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전통과 혁신(15세기 중반)
시간과 사람의 협치가 필요해~~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을 언급한때 예술가들 만큼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라는 분입니다..
누구이길래 이만큼 자주 등장할까요?
*조르조 바사리(이탈리아어: Giorgio Vasari, 1511년 7월 30일~1574년 6월 27일)는 메디치 가의 후원 아래 다양한 프레스코화를 제작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며, 우피치궁 설계 등을 맡았던 건축가이다. 평생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정작 그의 이름이 후대에게 잘 알려지게 된것은 안타깝게도 1550년에 그가 출간한 《미술가 열전》이라는 책 때문입니다.
책을 통하여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덕분에 미술사학자로 더 유명하다. 그의 저서는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사(史)로 르네상스 예술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바사리를 "미술사학의 아버지" 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예술가로서는 당시 메디치가의 수장이었던 코시모 1세의 힘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수한 프레스코화(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제작하였고 우피치궁(우피치미술관) 설계 등의 대작들을 연달아 수행했다.
화가로서 바사리는 화려하고 지적이지만 독창성은 부족한 보수적인 미술가였다. 그러나 건축가로서는 간결하고 강건한 건축물을 만들어내었다.
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 (1550-1568) 바사리는 자신의 책 제 1부'서설'에서 고대의 재생을 논하며 당시의 시대를 규정하며
Rinascimento(Renaissanc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는 현재 우리가 쓰는 '르네상스 시대'라는 역사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 문화가 재생하였다'라는 평면적 의미였다. 현대 우리가 쓰는 역사적인 의미는 스위스의 미술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만들어 낸 개념이다.
*미술가 열전
바사리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Le Vita De' Piu Eccellenti Architetti, Pittori, et scultori(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라는 제목의 책이다. 통상 한국어로는 《미술가 열전》으로 번역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명이 남긴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을 수록한 이 책은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550년에 초판 출간되었으며, 개정 작업을 시작하여 이탈리아 전국을 일주하면서 취재와 자료를 보강하였고 1568년에 개정판이자 결정판을 내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에 대한 평전을 담고 있음으로 인해 후세의 미술사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책은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사(史) 서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조르조 바사리는 이런 저술 활동으로 인하여 "미술사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도 받고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 저술을 통하여 후세에 남긴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은 당시의 예술 기법을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집대성한 '기법론'을 추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측면을 오늘날 파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바사리의 기록에는 많은 오류가 존재한다.대표적인 오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임종에 관련된 내용이다. 1516년 이후 말년에 3년동안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프랑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 임종시 그 자리에 없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오류는 모나리자에 대한 것이다. 바사리는 모나리자의 눈썹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평가하였으나 실제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는 것이 특징중 하나이다. 그의 실제 기록은 이렇다. "피부에서 솟아난 눈썹의 털은 여기는 뻣뻣하게 저기는 성기게, 또 모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그 이상 자연적일수도 없을것 같다".
이는 마치 바사리가 직접 본것을 기록한듯 했지만 실제로는 모나리자라는 작품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미완성된 모나리자를 가지고 프랑스로 이주한 시기는1516년으로 이때 바사리는 겨우 5살이었다.
다빈치 사망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의 제자인 멜치로부터 4,000플로닌에 모나리자를 구입하여 퐁텐블로 왕궁에 개인 소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바사리가 직접 모나리자를 볼 기회가 없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사리의 저서에 많은 기록오류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가 각종 서류와 일화들, 구술 기록등을 꼼꼼히 조사했지만 사실 확인이 부족할 경우에는 망설이지 않고 그 부분을 가설로 채워넣었기 때문이다. 바사리는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책에 등장하는 여러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직간접적으로 널리 교류했다. 덕택에 좀 더 생생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훗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오류로 밝혀진 부분들도 적지 않지만 생존했던 시대의 상황과 혼자서 200 여명에 대한 평전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그가 남긴 오류가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는 것 같다.
이분이 유명한 이유는 그림이 아니라 글때문인데 "미술가 열전"이후 서구사회에서는 예술가의 작품과 일화를 연구하는 작가들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미술가들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예술가들이 유명해지며 뒤따르는 것이 상례이기에 궁핍하고 힘든 생활로 불우한 생을 마감하는 예술가들은 수두룩했지만, 글재주만 있으면 글이나 그들을 삶으로 미술사를 적는 작가들은 사회적인 인정과 부를 획득하기가 한결 수월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를 미술사를 읽고 기록하며 저는 숫하게 경험했기에 "펜은 붓보다 강하다~~"라는 우스개 소리를 자주합니다..
흔히 미술사 책과 "저의 망구 혼자 미술사"를 보면 수도 없는 글에서 토시하나 틀리지 않는 내용이 등장할때가 자주 있는데 시중의 책들의 내용을 복사해서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올씨다!!
