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여기에 와서 강의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경영에 실패하고 30년 이상 끌어오던 삼미그룹 부도를 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이왕 망할 바에야 30년 이상 근속한 근로자들에게 퇴직금을 줄 것을, 그렇게 하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 물어내라. 퇴직금을 내 놓아라.'''''''' 하는 데모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 앞에 얼굴을 들고 와서 얘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는 옛날에는 성공사례만 연구를 했었는데 요즘은 실패한 사례도 연구를 한다고 한다.
성공을 한 것도 자산이고 실패도 역시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펑크가 난 경험과 같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다. 한번 펑크가 나 보면 다음에는 처음처럼 그렇게 당혹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아는 것은 없지만 내 경험을 몇 마디 드려서 여러분이 경영하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삼미그룹이 부도가 나고 할 일이 없어서 집에 있다보니까 속에서 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생 집에서 그렇게 할 일 없이 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등산을 해 보라고 해서 등산을 해 보았지만 그것도 일하면서 바쁠 적에 틈을 내 가는 것이 좋은 것이지 회사를 부도내고 실직한 상태로 가는 등산은 결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해서 망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실패했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마감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절벽에 새끼줄 하나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정말 미칠 정도로 긴장되는 일이다. 언제 떨어져도 떨어질 것은 틀림없는데 그냥 확 놓아버려서 엉덩방아 한번 찍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21세기는 모든 질병이 다 치료가 되어서 평균 연령이 97세나 된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62세 밖에 안된 상태에서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30여년이나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용기가 났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 다시 일자리를 구하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에 가서 다시 사장이나 부사장 같은 경영에 관계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싶어 경영에는 손을 씻고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일을 찾게 되었다. 이런 것을 찾다 보니 아파트 수위나 병원의 안내원, 골프장의 마샬, 식당의 웨이터 등은 한번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좀더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 왔었다.
식당이라는 것은 단순히 끼니를 채우는 곳만은 아닌 것이다. 인간 생활의 3대 요소인 의식주 중의 하나인데 밥 먹는 일에 결코 소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식당에서 우리는 불편한 일들을 자주 경험한다. 가령 물을 마시고 싶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 소리를 질러야 한다든지, 혹은 음식이 나왔는데 내 입맛에 짜서 바꿔달라고 하면 파는 사람들이 와서 먹어보고는 별로 안 짜다며 우긴다.
이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문득문득 들었던 생각이 내가 식당에서 일을 한다면 손님에게 좀더 편리하게 할 수 있을텐데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은퇴를 하게 되면 언제라도 한번 해 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마침 이렇게 기회가 와서 식당의 웨이터를 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웨이터 직업을 구해 보니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하면 되지 싶었지만 찾아간 식당 주인들은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머리도 하얀 양반이 집에서 쉬지 뭘 하겠다는 거냐''''''''고 핀잔만 주었다.
보름 정도 하겠다고 찾아다녀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내가 그래도 골프는 많이 쳐보았으니까 골프장 마샬을 한번 해 보겠다고 찾아갔다. 그런데 한 8개월만 기다리면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왜 기다려야 되는가 했더니 지금 있는 사람을 쫓아내야 하니까 8개월 정도를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만 했지 다른 사람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러니까 회사가 망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 사람도 살기가 나 보다 못한 사람일텐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그만두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아파트 경비를 생각했다. 내가 경비를 서면 성실하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비실에서 게으름 부리며 잠만 잘 것이 아니라 화단도 좀 가꾸고 청소도 잘 하고 애들하고 놀아 주기도 하면 모범 경비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경비회사를 찾아갔다. 경비회사에 대충 이력서를 내었는데 유심히 나를 살펴보더니 1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눈치가 이상해서 나중에 알아보았더니 1-2만원도 아닌 두달치 월급을 찔러주어야 그나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아파트 경비를 할 이유는 없다 싶어서 그것도 그만 두기로 했다.
그 다음에는 삼성 의료원 가이드를 하려고 갔더니 거기는 안 된다고 했다. 임직원들 부인들이 자원봉사를 하기 때문에 외부사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경총 인력센타에 가서 이력서를 내고 인력센타 소장에게 부탁을 했더니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틀림없이 하겠냐고 자꾸 물었다. 그래서 내가 틀림없이 할테니 그 대신 내가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없을 지 나도 잘 모르니까 6개월 정도만 비밀로 지켜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해 5월과 7월에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결혼을 하기로 날을 잡아 놓고 있었다. 아들들이야 괜찮지만 사돈될 사람들에게는 내가 식당 웨이터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신문에는 제발 내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신문사에서 전화가 오더니 웨이터 하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느냐고 묻고 그런 일이 없다고 일축했지만 비밀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소장이 얘기를 한 모양이다.
