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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 꿈과 놀이를 뺏는 학벌주의 교육
교육평론 원고
안재오
1. 지나친 학습 부담으로 인한 꿈의 상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대부분 꿈이 없다. 학생들은 거의 그렇다. 아이들에게 “네 꿈이 뭐냐?” 라고 물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 그 질문에 대해 대부분 “모른다” 라고 대답다. 필자는 전에는 이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꼭 꿈이 있어야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다시 생각하니 이게 한국의 근본문제라는 것을 깨닫았다. 꿈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고 그 꿈은 주로 아이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학생들은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라는 말도 듣는다. 이는 너무 소박한 꿈이다. 이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근래 필자가 다시 한국 아이들의 꿈이 없음을 문제 삼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꿈 또는 기이한 생각과 기이한 행동 혹은 상상력 등이 성인의 창의력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겨우 16세 때 ”빛에 올라타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상상해 보았다“ 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결국 이 상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고등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면 모두 ”야 임마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해“ 라고 핀잔 들을 확률 100%이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쓸데없는 아인슈타인의 이 황당한 질문이 현대 물리학의 혁명을 가져온 바로 그 질문이다.
우리는 여유없이 주입식으로 온갖 지식을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듯이 학생들에게 퍼 먹이기 바쁘다. 그러나 위대한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leisure)가 학문 탐구의 객관적인 조건임을 밝혔다. 참고로 학문 탐구의 주관적인 조건은 호기심이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호기심이 무참히 짓밟힌다.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 질문도 제대로 못한다. 누가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다른 학생들은 “진도 나갑시다” 라고 하든지 “ 야, 그게 시험에 나와?”라고 하며 질문자에게 핀잔을 준다.
그러나 학교 즉 영어로 school 이라는 말이 고대 그리스어의 한가함 즉 schole에서 온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현재 한국의 긴장되고 바쁜 한국의 학교 생활은 문제가 있다.
벼락치기로 공부한 학습은 오래 남아 있지 않다. 즉 여유를 가지고 배운 지식만이 살이 되고 피가 된다.
고도의 성적 경쟁의 압박하에서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공부한 지식은 결코 머리에 남아 있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에디슨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하고 기발한 호기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려고 했다는 일화 이외에도 숱한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에디슨이 곡물 창고에 들어가 그 구조를 유심히 관찰하던 중에 스위치를 잘못 눌러 곡물에 깔려 죽을 뻔했다고 한다. 어린 에디슨이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는 알약을 만들어 친구에게 먹게 했으나 그 친구가 하늘을 날기는커녕 며칠 동안 배가 아파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상상력과 호기심 그리고 이상한 행동 등이 인류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에디슨 한 사람이 가져온 부와 복지의 위대함을 고려하면 한 사람의 상상력과 꿈이 얼마나 소중하지 모른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이런 것들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고 무가치하게 치부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공부 혹은 학벌주의적 의미의 공부란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른다.
어린이, 학생들의 상상의 나래를 공부라는 폭군이 짓밟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한시 바삐 아이들에게 “놀지말고 공부하라” 는 말하기를 중단해야 한다. 필자가 독일에서 경험한 것은 실컷 놀아라 라고 해도 공부할 아이는 한다는 것이다. 김나지움에 다니던 어떤 한국 교포 여학생은 누가 공부하라고 강압하지도 않는데도 교과서를 껴안고 잘 장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경상도 말투로 “씰데없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뭐하노” 라는 말이 있는데 어른들 눈에는 쓸데 없어 보이는 아이들의 행위나 말이 실은 쓸데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정반대이다.
물론 너무 지나친 장난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언행 등은 바로 잡아야 하지만 아이들의 탐구열이나 호기심 혹은 상상력 등은 억압하면 안 되고 이를 좋은 방향으로 지도해 주어야 한다. 특히 친구들끼리 하는 놀이나 게임은 극히 장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뒤에 나온다.
2. 폭력과 체벌에 대해
폭력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창고에 보관된 좀 오래된 의자와 책상을 친구와 몰래 꺼내어 그것들을 던져서 부수다가 수위 아저씨에게 걸려 혼난 적이 있었다. 그 외팔이 수위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한 말을 “이 파괴주의자들아!” 였다.