바실리의 영향으로 많은 작가들이 펴낸 "미술사학서"(예를 들어 저의 집필 동기가 된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가 이미 미술사학계 바이블로 인정받는 책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책을 글을 적는 분이 인용하는 경우가 수둑룩해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저처럼 경제적 이득이 목적이 아니고 비공개된 장소에 취미로 적는 사람은 별 문제가 없지만 돈이나 명예를 목적으로 인용하는 경우에는 최소한 인용을 확실히 전해야하고 저작권의 문제가 있으면 절대하지 말아야합니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흐른 감이 있는데 전편에 이어 르네상스로 쭈우욱 갑니다!
이른바 중세가 마감되는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 갔다. 회화나 조각의 목적이 모두 종교라는 한 가지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며, 주문자들이 일정했으며 지역만 다를 뿐 화풍은 일맥상통하였는데 고딕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을 '국제 고딕 양식'이라 불렀다고 기술했죠!
15세기 초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미술이 성경의
이야기만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고 거대한 혁명과 모험 정신은 "오직 신 중심"이었던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렀지만 강압과 강권에 의한
분절의 역사가 아닌 이상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 절충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초기 르네상스를 언급하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의 제목이 '전통과 혁신'인 이유이기도 하다
"15세기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새로운 고안을
오래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만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일 때가 많았다.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전통과 혁신의 타협을 통해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중에서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를 으뜸으로 들 수 있다.
앞 편에 링크를 했지만 기베르티를 언급하자면 도나텔로 뿐만 아니라 블루넬레스키와의 경쟁이 언급되지 않을수 없기에 인용합니다!
*기베르티의 청동문~~
피렌체 두오모 광장에 가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시설 중 하나인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은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과거 피렌체의 인구 변동을 유추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기도 한다.
세례당은 내부도 아름답지만 동쪽과 북쪽에 있는 청동문 때문에 더 유명하다. 이 문을 만든 사람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다. 현재 세례당에 있는 청동문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베르티는 이 두 개의 문에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 먼저 모직업자 길드의 요청을 받아 동쪽청동문을
21년(1403-1424)에 걸쳐 만들었다. 이 문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길드는 다시 북쪽 청동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북문을 만드는 데에는 무려 27년(1425-1452)이 걸렸다. 북문 역시 걸작으로 훗날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현재는 북문과 동문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있다. 원래 북문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두 번째 청동문이 너무 아름다워 두오모 성당과 마주보는 동쪽에 설치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는 동문이 미켈란젤로가 얘기한 '천국의 문'이다.
청동문은 그 작품성도 뛰어나지만, 작업을 수주하기 위한 예술가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도 유명하다. 1401년 이 청동문 제작자를 선발하기 위한 공개경쟁이 열렸다. 여기에는 총 7명이 참가했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우승을 두고 경합을 벌인 이들은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을 개발하고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반니 세례당 북문 진품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있다. 천국의 문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게 느껴진다.
#천국의 문 진품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기베르티는 스물네 살에 불과했고, 또한 출신 성분도 분명치 않았다. 바르톨루치오라는 금세공사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바르톨루치오의 공방에서 작은 귀걸이 등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금세공사나 조각가 길드의 정식 회원도 아니었다.
반면에 브루넬레스키는 이미 당대 최고로 불리는 도나텔로와 절친이자 경쟁자일 정도로 실력과 명성이 높았다. 브루넬레스키는 애초에 기베르티가 자신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애송이와 경쟁하게 된 점을 불쾌하게 여겼다.
이런 두 명에게 주어진 경쟁 과제는 '제물이 된 이삭'이었다.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브라함이 노력 끝에 100세에 얻은 아들이 이삭이다. 그런데 신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도저히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신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으로 데려간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 대신 아들을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을 들어 이삭을 찌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말린다. 그리고 신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증명되었다며 수많은 축복을 내린다.
경쟁 과제는 바로 천사가 아브라함을 저지하는 순간을 부조로 만드는 것이었다. 경쟁자들에게는 각각 34킬로그램의 청동판 4개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 세로 43센티미터에 가로 33센티미터의 패널을 만들어야 했다. 기간은 1년이 주어졌다.
일곱 명의 경쟁자가 만든 과제 중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작품만이 현재 바르젤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 다섯 명의 결과물은 남아 있지 않다. 피렌체는 수많은 전쟁을 겪었는데,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작품은 워낙 뛰어나서 보존하기로 하고 나머지 경쟁자들의 작품은 녹여져 전쟁물자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같은 주제이지만 그 표현 방식은 극명하게 나뉜다. 가장 큰 차이점이 천사가 아브라함을 말리는 방식이다. 기베르티는 천사가 이삭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눈 아브라함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말리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반면에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은 훨씬 더 긴박하고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왼손으로 이삭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오른손의 칼은 금방이라도 목을 찌를 듯이 위협적으로 보인다.
상황을 말리기 위해 천사는 아브라함의 오른 손목을 직접 잡아채서 물리력을 행사한다. 이 두 작품은 모두 훌륭했지만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은 너무 도발적이고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탈락하고 기베르티가 최종 우승을 차지한다.