다음날 당장 신문에 보도가 되자 누님은 전화를 걸어 울고 난리가 났고, 삼미그룹의 전 임원들이 전화를 걸어서 무슨 이런 쇼를 하느냐고 말들이 많았다. 친구들도 핀잔을 주고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소문만 났지 취직이 안 되었다.
이왕 소문 난 김에 내가 직접 보타이를 매고 사진을 찍어 이력서에 붙이고 왜 웨이터를 하려는지 사유서를 써서 스무군데를 찾아다니며 제출하고 전화하고 또 찾아가고 또 부탁하고..2개월 반정도 그랬드니 스무 군데 중에서 일곱군데에서 OK를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여기 롯데호텔이다.
작년 4월 1월부터 근무했으니까 오늘이 10개월 25일이 되는 날이다. 앞으로 1개월 5일만 더 지나면 만 1년이 된다.
내 생각에는 어떻게 하든지 어려움을 이기고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훌륭한 웨이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를 몰라 연구를 많이 했다.
훌륭한 웨이터가 되기 위해 생각한 것 중 가장 첫째는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쫓겨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제 발로 걸어나오면 모르지만 여기서 쫓겨나면 다른 곳에 다시 취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쫓겨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지혜가 있는데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어 보니까 바깥주인에게 잘 보여봤자 밥을 얻어먹기 힘들고 안주인에게 잘 보여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 안주인에게 아무리 잘 보여봤자 부엌 아주머니에게 잘 보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매일 부딪히며 일하는 식당의 선배 웨이터들에게 잘못 보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첫날 선포하기를 "제 과거나 경력, 나이를 잊어 주십시오. 나는 제 나이, 경력, 과거를 잊겠습니다. 제 바로 앞의 선배님이 스물 한 살이고 그 위의 선배님이 역시 스물 두 살밖에 먹지 않았지만 어쨌든 직장의 선배님이시니까 오늘부터 선배님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과거는 잊어 주시고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난 후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조차 선배님들보다 한 번도 먼저 타고 내린 적이 없다. 계약을 할 때는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일을 하기로 했는데 4시쯤이면 출근을 했다. 회사를 위해 먼저 나온 것이 아니라 어깨 너머라도 일을 빨리 배우고 선배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일찍 나왔다. 내가 열여섯번째 서열인데 한달 전에 내 밑에 후배 한 명이 들어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지금은 선배님들이 나를 완전히 꼬봉처럼 취급을 한다. 담배 재떨이 비워라, 걸음이 왜 그리 느리냐, 담배 사와라 등등 온갖 심부름과 핀잔을 다 듣는다. 그래서 일단 선배님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는 일에는 성공을 했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호텔
롯데의 경영진들이 매우 용감했다는 것이었다. 왜 나를 취직 시켜 주었을까? 거꾸로 생각을 해 보았다. 아마도 경영진들은 내가 대그룹 부회장 출신이니까 아는 사람도 많고 해서 선전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매상도 좀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지금 내가 입은 옷은 유니폼이 아니다. 일을 할 때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긴 넥타이는 아예 장농에 집어 넣어버리고 나비 넥타이를 열 두 개 샀다. 집에 있는 와이셔츠 단추도 다 따 버리고 검은 단추로 바꿔 달았다.
이왕 시작한 김에 아닌 척 하는 것보다는 돌아다닐 때도 눈에 띄게 호텔 롯데 쉔브룬 식당의 이동 선전간판처럼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 다니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가끔 다른 호텔에 가는 경우가 있는데 나한테 커피값을 내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커피값을 잘 내지 않는 덕을 좀 본다.
반면에 내가 새신라 로타리 회원이어서 친구들을 만나러 신라호텔에 자주 가는데 참 곤란한 경우가 많다. "이봐 재떨이 좀 가져와."하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얼른 갖다 준다. 그리고 계산해 오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얼른 그곳 종업원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계산을 해 주도록 한다. 그러면 잠시 있다가 거의 다시 찾아온다. 아까는 미안했다고. 그러면 웃으면서 "호텔 웨이터야 신라호텔이나 롯데호텔이나 손님들에게는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하면서 "우리 식당에나 한번 찾아달라"고 하면서 명함을 내민다. 그렇게 다니니까 마음이 오히려 편안하다.
