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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탄생
이어령 지음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 292쪽 / 11,300원
▣ 저자 이어령
문학평론가로 출발해 소설가, 극작가, 국문학자, 하이쿠 연구자, 에세이스트, 언론인, 일본문화 연구자, 문예지 편집자, 출판인, 초대 문화부 장관, 88올림픽 기획자, 새천년준비위원장, 2002한일월드컵 기획자, 이화여대 교수로 각 분야에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특출한 업적을 남긴 이어령. 그에겐 시대를 통어하는 화두를 간파하고 전체를 통찰하는 견고한 지성과 예지적인 순발력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복합 체험의 공간이었던 격동과 급변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이어령은 놀라운 열정과 능력으로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년대)’, ‘신바람 문화(1970년대)’, ‘벽을 넘어서(1980년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1990년대)’는 구호를 통해 매 시대를 바꾸는 키워드를 제시해온 그는, 지난 2006년 『디지로그-선언 편』을 통해 디지로그 시대를 주도할 한국인의 저력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역설, 2000년대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또 한 번 제시하기도 했다.
▣ Short Summary
『젊음의 탄생』은 지난 2008년 3월 3일 서울대학교 입학식에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축사 “떴다 떴다 비행기”를 발화점으로, 저자 이어령이 그간 여러 대학과 각종 강연에서 피력해 왔던 젊은 세대를 향한 목소리와 평소 젊은 지성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데 묶고 다듬은 책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라면 꼭 봐야할 바이블을 만들고 싶었다는 저자는 평생 한 번 있는 ‘지적 나그네의 시기’인 대학을 ‘주어진 정답’을 벗어나 모든 가능한 생각들과 소통하며 창조적 지성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길 제언한다. 이러한 제언은 일방향적 ‘정보 수신’만 있는 웹 1.0시대에서 사용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해내는 ‘웹 2.0시대’로의 전환과 유사하다. 대학 2.0 시대를 언급하는 저자는 대학도 ‘정답’을 수신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답을 생산할 수 있는 개방·자율·창조의 공간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여기에 묶인 글들은 ‘또 하나의 정답’ 혹은 ‘다른 쪽에 서 있는 정답’이 아니다. 다만 여러 가능성의 길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음을, 그 가능성과 어떻게 접점을 형성해야 하는 것인지를 넌지시 얘기해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들이 젊은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 2.0’이 아니라 ‘대학 2.0 시대’라 함은, 대학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전반이 어떻게 대학 2.0 시대와 조우하고 융합하고 새롭게 진화해가야 하는지를 역설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다른 세대들에게도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자신을 창의적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충분한 조언을 줄 것이다.
▣ 차례
Up1 뜨고 날고―天外有天―Take off
Magic card 1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
1. 떴다 떴다 비행기 / 2. 날아라 날아라
3. 높이 높이 날아라
Up2 묻고 느끼고―疑問驚歎―Interrobang
Magic card 2 물음느낌표(Interrobang)
1. 물음표의 비밀 / 2. 느낌표는 어디에서 왔는가?