이렇게 표현 방식이 차이나는 이유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자신감이 넘치고 독선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없이 독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기베르티는 매우 유순하고 사람 관계가 좋았다. 또한 자신의 이런 성격을 정치적으로도 잘 활용했다. 당시의 조각가들은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 밑그림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밀랍으로 모형을 만들어 본다.
기베르티는 밀랍 모형을 여러 명에게 보여주면서 조언을 받았다. 그 중에는 평가위원들도 있었다. 그는 조언을 최대한 반영해서 모형을 수정했다. 어떤 경우에는 밀랍 모형을 전부 녹여버리고 아예 새로 만들기도 했다.
반면에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밑그림과 밀랍모형을 보여주지 않았고, 어떠한 조언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의견이 반영된 작품에 더 정이 갈 것이다.
#기베르티의 작품 브루넬레스키의 작품보다 좀 더 정적이고 부드럽다.
#브루넬레스키의 작품 천사가 아브라함의 손을 직접 잡아서 말리고 있다
최종 탈락한 브루넬레스키는 당연히 불같이 분노한다. 사실 평가 위원회 내에서도 두 작품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의견이 갈렸었다. 판정 결과에 대해 두 사람은 훗날 상반된 얘기를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위원회가 공동 우승을 제안했지만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베르티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자신의 단독 우승이었다고 말했다.
화가 난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떠난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에서 고대 미술과 건축을 연구했다. 그리고 수년 뒤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 설계자를 선정하기 위한 공모가 열리자 돌아온다. 이때도 둘의 갈등은 계속 이어진다.
* 두오모 돔 스토리
피렌체의 상징이라면 두오모라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일 것이다. 두오모 성당이 있는 자리는 원래 산타 레파라타 성당(basilica of Santa Reparata)이 있던 자리로 종교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시민권력이 성장하면서 900년 이상 된 낡은 성당을 허물고 신축하기로 한다.
1292년 피렌체 시의회는 아놀로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1302/1310?)에게 신축 성당의 설계를 맡긴다. 1296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캄비오의 사망으로 30년간 중단되기도 했다. 다른 건축가가 이어받았지만 흑사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1418년이 되어서야 돔을 제외한 성당 건물이 완성되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한동안 돔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드라마 '메디치 : 피렌체의 지배자들(Medici: Masters of Florence)'를 보면 돔이 없는 상태의 성당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돔은 도저히 만들 수 없었다. 아무런 내부 지지대 없이 거대한 돔을 지탱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 문제가 지적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 분명히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믿고 공사를 밀어붙였다. 피렌체 공동체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고 성당 지붕이 훤히 열린 채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중에 이 돔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이다.
돔을 만들 때 건축가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압축력(壓縮力, 위에서 아래로 미는 힘)과 인장력(引張力, 측면으로 당기는 힘)이다. 이 힘들은 돔의 크기(지름)가 커질수록 급속히 강해진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우선 돔의 모양을 완전한 반구가 아니라 위로 늘어난 모양이며 원형에 가까운 팔각형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돔을 내부와 외부 두 겹으로 만들어 힘을 분산시켰다. 돔 꼭대기로 올라갈 때 사용하는 계단이 이 두 겹의 돔 사이 공간이다. 또한 '헤링본(herringbone, 청어 뼈 모양)' 방식으로 벽돌을 쌓아 견고함을 더했다.
# 돔 내부 벽 헤링본 방식으로 벽돌을 쌓았다
1418년 모직업 길드는 이 돔을 완성하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고, 메디치 가문이 이를 후원한다. 야심만만한 여러 건축가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대부분 내부 지지대를 활용하는 방법이어서 최초 설계와 거리가 있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도 이 공모전에 참가한다. 브루넬레스키가 로마 판테온을 연구하면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완성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 옛날에도 지지대 없이 큰 규모의 돔을 만들 기술력이 있었다는 것을 판테온은 보여준다.
# 로마 판테온의 돔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 외에도 여러 고대 로마의 무덤과 유적을 연구했다.
그는 평가 위원회에 자신이 완벽한 돔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아이디어를 훔쳐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경쟁자들은 브루넬레스키가 허풍을 떠는 거라며 비난했다. 이에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에게 돔 공사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여러 명이 도전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의 끝을 깨서 세운다.
경쟁자들은 저런 방법이라면 자신들도 달걀을 세울 수 있다며 분노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의 방법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방법을 공개하면 아이디어가 도용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우여곡절 끝에 브루넬레스키가 돔 공사를 맡게 된다. 어쩌면 '콜럼버스의 달걀'보다 '브루넬레스키의 달걀'을 원조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콜럼부스도 이탈리안이니 전해 들었는지도~~
1420년 8월 7일 기공식이 열렸다. 공사에는 채석장 인부까지 포함하여 총 3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이들의 근무환경은 매우 가혹했다.
작업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해가 긴 여름에는 열네 시간 이상을 일했다. 120미터 높이에서 좁은 비계 사이를 오가는 것은 여러 사고를 불러왔다. 실제로 인부가 추락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 위원회는 장례비만 지급했을 뿐, 유족에게는 한 푼의 위자료도 없었다.