매상을 올리는 일에는 특별한 재주가 없다. 젊은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안되니까 직접 편지를 쓴다. 대상이 천2백명이고 지금까지 8백명 정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매일 열 장이나 다섯 장씩 편지를 보내서 한번 찾아달라고 했다. 한번은 장인어른에게서 전화가 왔길래 내가 눈 질끈 감고는 "사위가 새롭게 뭘 해 보겠다는데 한번 찾아 오지도 않고 전화만 해서 되겠냐?"고 했더니 일주일쯤 후에 오셔서는 백 8십만원 정도 매상을 올리고 가셨다. 장인어른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들이 다 한번씩 와서는 큰돈을 나 때문에 뒤집어쓰고 갔다. 이렇게 선전이나 매상고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내 월급이 지금 60만원이다. 원래 선배님들 같은 경우에 하루 8시간 이상 일하고 60만원 정도 받는데 나는 절반만 일하고 60만원을 받으니 감사하다. 옛날의 월급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 정도지만 정말 신기한 것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전철 타고 왔다갔다하면 85만원이 필요하다. 25만원 정도가 모자라서 주택은행 행장을 한 친구에게 가서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고 궁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이야기가 신문에 자꾸 나고 하니 어디서 강사로 오라고 하는 곳이 많아졌다. 이외의 수입이 생긴 것이다. 머리털 나고 정기적금 시키는 것은 요즘이 처음이다. 한달에 50만원씩 적금을 하고 있다. 많이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적게 받아도 돈 쓸 일이 별로 없으니 오히려 남고 마음이 편하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도 나에게 차값을 내라든가 식사비를 내라는 사람은 없다.
여러분들이 나를 보실 때 측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돌아오는 수표가 없으니까 수표 걱정할 일이 없다. 또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좀 해야 하는데 거짓말하거나 사정할 일이 없어졌다.
하루에 여섯시간씩 서서 일을 하니 다리가 굵어지고 배가 들어가서 9킬로그램이 줄었다. 게다가 선배님들 평균 연령이 스물 네살인데 한달에 한 두번씩 미팅이라고 해서 새벽 4시까지 춤추고 노는 일이 있다. 그렇게 젊은이들과 함께 놀면 내 나이를 다 잊어버린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을 때 돈을 싸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97세까지 살려면 아직도 한참을 가야한다.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운동도 많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강연을 많이 하는데 별로 재미없을 것 같지만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한다. 어떤 그룹에는 내일 가면 열 아홉번째 강의를 한다. 처음에는 20만원을 주더니 지금은 70만원을 준다. 내가 피곤해서 못 간다고 했더니 돈이 적어서 안 가는 줄 알고 돈을 올려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잡수익이라고 해서 세금이 44%라고 했다. 1, 2월에는 작년에 번 것에 대한 세금을 갚아주고 3월부터는 많이 다니지 않으려고 한다.
기업현장에 가서 강연을 할 때면 주로 하는 얘기가 오는 21세기의 새 천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경도 없고 관세도 없는 21세기 세계화 시대에는 한국에서 1등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고 최고가 되려면 전 지구촌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프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자기가 살고 회사도 사는 것이라고 강조를 한다. 여러분들은 다 프로들이고 주인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건재한 것이다. 여러분의 직원들에게도 이런 프로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당신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옳게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게 물으면 나는 호텔롯데의 신관 35층 쉔브룬 식당에서 견습웨이터로 있다고 대답을 한다. 이렇게 똑똑히 대답해 주어야 하는데 다들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기 직업을 정확히 대답해 주지 못하는 직원들을 데리고 있는 경영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만점을 받을 만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 나는 호텔 롯데 지하 1층 무궁화 식당에서 일을 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입니다. 내가 끓이는 된장이 맛이 있어서 저희 식당에 오는 손님 30%는 내가 끓이는 된장을 찾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한번 찾아주십시오" 하고 명함을 내밀어야 한다.
모든 조직원이 홍보활동을 하고 생산활동을 하고 판매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된장찌개 끓이는 것 하나만으로도 수십억을 벌 수 있다. 직업의식과 자부심, 주인의식을 불어 넣는 것이 자기 개인과 조직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 회사와 조직체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이런 프로의식, 직업의식, 자부심을 가진다면 생산력이나 모든 부분에서 훨씬 뛰어난 효과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한국에는 만5천16종의 직업이 있다고 한다. 무엇을 하든지 프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주로 우리 집에서 일하는 파출부 이야기를 한다.
내가 92년 8월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집사람이 함께 오지를 못해서 집안 청소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파출부를 불러서 청소를 시켰는데 돈은 5만원을 주었지만 맘에 들게 청소를 하지 못했다.