3. 물음느낌표의 족보
Up3 헤매고 찾고―暗中摸索―Serendipity
Magic card 3 개미의 동선(Ant's Trace)
1. 인간의 뇌는 우유성을 먹고 자란다 / 2. 노이즈와 국물 문화
3. 젊은이여, 세렌디피티를 잡아라
Up4 <나나>에서 <도도>―兩端不落―Win-Win
Magic card 4 오리-토끼(Duck-Rabbit Illusion)
1. 이것이냐 저것이냐 / 2.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법
3. 불국사에서 배우기
Up5 섞고 버무리고―圓融會通―Mash up
Magic card 5 매시 업(Mash up)
1. 서로 다른 것끼리의 만남 / 2. 이분법의 탈구축, 개짱이
3. 융합의 시대에 잃어버린 한국의 문화 코드
Up6 연필에서 벌집―圓-方-角―Honeycomb core
Magic card 6 연필의 단면도(Hexagon)
1. 연필은 필기도구가 아니라 생각의 도구다 / 2. 벌집 구조 육각형의 신비
3. 바이오미메시스
Up7 <따로따로><서로서로>―獨創性―Only one
Magic card 7 빈칸 메우기(Blank)
1. 내 젊음의 빈칸 메우기 / 2. 대통령의 퀴즈
3. 독창성의 수원지, 인문학
Up8 앎에서 삶으로―知·好·樂―DIKW
Magic card 8 지(知)의 피라미드(Knowledge Pyramid)
1. 배움은 젊음을 낳는다 / 2. 즐기는 자들의 대학
3.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Up9 나의 별은 너의 별―世域化―Glocalization
Magic card 9 둥근 별, 뿔난 별(Form of stars)
1. 둥근 별과 오각형 별 / 2.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3. 동의 용 서양의 키메라 / 4.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
5. 자크 아탈리의 예언
젊음의 탄생
이어령 지음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 292쪽 / 11,300원
뜨고 날고―天外有天―Take off
- “뜨면 추락한다, 날아라!”
대학에 합격한 순간 여러분도 떴습니다. 오랜 입시 공부의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 있는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뜬다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 억누르던 중력에서 풀려나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 그래서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대학에 붙자마자 일제히 터져 나온 것이 “떴다 떴다”의 함성이었지요. 하지만 ‘뜨는 것’과 ‘나는 것’은 다릅니다. 공기든 물 위든 ‘뜨는 것’의 힘은 밖에서부터 옵니다. 구름이나 풍선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기 위에 떠다니다가 사라지고, 물에 뜬 거품과 부평초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다가 꺼져버립니다. 이와는 달리 ‘나는 것’은 자신의 힘과 그 의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향해 돛을 올리고 날개를 폅니다. 독수리의 날개는 폭풍이 불어도 태양을 향해 꼿꼿이 날아오르고, 잉어의 강한 지느러미는 거센 물살과 폭포수를 거슬러 용문(龍門)에 오릅니다. 죽은 고기만이 물 위에 떠서 아래로 떠내려갑니다. 여러분은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자율성의 새로운 기류 위에 뜬 대학생들입니다. 이제 자유롭게 자신의 힘으로 날아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나는 것은 바람 탓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부모 탓, 사회 탓, 정치 탓, 아무리 탓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은 초․중․고 환경처럼 타율과 의존이 아니라 모든 제도와 운영이 자율을 토대로 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은 이제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자율성 안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젊음의 유영(遊泳)과 비상(飛翔)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자성어에 ‘천외유천(天外有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차원을 한 단계 올려 “높이 높이” 날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닥쳐올 새 시대의 하늘은 수학 문제로 치면 고차방정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풀어야할 인간의 삶과 문명 문제는 어떤 공식도 존재하지 않는 5차방정식과 비슷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1차방정식이 수렵 채집 시대, 2차방정식이 농업 목축 시대, 3차방정식이 산업 시대, 4차방정식이 오늘의 정보 시대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다음 문명은 바로 5차방정식과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머리띠 동여매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던 저차원 방정식의 문제 풀이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학의 힘은 거리의 시위 공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넓은 바다, 창조적 상상력의 높은 하늘에서 옵니다. 젊은이와 대학의 토대는 파멸의 센서 노릇을 하는 보네갓드의 ‘카나리아 이론’에서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이나 3T(Talent, Technology, Tolerance)로 무장한 리처드 플로리다의 ‘창조 이론’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매직카드를 잘 보세요. 내 젊음을 업그레이드할 때 생기는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입니다. 게의 집게발처럼 생긴 세 개의 팩맨(pac-man)을 보고 있으면 그 사이로 하얀 삼각형이 떠오를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윤곽선이 보이고, 같은 종이의 흰 바탕색인데도 가상공간의 삼각형은 한층 더 희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 그림이지요. 