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셰퍼드>-우아한 절제미로 미국 이너써클을 해부하다
‘선한 목자’라는 뜻을 제목으로 단 이 영화는 CIA 핵심요원의 생애를 통해 미국의 이너써클문제를 다룬다. 진지한 연기못지 않은 진지한 감독으로 입증된 로버트 드니로연출, <대부>의 프란시스 포드 코풀라와 드니로 공동제작, <포레스트 검프>와 <뮌헨>등을 통해 최고의 작가로 등극한 에릭 로스 각본, 마틴 스코세지의 전속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로버트 리차드슨의 촬영, 맷 데이먼, 윌리엄 허트등 연기파 명배우들의 대거 출연...이들이 모여 만든 <굿 셰퍼드>는 이야기 자체가 제대로 구성조차 되지 않는 최근 할리우드영화 풍토에서 오랜만에 생산된 음미해볼만한 우아한 수작이다.
배경은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냉전시대. 2차 대전 직전부터 쿠바의 피그만 침공에 관여한 CIA 핵심요원 에드워드(맷 데이먼)의 삶을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며 추적해가는 것으로 짜여있다. 그 계기는 내부정보 유출로 실패한 피그만작전의 첩자를 밝혀내는 것인데, 흐릿한 흑백사진과 잡음섞인 여자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의 배달로부터 시작된다. 극소수만 아는 피그만 비밀작전 장소를 누가 적에게 유출한 것일까? 녹음테이프 속 목소리의 여자는 누구이며, 그윽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며 비밀정보를 캐고 드는 정사중인 그 여자는 누구에게 말 걸고 있는 것일까?
이런 설정은 당연히 첩보물 혹은 스릴러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드니로는 이런 장르적 설정과 호기심을 넘어, 국익을 위해 헌신한 첩보원 개인의 직업과 가족간계를 넘나들며 진지한 내면드라마를 구성해낸다. 그것도 거의 세 시간에 걸쳐서 담담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그 결과 이 드라마는 냉철한 첩보원 개인의 인생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너써클인 WASP과 권력의 본질을 깊이 해부해 들어가는 분석적이고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도 한다.
피그만작전 실패의 염탐자를 색출해내지 않으면 자신이 첩자로 몰릴 위기에 처한 에드워드는 사진과 녹음테이프를 분석하면서, 누가 자신을 음해하는지 탐색하면서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하여 CIA와 20여년에 걸친 인연 속에서 그의 직업생활과 사생활의 편린들이 가라앉았던 앙금을 휘저은 것처럼 서서히 떠오르게 된다.
어린시절 겪은 (군대에서 고위직이었던) 아버지 자살의 목격, 예일대 시절 시인을 꿈꾸던 문학도가 비밀스런 엘리트 이너써클 해골단에 가입하면서 (CIA전신인) OSS요원으로 발탁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 와중에 그는 사랑했던 청각장애인 로라의 사랑을 저버리고 해골단 친구의 여동생 마가렛(안젤리나 졸리)을 임신시킨 죄로 결혼한다. 책임지기 위해 사랑없는 결혼을 감행한 에드워드는 더욱 첩보일에 몰두하고, 그의 냉철하고 충직한 임무수행은 그를 CIA내 핵심요원으로 만들어준다.
예일대 학생시절, 시를 지도하던 나치와 CIA이중첩자인 게이 노교수와의 관계 변화, 미로노프라는 KGB첩보원의 위장을 밝혀내는 황당하고 치밀한 과정, 미친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뭉친 아들이 전철을 밟아 CIA요원이 되는 사연,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배신, 그리하여 아들조차 믿을 수 없는 냉혹한 첩보원의 세계가 가슴 저리게 벌어지건만 에드워드는 그것조차 표현할 감성을 거세당한 인간처럼 보인다.
이런 냉혹한 드라마 속에서 미국의 본체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요소들이 툭특 던져져 폐부를 찌른다. 이를테면,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자부심을 표현하면서 에드워드는 “이탈리아인에겐 가족과 신앙이, 아일랜드인에겐 조국이, 유태인에겐 전통이, 흑인에겐 음악이 있다면, 우리(WASP/CIA)에겐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있다. 나머지는 방문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 들어가지 않은 (그럼 방문자에 불과한?) 재미교포는 ‘자녀교육과 부자되기’로 요약될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말이다. 특히 이민자들로 구성된 다인종 다문화국가임을 자랑스럽게 표방하는 미국의 이너써클에 속한 신중한 인물이 흘린 말치고는. 이 대사를 명대사로 꼽은 드니로 자신은 할리우드의 대표배우로 출세한 백인이어도 WASP에 끼기엔 원천적으로 자격미달인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약자적 시각을 인정한데서 나온 진단이리라. 그런 문맥에서 이 작품은 겉으론 열려 있는 것 같아도 정작 속으론 꽉 닫힌 미국 내부를 고발하는 냉소적 비판이 담긴 좌파적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생활을 헌납하면서 국익봉사에 올인한 CIA핵심요원의 좌절과 내파상태는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동독 슈타지 첩보원을 그려낸 <타인의 삶>이나 국익을 위해 각하에게 여자를 대주는 일에 낙망하는 한국 첩보원들이 등장하는 <그때 그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남다른 미덕은 다큐적 사실성을 담보한 강렬한 리얼리티로 냉전시대 미국의 첩보활동에 대한 영양가 있는 정보를 드라마라는 양식을 통해 세세하고 흥미롭게 제공해 주는 참고자료의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미로노프사건은 한때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KGB첩보원 유리 노센코 스캔들을 연상시킨다).
두꺼운 안경테 속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시선, 감정이 절제된 단호한 표정, 완벽한 다림질 효과가 드러날 정도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빛나는 흰 셔츠의 깃과 가장자리, 어떤 앵글에서건 정제된 태도를 보여주는 고수 첩보원의 장점을 모두 갖춘 에드워드를 맷 데이먼은 정제된 물오른 연기로 흘륭하게 소화해낸다. 이걸 보노라면 드니로는 맷 데이먼이야말로 그의 대를 잇는 연기자로 점찍어둔 듯하다. 해골단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너써클의 맹주인 필립역을 맡은 윌리엄 허트도 느끼한 카리스마 캐릭터에 걸맞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광이라면 곧 알아볼 여러 명배우들(조 페시, 존 터투로등)을 느닷없이 대면하는 즐거움도 크다. 반면 에드워드의 (사랑받지 못해 불행한) 아내 마가렛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는 결혼 전 도발적 매력을 발산하는 몇 장면 외에는 무력한 캐릭터 자체가 되어 스타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안젤리나 졸리 맞아?, 라는 의문).
그 가운데 특히 빛나는 것은 로버트 리차드슨의 촬영인데, 유난스럽게 튀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깊이와 배경을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나는 시각적 조화로 찍어나가는 정제된 장면들은 이젠 사라진 왕년의 웰메이드 할리우드 클래식과 중후한 필름 누아르가 풍기던 비장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07/04/25 유지나
첫댓글 '시민과 변호사'웹진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