한번은 내가 일요일에 불러서 청소하는 것을 보았는데 일하는 모습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도가 불순할 뿐만 아니라 전혀 성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붙잡고 앉아서 얘기를 했다.
"당신도 부자가 되어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야 부자가 되겠소?
전문가(로)가 되시오.
남의 집에 일을 하러 오면 먼저 당신을 불러 일을 시킨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오.
두 번째는 그저 대강하고 갈 것이 아니라 내가 청소 전문가이니까 청소푸로라는게 뭔지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기분으로 푸로답게 청소를 하십시요.
또 당신도 일단은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 집에서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을 하시오.
청소부를 부르는 사람이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혹시 귀중품을 주머니에 넣고 가지는 않는가 하는 점인데 그런 면을 당신이 해소를 해야 하오.
철저히 청소를 푸로답게해서 시범을 한번 보이고 그런 불안 요소를 스스로 제거해야 하오. 사람이 있으면 말로 하고 없어면 편지를 하나 써 놓고 가면서 불러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놓고 가면 그런 불안은 없어지고 오히려 신뢰가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도 사업이니 재 투자를 해야 합니다. 장미라도 한 송이 사들고 와서 화장실에 꽂아 놓고 불러주어서 감사하다고 편지한장을 써 놓으면 그것이 재투자가 되는 것이오.
그런 얘기를 한번 하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1년 후에 어떤 아주머니가 옷을 잘 입고 나를 찾아 왔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그대로 실천을 했는데 그 후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계속 찾아 도무지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고 지금은 파출부만 열두명을 둔 파출업사장이 되어 있다고 하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자기가 20명 정도는 필요한데 사람을 구할수 없기 때문에 열 두명만 두고 있다고 했다. 파출부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생각만 바꾸면 그렇게 될 수 있다.
자기는 옛날에 소개비조로 만오천원 뜯긴것이 한이되어 자기는 일인당 매일 만원만 받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일손이 모자라니 하루 두탕 뛸때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편균 하루 수입이 20만원 정도는 된다고 한다.
대전 북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김기숙씨라는 분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그 분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나와서 전화를 해서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맏딸이 대학 2학년이라고 하니 아마도 40세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가는 시간이 몇 초밖에 안되지만 그 사이에 그렇게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사람들에게 친절했던지 다른 톨게이트로 가지 않고 김기숙씨의 톨게이트를 지나가려고 줄을 선다고 한다.
김기숙씨에게 돈을 내고 지나가면 기분이 확 달라지고 피로가 다 풀린다고 한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들이 요즘은 김기숙씨에게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주는 바람에 먹을 것이 잔뜩 쌓여 있다고 한다.
모든 직종에는 그런 프로가 있다. 만약 우리 호텔의 도어맨이 불친절하면 우리가 식당에서 아무리 잘해도 손님은 오지 않는다. 조직의 모든 부서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프로가 되지 않으면 전체 조직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내가 옛날에 미국에 있을 때 7천불 정도 번 적이 있다. 서울 운동장보다 더 큰 드라이브 인 시어터(Drive in Theater)에서 토요일과 일요일 낮에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내가 7천불 밑천을 가지고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소를 잘못 얻어서 그런지 장사가 되지를 않았다.
경험이 없어 운동장 제일 안쪽 높은 곳에 장소를 얻었더니 사람들이 중간쯤 오다가는 다 돌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영어 잘하는 친구까지 불러 동업을 했는데 망하기 직전이었다. ''''''''한 150 미터만 더 들어오면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워했는데 갑자기 어릴 때 동네에 약 장사들이 오던 생각이 났다.
