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추상
김상환
문득, 사잇길로 들어서면 숲
개곽향과 뱀과 이끼 밑
옛적의 물이 있다
유금빛 바위
생을 다한 나뭇가지가 숨어 부르는 노래,
天玄地黃
운문
김상환
배롱나무 근처
그늘에서의 일이다
한여름 오후
법고소리에 개울물이 깨어나면
꽃담에 비친 나는 비非,
아니 나비가 되어버린
나반존자의 하늘
구름은 멀고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구름체꽃을 본지 오래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을 떠나온지 오래
죽은 새를 뒤로 하고 운문을 나서니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
즉물
김상환
물의 중심은 둘레다
둘레가 물의 즉卽, 프론트*임을 안 것은
단산지에서의 일이다
탱자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다 본 저수지, 희다
흰새가 운다
물의 이마와 소리를 걷다 보면
천인국이 어느새 제방을 뒤덮다
길 끝 접시꽃 한 점,
즉물卽物이다
무덤은 순전한 물음이다
김상환
무덤과 물음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 위
무엇이 노래이고 무엇이 새인지
해를 따라 걷다 보면 안다
무덤은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
먼 들녘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
고분을 휘감다
정수리 위로 내리꽂히는
정오의 태양
예초음에 머리 끝이 곧추 서다
무덤은 순전한 물음이다
산정호수
김상환
산정에는 호수가 있다
깊고 푸른 호수가 고요의 빛이라면 그것은 물과 산을 바라보는 빛의 고요, 아니 잎이 오므라든 채 겨울을 나는 가침박달의 흰 꿈 사향노루가 곤히 잠든 호숫가, 누군가의 한 생이 저물어간다
밤이 깊으면
십일월에 눈이 온다
빨간 자전거에 꽃이 핀다
달과 소녀
-서양화가 강신국에게
김상환
초승달은 푸른 말이다
달의 갈기 곧추 세워 소녀는 현을 켠다
물수제비처럼 선율이 하늘가에 퍼진다
말은 검푸른 달
그 달의 말과 빛으로
뭇별이 쏟아지면
홍교 아래 물이 흐른다
꽃살문
김상환
꽃의 살
살의 문
문의 꽃
솟을
모란꽃
살문
솟을민
꽃
살문
열에서 하나
하나에서 법
열
구멍
김동원
구멍은 어찌 보면 참 많은 것을 가졌다.―저 광활한 우주의 별들이 생겨나고 또 죽어서 스스로 돌아가는 몰락과 생성의 두 구멍이 있는가 하면, 우리 같은 수컷들이 알이나 새끼로 자라서 흘러 나오는 저 한정 없는 암컷들의 한없이 깊고 넓고 편안한, 그 한 길 구멍도 있다.
좁게는 부끄러운 짓거리를 했거나 크게는 온 나라를 망쳐서 말아 먹은 자들이 으레히 숨어서 들락거리는 쥐구멍 같은 것도 있고, 참 착한 것들이 두 귀를 쫑긋거리고 봄나들이 길을 나서는 그 아늑한 수풀가의 토끼 구멍도 있다.
구멍은 또, 여름 밤 도시 옆구릿길의 복개천 아래로 몰래 쏟아 놓은 퀴퀴한 인간들이 썩는 오물냄새 나는 수챗구멍에도 있고, 꽝꽝 얼어붙은 겨울 연못가 도랑 밑에 흐르는, 졸졸졸 소리 나는 맑은 봄기운을 흡입하는 그 생기 도는 버들 뿌리의 작은 공기 구멍에도 있다.
구멍은 어찌 보면 참 많은 것을 가졌다.―이따금 난 산이 몸부림치는 이상한 소리를 바람 부는 뒷산의 동굴 구멍 안쪽 벽에서 들었는데, 어찌 들으면 그 소리는 태초의 첫 구멍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또또 어찌 들으면 많이 쓴 구멍들의 흥건한 절정의 끄트머리에서 흘러 나오는 그 야릇한 소리로, 수만년 제대로 키워 온 자연의 그 순리 구멍의 신음쯤으로 알아들었다.
