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봉이 작품만 대했던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 조원의 시 2편을 소개한다. 공교롭게도 이옥봉과
연관된 것이어서 흥미롭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형암(炯庵)의
<청비록(淸脾錄)>에 「운강(雲江)과 그의 소실(小室)」이라는 글에 있는 시이다.
庭院微風燕影低 정원의 실바람에 제비 나직이 날고
梨花芳隖隖鳥啼 배꽃 핀 풀밭 언덕엔 새들이 지저귀네.
墻頭落日宜春晩 담 모퉁이에 지는 해는 이미 늦은 봄이라
撩亂飄紅杏苑西 행원 서쪽에 붉은 꽃 요란히도 나부끼네.
- 별원즉사(別院卽事)
江上誰家碧玉欄 강가의 어느 집 벽옥 난간에 기대선
美人春恨鎖眉端 봄 생각에 젖은 미인 눈썹에 시름이 겨워
低頭欲共仙郞語 머리 숙여 선골(仙骨) 낭군과 속삭이려는데
無賴輕舟下急湍 가벼운 배는 무정하게 여울을 떠나가네.
- 강행(江行)
이덕무의 청비록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시를 버리고 사랑을 얻은, 다시 시로서 사랑을 잃은, 기구한 처지의
여류시인 이옥봉만은 기억하고 있다. 얻은 사랑을 지켜가기 위하여 한참 완숙한 시령(詩齡)에
시작(詩作)을 중단하여 허난설헌이나 황진이처럼 많은 시를 남기지 못한 게 후학으로 지극히
한스럽다.
이옥봉의 죽음은 정학히 밝혀진 바가 없다. 1595년 52세로 사망한 조원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인근 야산에 있으나, 그의 비문에는 이옥봉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선 여류시인들 가운데, 허난설헌과 함께 이름을 올린 명대(明代)의 시인선집인 <열조시집(列朝詩集)>
(청나라에서 간행)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나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의
<일사유사(逸士遺事)>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나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원의 고손 조정만 (趙正萬)이 남긴 <이옥봉행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비록 (집안에서) 쫓겨났어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단속해서 전란(戰亂) 속의 어려운 시절에
정절을 잘 보전하였다. 해서 마침내는 천하 사람들이 (그녀를)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그 삶은 불행
하였으나, 그 죽음은 불후(不朽)하였다.” 라고 적어놓았다.
또 조정만은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 1704年刊>를 편집할 때, 그 부록으로 이옥봉 시 32수를
실으면서 글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기도 하였다. “이 씨는 종실의 후예로 운강공의 소실이며, 옥봉은 그의
호(號)다. 작품 32편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죽어 묻힘에는 전(傳)함이 없다. 이에 책의 끝에 올린다.
(李氏宗室後裔而雲江公小室, 玉峰其 號也, 所有作三十二篇, 惜其埋沒無事, 玆附于卷末滋.)”
또 한치윤(韓致奫 1765-1814) ˙ 한진서(韓鎭書)가 엮어낸 <해동역사(海東繹史> 「인물고(人物考) 명원(名媛)」
란에 “이숙원(李淑媛)은 자호가 옥봉주인(玉峰主人)이며, 조선의 학사 조원의 첩으로 임진왜란 때 죽었다.
이숙원은 종실(宗室)의 후예다. 이옥봉의 생부는 왕족의 후예로 옥천군수였던 이봉(李峰)이다.” 라는 기록과
제갈원성(諸葛元聲)의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에 “임진왜란 때 많은 여인이 사절하였는데, 승지 조원의
첩인 이 씨 역시 이때에 죽었다. 그녀는 시문을 잘 짓고 아름다웠으나, 아들이 없었다. 자호를 옥봉주인이라
하고 허경번(허난설헌)과 한묵(翰墨)을 주고받으며 아주 친하게 지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옥봉의 문명을 드높인 것은 사후에 대한 그의 극적인 후일담 때문이다. 명나라 동해해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시신과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는 시의 원고에 대한 일이다. 조선시대 백과사전 격인 김수광
(李晬光 1563-1628)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으로도 전해지는 그의 사후의 일화는, 그의 시
「자탄 또는 몽혼」과 함께 애절한 이미지를 더욱 더 상승시켜 사람의 감성의 샘을 유감없이 자극한다.
