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09 년에 일본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재로 쓰이던 '제국국방사론(帝國國防史論)'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책에서 임진왜란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위대함을 넬슨제독 이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장갑선)의 창시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아래에서 국내외의 수많은 학자와 연구가 한국의 대문호 박경리, 각국의 해군제독, 심지어 조선의 왕까지도 이순신 장군의 공적과 위대함을 말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이 부각되어 우상시된것이 충무공을 존경한 박통때 부터라는 등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불순한 자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런점을 이내원씨는
" 한국 사람들은 말뿐, 이순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를 일본사람들 보다도 미처 모르고 있다." 라고 꼬집어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1982년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이순신 얼마나 위대할까 ( http://www.yisunshinusa.com/images/pdf/yi5.pdf )
-그 인물평을 중심으로-
이 내 원
(2005년 7월)
이순신을 잘 알거나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 또는 이순신을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들의 이순신에 관한 인물평들을 모아보면 이순신의 위대성을 손쉽고 간편하게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1. 같은시대 사람들 또는 역사인물들의 고전적 이순신 평가
•유 성 룡 – 선조대왕때 좌의정, 영의정으로 두 명장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 어릴 때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3살 맏이 친구로 이순신의 정신적 지주이며 후원자였다.
『순신은 수근 한 선비와 같았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재주는 있으되 명이 없어 그 가진 재주의 백에 하나도 미처 펼치지 못했다』
•진 인 – 명나라의 수군도독으로 임진왜란의 해전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물리쳤다. 다섯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이순신에게 크게 감화되어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이순신을 극찬하여 명나라 수군도독의 벼슬과 함께 도독인, 참도, 곡나팔 등 8가지 상품(팔사품)을 하사 하게 했다. 선조임금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에게는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하늘과 해를 손 보아 무너지는 나라를 구한 공이 있다』
•최 유 해 – 인조대왕 때의 승지로 이순신의 일대기인 <행장>을 썼다.
『공은 엄하고 진중하여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며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어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하는 말이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서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 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뜬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나의 부끄러워 하는 바라” 하였다』
•이 식 – 이순신과 같은 덕수이씨이며 39살 아래로 인조대왕때 대제학, 대사헌, 판서를 지내고 이순신 전사 후 그 공적을 기리는 ‘시장’을 썼다.
『우리 역사상의 장수들로서 보통때에 조그만 적을 만나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날린 이는 많았지만 공과 같은 이는 나라가 고작 쇠약해지고 전쟁을 꺼려하는 때를 당하여 천하에 더 할 수 없이 강한 적을 만나서 크고 작은 수십 번 싸움에 모조리 다 이겨내어 서해를 가로막아 적들이 수륙으로 병진할 수 없도록 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근본을 삼은 것이니 저 한 때의 공을 세운 신하 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의 몸을 세우는 절개와 국란에 죽는 충성과 또 행군하고 용병하는 묘리며 복잡한 사무등을 처리하는 지혜는 이미 다 보고 아는 일이라 비록 옛날의 명장이나 어진 장수들로서 백년에 한 둘 밖에 나지 못하는 그런 인물로도 이 분을 넘어 설 이는 없을 것이다.』
2. 조선 임금들의 이순신 평가
•선조대왕 – 임진왜란을 직접당한 임금으로 이순신을 발탁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시기 질투하여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까지 하였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일등공신으로 뽑았건만 포상이 오히려 부족하다』
•숙종대왕 – 약 70년 뒤의 임금으로 현충사를 처음 짓고 그 제문에 쓰기를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마는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정조대왕 – 약 200년 뒤의 임금으로 이순신을 지극히 사모하여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케 하고 이순신 묘소에 역사상 유일한 임금의 신도비를 직접 짓고 써서 세웠다.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짖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3. 현대 저작가의 이순신 평가
•박 경 리 – 한국의 대문호. 소설<토지>의 작가.
『이순신은 개인의 욕심이나 영광을 위해 싸운게 아니라 백성의 편안한 삶이 침탈 당한데 대해 항거한 선비다. 그는 무장이 아니면 시인이나 학자가 됐을 것이다. 이순신은 우리시대가 도달할 인격의 전형이다』 2004년 8월
•이 형 석 - 1967년작 <임진전란사>저자. 예비역 장군
『어떠한 영웅걸사(英雄傑士)라 할지라도 연구하면 할수록 그의 위대성만이 더욱 부각되는 인물이란 그다지 흔하지 않은 법인데 그는 이렇게 흔하지 않은 영걸의 제일인자이며 그를 알게 되면 될수록 무궁무진한 청향(淸香)이 감도는 인물이다. 마치 성자(聖者)의 고풍(高風)을 지닌 무장이라고 추앙하는 것도 결코 과찬이 아닐 것이다』
•김 종 대 - 2002년작 <이순신 평전>저자. 법관. 이순신 민간 연구 숭모인.