그 가상의 삼각형은 여러분이 지금부터 높이 날아야 할 공간, 창조적 상상력과 그 지성의 영역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대학 캠퍼스도 벽돌로 된 강의실과 나무를 심은 교정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팩맨의 유도인자처럼 젊음을 에워싼 가상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그곳은 젊은이들의 거침없는 상상력이 뜨고 날고 춤출 수 있는 창조적 지성의 인큐베이터입니다. 대학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집게발 같은 팩맨의 모양만 볼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분명 그 사이에 떠오르는 삼각형의 공백을 볼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지요. 꿈, 상상력, 창조 공간, 미래의 판타지―무엇이라 부르든 이 떠오르는 가상공간에서는 학과 간의 구분도 없고 인문학이니 사회과학이니 자연과학이나 하는 구별도 없습니다. 학과 사이의 높은 문지방도, 두터웠던 문과와 이과의 벽도, 높은 가상공간의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개방되어 있지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만들어가야 할 ‘대학 2.0 시대’의 기반이요, 높이 날아올라야 할 창조적 상상력의 하늘인 것입니다. 이처럼 높이 날기 위해서는 지식과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목숨을 건 모험과 열정 말입니다. 이번만은 추락하지 말고 높이 높이 날아야 합니다. 우리 젊음을 위한 추임새의 노래가 팩맨의 입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묻고 느끼고―疑問驚歎―Interrobang
-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게 된 대조법이지만 옛날 대학생들을 괴롭힌 것은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의 인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었지요. 햄릿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유명한 대사가 의미하듯이 매사를 회의하는 물음표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미쳐서 살고 깨어나서 죽었다”는 돈키호테는 환상을 좇는 꿈속의 기사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느낌표형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나누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감정은 이성을 눈멀게 하고 이성은 감정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았지요. 감정과 이성을 상호 대립하는 것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 인지과학에서는 그것들을 서로 기능을 보완하고 도와주는 상보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물음표는 느낌표가 있기 때문에, 느낌표에는 항상 물음표가 동행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특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의 대학생들이 그렇지요
물음표와 느낌표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매직카드가 바로 물음느낌표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나 영어로는 Interrobang이라 하고 중국어로는 ‘의문경탄호’라고 일컫는 기호입니다. 컴퓨터의 유니코드에서는 U+203에 배치되어 있는 글자로 당당한 문자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한 마크라고 할 수 있지요. 곡선과 직선이 어울리고 얼음 속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처럼 이성과 감정이 오버랩 되어 있는 이 글자의 모양은 햄릿과 돈키호테를 한데 합쳐놓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음느낌표가 앞으로의 젊음을 탄생시키는 매직카드가 되는 이유는 좌우 어느 한쪽 뇌만으로는 통합적인 미래의 나 그리고 문명을 창조할 힘을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궁상맞게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어 봤자 자기 배꼽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며 물음표 인간을 비웃는 젊은이들. 마찬가지로 핫(hot)이란 말보다는 쿨(cool)이란 말을 더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느낌표의 “아이 스크림!(I scream)”은 금시 녹아 없어진다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오로지 두 타입의 젊은이들을 함께 포용할 수 있는 것은 물음느낌표, 인테러뱅밖에는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혈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화끈한 것, 불타는 것에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진짜 용기와 열정은 회의하면서도 불확실한 회색 지대로 뛰어드는 ‘최초의 펭귄’이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최초의 펭귄(First Penguin)’이라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펭귄들은 뒤뚱뒤뚱 떼를 지어 우르르 바다로 모여들지만 정작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일제히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머뭇거립니다. 왜냐하면 바다 속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잇감도 있지만 동시에 위험한 물개나 바다표범 같은 천적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머뭇거리고 있는 펭귄의 무리 가운데 그 불확실한 바다를 향해 맨 먼저 뛰어드는 용감한 펭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펭귄들도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바다로 뛰어듭니다. Just do it! 불확실하지만 일단 무언가 저지르는 것. 끝없이 회의하다가도 순간적인 직관이나 느낌으로 판단하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의문과 감동이 한 몸이 된 ‘물음느낌표’의 상징적 부호의 의미입니다. 노인은 의구심이 많아 머뭇거리고 아이들은 철이 없어 덤빕니다. 진정한 젊은이는 의심하고 행동하는 최초의 펭귄인 거지요. 젊은이란 한 마리가 멋도 모르고 뛰면 덮어놓고 따라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스프링복이 아닙니다. 젊음은 목숨을 걸고 남보다 앞서 불확실한 모험의 바다로 뛰어드는 최초의 펭귄인 것입니다. 물음느낌표를 가슴에 단 펭귄 같은 젊은이들이 있기에 오늘의 문화와 사회가 바뀌고 새 역사들이 쓰였습니다.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불확실한 바다로 용감히 뛰어드세요.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납니다. 젊음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나나>에서 <도도>―兩端不落―Win-Win