위원회는 공사 인부들이 작업 시간 동안 땅으로 내려올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오르내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인부들은 하루 종일 그 높은 곳에서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작업했다. 뜨거운 여름 오후에 즐기는 시에스타(낮잠)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인부들이 들고 일어나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자 브루넬레스키와 위원회는 이들을 모두 해고해 버린다. 하지만 인부들은 대부분 지독하게 가난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파업을 철회한다. 이때 위원회는 처음보다 더 낮은 임금을 강요했고 인부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동의한다.
공사를 맡기긴 했지만 위원회의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례당 청동문을 두고 경쟁했던 로렌초 기베르티를 공동 책임자로 임명한다. 성격이 불 같아 통제하기 어려운 브루넬레스키보다 유연하고 우호적인 기베르티가 함께 한다면 불안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불안했는지 위원회는 공동 책임자를 7명까지 늘리기도 했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는 공동 책임자였지만 그 역할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
임원들이 규정한 필리포의 임무는 '돔의 축조, 존속, 완성에 바람직하거나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제공, 준비, 제작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반면 로렌초의 임무는 단순히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다.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희재 옮김, 세미콜론)
이렇게 곁가지 역할만을 하는 기베르티였지만 급여는 브루넬레스키와 같았다. 건축 관련 경험이 일천하고 공모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기베르티가 공동 책임자로 임명된 것에 브루넬레스키는 분노했다.
이미 청동문 사건으로 사이가틀어졌으니~~
거기에 급여까지 같은 데에 큰 모욕감을 느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베르티를 몰아낼 방법을 강구했다.
기베르티를 돔 스토리에 등장시킨 이유!
살짝 쫀쫀하기도 합니다만 천재들에게 일반인의 잣대를 들이대면 그 또한 바보~~
필리포는 돔을 완성하기 위해 나무 사슬을 이용한 공정을 구상했다. 나무 사슬 작업을 위한 밤나무가 도착했을 때 브루넬레스키는 옆구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병상에 누워 버렸다. 혹자는 이를 꾀병이라며 힐난하기도 했다.
브루넬레스키가 현장에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모든 작업은 기베르티가 지휘해야 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나무 사슬 작업에 대해 기베르티에게 알려줬을 리가 없다. 게다가 기베르티는 청동문 제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현장은 멈췄고 조급해진 위원회는 브루넬레스키에게 제발 어서 현장으로 복귀해 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위원회는 그의 연봉을 100플로린으로 거의 세 배나 높여 주었다. 반면에 기베르티의 연봉은 여전히 36플로린이었다. 자신의 중요성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브루넬레스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장으로 복귀한다. 나중에 기베르티는 두 번째 청동문(일명 '천국의 문') 제작을 맡으면서 서서히 돔 공사에서 멀어졌고 모든 것은 브루넬레스키가 장악하게 된다.
1436년 3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8월 30일,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았다. 드디어 약 400만 장의 벽돌로 쌓은 지름 45미터의 돔이 16년 23일 만에 완성되었다.
#부르넬레스키 조각상 자신이 만든 돔을 올려다 보고 있다.
# 세례 받는 그리스도 by 기베르티/1427년
'세례받는 그리스도'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를 들 수 있다.
'세례받는 그리스도'는 도나텔로가 만든 (헤롯왕의 잔치)가 있는 시에나 대성당의 동일한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부조 가운데 하나이다. 도나텔로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새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기베르티의 작품을 처음 보아서는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우리는 이 장면의 구성이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구원의 천사들을 데리고 중앙에 있으며 하느님 아버지와 비둘기는 하늘에 새겨져 있다. 세부를 다르는 방법에 있어서도 기베르티의 작품은 중세의 선구자들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아름다움과 겸손함, 광야에서 해방된 예언자 세례 요한의 엄숙하고 힘찬 몸짓, 그리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서로 조용히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천사들. 도나텔로가 성경의 장면을 표현한 새롭고 극적인 방법이 그 전시대의 자랑거리였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어 놓은 반면 기베르티는 보다 명료하고 절제있게 표현하고자 세심한 배려를 했다.
헤롯 왕의 잔치 by 도나텔로/1423~7년
<헤롯왕의 잔치>에서 도나텔로는 다양한 특색을 보여준다. 화면의 가운데 두 인물은 각자 반대편으로 상체를 젖혀 V 자 형태의 구도를 만든다. 그림의 소실점은 명확지
않으나 마치 소실점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 달리 주인공인 헤롯왕은 왼편 구석으로밀려나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제공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중심으로 왼편 네 명이 둘러싼 형태의 공간감을 구성한다. 오른편의 일군의 무리는 잘린 목에 대한 반응으로 왼편으로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물론 가장 오른편의 두 인물은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지만
그로 인해 나머지 인물들의 몰입이 강조된다.
테이블의 공간은 왼편의 헤롯왕으로 향하는 듯한 방향성을 갖는다.
