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성주지방에서 대대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사회적 모순과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이 늘어나고 신분 상승에 따른 사회 변동 욕구도 고조되어 있었다. 또한 1862년 2월 인근 경남지방의 단성,진주에서 시작된 농민운동이 충청도,전라도 등 70여개 고을로 번져 이의 영향도 커지고 있었다.
또한 성주지방에서는 1950년 두해에 걸쳐 심각한 흉년이 들고 누적된 부세까지 부담하게 되니 농민의 생활도 피박한 때였다.
1차 농민항쟁은 임술년 1862년 3월 24일 초전면 대메장터에서 시작되었다. 대메장날을이용하여 봉기 계획을 세우고 이틀 후 26일 성주읍내에서 수만명이 운집한 대규모 민중 봉기를 일으키고 착취의 중심에 서 있던 李校家와 서원배들의 가옥 32가를 파괴하고 30여채를 불살르는 등 재물을 탈취하였다.
이에 감영에서는 폐정을 개혁하기로 약속하자 그 날로 항쟁을 종식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소농민층의 군역과 환곡,지세등 구조적 개혁을 미루고 급한 불을 끄는데 급급하였기 때문에 보름 뒤 4월 12일 인근 벽진면 명암장터에서 다시 일어났다.
2차 농민항쟁은 1차 항쟁때 개혁하겠다던 약속을 뒤로 미룬 배신감에 분노한 농민은 아전과 향리는 물론 지주들을 공격하고 약 1개월 동안 군현을 지배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 선무사가 파견되어 군포와 환곡,지세를 감해주기로 약속하고 또 이방은 효수에 처하는 등 7명을 유배시키며 농민운동 주모자는 선처하는 등 조건으로 사건이 종결 처리되었다.
그리고 이 후 농민들이 직접 뽑은 서리를 임명 李得石이란 사람이 이방으로 역임하였다.
그 후 20년 가까이 고을 이 조용하였으나 다시 사족들이 다시 향청의 추천에 의해 자신들의 사람으로 이방을 임명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사작하자 1883년 6월 12일 또다시 계미항쟁이 일어났다.
성주읍에서 10리 떨어진 선남면에서 대규모 궁중집회를 가진 후 백천을 따라 성주 관아를 공격하고 목사를 축출하고 관아를 점거하였다. 이에 대구 감영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농민군을 제압하고 주동자
최병굉과 정중집을 효수에 처하고 63명을 처벌하여 난을 진압하였다.나머지는 낙동강에 투신하고 도망쳐 살아 남았다.
불과 150여년 전에 대구 인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작청지(作廳址) 성주목 6방 가운데 吏房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주로 대민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사실상 민간 착취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은 우체국 건물이있다.
(성주목 관아가 있던 곳- -지금은 성주군청 건물이 되었다.)
(성산관의 모습--성주목사가 집무하던곳으로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효종때목사 최계훈이 군청자리로 옮기고 1994년 지금의 군청사 건축으로
지금의 자리인 군청 바로 뒤 언덕으로 이전하였다.)
(1662년 1차 임술항쟁이 일어난 초전면 대메장터. 장터자리에 국밥집 간판이 보인다.)
(벽진면 사무소의 모습 뒷쪽이 장터이다)
2차 농민항쟁이 일어난 벽진면 해평동 명암장터 지금은주차장이 되어있다.)
독산-요도터( 獨山-蓼島)-이곳은 연못이 있던 가장자리 언덕을 말하며 조선시대
성주에 유배된 인물이 주로 머물던 곳이다)
성주여씨 향약을 처음 실시한 圓亭 여희림의 기념비 - 성주
고을은 향약이 있어 농민항쟁때 농민이 결속력과 긴밀한 연락을
하여 대규모 군중집회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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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