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의 생애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러시아력) 모스크바의 마린스끼 빈민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은 군의관 출신으로, 이 병원 의사였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생활은 보잘것없는 서민적인 것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성품을 가졌으며, 곧잘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야는 모스크바 상인의 딸로 상냥한 분이었으며 남달리 신앙심이 두터웠다. 작가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교회나 수도원을 다니던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뚤라 현에 조그마한 영지를 사서, 매년 여름을 교외의 자연 속에서 지내게 됐다. 이것은 우울한 병원의 어두운 구석에서만 살던 그에게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을 남겼으며, 농민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 작가의 전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만년에 잡지 〈작가의 일기〉속에 실린 여러 편의 소품들은 그 당시의 기억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열세 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많은 고전들을 읽었고, 그 중에서도 스코트, 주꼬프스끼, 푸슈킨의 작품들을 주로 탐독했다.
열 여섯 살 때, 그는 처음으로 인생의 슬픔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어머니를 잃었고, 존경하던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결투로 죽은 사실이 그를 미칠 듯한 슬픔에 잠기게 했다.
이듬해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뻬쩨르부르그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문학에 열중하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통적으로 엄격한 군대 규율에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가 않아서 별로 부자간의 서신 연락도 없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혼자 방에 들어앉아서 푸슈킨, 고골리, 쉴러, 스코트, 발자크, 조르즈 상두 등을 읽으며 문학세계에 탐닉하는 일밖엔 없었던 것이다.
고골리를 제외한 러시아 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리얼리즘에 짙은 로맨티시즘의 그림자를 남긴 작가도 없을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별세 후 그의 아버지는 영지에 은거하면서 농노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그들에게 참살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은 감수성이 강한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으며, 그의 만년의 대작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살인 소재가 되었다. 자기 영지의 사랑하던 농노들이 이러한 잔학한 범죄를 저질렀던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그의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작중 인물의 이중적 성격, 즉 인간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대립되는 모순을 파헤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창작의 주제로 삼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학교를 마친 뒤 장교로 임관되어 공병학교에 남게 되었으나, 근무에는 취미와 의욕이 별로 없었고, 문학에 대한 열망이 더해갈 뿐이었다. 결국 그는 가난과 불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에서 제대를 한 뒤 창작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지병인 간질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약간의 발작을 일으켜, 우울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음해 그의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의 학교시절의 동창이며 일찍 문단에 데뷔했던 그리고로비치가 읽고 감동하여 발표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시인 네끄라쏘프는 이 원고를 읽고, 너무나 감동되어 “새로운 고골리가 나타났다!”고 외치면서,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비평가 벨린스끼에게로 전하게 되었다. 그도 작가의 재능을 극찬하면서 “자기의 재능을 귀중하게 간직하고 꾸준히 재능에 충실하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삼십 년 뒤, 이때를 회상하면서 “내 생애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이 중편소설은 다음해 1월에 네끄라쏘프가 주간 하는 <뻬제르부르그 문집>에 수록되어 독서계의 일대 선풍을 일으켰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화려한 데뷔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성공으로 그는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투르게네프와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교우를 가지며, 또한 계속 신작을 발표함으로써 활기찬 전도 유망한 문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갑작스러운 성공은, 경륜이 얕고 신경질이 심한 청년작가에게 좋은 결과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자만과 자부심을 가지게 했고, 그것은 자연히 동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벨린스끼와의 사이도 나빠지고, 잡지사에서 빌린 돈으로 도박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뒤 4년 동안에 그는 《분신》《쁘로하르찐 씨》 《주부》《백야》와 같은 수십 편의 중·장편소설을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고, 도리어 처녀작 이후에 나타난 병적 심리에 대한 흥미나 신비주의에 만족은 고사하고, 심한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러시아 인테리 청년들 사이에는 서구의 공상적 사회주의의 새로운 사조가 스며들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뻬뜨라셉스끼가 중심이 되어있는 서클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자유사상가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서클의 동료들이 체포되어 뻬뜨로 빠블롭스끄 요새 감옥에 8개월간 감금됐다가, 그해 12월에 21명의 동료와 함께 사형이 선고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것은 황제가 꾸민 참혹한 연극이었다는 것이 뒤에 알려졌다.