뒤편의 공간과 인물들은 보다 얕은 깊이를 보이는데 이로 인해 뒤편과 앞부분의 공간적 깊이감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얕은 부조 기법을 릴리에보
스키아치아토(Rilievo Schiaciatto)라고 한다. 그는 친구 브루넬레스키의 일점 투시도를 일부 사용하며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의 조각의 특징 역시 적극 활용한다. 또한 왼편 제일 뒤의 인물은 손에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오는데, 이는 화면 맨 앞의 인물과 동일인으로 부조 안에서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본의 아니게 '기베르티'와 '도나텔로'를 또 비교합니다..
우찌 기베르티는 계속 비교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 살짝 미안한데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비교를 해야하니 부연 설명~~
상기의 조각품들은 공히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례반에 조각된 부조 작품으로
'기베르티'의 작품은 정교한 청동 주조 기술이 돋보이는 작업으로 세부 묘사와 표면 처리에서 그의 장인 정신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도나텔로처럼 원근법을 통한 공간감을 표현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가 보이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모호한 배경과 대비되어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고 인물과 배경의 깊이감의 차이를 주어 공간감과 사실적인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당대의 새로운 발견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 미술의 이념에 충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근법의 경우 발견자인 브루넬레스키가
경쟁자로 인식한 기베르티에게 쪼잔하게
공유를 배제하지 않았는지 의심~~ㅎ
15세기 중엽의 또 다른 거장인 피렌체의 화가 '파올로 우첼로'는 '마사초'의 원근법을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져있어 그의 후계자로 불린다.
아래의 <산 로마노의 전투>는 피렌체가 루카(밀라노)와의 전투에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부유한 은행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근경과 원경을 사물의 크기에만 차이를 두고 색감의 차이는 없이 선명하게 표현하여 마치 목각인형 같은 느낌을 주는데 특히, 바닥에 있는 창과 병사들이 어느 한 점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 있음을 볼 수있다. 이것은 하나의 소실점에 세상을 고정시켜 수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세상을 표현한 작가의 의도이며, 더불어 전투와 어울리지 않는 장군의 붉은색 모자, 오렌지 나무, 말의 금빛 장식 등은 자세히 표현한 반면, 바닥에 흥건해야 할 피는 그리지 않아 판타지적 요소를 부각해 전쟁을 이상화시켰다.
산 로마노의 전투 그림 한편으로
당시의 상황을 상술한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미술사라고 하는 것이 한편의 작품으로 역사 대하 드라마를 만들수 있는 것이 매력이라고 해야하나요?
*산 로마노의 전투 해설~~
피렌체의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의 "산로마노 전투(The Battle of San Romano)"는 1432년에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벌어진 산 로마노 전투를 묘사한 작품으로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서 선형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그전의 의뢰 작품에서는 찾아 보기 쉽지 않은 이례적 사례이다.
작품들은 각각 길이가 3m 넘는
나무 판넬에 안료에 달걀노른자와 물을 섞어 그린 계란 템페라(egg tempera)로 그려졌다
작품중 한점을 소장중인 영국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 의하면, 작품은 전쟁 자금을 지원했던 피렌체의 부동산 부호 가문인 바르톨리니 사림베니(Bartolini Salimbeni)의 리오나르도 바르톨리니(Rionardo Bartolini)가 기념하고 싶어
당시 피렌체 최고의 작가였던 파울로 우첼로에게 1435-1460년 사이에 작업을 의뢰하였다 한다.
그런데 당시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였던 로렌조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는 작품을 몹시 탐냈다.
결국 3부작 중 하나를 구입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강제로 메디치궁(Palazzo Medici)으로 옮겨 놓는다. 소송이 벌어지고 결국 원래 소장자인 다미아노와 안드레아가 승소했지만 메디치 가는 반환하지 않았다.
1784년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면서 3부작의 패널들은 각각 흩어지는데, 하나는 피렌체의 소장품이었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에 보관 중이고 나머지 둘은 수백년 동안 화상들의 손을 거쳐 지금은 런던내셔널 갤러리-"로마노 전투에서의 니콜로 마우루치 다
톨렌티노(Niccolò Mauruzi da Tolentino at the
Battle of San Romano)"(1438-1440)와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
"산 로마노 전투에서의 니콜로
마우루치 다 톨렌티노의 반격(Florence Micheletto da
Cotignola Engages in Battle)"(1455)에 자리하고 있다.
#《Niccolò Mauruzi da Tolentino at the Battle of San Romano》 (1438년–1440년 사이 측정), 호두 기름과 아마인 기름을 혼합한 에그 템페라, 182 x 320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 Niccolò Mauruzi da Tolentino unseats Bernardino della Ciarda at the Battle of San Romano》 (1435년에서 1455년 사이로 측정), 목제판, 182 x 320 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The Counterattack of Michelotto da Cotignola at the Battle of San Romano》 (1455년대 작 추정), 목제판, 182 x 31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술사학자들은 이 3부작이 내셔널 갤러리(새벽), 우피치(한낮), 루브르(해질녁) 순으로 제작되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8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우첼로는 이 작품을 통해 15세기 중세 회화에 "전쟁"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했다. 미술사에 있어 실제의 전쟁을 다룬 최초의 작품으로 20세기에 들어 재조명되며 많은 작가들이 영감을 받아 전쟁화들을 그렸다. 3개의 패널화들은 각기 작품을 의뢰하였던 리오나르도 바르톨리니 침실의 각각의 벽에 걸려지도록 만들어져 각 작품의 원근법들은 이를 바라보는 시각의 원근법에 맞추었다.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전시장의 높이나 사진에서 볼 때와는 다소 변칙적인 형태로 보이고 있다.