그때 의자를 부순 것은 분명 잘못이나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집수리 일을 하다가 필자는 대형 거울을 깨트려야 했다. 여기서 파괴 역시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어릴 때 아이가 파괴를 할 때도 너무 혼내지만 말고 인간의 파괴의 충동을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게 좋다. 가령 장작을 파괴한다든지 아니면 종이박스나 기타 쓰레기를 파괴하는 일에 아이들의 관심을 돌리면 좋다.
우리는 파괴 혹은 폭력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현실에서 파괴와 폭력이 꼭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령 폐차를 부수거나 폐기물을 파괴하는 경우의 파괴는 삶에 꼭 필요한 파괴이다. 파괴없이 건설이 없다.
몇 년전 필자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어떤 애가 신문지에 불을 붙여 장난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떤 아주머니가 보고 이를 말렸다.
큰일 날뻔 했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없는 가정에서 아빠도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집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아이는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소위 “일진”이 되었다. 그 때 필자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즉 “대균아 너의 파괴적인 충동도 그게 제대로 사용만 되면 좋은 것인데 나쁘게 사용되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또 그의 폭력적인 기질도 그것이 군대같은 곳에서 사용되면 용맹하고 잔인한 습성이나 호전적인 능력은 도리어 상(償)받을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의 부정적인 행동도 알고보면 유용한 측면이 있다. 가령 주의력 산만 같은 것도 실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보기 때문에 일어난다.
한번에 한 가지만 보면 결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볼 필요가 생기면 어린 시절 주의력 산만한 애들이 도리어 더 잘 할 수 있다. 가령 전투중인 경우 병사는 주변의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인지해야 한다.
학교폭력의 문제 역시 이런 방향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인간의 폭력성 그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 사용에 따라서 폭력은 선(善)이 되기도 하고 악(惡)이 되기도 한다.
체벌
교사들의 징계 수단으로서의 체벌이나 매(폭력) 도 마찬가지이다.
교사의 폭력 혹은 매질 등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규정되는데 이 역시 잘못이다. 징계는 필요하고 그 수단이 문제인데 정학이나 퇴학보다는 폭력이 낫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라는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이 대세를 이루는데 여기에 좀 문제가 있다. 때리는 것도 규제만 잘 하면 아주 효과적인 훈육의 수단이 된다. 특히 똑똑한 애들은 신체의 고통을 아주 민감하게 기억하고 따라서 잘못이 여러번 반복할 때 때리는 것은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성경에는 “채찍으로 애를 가르치라” 는 구절이 있다. 잠언은 체벌을 금하지 말라 라고 가르친다
요즘 학교에서 문제인 주의력 결핍증(ADHD) 같은 것도 꼭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학습진도이다. 다들 빨리 배우고 시험쳐야 하는 분위기 내에서는 한 학생의 주의력 결핍증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 학습 지진아나 수업 부적응자가 나온다. 이런 것은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성적 경쟁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 성적 경쟁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가령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무학년 제도를 실시하여 아무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고 수우미양가 등으로 평가될 필요가 없는 시스템을 운영중이다.
3. 장난과 놀이의 교육적 의미
한국의 폭력적인 교육 실태
조선시대 아니 고려시대부터 “공부”, “공부” 하다보니 한국의 학교나 가정은 애들이 공부하지 않고 노는 것을 보지 못한다. 먼 옛날부터 이 땅에는 “공부하지 않고 논다는 것은 잘못이다” 라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부모와 자녀들의 가장 큰 갈등이 “자녀가 공부하지 않고 논다”는 것이다. 그런 전통은 해방이후 더욱 공고하게 되어 애를 잡는 부모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부모의 성적 욕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초등생 '學院스트레스' 자살
"학교끝나면 학원 또 학원...어린이인 내가 왜..."천안 5학년생 "자유롭고 싶다" 日記"난 죽을것" 친구와 채팅후 목숨끊어
맞벌이 부부의 아들인 초등학교 5학년생이 같은 반 여자친구와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자살을 예고한 뒤, 열흘이 지나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어린이의 일기장에는 “내가 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어른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2002년 11월 11일 인터넷 조선에서)
또는 정반대로 심지어는 공부 때문에 엄마를 죽이기도 한다.
2년 전인가 이 곳 서울시 광진구에서는 어떤 고등학생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전교 1등을 강요한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10대가 법정에서 '어머니가 그립다'고 최후진술했다.