어쩌면 좋은가. 이 하늘과 땅의 그 많은 구멍 중에서 우리는 어떤 구멍을 가져야 하는가. 오뉴월 개도 걸리지 않는 삐삐거리는 콧물소리 내는 콧구멍이 되든가, 아니면, 달빛이 걸어가는 대숲 속에서 은은히 흘러 소리 되어 나오는 그 멋진 대금의 피리 구멍 가락이 되든가, 아니면 또, 저 동해 바다 한가운데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그 고래들의 마구마구 뿜어 올리는 무한 자유의 숨구멍이라도 되든가.
참으로 그 구멍이 하는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그 무슨 질퍽거리는 운명의 진흙 구멍 속에라도 들어가야만 하고, 또 그 구멍 밖으로 안간힘을 다해 기어 나와야만 한다. 마치, 저 백두산 천지 복판에서 날마다 힘차게 밀고 올라오는 그 생수 구멍의 당찬 힘처럼, 우리도 언젠가 한 번은 찬란한 기쁨의 인생을 위해, 온몸으로 어둠의 구멍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꽃과 첫날밤
김동원
오늘 밤 신랑은 신부의 몸에
시를 쓰겠다.
눈 덮인 겨울 숲 속에
그 기막힌 첫 행을 긋겠다.
아! 오늘 밤 신랑은, 온 사방 신부의 몸에
꽃을 찾겠다.
꽃과 여인
김동원
비는 왠지, 종일 모로 누워 우는 듯했다. 손 베개를 괸 채 시달린 병에 지친 여인처럼, 비는, 눈가에 눈물이 번져 오고 있었다.
그 봄날 앞마당 꽃잎에 떨구던 빗물을 세며,
"다음 생生은 꼬옥, 꽃이 돼야지."
자꾸 쓸쓸한 예감 쪽으로 말이 젖던,
그 비는, 곱고 야윈 겨울 아침 몸을 벗고, 흰 눈 속 꽃을 피우려 하늘로 들었다.
저녁 숲
김동원
물기 덮인 축축한 낙엽더미 속을 뒤적거리노라면,
이 숲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여인의 흔적을 만날 것만 같다
이 고요한 가을 법이산 저녁 숲 속의
안개 내린
나무들 사이로 팔을 벌려
서 보면,
작은 안개의 물방울들이 내 아픈 상처의 잎새 위로
발을 내리고, 서로
위로하는 걸
느낀다
'가만히 앉아서 낙엽 냄새를 맡는다'
이 숲 어딘가에서 물기 덮인 축축한 낙엽 더미 속을
뒤적거리노라면, 그 옛날
안개가 길을 잃은 숲 속 사이로
여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안 들린다' 들린다 '안 들린다'
시인
김동원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처음 보는 길 캄캄한 길 되돌아올 수 없는 길
누군 뭐 다 알고 가나, 가다 보면 알겠지
그렇게 가다 보면 달빛도 나오겠지,
안 나와도 못 갈 것 없지
길 없으면,
길 보일 때까지 눌러앉아 쉬면 되거든,
무작정 쉬는 재미 세상사
깜박 다 잊고
구름에 기대 쉬는 재미
여자 꽁무니도 한 번 따라가 보는 거야
모든 게 그 계곡서 흘렀으니,
혹, 그 길 보일지 누가
아나,
올라도 타 보는 거야, 그 상상력의 快美 속에, 그러다 안 되면
산도 들이받아 보고, 그 아래
처박혀도 보고
한밤중 술병을 들고 神 앞에 나서
버둥거려도 보고,
그래도그래도 풀리지 않거든,
그 이른 첫새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꺼이꺼이 해를 안고
다 타도록 울면 되지, 이제 알겠지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어쩌면 시는
김동원
어쩌면 시는 내 첫 여자일 것이다. 이별의 구름 밖에 서서 울던, 그 눈물 같은 노을의 처녀일 것이다. 어쩌면 시는 내 어머니의 무덤일 것이다. 봄볕에 만져 보면 잔디가 흰 솜 같던, 그 따뜻한 체온의 모성일 것이다.
문득
김동원
문득, 난 한 번씩 길을 가다, 나도 모르게 그만 중얼중얼거리며 문 열고 들어가 한참을 있다 돌아온다 빙글벙글 좋아서 돌아온다 그 신기하게도 졸랑거리며 하늘로 몰려가는 어린 솜구름처럼, 그 곳은 문득 한 번씩 길 가다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거리며 문 열고 들어가 한참을 있다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