그러나 성급하게 얘기해서 많은 이의 관심사인 조희일(趙希逸)의 명나라 사신 길에 대하여 그의 행방을
끈질기게 추적한 혹자는 그가 명나라에 갔던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있다.
김수광의 지봉유설
그 이야기를 대충 추려보면 이렇다.
- 조선 인조 때 일.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다. 그
대신이 조원을 아느냐 물었다. 깜짝 놀란 희일이 제 아비임을 밝히자 그 대신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옥봉 시집>이었다. 그녀의 생사를 모른 채 40여년이 흘렀기에 다시 한 번
놀란 희일이 그 연유를 되묻자, 그 대신은 차근히 입을 열었다.
“한 40년 전 일이오.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돈다는 얘기가 포구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포구 이리저리로 떠돈다는 것이었소.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의 시체였다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 종이에는 빽빽하게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지요. 시를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버리기 아까워
손수 거둬 이리 책으로 엮었소이다.“
이옥봉의 시는 중국에서 간행된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작품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들 시집에 허난설헌과 같이 수록된 것은 그녀의 시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난설헌의 경우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許筠)은 누이의 일부 시를 수습해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묶었는데,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이를 중국에서 출간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는 게 지금까지 통설이다.
그런데 이옥봉의 경우 1606년 황태자손의 탄생을 알리려 주지번(朱之蕃)일행이 국경을 넘어 의주에서
한양에 도착하기까지 각 곳의 경관지마다 들러 연회를 베풀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을 맞으려 나간
조선의 관리들과 시문(詩文)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창화(唱華)한 시들을 기록에 남겼는데, 이것이
<황화집(皇華集)>으로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자료다.
이때 중국사신을 맞으려 유근(1549-1627)을 모시고 종사관으로 나간 사람이 허균과 조희일이다. 물론
그 자리가 명문장가 시와 문장을 겨루는 자리라 당대 문사(文士)들만 뽑혔던 것이다. <열조시집
(列朝詩集)>에 이달(李達)의 시 36수, 이옥봉 11수, 허균 10수, 허봉(1551-1588) 시 4수 등이 실려 있다.
이를 보아 허균이 이옥봉의 시를 전해주었거나, 아니면 사신의 종사관으로 함께 참석한 조희일이 자신의
부친 조원의 소실 이옥봉의 시를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소개하여 명나라 여류들의 시집에 싣게 된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참고로 조원 일가와 관련이 있는 마을의 명칭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유린당하고 임금마저
피난길에 오르자, 조원도 가정을 떠나 전란의 바쁜 일로 매달려 있었을 때다. 조원의 본실(本室) 처는 세
아들과 더불어 철원으로 피난을 갔는데, 왜적에게 쫓겨 잡힐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때 둘째 아들 조희철(趙希哲)이 나서며 “제가 나가서 막을 테니, 형님은 그 틈에 어머님을 모시고 떠나시오!”
외친 다음 왜적을 막아 싸우다 칼에 맞아 죽자, 큰 아들 희정(希正)이 나섰지만, 그 역시 그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틈에 셋째 아들 희일(希逸)이 어머니를 업고서 샛길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유지하였다.
전란이 끝나고 한양이 회복되자 이러한 소식에 접한 선조 임금은 쌍홍문(雙紅門)의 정려를 이들 형제가
살던 마을에 새우도록 하였다. 그곳이 바로 오늘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이고, 동명(洞名)의 유래가 되었다.
김지용 편 역대여류한시문선
다른 한편 이옥봉에게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만이 <가림세고>의
부록으로 전할 뿐이다. 그의 시편들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참고자료로 김지용(金智勇 ) 편 <역대여류한시문선(歷代女流漢詩文選)> 대양서적(大洋書籍) 을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계속]
첫댓글 옥봉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옥봉의 기구한 피내림의 운명이 참으로 슬프군요.
한시로는 허난설헌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이 맞습니다.
이옥봉의 시에 대한 능력은 그런 평가가 합당할 것입니다.
괴산현감인 조원도 참 대단한 남자였지 않았나 싶네요
이도령이 춘향이를 어찌 마다했으랴
어찌 조원이 옥봉이를 마다했는지 그 체면 위신이 무엇길래
옥봉이를 그리 돌려보냈는지 인정머리라곤 손꼽만치도 없는 무정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