠져 있는 것만 같아 아쉽습니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 지구상 마지막 남아 있는 분단국가인 한반도까지 '합창'이 울려 퍼져야 하는 곳은 아직도 많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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