『그는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고 백의 종군의 신세가 되어도 그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씀에는 도(道)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냥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뚜렷한 사생관으로 생사(生死)를 초월한 도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원망하고 화내는 마음들을 항복받아 능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대인격을 갖춘 성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뭇 영웅들 중에서도 오직 이순신을 일러 성웅(聖雄) 혹은 성장(聖將)이라 해 ‘성스러울 성’자를 그 앞머리에 헌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석 호 - 1996년작 <난중일기>번역자. 교수. 중문학자
『충무공 이순신, 그야말로 이 겨레의 역사속에 살아 있는 거대한 광망(光芒)의 하나이다. 임진 7년 왜란을 우리 민족의 승리로 귀결지은 우리의 태양이었다. 그가 향하는 곳에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적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함선이 나아가는 곳에는 다만 추풍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부서지는 적선과 적의 수급(首級)이 있었을 뿐이다. 오늘은 이 해전, 내일은 저 바다에서 그의 명령이 떨어지고, 그의 칼빛이 번쩍이는 곳이면 이 강토의 강하와 해원(海原) 어디에서나 울려퍼지는 것은 승리의 함성뿐이었다. 그리하여 조국의 위기를 넘겼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민족의 명맥(命脈)이 그렇게 하여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순신, 그는 한낱 무장(武將)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구국의 영웅이요, 우리 강토의 성벽이요, 우리 역사의 등불이다』
•박 성 부 – 1994년 <소설 이순신>저자. 경영. 행정학자
『영민한 예지(叡智)와 불굴의 노력, 충성과 신의의 용단(勇斷). ‘이순신’ 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모두의 가슴속에 신비로운 광망(光芒)으로 영원히 살아야 할 구원의 표상인 것이다.
그는 7년이란 장기 전쟁에서 조정의 변덕과 천대, 모함과 박해, 병선과 군사와 무기의 부족 등 온갖 간난신고 속에서도 불굴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 쓰러져 가는 나라와 민족을 껴안고 구하여 청사에 지울 수 없는 거인의 족적을 남기고 초연히 사라져 갔다. ‘인간’으로나 ‘군인’으로나 이만한 인물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가망은 없다. 그는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인간 완성의 한 전형(典型)이다』
4. 근현대 세계 해군 전략가의 이순신 평가
•도고헤이하치로(東卿平八郞) – 일본의 군신. 1905년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 제독 전쟁 영웅.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기는 것은 가하나 조선의 명장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 <日朝中連帶理論>에서
•발라드 (Ballad) – 영국의 해군제독. 1920년대 영국 해군전략 연구가
『넬슨만큼 위대한 제독이 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있다면 무패를 자랑하는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제독 이순신 일것이다』
•사토 데츠타로(左藤鐵太郞) – 일본제국의 해군대좌(대령), 1908년 일본 해군 대학 교수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해군대학에서 강의한 교재 <제국국방사론(帝國國防史論)에서
•가와다 고오( 川田功 ) - 1920년대 일본 해군전략 연구가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포탄 잠재우기> 라는 책에서
5. 일본 사가 작가 저자들의 이순신 평가
•도쿠도미(德富猪一郞) – 사가 <근세일본사>저자
『그(이순신)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역(朝鮮役)의 전후 7년간에 걸쳐 조선국의 책사(策士), 변사(弁士), 문사는 많았으나 전쟁에서는 참으로 이순신 한사람으로서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하였다. 그는 실로 조선역에 있어서 조선의 영웅일 뿐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하여 최고의 영웅이었다……』
<참고>조선역 – 일본의 ‘임진왜란’ 명칭
•아오야나기(靑柳南冥) – 사가. <이조사 대전> 저자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인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이씨 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 인기 역사 작가
『이순신은……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종 합 평 론
이내원
이순신에게는 하늘과 땅, 곧 세상을 경영할 재주가 있고 군인으로나 인간으로나 이순신만큼 완벽한 사람은 지난 인류역사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새로 태어날 가망이 없다.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사의 할 만큼 이순신은 다시 없이 위대한 사람이다.
이순신은 인격완성의 전형(典型)으로 본 받고 따르고 배워야 할 이상적 표본이다.
한국 사람들은 말뿐, 이순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를 일본사람들 보다도 미처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