- “굿바이! 유통기한이 지난 흑백의 이분법은 가라. 하이! 그레이 존의 보물섬 지도”
이번 매직카드는 비트겐슈타인의 애매도형인 ‘오리-토끼(duck-rabbit)’입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무엇을 그린 그림이냐고 물으면 <오리>라고도 하고 <토끼>라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른쪽 방향을 보고 있는 오리 그림인지, 왼쪽 방향을 보고 있는 토끼 그림인지,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그 그림의 선 모양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인지하고 그 형상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존재합니다. 관찰자가 부여하는 <관점의 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그림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태까지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리-토끼의 매직카드를 보면서 비로소 그게 아니라는 것, 그림보다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능동적인 역할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자르는 칼자루가 내 눈 속에 마음속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여러분은 이 매직카드를 통해서 인간은 동전을 넣어야 움직이는 자동판매기처럼 outside-in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바깥에서 자극이 없어도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inside-out의 존재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위 그림을 오리-토끼로 동시에 인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오리로 보일 때에는 토끼 모습이 사라지고 토끼로 보일 때에는 오리가 지워집니다. 언제나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요. 이처럼 관점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자유이면서도 때로는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됩니다. 쏠린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향과 배재―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다의적인 것인데도 늘 삶의 반쪽밖에는 볼 수 없게 합니다. 원래는 오리도 되고 토끼도 되는 양의성을 지닌 것인데도,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에 좌우의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 차이에서 의미와 여러 가지 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거기에서 시스템이라는 것이 구축되고 그 시스템 속에 굳어버린 사물이나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선지피가 흐르는 현실의 삶으로부터 동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오리냐 토끼냐의 양자택일의 강박관념이 젊은이들을 가위눌리게 합니다. 열린 들판의 복판에서 살기를 원하는 젊음이 흑백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서 경직되는 것입니다. 예스면 예스, 노면 노의 일도양단으로 처리되는 정황 속에서는 어떤 단서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색분자로, 논리적 배중율로, 혹은 박쥐가 아니면 우유부단한 존재로 배척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처럼 다의적이고 애매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고교 교실과 다른 대학 강의실이 무질서해 보이고 늘 회색빛이고 안개이고 입구와 출구가 여러 개 나 있는 미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아무 방향으로나 갈 수 있는 열린 벌판, 개방되어 있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그라미가 아니면 가위표를 치는 외통수의 시험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불안해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냐’를 ‘나’로 바꿔주면 됩니다. 그러면 선택의 차이는 없어지고 대립은 해소되어 ‘이것이나 저것이나’가 됩니다. 중국 사람들이 생활 철학의 하나로 꼽는 ‘차부도(差不等)’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그 ‘나나’는 ‘도도’로 진화합니다. 수동적인 데서 능동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도시생활에서 패배한 젊은이들이 잘 쓰는 말 “모두 다 때려치우고 시골이나 가서 농사나 짓지”라고 할 때의 그 ‘~나 ~나’입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패기 있는 젊음과 희망을 지닌 젊은이들은 ‘나나’가 아니라 ‘~도 ~도’라고 말합니다. 일‘도’ 하고 놀기‘도’ 하고, 도시‘도’ 농촌‘도’ 모두 자기 생활공간 안에 포함시킵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either-or에서 both-and로 가는 것이고, 한자의 사자성어로 말하면 이자택일에서 양자병합의 세계로 가는 것이 ‘나나’에서 ‘도도’로 가는 삶이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Win-Win’의 상생원리입니다.