그때 약 장사들이 왔을 때 북치고 장구치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었다. 그래서 광대놀음을 한번 해 보기로 하고 어느 날에는 축구공을 등에 넣고 루즈를 얼굴에 바르고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Hello, Hello, American Hello, Cheap, Cheap, Buy, Buy." 손님을 끌기 위해 이 가사를 밑천으로 해서 양산도에 맞추었다가, 닐니리에도 맞추었다가, 애국가에 맞추어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각설이 타령까지 하게 되었다. 얼마나 고함을 질렀던지 그 벼룩시장에 왔던 사람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노래하고 뛰었더니 땀이 범벅이 되고 서럽고 가난한 이민 생활을 하는 게 생각이 나서 눈물까지 쏟아졌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사가 잘 될 것 같았는데 막상 팔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영어로 물건을 팔아야 할 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도대체 어디 갔었냐고 따지니까 나는 체면이고 뭐고 없이 사생결단을 하면서 춤추고 울고 광대짓을 했는데 그 친구는 내 옆에 있는 게 창피해서 있지 못 하겠더라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욕을 퍼부었다. 동업하자고 해 놓고 이러는 게 어디 있냐고 따졌지만 이 친구는 그래도 싫다면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LA 공항에서 비행기를 태워 보냈는데 돌아서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차를 세워놓고 신나게 울었다. 평생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이제부터 장사도 잘 되고 하니까 돈을 나누지 않고 혼자 돈을 다 가질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또 반성이 되는 것은 내가 미국에 온 지가 벌써 3년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영어도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서 그날 당장 책방에 가서 영어 교재와 테이프를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서 10개월만에 영어로 말을 잘 할수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 후 12년 후에는 미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영어로 연설을 할 정도가 되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더 이상 절망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만날 수 있는데 어쩌면 그게 오히려 더 좋게 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답답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말도 있듯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애를 쓴다.
80년대 미국의 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공익광고를 낸 적이 있었다.
당신이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 있다면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22세에 주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떨어지고 25세 때는 경영하던 백화점이 파산을 해서 15년 동안 빚을 갚느라 무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52세가 되던 해에는 사무실에 앉아서 대통령 링컨이라고 쓸 수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이건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우리 나라 김대중 대통령을 보면 링컨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을 겪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링컨이 아무리 어려웠다지만 잡혀가서 두드려 맞고 유치장 생활을 하며 사형선고를 받고 해외로 추방을 당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참고 견디고 모진 생활을 이겨서 오늘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좋은 대통령인지 나쁜 대통령인지는 후세의 역사가 평가를 하겠지만 그가 겪은 과거의 고초만큼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이라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이 겪은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들은 그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의 경제를 일으킨 주역들이다. 그리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한번 더 지금의 이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이 나라의 장래가 바로 여러분들의 손에서 꽃피게 될 것이다.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다면 반은 이미 된 것이고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거의 안 된다. 이왕 시작한 사업이라면 끝까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지금은 개인의 창의시대이다. 앞으로는 누가 얼마나 창의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려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진정한 권위란 리더가 솔선수범함으로써 아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스스로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다.
권위있는 경영인이 되어서 직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따라 올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회사도 그렇다. 우리들에게 스마일 뺏지를 달라고 하면서 스마일 캠페인을 하자고 하는데 임원들 스스로가 굳은 얼굴을 하고 웃지 않으면 아무리 스마일 캠페인 하자고 해도 되지 않는다. 임원들부터 스스로 웃는 얼굴을 하면서 다니면 스마일 캠페인 하자는 소리를 굳이 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저절로 웃게 된다.
표정관리라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말로는 되지 않는다. ''''''''四柱는 不如觀相''''''''이라는 말이 있다. 사주가 아무리 좋아도 생긴 것이 험악스러우면 되지 않는다. 우선 외모에서부터, 표정관리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주는 21세기형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 인물이 잘 나고 못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정관리를 말하는 것이다.
또 ''''''''觀相不如心性''''''''이라는 말도 있다.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 씀씀이가 틀리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잘 생겨도 마음보가 틀리면 미소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 식당에서도 손님이 밤 9시에 들어오면 직원들 인상이 찡그려진다. 11시에 퇴근인데 9시에 들어오면 그만 마음이 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기술적인 문제는 내가 당신들에게 배워야겠지만 이런 문제는 지적을 해야겠다하고 선배님들에게 말을 했다.
9시 아니라 10시에 와도 손님이 오고 돈이 들어오는데 왜 인상을 찡그리는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조금 늦게 가면 되는 것이다. 자기 식당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식당이라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종업원과 그저 월급만 받으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가진 종업원은 천지차이가 난다.
공장에서는 수위부터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내가 국민은행에 가서 강연을 할 때는 경비가 권총차고 서서는 노려보지 말라고 한다. 권총차고 서서 노려만 보면 오는 손님을 다 도둑놈으로 보고 서 있는 것이다.
권총은 뒤로 돌려 차고 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하는 경비를 해야 은행의 인상이 좋아지는 것이다. 어느 회사를 가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에게 아직도 견습딱지를 못 땠냐고 묻는데 견습 딱지를 때는 것이 쉽지가 않다. 정식웨이터(캅텐)가 될려면 7년내지 12년 정도 해야 하고 외국어도 두 개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며 30개 정도 칵테일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쉬운것은 하나도 없네요.
여러분들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시간이 나시면 우리 식당에도 한번 들려주시라는 부탁을 드리면서 말을 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