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교환기의 역사에 대해서
전화가 실용화되어 보급된 이듬해 보스턴 시에서 전화교환 업무가 개시됨으로써 전화의 실용화에 교환이 필수적인 기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교환기란 다수의 전화기에서 상호접속을 원하는 전화기 간 회선을 설정해 접속하도록 해주는 장치다. 전화는 회선교환방식으로 소리를 전달해 왔으며, 통화를 위해서는 송신자 및 수신자간 하나의 회선이 필요하다. 따라서 n명을 연결하는 전화선은 nC2개(n×(n-1) ÷ 2)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100만 명을 연결할 전화선 수는 약 5천억 회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100만 명의 중심에 교환기를 설치하면, 100만 명과 교환기를 연결하는 100만 회선이 필요할 뿐이다.
1. 교환기의 종류
1) 스위치보드

전화가 발명된 다음해인 1877년 전화교환기를 발명한 티바다르 푸스카스(Tivadar Puskás, 1844~1893)
전기적 스위치는 1858년에 이미 전신회선 교환이나 도난경보시스템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교환기는 전화가 발명된 다음해인 1877년 미국의 보스턴에서 처음으로 실용화되었는데, 헝가리 기술자인 티바다르 푸스카스(Tivadar Puskás)가 만들었다.
1878년 1월에는 조지 코이(George W. Coy)가 상업적 교환기를 만들었는데, 이는 2개의 동시 통화만을 허용하는 빈약한 것이었다. 같은 해 찰스 글라이던(Charles Glidden)이 50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2) 패널 교환기와 로터리 교환기
시일이 흘러 보다 많은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는 패널 교환기가 개발되었다. 최초의 패널 교환기가 설치된 것은 1915년 뉴저지의 뉴아크(Newark)였는데, 다이얼 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반자동 교환시스템이었다. 패널 교환기(panel switch)는 자동 교환기의 초기모델로 벨시스템이 1920년부터 설치해 1970년대까지 활용한 교환기술이다. 패널 교환기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유럽에서는 원형 형태의 로터리 교환기(rotary switch)가 사용되었다.
3) 스트로저 교환기
1891년 3월 10일 미국의 알몬 브라운 스트로저(Almon Brown Strowger)가 스텝핑 교환기(stepping switch)로 발명특허를 얻고 이를 개량해 1892년에 상용화했다. 이는 전화가 비약적으로 보급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단계(step by step) 방식의 스트로저 자동 교환기(Strowger switch)는 구조상 접점수가 제한되어 있어 대용량 교환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4) 크로스바 교환기
1915년 웨스턴 일렉트릭이 벨회사를 위해 코디네이터 셀렉터(coordinate seletor)로 불리는 크로스바 교환기(crossbar exchange)를 개발했지만, 비용절감을 위해 스텝핑 교환의 원리에 입각해 설계된 것으로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스웨덴 정부조직인 텔레베르켓(Televerket)은 1919년에 스트로저 교환기의 결점을 보완한 새로운 형태의 크로스바 자동교환기인 A204를 개발해 1926년에 상용 도입했으며, 1945년에는 용량이 확대된 개선된 모델이 도입되어 디지털 교환기로 교체되는 1980년대까지 활용되었다.
벨전화연구소가 개발한 AT&T사의 1XB 크로스바 교환기는 1938년에 이용되어 1950년대까지 수백만 회선용량이 설치되었다. 1950년 스웨덴 회사 에릭슨(Ericcson)도 A104와 1XB모델을 만들었었는데, 1960년에 이르러 회전형 500교환시스템의 매출을 넘어섰다. 영국의 플렛세이(Plessey)사는 1964년 이해 TXK라는 크로스바 교환기 시리즈를 개발해 설치, 운영했다. 이러한 크로스바 교환기들은 전기 및 전자부품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보다 정밀하고안정적이며 추가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다.
5) 디지털 교환기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환기는 전자기계식 교환기를 벗어나 디지털 교환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사용자 간 2인 이상 동시접속이 가능하고, 신호시스템 7(signaling system 7)을 지원하는 등 정보통신 및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해졌다. 그러한 교환기들로 ITT의 시스템 12(System 12), 노르텔(Nortel)의 DMS-100, 루슨트(Lucent)의 5ESS, 지멘스(Siemens)의 EWSD, 에릭슨의 AXE 등의 전화교환기들이 개발되어 설치 운영되었다.
2. 교환기 발달의 의미
교환기의 기술발전에 따라 꽤 오랫동안 전화교환을 위해 활약해 왔던 교환원이 사라지게 되었다. 전화 특허를 받은 벨이 1877년 설립한 벨 전화회사는 고속성장을 거듭해 AT&T라는 공룡기업으로 성장했다. AT&T는 미국에서 여성을 고용한 최초 기업 중 하나였다. 고용인력의 대부분은 바로 여자 전화교환원이었다. 1878년 벨 전화회사는 처음 고용했던 호기심 많고 장난 많은 소년들이 말썽을 부리는 것을 이유로 모두 해고하고, 전화교환원을 여자로 대체했다.