여름날 아버지는 덥다고 창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모기 들어온다고 창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괴로운 오리-토끼지요.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어느 한편을 들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유리한 어느 한쪽에 서려고 한다면 오랫동안 우리가 상처입은 그 줄서기의 비극을 재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골육상쟁(骨肉相爭)하던 그 천 년의 비극 말입니다. 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것이 젊음으로 태어난 여러분의 힘이요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줄을 서지 않습니다. 오리냐 토끼냐의 선택에서는 줄을 서야 하지만 창조하는 젊음은 줄을 만듭니다. 망창을 만들어 다는 것이지요. 바람은 들어오고 모기는 막아주는 이 방충망을 창조하는 것. 그것만이 ‘나나’를 ‘도도’로 바꿔주는 희열의 역사를 눈앞에 펼쳐줄 것입니다.
섞고 버무리고―圓融會通―Mash up
- “섞어라, 버무려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두 개의 아치형 대문처럼 보이는 것은 영어의 M자를 딴 것이고, 탑처럼 위로 솟은 화살표는 위로 올라가는(up)의 표시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매시 업(mash up)’이라는 음악 양식을 나타내는 로고입니다. ‘mash’는 섞다/결합하다의 뜻으로,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음원을 합성해 새로운 곡을 만드는 음악제작 기법을 일컫는 말입니다.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The white album)>의 곡에 랩 가수인 제이 지의 <블랙 앨범(The black album)>의 랩 일부를 붙여서 새로운 곡을 만든 미국의 음악프로듀서이자 가수인 데인저 마우스가 그 원조라고 합니다. 이름도 <그레이 앨범(The gray album)>이라 붙인 것을 보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르려 했는지 분명해집니다. 백인이 부른 ‘화이트’ 곡에 흑인이 부른 ‘블랙’의 가사를 혼합해서 ‘그레이’의 잡곡(雜曲)을 낳은 것. 그런 시도야말로 매시 업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양식의 음악이 힙합계를 덮치면서 젊은 층에 파고들기 시작한 것을 보아도 분명 매시 업은 21세기 융합문화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음악만이 아닙니다. 비디오 아트, IT의 웹 서비스,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 대부분이 융합기술 제품이 아닌 게 없습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을 결합하여 지금까지 누구도 모르고 있던 새로운 효능과 가치를 창출하는 기법, 그리고 그 정신이 M자 위의 화살표처럼 오늘의 젊음을 업그레이드하는 비밀 병기, 즉 매시 업입니다.
새 젊음을 탄생시키는 것은 미래의 힘이라기보다 과거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매시 업의 21세기 트렌드는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자성어에 여러분이 외국인과 경쟁해서 앞설 수 있는 비법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 21세기가 지난 세기 또는 산업주의가 지배해온 근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직선적 사고 패러다임이 원형적, 순환적 사고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는 현상입니다. 20세기까지의 직선적 사고와 그 시스템을 기초로 한 항상적(Homeostatic) 패러다임을 원형적 사고와 순환적 시스템으로 구성된 역동적(Homeodynamic)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이 21세기 교육의 기본 전환점입니다. 21세기를 열어갈 정보기술(IT)과 바이오기술(BT)부터가 이미 산업기술과는 달리 호메오다이나믹스를 전제로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정보기술을 비롯한 21세기 벤처산업들이 모여 있는 실리콘밸리는 바로 그 옛날 히피들의 발상지였던 샌프란시스코와 개방 학교를 창설했던 산타클라라 지방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21세기 기술 경쟁에서는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기술 융합, 즉 기술을 잘 ‘뭉치는’ 자가 승리합니다. 각 기업이 서로 다른 용도로 개발했던 기술이 한데 모여 새로운 기술을 낳고 그러한 추세가 거듭되면서 또 다른 기술 혁신을 불러옵니다. 첨단기술들의 합종연횡이 이루어지는 시대지요. 그러므로 앞으로의 교육은 이른바 이중적 사고-노동 인간(Homo laborance)과 놀이 인간(Homo ludens)의 두 인간관이 이항 대립을 넘어 하나로 융합한 총체적인 가치의 사고 체계로 전환하고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원’과 ‘융’ 다음에 오는 세 번째 방법은 바로 만남의 패러다임, 즉 ‘회(會)’입니다. 앞으로 대학과 인간의 생활을 결정하는 운명의 키워드는 ‘링크’, ‘인터랙티브’, ‘접속’,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기계를 이어주는 ‘인터’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학교는 순종교배의 순수함을 보전하려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잡종교배의 다양함과 풋풋함이 넘쳐 나는 새로운 실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실리콘밸리의 특성은 세계의 모든 문화가 한곳에 만나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생각들을 상품과 첨단기술로 만들어가는 모험의 땅이요 꿈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실리콘밸리는 한국, 중국, 러시아, 인도, 베트남, 일본 등 백여 가지가 넘는 인종들이 서로 만나는 장소이며,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 부딪치고 마주하면서 미래의 기술과 삶을 탄생시켜가는 21세기의 모델입니다. 이 자유로움과 흡수력과 유연성이 실리콘밸리의 신화이며 그 미래인 것이지요.