우첼로는 여기서 당시 물체의 모양과 위치를 선에 의해 투시적으로 표현하는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1점 소실 원근법)의 사용으로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놀라운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작품은 이탈리아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달걀 템페라로 그려진 3m 길이에 나무 패널화로 3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트립틱(triptych)이다.
작품은 리오나르도 바르톨리니의 침실에 장식되어 있다가 사후, 그의 아들 다미아노와 안드레아에게 물려지는데, 15세기에 이 작품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전술과 조금 어긋나는 대목이네요!)
피렌체와 시에나는 적대적 관계였다. 1432년 산 로마노 근처에서 매복 중이었던 시에나군은 피렌체를 기습 공격
한다. 병력이 우세한 시에나군의 기습 공격에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피렌체 장군 니콜로 다 토렌티노는 20여 명의 기병을 데리고 산 로마노 탑 앞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계곡에서 맞닥뜨린 시에나 군에 대항하여 피렌체 기병대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투하고있다.
#X자 형 원근법을 위한 전경의 일자 배열과 밝은 분홍색의 사용이 어두운 색상의 숲과 병사들의 묘사와 대비를 이루고 있다.(이후 설명은 런던 네셔널 겔러리 작품 위주입니다!)
전투 장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미 울타리와 오렌지 나무의 짙은 녹음으로 전형적인 x자형 선원근법 구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회화 기법에서 어떤 물체가 비스듬히 놓였을때 그 물체는 실제의 길이보다도 짧게 보이는데 그러한 현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기법을 단축법
foreshortening, 라 하는데, 죽은 병사의 둥근 갑옷을 표현하는 토러스(Torus, 둥근 융기)와 발 바닥과 이 토러스를 잇게 그린 것이 단축법을 이용한 원근법이다.
화가이자 수학자인 우첼로는 정확하고 분석적인 감각으로 삼차원적 공간처리를 위한 선원근법을 르네상스 화화 최초로 작품에 적용하였다.
혼돈의 전투 장면이 사방 팔방으로 넓게 펼쳐진 평면들을 전투의 핵심 장면에 집중시킨 X자형 선형 원근법 구조.
창시한 우첼로는 새로운 기법을 강조시키면서 전투 장면의 시각적 혼돈에 대한 통제된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니콜로는 무모하게 헬멧도 쓰지 않은 체, 금박과 무늬 장식이 있는 커다란 붉은 모자, 샤프롱(Chaperon), 마쪼기오
(mazzocchio)를 쓰고 선두에서 지휘자 답게 백마를 타고 기병대를 이끌고 있는데, 그의 헬멧은 뒤에서 역시 헬멧을 쓰지 않은 나이 어린 금발의 병사가 들고 있다.
바사리는 이 마쪼기오의 묘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친구인 조각가 도나텔로에게 마조끼오(mazzocchio)를 보여 준 일이 있다. 마조끼오는 그가 원근법으로 여러 각도에서 본 점과 돋을새김으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72개의 마름모형의 평면이 있는 구체이며, 각 평면에는 뒤틀어진 둥근 막대기, 여러 조각들, 기타
이상야릇한 것들이 그려져 있다. 그는 사실 이런 데에 모든 시간을 소모하였다.
여기서 마쪼기오의 묘사를 위해 우첼로는 단축법에 의한 원근법을 이용하여 인물의 코와 모자의 꼭대기까지의 3차원적 공간감의 묘사를 매우 사질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사실적인 공간감을 전해주고 있다."
#나팔수의 진격 나팔 소리에 맞춰 진군하는 피렌체군.
#화면 오른쪽에 있는 기병대 선두의 병사는 적군두 명에 의해 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자 곤봉으로 싸우고 있다.
우화와 같은 모습의 백마는 마치 목마처럼 어색해 보이나 두발을 들고 있는 역동성은 뛰어난 공간감각을 연출하고 있다.
마구와 장군의 복장, 안장 등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금박 장식은 피렌체화파의 사실주의 보다는 시에나화파의 전통을 잇는 우첼로의 후기 고딕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시에나군을 무찌른 피렌체군의 승리를 기리는 전쟁화가 작가에 의하여 시에나 화풍의 양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전형적인 후기 고딕 양식의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는 금박과 은박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말의 장식에 금박은 여전히 화려한 광택을 유지하고 있으나 갑옷의 은박은 산화되어 짙은 회색이나 어두운 검정으로 변하였다. 처음에는 은박 장식이 너무 화려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한다.