처음 세 사람이 기둥에 묶여 사형집행 병사들이 총을 들어올린 순간, 황제의 칙사가 달려와 사형을 사면하고, 유형으로 감형한다는 새로운 선고가 내려졌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겪은 몸서리칠 만한 작가의 체험은 뒤에 《작가의 일기》나 《백치》에 묘사되고 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옴스끄 감옥에서 보내면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죄수나 살인범들과 함께 어울린 고통스러웠던 생활을《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참다운 인간적인 가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 신경의 질환과 간질병이 심해지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성서를 읽으며 종교적인 구원을 기다렸으며, 형기를 끝마친 그는 다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 수비대에서 또 4년을 복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학교 교사였던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가 있는 기혼녀였으며, 결혼 전까지의 그들의 열애는 많은 고난을 겪게 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희생적 행동의 연유를 이런 곳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그후 십 년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무렵 수도 뻬쩨르부르그에는 개혁에 부푼 기대가 팽배하여 문단에 복귀한 그는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형 미하일과 공동으로 잡지 <시대>지를 창간하고, 《아저씨의 꿈》《학대받는 사람들》《죽음의 집의 기록》등 병역 근무 중에 집필하거나 구상했던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여 문단에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죽음의 집의 기록》은 시베리아 옥중의 체험을 서술한 것으로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사생활은 암담했었다. 아내 마리야의 지병인 폐병은 날로 심해졌으며, 그들의 불화는 더욱 심해만 갔다. 작가 자신도 지나친 과로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서, 1862년과 다음해 두 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의 서구여행을 떠나게 되며, <시대>에 게재된 스뜨라호프의 폴란드 문제에 관한 논문 <운명적인 문제>가 말썽이 되어 당국의 발행정지 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그는 지성적인 신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뽈리나야 수슬로바를 사랑하고 있었고, 외국 여행중인 그녀를 찾아 떠나게 되며, 여행 중 그는 여자와 도박에 열중한 나머지 경제적인 곤경에 처하게 된다. 뒤에 소설 《도박자》는 이 때의 체험이 소재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 여행 중에 어려서부터 동경하던 서구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오히려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구의 문화도, 파리의 이채롭고 상쾌한 분위기도, 독일의 음악이나, 알프스의 장관, 스웨덴의 미소짓는 듯한 아름다운 호수, 피렌체의 미술품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는 서구문화를 부르주아적이며 퇴폐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이라고 확언하기도 했다. 그가 밀라노에서 보낸 편지에는 "나는 여기서 둔해지고 편협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접촉도 끊겨져 갑니다. 나에게는 러시아의 공기와 러시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는 점차 슬라브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러시아인의 뛰어난 독창성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여행에서 귀국하여, 발행이 금지됐던 <시대>지 대신으로 <세기>지를 발행하면서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년)를 지상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하나의 커다란 전기가 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경계로 해서 그 전기의 작품에서 보여주던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인간성의 발견이라는 인도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다 폭넓은 사회·윤리·도덕·철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독자적인 사색의 경지로 확대해 나갔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인간의 의식이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높은 곳으로부터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깊이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제 2의 우주를 창조해 갔으며, 《죄와 벌》에서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 이르는 일련의 위대한 사색소설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생애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는 아내 마리야의 죽음과 형 미하일의 급사, 그리고 오랜 문우이며 잡지의 유력한 동인이었던 그리고로비치의 이따른 죽음이 있었던 때이다.
잡지의 폐간은 불가피했으며 그로 인한 막대한 부채와 형이 남기고 떠난 많은 가족의 부양책임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이러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저작의 판권을 출판인 스쩰롭스끼에게 3천 루우불에 팔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일정 기한부로 신작 장편을 쓸 것을 아울러 약속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 장래의 모든 그의 저작권까지도 넘겨주어야 하는 가혹한 강요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부득이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구술 필기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젊은 속기사 안나 스니뜨끼나를 다음해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속기로 《도박자》를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었고, 이 해에 《죄와 벌》이 발표되었다.
신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채권자들의 성화나 부양해야 할 친척들의 무거운 짐을 피하고 창작활동에 주력키 위하여 아내와 같이 다시 서구 여행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그 뒤 4년간을 각지로 전전하면서 장편 《백치》《악령》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여행 중에도 그의 도박벽과 간질의 발작, 궁핍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그의 영리하고 성실한 아내의 조력에 의하려 점차 가정의 경제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내가 계획했던 자비 출판의 저작 집을 간행하고, 그 것이 적중됨으로써 부채의 청산은 물론 별장까지 가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격상의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으며, 자신도 자기 결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영심과 시기심이 많았고, 이기적이며 남을 곧잘 의심하는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알렉쎄이 카라마조프나 성인과 같은 조씨마 신부를 창조해냈다. 또한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거지나 친구가 돈을 달라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고, 자신이 곤궁에 처하고 있을 때에도 돈을 긁어모아 형의 가족과 주위의 매달린 친척에게 화도 내지 않고 주기도 했다. 그의 공식 전기를 썼던 친구인 스뜨라호프는 이렇게 썼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착한 사람이나 행복한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는 질이 좋지 못하고 타락하고 시기에 가득 찬 인간이었습니다. 일생을 두고 정욕의 불길에 농락되었으나. 만일 그가 지성이 부족하거나 그처럼 심술궂지 못했다면,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1876년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개인잡지 <작가의 일기>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예상외로 독자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재판, 삼판의 증판 사태까지 일어났다. 잡지에는 주로 사회비평을 써왔으며 많은 소품과 수상을 발표했다. 그의 사상적 전환은 1861년 농노해방 이후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점차 퇴조되어 우경화하였으며, 새로운 급진적인 청년층이 형성되기에 이르렀으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전자에 속하고 있었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러시아의 갱생의 길과 처참한 국민에 대한 구제책에 대하여 "고난을 이상화하고 그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 하며, 개혁 대신에 종교적인 위안, 신비로운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작가의 일기>를 통하여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서신을 받고 그들의 질의에 해답을 줌으로써 그는 차츰 인생의 교사로서 또 지성인의 지도자로서 추앙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18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서 푸슈킨을 찬미하고, 러시아 문화와 역사적 운명에 대해 논술한 그의 연설은 만장의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위한 축제가 되어 버렸다.
그 해 가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완성하였으며, 다음해 1881년 60세기를 일기로 영면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은 문학자로서는 거의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대한 것이었으며, 수만의 군중들이 거리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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