이러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21세기 최고의 교육 수단과 방법 그리고 목표는, 바로 인터넷을 위시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과 사통팔달의 사이버커뮤니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의 의사와 마음을 전달하고 감동을 나누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원융회통의 마지막인 ‘통(通)’ 패러다임입니다. 그 옛날 하늘의 달과 지상의 인간을 하나로 융합시켰던 월명사의 피리를 젊은이들이 나누어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원융회통의 ‘통’, 오늘날 말하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소통의 기술이요, 그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따로따로><서로서로>―獨創性―Only one
- “함께, 그러나 홀로 있는 창조의 외로움과 즐거움”
이번 매직카드는 심리 테스트를 할 때 사용하는 빈칸 메우기 도형입니다. 삶이란 것도 결국은 빈칸 메우기와 같습니다. 반은 운명처럼 주어진 문자가 있고 그 옆에는 마음대로 자신이 써넣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백이 있습니다. 삶에 다양한 변화를 주는 빈칸들이 있기에 젊은이들의 삶은 운명의 실로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닌 것입니다. 운명과 선택이 뒤얽혀서 그때그때의 낱말들이 결정되고 그것들이 모여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꾸며지는 것이지요. 더구나 대학 시절만큼 빈칸이 많은 날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메우는 상상력과 창조력 여하로 일생의 이야기가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다채로워지는 때인 까닭입니다. 봄날처럼 대학 시절의 젊음은 짧고 쉬 지나갑니다. 사랑은 결혼으로, 강의실은 사무실로, 그리고 가슴속에 벅찬 책들이 캐비닛의 때묻은 서류가 되어 쌓여 가면, 어느새 그 많던 빈칸들도 소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빈칸이 있다면 채워야 합니다. 젊은이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해서 하루하루를 빛의 언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랑하고 생각하고 감동하고, 때로는 사전에도 지도에도 없는 낱말들을 찾아내어 나만의 이야기를 엮어가야 합니다. 조금은 문법에서 어긋나고 철자가 맞지 않아도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을 조금이라도 놀랍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만한 일탈은 젊음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 비해서 꿀벌은 처음부터 완결된 ‘생물’입니다. 자나 분도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육각형 구조의 벌집에는 한구석의 빈틈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수정할 수 없는 완결된 문장과도 같아서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꿀벌에겐 언어도 도구도 필요 없으며, 더 가르칠 것도 없습니다. 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개체라는 것이 생기고 창조력이 움틉니다. 개만 해도 꿀벌보다 조금은 빈칸이 있기 때문에 훈련을 시킬 수 있지요. 민족이나 국가도 빈칸 메우기로 달라집니다. 한국에는 양떼를 기를 만한 땅이 없습니다. 기후도 유목에는 적합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결핍 때문에 화학섬유 공장이 쉽게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 한국에는 철강석이나 석유, 석탄 같은 지하자원이 부족합니다. 모든 산업용 원자재들은 바다 밖의 나라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이나 포항 같은 연해안 지역에 산업도시가 들어서게 되고 그것들은 곧 경제성장의 노른자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부존자원의 결핍이 새 도시를 만들어내고 고부가가치 산업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이렇듯 결핍이 성장과 창조의 능력을 가져오는 역설의 현대사가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여러분들은 황토벌에서 자갈을 고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결국 산업사회의 열등생이 정보사회의 우등생이 된 것은, 양이 없고 땅이 없고 전력이 없고 부존자원이 없었던 빈칸이 만들어낸 창조력과 독창성 덕분입니다.