#핑크빛 바닥은 오렌지 숲의 X자형 선형 원근법을 더 강조하고 치열한 전투 장면의 흩어져 있는 조구들을 더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화면 맨 아래에는 부러진 창과 투구, 갑옷 죽은 병사들의 사체가 일직선으로 늘어져 있는데, 죽은 병사 묘사는 당시에는 충격적인 표현이었다. 이러한 핑크빛 바닥의 전경에서의 일직선으로 늘어뜨린 배치는 x자 형의 선원근법의 중앙 소실점의 구도를 위한 배치로 의도되었다
바사리는 이에 대해, "우첼로가 만약 원근법을 위하여 애쓴 시간만큼 인물과 동물 연구에 시간을 바쳤다면 그는 조토 이래의 가장 매혹적이며 영감이 풍부한 화가가 되었을것이다. 원근법은 치밀하고 고상한 기법이지만 지나치게 몰두하면 시간만 낭비하며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소모하여 수시로 뛰어나고 풍부한 재능은 단조롭고 메마른 것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주의력을 인물보다 원근법에 더 기울이는 예술가들은 사물을 너무 세부적으로 검토하려는 고심 때문에 건조하고 딱딱한 스타일만이 몸에 베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독과 괴상한 생각과 우울증 그리고 정신적 빈곤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바로 파올로 우첼로가 이런 경우이다.
자연은 그에게 분별력있고 예민한 지력을 부여했으나 그는 힘들고 불가능한 원근화법의 여러 문제들에 흥미를 가지고 몰두했다. 그런 것이 비록 환상적이고 매력적이지만 그가 초상화를 그릴 때 큰 방해가 되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문제가 더욱 더 심해졌다."라 하고 있는데, 바사리
또한 아직 우첼로의 원근법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후대 사학자들은 바실리의 묘사를 폄하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첼로의 원근법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같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사한 시에나 병사
#화면 중앙 상단에는 니콜로가 피렌체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두 명의 전령을 보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토렌티노 장군은 무려 여덟 시간 동안 수적으로 열세한 군사를 가지고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년∼1475년)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원근법의 연구에 몰두한 우첼로는 마사초의 후계자, 또는 원근법의 발명자라고 불리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시적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화려한 색반(色斑)과 풍부한 금을 사용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이는 고딕의 전통에 살아 온 작가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노아의 생애> 작품에도 노아의 아들이 목에 생뚱맞게 두르고 있는 마초키오를 볼 수 있으며 <산 로마노의 전투>의 그림 중앙의 백마를 타고 있는 장군의 붉은색 두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조키오(mazzocchio)
우첼로는 승장 톨렌티노에게 희한한 모자를 씌웠다. 누가봐도 전쟁용도 아니고, 평상시의 패션으로도 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모자다. 이 모자는 그가 다양한 형태를 선원근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실험했던 마조키오(Mazzocchio)라는 도넛모양의 입체 도형을 적용한 형태다. 마조키오를 실험하면서 우첼로는 어떤 복잡한 형태도 일점소실점 선원근법으로 모두 그려낼 수 있다고 자부했다.
전쟁 통에 저렇게 풍성한 모자가 무슨 필요가 있냐고, 묻고 싶다. 함께 그림을 보는 친구가 소고기 마블링같은 모자를 쓰고 부를 과시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모자 또한 우첼로의 원근법 실험대상이었다니. 열심히 공부한 것을 어떻게서든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우첼로'의 원근법 연구는 마초키오(Mazzocchio/3차원
적 도형)를 적극 활용하여 화병, 모자 등 실물을 그리는데 이용하였다.
엄격한 원근법 묘사로 인한 거친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명암과 공기의 효과를 구사하는 방법은 다소 미숙해보여 2D 애니메이션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국립 미술관에 있는 원화를 직접 보면 잘못된 그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기하학을 그림에 응용하는데 지나치게 몰두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첼로'는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15세기 중엽, 당시 미술가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장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미술가들이 공방에서 일하며 도제들을 훈련시켜 '기술적 숙련도'와 '재료를 다루는 능력'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개인적인 창작보다는 후원자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불과 십수 년 후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뒤러등 르네상스의 천재적 거장들이 곧 출현하면서 이들의 창작 활동은 단순한 기술적 작업이 아닌 창조적이고 지적인 탐구로 자리매김하며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얻게 된다.
르네상스 최초의 화가 마사초가 죽은 지도 약 130년이 지난 15세기 중후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완숙한 원근법을 기반으로 회화의 구도, 소재, 빛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3명의 작가를 중심으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안드레아 만테냐
1431년생인 '안드레아 만테냐'는 이탈리아 북부의 만토바라는 도시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당시 같은 도시에서 잠깐 활동했던 르네상스 최초의 조각가 '도나텔로'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도나텔로'의 해부학적 인체표현과 감정의 극적인 표현은 '마테냐'만의 회화적 원근법과 어우러져 입체감과 공간적 착시효과를 극대화시켜 시청자에게 강렬한 감정을 전달한다.
