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소작쟁의의 진원지 |
강진문화답사기- 군동면 |
군동면은 전체 면적에 비해 유독 평야가 드넓은 곳이다.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들만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평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로부터 땅이 넓으면 싸움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싸움(민란)의 진원지는 대부분 농촌이었다. 생존과 직결된 산업의 중심이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산업의 중심이 공업으로 바뀜에 따라 이제 싸움의 현장은 농촌이 아닌 도시로 옮겨갔다. 수천 년 조상 대대로 이어온 땅을 버리고 농민들이 도시로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싸움은 들판이 아닌 공장에서 일어난다.
군동면은 일제하 강진 농민운동(소작쟁의)의 진원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왜 정읍이나 김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던가를 알려면 백산 꼭대기나 만석보 둑에 서서 들판을 바라보면 되듯이, 강진의 농민운동이 왜 군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가에 대한 의문을 풀려면 까치내 고개에서 군동평야나 삼신평야를 내려다보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지금까지 일제하 강진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신안 암태도나 하의도의 그것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진군의 농민운동 연구}(1995)나 당시 동아일보·조선중앙의 기록에 따르면 강진의 소작쟁의 또한 다른 지역에 못지 않게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농민운동은 운동의 연대성과 통일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확대되면서 전국 및 지방 차원에서 노동·농민운동 연합조직이 출현함으로써 1924년 전라도 지방에도 전라노농연맹회가 결성되었다. 강진군의 경우는 1922년 4월 군동면소작공제회를 필두로 1923년 성전면소작공제회, 1926년 강진농민조합, 1928년 병영면농민당이 결성됨으로써 조직화되었다. 이 중 군동면 소작공제회의 활동은 단연 으뜸으로서 전라노동연맹, 남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과 맥을 함께 했다. 특히 회장 오원석은 전라노동연맹의 49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핵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20년대 초반 강진의 소작쟁의는 미미한 편이었다. 이 시기의 농민운동의 양상은 수백 명이 모여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몰려가 소작문제 해결을 촉구하거나 진정하는 방식에 그쳤다. 다만 1920년 4월 15일 군동면의 동양척식회사 농장의 소작인과 일본인 이민 사이에 한 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군동면 삼신리 소작인 김홍여가 경작하던 답 6두락을 일본인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이에 김홍여가 그간 투입한 비용과 비료대를 청구하자 이를 돌려 줄 수 없다며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히자, 소작인들이 항의하였으나 집단적인 투쟁으로는 연결되지 못하고 끝났다.
1930년대 초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1932년의 경우에는 소작쟁의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에는 34건이 발생하였고, 1935년에는 200건 이상이 발생함으로써 전국 최고를 기록한다. 이 중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것이 1931년 군동면 소작쟁의에 이은 대규모 강진군 소작인대회다.
먼저 군동면 소작쟁의는 당시 겸전산업주식회사의 소작료 수납장이었던 강도균의 마당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지주들이 소작료 3:7제 계약을 마음대로 5:5제로 바꿔 강제 징수를 자행한 데 있었다. 이에 소작료 강제 징수 과정에서 소작인이 무수히 구타당함에 따라 오원석을 중심으로 소작인 대책회의를 갖고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소작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회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11월 강진군의 각 구역 대표를 포함한 소작인 300여명이 모여 군동면에서 대규모 소작인대회를 개최한다.
이들은 요구 조건으로
① 소작료는 계약에 따라 3:7제로 할 것,
② 소작지 이동을 지주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할 것,
③ 소작료 수납 때 정확한 양기를 사용할 것,
④ 수납인의 횡포를 엄금할 것 등 4가지를 결정하고 이를 군 당국에 제시함과 동시에 이를 거부할 때는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통보했다(동아일보 1931. 11. 30일자).
이에 지주 측에서 불응하자 소작인 300여명은 겸전산업주식회사 목포지점 강진출장소에 몰려가 회사를 포위하고 주임을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작인 집행부 6명이 경찰에 검거되자 이에 분개하여 더욱 그 수가 늘어난 소작인 500여명은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한밤중에 경찰서로 몰려가 '검거자 석방'·'소작료 감액'을 외치며 새벽토록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군내 각 주재소는 물론 해남과 장흥의 경찰, 군내 재향군인회 및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섬으로써 소작인들은 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시 60여명이 검거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주동자 오원석, 장명환, 마성만, 김호기 등 15명이 장흥지청에 기소되어 최소 6개월 이상 징역을 언도받음으로써 강진의 소작쟁의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당시 소작인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농민가]를 부르며 항거했다고 한다.
밤나 땅 파면 금이 나오냐, 밤나 땅 파면 옥이 나오냐
밤나 땅 파고 밤나 땅 파네, 밤나 땅 파도 나올 것 없네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십리의 큰 밭은 누가 갈았나, 갈은 농민만 굶고 있구나
밤나 땅 파고 밤나 땅 파네, 밤나 땅 파도 나올 것 없네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고대광실은 누가 지었나, 지은 농민만 떨고 있구나
밤나 땅 파네 밤나 땅 파네, 밤나 땅 파도 나올 것 없네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앵앵 에헤야.
소작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지주나 겸전회사에 접근하였는데, 노랫소리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고 한다. 땅 파는 농민들의 한스러움이 잘 드러난 이 노래는 당시 성행하던 야학을 통해 보급되어 모두들 부를 줄 알았으며 특히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잘 불렀다고 한다.
출처 -- 시인 김선태와 함께 가는 강진문화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