그런데 독창성은 절대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터링크된 관계론에서 그것의 유연한 소프트파워가 발휘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해군들의 올라타기 해적전술과 그들이 타고 온 배의 구조를 알고 그것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배가 접근하여 올라탈 수 없도록 갑판에 뚜껑을 해 닫고 거기에 칼날과 창끝을 꽂아놓았지요. 만약 적이 화공을 해올 때라면 거북선은 갑판이 지붕으로 막혀 있어서 불리했을 것입니다. 전쟁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거북선이 어떤 배인가를 가르쳐주려 한다면 교육 시스템은 거북선과 대적한 일본배도 함께 알려주어야 합니다. 거북선만이 아니라 실체론이 아닌 관계론으로 사물을 보아야만 21세기의 상호작용성(인터랙티브)을 중시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창성은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도, 독장군의 그 독도 아닌 ‘함께 그러나 따로’에서 생겨나는 힘임을 빈칸 메우기의 최종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탈레반과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배운 것은 스마트탄의 병기가 지닌 위력만이 아니라, 바로 이슬람의 문화읽기와 그 지식의 힘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스마트탄보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이 더 스마트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는 ‘□ilk’, '독', ‘결’자 퀴즈에서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따로따로 서로서로에서 독창성으로 살아가야 할 21세기의 젊음이 탄생합니다.
앎에서 삶으로―知·好·樂―DIKW
- “그레이트 아마추어가 되어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논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처럼 공자는 사람을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 그리고 ‘즐기는 자’의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뜻밖에도 아는 자를 가장 아랫자리에 두고 즐기는 자를 제일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낙지자(樂之者)’가 지지자(知之者)나 호지자(好之者)와 어떻게 다른가를 현대적인 입장에서 풀어보기 위해 속된 비유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지요. 술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을 우리는 술의 지지자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는 술병을 앞에 두고 그것이 몇 년산 무슨 포도주이고 값이 얼마며 술의 유통과정이나 세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고 감정 평가합니다. 이런 술의 지지자는 장사하는 데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함께 술을 마시는 데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역시 술자리에서 술맛 나는 사람은 술을 아는 것보다는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요 주당들입니다. 술의 호지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행위하는 사람, 뛰어들어 맛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술의 호지자도 술의 지지자처럼 함께 술을 마시는 데 있어서는 약간의 고통과 부담이 따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술을 너무 좋아하여 깊이 빠져버릴 경우 주정뱅이나 알코올중독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 많이 알거나 그저 좋아하는 것이 아닌, 술을 즐기는 낙지자가 있습니다. 술의 낙지자들은 주도에서 벗어나는 일없이 술맛과 그 멋을 즐길 줄 압니다.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도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도 아닌, 이태백처럼 달과 나와 술이 혼연일치하는 주선(酒仙)이 되는 겁니다. 지지자나 호지자는 단지 술을 소비하지만 낙지자는 술과 내가 하나가 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창조합니다. 이때의 술을 자신의 삶이나 배움 그리고 학문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이 같은 [지-호-락]의 경우에 따라서 어떤 양상이 생겨날지 아주 쉽게 유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기실현이란 자기의 삶을 창조해내는 것이고 그 창조에는 반드시 기쁨과 즐거움이 따릅니다. 지지자나 호지자가 따라오지 못하는 그 즐거움 말입니다. 