21일 서울고법 형사10부(조경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A(19)군은 “예전에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악몽 같은 날들은 흐려지고 좋은 추억만 남았다”며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A군의 변호인은 “성적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으로 학대와 체벌에 시달리면서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은 게 범행에 이르게 됐다”고 주장했다.
A군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지난해 좋은 성적을 강요하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8개월 동안 시신을 안방에 둔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노컷 뉴스 2012-08-22)
어머니로부터 성적이 나쁘다고 구타를 당한 학생. 학교 관계 자에 따르면 어머니는 학교에서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쉴 새 없이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아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부모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 그는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를 살해한 후 8개월동안 시신을 방치했다.
필자는 우연히 서울 동부 지방법원에서 그 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자녀에게 성적 이야기, 공부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어머니를 죽였겠는가? 사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학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놀이의 중요성
그러나 공부의 반대 개념 즉 논다 혹은 놀이 또는 장난 등의 중요성은 점점 크게 부각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논다” 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좋지 않은 행동” 이지만 서양에서는 반대로 이 “논다” 혹은 “놀이” 개념이 그렇게 중요하다.
우리 민족도 원래는 잘 놀고 즐기는 민족성이 있었지만 고려 시대 과거 제도가 도입된 이후 부터는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노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지고 오직 글읽고 책 보는 것에만 가치를 두었다.
조선시대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은 “시간이 없어 공부하지 않겠다는 자는 시간이 있어도 공부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영어 속담에 “일만하고 놀지 않는 것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의 “일”이란 아이의 일이니 여기서 일은 아마 공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속담은 특히 한국적인 학습 상황에서 많은 것을 의미한다. 공부만 많이 하고 놀줄 모르는 아이는 바보가 됩니다. 문자 그대로 그렇다. 어린 시절 학습 압박이 너무 큰 상태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사고력, 도덕성, 창의성이 모자란 사람이 되어 있다. 또 이런 것이 일반화된 사회 곧 학벌사회는 지도자들이 반드시 부패하게 된다. 조선 시대의 탐관오리들도 모두 이런 학벌주의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었다.
놀이의 문화적 의미
그러면 논다 혹은 놀이(play, game) 등이 가지는 의미를 문화적 의미를 한번 보겠다. 놀이의 깊은 의미를 밝힌 사람은 호이징하 라는 사람이다. 그는
20세기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철학자로서 호이징하 혹은 하위징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호이징하의 저서 “호모 루덴스”
Johan Huizinga 호이징하(1872-1945)
인간의 본질을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로 본 화란의 역사학자, 철학가
이 호이징하는 인간의 본질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보았다. 이를 호모 루덴스 라고 한다. 즉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놀이라는 것이다. 즉 호이징하에 의하면 놀이가 문화의 기초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실생활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놀이는 인간의 문화를 이루는 기초라고 한다.
놀이(play)는 문화보다 오래된 일이고 놀이에서 문화가 나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 문화를 이루는 것은 사회성인데 이 사회성이 놀이를 통해서 발전된다는 것이다. 물론 놀이의 본질은 재미(fun)이다.
인간은 재미를 위해서 놀이를 하는데 그 놀이의 본질이 자유와 규칙성이다.
그리고 호이징하가 보는 놀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놀이는 자유롭다, 놀이는 사실 자유 그 자체이다.
2. 놀이는 일상적이거나 실제 생활이 아니다.
3. 놀이는 그 위치성과 지속성에 있어서 일상 생활과 구별된다.
4. 놀이는 규칙을 창조한다. 놀이는 규칙을 절대적으로, 최고로 친다.
5. 놀이는 물질적인 이익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놀이로부터 어떤 이윤이 생길수는 없다.
여기서 보면 놀이 혹은 게임 같은 행사의 중요한 특징이 1. 자유롭고 2.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저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가 중요한데 자유로운 규칙성은 바로 인간의 도덕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덕성은 자율 개념을 말한다. 자율도 일종의 강제요 구속인데 스스로 하는 강제요 구속이라는 점에서 타율과는 다르다. 억지나 강압에 의한 구속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구속이요 속박이라는 점에서 자율적이다.
이게 바로 도덕과 윤리의 본질이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성은 놀이와 게임에서 성장하게 된다.