사물과 사물 간의 공간뿐이 아닌 인물자체에까지 원근을 적용한 극단적인 '단축법'의 혁신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죽은 그리스도 by 만테냐 / 1480년 경
그의 작품 중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는 젊은 20대 시절의 작품으로 원근법과 해부학적 연구, 드라마틱한 서사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약 25년 후 그려진 <죽은 그리스도>는 크고 두툼한 두발에서 시점이 출발해 과감히 단축시킨 몸통을 거쳐 발의 크기와 거의 비슷한 머리가 화면 뒤를 지탱하며 끝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마치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것 같은 시점을 경험하게 되어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고 독창적인 구도로 관람자에게 강렬한 시각적 충격과 감정적 몰입을 선사한다
"만테냐는 그의 인물상이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무대를 창출하기위해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마치 능숙한 연극 연출가
가 하듯이 인물들을 배치하여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의 의미와 과정을 전달하려 했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다."
피렌체 남부, 아레초라는 도시에는 기하학자이자 화가였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있었다. '점은 사람들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선은 한 점이 다른 점까지 확장된 것이다. 면은 선들에 의해서 에워싸인 넓이와 길이의 합이다.
' 이 글은 그의 논문 '회화의 원
근법에 대하여'의 첫대목으로 수학적 엄정성은 타협이 불가능한 원칙이었으며, 고전 기하학의 추상적 개념들을 스케치와 구성, 채색이라는 현실적인 작업에 적용하려 노력하였고 이 노력이 극대화된 작품이 <채찍질당하는 그리스도>이다.
채찍질당하는 그리스도 by 피에로/ 1460년
화가들이 많이 다룬 성경의 사건으로 똑같은 복음으로 얼마나 다양한 그림이 만들어지는지 보시라고 멘트없이 벨라스케스, 카라바조의 그림도 소개합니다..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1630년경, 내셔널 갤러리, 런던
카라바조의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등장인물들의 무릎 정도에 위치한 소실점으로 인해 관람자들은 화면 속의 오른쪽 3명의 인물들을 마치 거인들과 같이 우러러보게 되고 열주랑 안쪽 멀리에는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와 세 명의 형리들이 서 있다.
안쪽 구석에는 빌라도가 권좌에 앉아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내부의 모든 건축물들은 광장 바닥의 격자 선에맞추어서 배치되어 있고, 정면이 화면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너무나 뚜렸해서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러한 구성은 '피에로'가 위의 논문에서 물체의 평면도와 입면도를 조합하여 입체와 삼차원적 공간을 재현하도록 했던 계산방식의 구체적 예시인 것이다.
원근법에 낯선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이 맞닥뜨릴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을 담고 있는 위대한 화가의 교과서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있어 우리는 '산드로 보티첼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의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은 과도기 르네상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구도에 따라 비너스는 화면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그녀의 주변에 배치된 제피로스(바람의 신)와 클로리스(봄의 여신), 그리고 오
른쪽의 호라이(계절의 여신)는 비대칭으로 균형을 이루며 동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원근법적 깊이를 약화시키는 대신 우아한 선과 움직임의 흐름을 강조하여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화사한 컬러감과 함께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비너스의 탄생 by 보티첼리 / 1485년 경
비너스의 탄생(이탈리아어: La nascita di Venere, 영어: The Birth of Venus)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의 대표적인 그림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비너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하면서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너스의 탄생은 1483년경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몇 학자들은 피에르프란세스코가 보티첼리에게 비너스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했고 조르조 바사리가 그 외의 그림들을 현재까지 피렌체에 전시해 놓은 것으로 본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줄리아노 데 메디치 (1478년 파치 음모로 암살됨.)의 연인이자 포르토베네레 출신의 미인이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달력" 그리고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편"은 보티첼리에게 영감을 주는 데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고전적인 여신 비너스는 물 위에 떠 있는 조가비에서 나온 채로 정신적인 사랑의 상징인 제피로스(서풍)가 부는 바람을 타고 해안에 상륙하고 있으며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의 한 명이 꽃에 덮인 외투를 비너스에게 건네주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라파엘로와 같은 르네상스 화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엄격한 고전적 사실주의와 차이를 두고 있다. 비너스의 목은 비현실적으로 길고 왼쪽 어깨의 기울기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친구가 폐가 좋지 않아 한쪽이 꺼진것을 묘사한것이다
"사실 보티첼리의 인물은 보다 당시 화가들의 작품보다 덜 단단해 보인다. 인물들은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기베르티나 시모네 마르티니와 같은 14세기의 미술을
상기시켜 준다.
그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의 자유로운 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선물로서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오랜 중세의 틀에서 벗어나 르네상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있는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들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전통과 혁신"이라는 화두로 오랜 시간 변화를 위한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딕과 르네상스의 경계에서 활동했던 위대한 예술가들을 소개하여 보았는데 글 실력과 지식이 현격하게 부족하여 스스로 많이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래도 칼을 들었으니 무우라도 짜른다는 각오로 쭈우욱~~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