전화 기술이 선망의 대상이었고, 가입자가 소규모였던 시절의 교환원과 지역 가입자들의 관계는 단순히 전화를 연결하는 것 이상의 사적인 친분과 유대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일부 노령 가입자들은 상대와 통화하기보다는 교환원 여성에게서 다양한 지역정보를 듣거나 심리적 위안을 얻는 등 개인 서비스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자동교환기의 도입으로 이러한 부가 효과들이 사라지고, 첨단 교환기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환기의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전화교환을 위해 교환원이 있어야 했다. 사진은 전화 교환원의 모습
3. 우리나라 교환기의 변천과정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 대한제국의 궁내부용 전화가 개설되면서 도입된 스웨덴 엘엠·에릭슨(LM Ericsson)사의 자석식 단식교환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교환기는 회선을 손으로 접속하는 회선 교환방식에 의한 자석발전기를 사용하는 수동식으로 100회선 용량이었다.
1902년 3월 서울-인천 간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고, 이어 한성전화소(1902. 6. 6)와 인천전화소(1903. 2. 17)에서 시내 교환업무가 개시되었는데, 이때 10회선과 50회선 용량의 교환기가 사용되었다. 1908년 경성우편국(지금의 서울중앙우체국)의 자석식 단식 교환기의 수용용량 한계에 이르게 되어 도입한 교환기는 회선 교환방식의 수동식이기는 했으나 공전식이었다.
1935년 3월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나진우편국에 자동교환기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경성중앙전화국에 역시 자동교환기가 설치되면서 우리나라도 비로소 자동교환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 나진에 설치된 교환기는 서독 지멘스의 스트로저 F형이었고, 경성중앙전화국은 일본 NEC의 스트로저 A형이었다. 그 뒤로 반도 북쪽에는 지멘스 식이, 남쪽에는 NEC 식이 설치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1960년 8월 용산전화국에 EMD 교환기가 설치되어 주로 도시지역에서 사용되었는데, 1960년대 이후 교환기의 기준이 되었다.
1976년 9월 설치된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에서는 전자교환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결정에 의해 1979년 12월 영동전화국과 당산전화국에 M10CN 전자교환기가 설치되면서 우리나라도 시대적 요청인 전자교환 방식이 도입되었다. 우리나라에는 M10CN(벨기에 BTM 반전자), NO. 1A(미국 AT&T 반전자), NO. 4(미국 AT&T 전전자), AXE-10(스웨덴 에릭슨 전전자) 등의 여러 기종이 도입되어 설치, 운용되고 있었다.
4. 국내 전화교환기의 개발
1957년 자석식 교환기가 개발된 것을 시작으로, 공전식 교환기의 개발에 앞서 1959년에는 스트로저 자동교환기의 부품제조에 성공하고, 1962년 12월에는 서울중앙전화국에 300회선 용량의 스트로저 자동교환기가 국내 기술에 의해 설치되었다. 또한 1960년에 국내 교환기의 표준으로 삼은 독일 지멘스의 EMD 교환기의 기술을 일부 국산화해 1964년에는 국내 제조한 EMD 교환기가 생산·공급되기 시작했으며, 1968년에는 EMD 사설교환기가 처음으로 해외로 수출되었다. 이와 함께 1964년에는 체신 1·2호(미국의 Stromberg Carlson형), 체신 3·4호(일본의 NEC형) 등의 공전식 전화기가 국내에서 개발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극심해진 전화 적체를 해소하고 국내산업의 보호를 위해 당시 도입이 거론되고 있던 시분할 전전자교환기의 국내 개발이 논의되었다. 파급효과가 막대한 시분할 교환기의 국내 개발은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 주관으로 당시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 이하 ETRI)가 준비해 왔는데, 이를 토대로 한국형 시분할 전자교환기(Time Division Exchange : 이하 TDX)의 개발에 관련업체·전기통신사업자 및 정부부처가 함께 협력했다.
ETRI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2차에 걸친 시험기 개발과정을 거쳐, 그 성과를 근거로 정부는 1981년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중점 연구과제로 TDX개발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관련업체들과 함께 1981년에서 1982년 사이에 3차 시험기를 개발해 다음해 인증시험을 거쳤다. 1984년에 이르러 9600회선 용량의 TDX-1 실용시험 모델을 개발, 서대전·유성전화국을 대상으로 한 실용시험 모델을 운영했는데, 1차 및 2차에 걸친 인증시험, 상용시험기 규정 제정을 했으며, 1984년 4월 25일 시범인증기를 개통하고 1986년 3월 14일 상용화했다.
1987년에는 ISDN기능이 부가된 대용량 전전자교환기 TDX-10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교환기의 상위구조 설계를 완료하고 1·2차 시험모델 교환기를 구성해 하드웨어의 종합적 기능시험을 거쳐 상용화했다. TDX-10은 국내에서 개발한 대형 디지털 전자교환기로 약 10만 회선 용량에 이르는 것으로 1990년 이후 공중전화 교환망의 시내 가입자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TDX-100 교환기는 1995년에 개발에 착수해 일반전화 20만, PCS전화 50만, 시간 당 호처리능력 350만에 이르는 교환능력을 갖춘 것이었다. 1999년 1월에 시범운영한 후, 10월에 상용서비스를 위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는 대도시형 교환기다.
5. TDX 교환기 개발의 의의
외국에 의존해 오던 교환설비를 국내 독자 기술로 설계, 제작, 생산된 교환기로 구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수출도 가능해졌을 정도로 우리나라 교환기 기술이 발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TDX-1 교환기의 연구개발 능력과 생산제조 능력이 확인되면서 외국 교환기 가격과 기술이전 조건 등이 과거에 비해 훨씬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국가의 기술경쟁력이 갖는 이점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체신부(1985). 『한국전기통신 100년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전화교환기 (통신 역사, 2012, 커뮤니케이션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