필자는 호이징하의 놀이-문화 사상과 조금 달리 놀이-도덕 사상을 좀 전개했다. 놀이와 게임은 이처럼 인간의 도덕성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니 어울려 놀지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키는 한국의 역사가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다. 조선 시대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타락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국왕마저도 매관 매직을 공공연히 자행했고 자기 배를 불리기 바빴다. 세종대왕은 휼륭한 왕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종모법) 많은 노비를 창조했다.
그러니 이명박과 박근혜 등이 그렇게 국정 농단을 하고 나라를 팔아 자기 배를 채우기 바빴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자율이 없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나라가 한국이다. 최근 대한 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갑질 논란을 보면 지도층의 타락과 부패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그 밖의 재벌 3새들의 갑질들을 열거하기도 힘들다. 거기다가 과잉보호가 겹쳐 조현아, 조현민 거기다가 어머니인 이명희의 갑질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이 민주국가인지 노예국가인지 의심이 든다.
한국은 이처럼 놀이없이 공부만 시킨 결과 과거가 그렇고 현재가 그렇다. 정의감이 없고 지도층의 부정 부패가 심한 것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에 유교가 있는데 이 종교(혹은 학문)는 예절과 도리를 그렇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종교는 인간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를 못했다. 그렇게 된 큰 이유가 과거제도 덕분이다.
도덕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공자. 맹자의 도덕론과 예절 등에 대해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이거나 예절 바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이 양자는 별개의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적인 자율성은 아는 것을 넘어서서 실제로 행함으로서 이루어 진다. 게임이나 놀이 등은 실제로 행함을 배우는 체험이 된다. 그러니 놀지도 못하게 하고 친구간의 유희도 못하게 막는 한국은 도덕성 향상이 힘들다.
유희와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산업 혁명을 일으킨 동기이다.
스티븐 존슨(Steven Johnson)이란 저술가가 최근(2014) 쓴 ‘원더랜드“ 어떻게 놀이가 근대 세계를 만들었나” 란 책에서 그는 놀이와 재미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를 밝히고 있다. 유희 본능, 역사를 바꾸다 라는 해설도 있다. 이는 위의 호이징하와 비슷한 생각을 보인다. 단 존슨은 좀 더 세부적인 예를 가지고 인간의 유희 본능이 문화와 산업을 유도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책에 담긴 단락을 그대로 인용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나 제도를 과연 누가 탄생시켰는지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를 해본다면? 거의 대부분, 여가와 유희가 그 잉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국민일보)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놀이 문화와 유행을 좇고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게 이 책의 골격이다. 여기에 보태지는 살점은 수많은 사례들. 놀이와 유행이 혁신을 이끌어 세상을 바꿔놓은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패션과 쇼핑이 가진 역사적 파워를 전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산업혁명의 도화선을 17세기 후반 영국 런던에 등장한 상점들에서 찾는다. 이들 상점의 정면은 큰 유리로 돼 있었다. 매장 안은 정교하게 장식된 거울과 조명 덕분에 ‘귀족 저택의 접견실’ 같았다.
이전까지 별다른 인테리어가 없던 상점들이 경이로운 세상, 즉 ‘원더랜드(Wonderland)’로 거듭난 것이다. 주인들은 상점 분위기에 걸맞은 면섬유 옥양목을 선보였고, 손님들은 옥양목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가격이 비싸고 내구성이 약해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한 면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면이 대대적인 인기를 끌자 발명가들은 면을 대량생산할 기계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방직기가 만들어지고 이런 현상은 증기기관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약컨대 즐거움을 좇는 인간 심리가 반영된 상점의 등장이 새로운 소비문화를 낳고 산업혁명까지 이끌어냈다는 내용이다.
이런 얼개는 산업혁명의 통념을 뒤집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산업화가 새로운 소비문화를 낳았다는 게 아니라 소비문화가 산업의 발전을 유도했다는 의미이다.
결론 : 놀지 못하고 꿈도 없는 한국의 상황은 창의성과 도덕성을 키우지 못한다. 호모 루덴스 즉 노는 인간이 문화를 창조하고 도덕성을 발휘하는 것을 인류는 증거한다. 이제 무조건 공부만 강요하는 학벌주의 교육은 지양(止揚)되어져야 하고 성장기의 아이들이 놀고 공부하는 것의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