자기실현, 창조 활동, 기쁨, 즐거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는 군자의 자족-이 모든 것이 낙지자의 속성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호-락] 계층은 요즘 한창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지식경영 모델인 DIKW 피라미드와 놀라운 호환성을 갖고 있습니다. DIKW 피라미드란 지의 계층을 네 단계로 나눠서 최저변의 Data(자료)에서 시작하여 Information(정보)→ Knowledge(지식)→ Wisdom(지혜)의 오름차순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형을 일컫습니다. 가령 원시인들이 처음 이 지상에 등장하였을 때 그들은 하늘에는 해와 구름이 있고 땅에는 풀과 냇물과 토끼들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주위의 사실과 사물들이 자료(Data)이고 그것을 감각을 통해서 보고 듣고 인지하는 것이 바로 정보(Information)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생각이 올라가면 토끼는 풀을 먹고 풀은 흙에서 자라고 비는 구름에서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지요. 이것이 지식(Knowledge)의 단계입니다. 여기에서 한층 더 올라가면, 원시인은 만약 자신이 늑대를 모두 죽이면 토끼들이 불어나서 풀들을 모두 먹어치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초원에는 풀이 없어지고 풀이 없어진 초원에서는 비가 내리면 토양이 모두 물에 씻겨 내려가 결국 생물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고 맙니다. 늑대를 멸종시키면 안 된다는 환경의식이 바로 지혜(Wisdom)의 단계입니다. 여기에 공자가 말한 [지-호-락]의 개념을 대입하면, 자료(Data)와 정보(Information)는 ‘지지자’의 몫이고,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는 ‘호지자’의 영역이며, 엘리엇이 그의 시 「바위(The Rock)」에서 제안했던 최고의 단계인 삶(Life)은 ‘낙지자’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은 비록 가는 로프에 매달려 있지만, 낙지자의 교육과 학문은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암벽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즐거워서 손뼉 치는 학문이 현실이 되려 합니다. 이에 발맞춰 대학의 위상과 미래 비전은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대학은 자기 목적적인 창조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낙지자의 요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소속과 존중의 그 모든 외발적 욕구를 기준으로 했던 지금까지의 교육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두 번째로 대학의 개방은 양산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스몰그룹을 타깃으로 한 ‘크리에이티브 클래스’의 핵심을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학 스스로도 강의방식을 푸시(push)에서 풀(pull)로 바꿔 배우는 사람의 선택폭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들은 멍석을 깔아주는 teaching에서 스스로 멍석을 까는 learning으로, 배우는 learning에서 생각하는 thinking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생각에서 창조의 creative로 향하는 동선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추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넘버원의 베스트가 아니라 온리 원의 독창성에 미래를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나 자신의 전공에 관한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고 체험하는 퓨전 음식, 하이브리드 컨버전스 제품, 크로스오버의 예술과 멀티미디어의 웹 컬처 등을 세계 학문과 회통시켜 새로운 방법론들을 독창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은 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지만 실제로 날지는 못하는 닭이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보면 절대로 날 수가 없는 구조임에도 날아다니며 꿀을 따오는 뒝벌(Bumble bee)이어야 합니다. 즉, 리얼리즘과 실증주의에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삶의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지금까지의 대학은 지지자(知之者)를 만들어내고 오늘의 대학은 호지자(好之者)를 만들어냈지만, 앞으로 21세기의 대학은 자신의 생 자체를 창조하고 즐기는 낙지자(樂之者)들의 행복한 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음은 새롭게 탄생합니다. 젊음은 대학을 낳고 대학은 시대를 낳습니다. 시대는 다시 대학을 낳고 대학은 다시 젊음을 낳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앎은 삶으로 삶은 앎으로 순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