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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민주주의다 |
김 정 남 (언론인) |
변호인들이 이미 항소이유서를 작성,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재규는 황인철 변호사를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할 항소이유 보충서를 구술하였다. 1980년 1월 28일자로 작성된 보충서에서 그는 자신이 결행한 10.26거사를 민주회복국민혁명으로 명명하면서 그것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진정을 다해 역설하고 있다. 자신이 1979년 10월의 부산사태 직후 부산을 다녀온 결과를 “체제저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정보보고에 따르면 유사한 사태가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고했더니, 박정희 대통령은 버럭 “앞으로 부산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역정을 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실장은 이 말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200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했다. 4.19같은 사태가 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로서는 박대통령의 생명과 다수의 국민희생을 바꾸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부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말고, 자신으로 하여금 자결토록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법정에서는 공개할 수 없었지만 반드시 밝혀야 할 문제로 「구국여성 봉사단과 관련한 큰 영애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구국여성 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 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습니다. 중정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
장물, 정수장학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
1962년 3월 27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당시 부산의 기업인 김지태 회장이 거느리고 있던 산하기업의 임직원 10여명을 구속했다. 이어서 젖먹이를 둔 그의 부인까지 구속했다. 이렇게 아내와 회사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일본에 체류하던 김지태도 4월 10일경 귀국했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구속되어 5월 24일,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은 김지태를 구속시킨 가운데 그에게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을 포기할 것과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상정해 놓은 부산 서면 일대의 토지 10만여평을 내놓으라고 끈질기게 협박했다. 김지태는 견디다 못해 6월 20일, 기부승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틀 후 김지태는 석방되었다. 이렇게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 부산일보 주식 100%를 보유하고 있던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는 권력에 의해 강탈당했다. 박정희 일파는 김지태가 운영하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5.16장학회라는 걸 만들었다. 박정희가 죽은 뒤 전두환은 MBC주식의 70%를 빼앗아 KBS에 주고(이것이 1988년 방송문화진흥회로 넘어갔다) 나머지 자산은 박정희 유족들이 관리토록 했다. 5.16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에서 글자 하나씩을 따서 정수(正修)장학회로 변경했다. 10년 넘게 이사장직을 맡아오던 박근혜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유신시대 이래 집사노릇을 해 온 최필립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한홍구, 유신과 오늘)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는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는 1962년 부산기업인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재산을 중앙정보부가 강제로 헌납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금년 2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시효는 지났지만 “국가의 강압에 의해 주식을 증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결국 정수장학회는 권력의 힘으로 강탈한 장물임이 청천백일하에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장물아비 정수장학회는 한사코 그 장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과연 이대로 대선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
민주주의 인식에 대한 의문을 무시할 것인가 |
1975년 4월 9일 새벽,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서대문구치소에서 처형되었다. 1∙2심 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있은 지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2007년 1월 23일, 이들 8인은 재심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5년 12월 9일, 국정원 과거사위는 “권력자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방향을 미리 결정, 중앙정보부에 의한 고문과 이를 통한 증거조작, 공판조서의 허위작성, 진술서의 변조 등으로 사건 자체가 완전히 조작되었으며, 실제로 인혁당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이 조사보고서는 상고기각 결정 18시간 만에 국방부와 법무부, 검찰청과 군법회의를 거쳐 사형이 집행될 수 있었던 것은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 이것이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데 지나지 않는 일인가.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의 최태민, 박근혜가 저지른 부정의 실체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 권력의 강탈에 의한 장물 임이 확실히 밝혀진 정수장학회의 향방에 대해서도 국민은 끝까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개인의 도덕성과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대선후보들의 인식과 신념이 어느 수준인지 검증해야 할 엄중하고도 절실한 시점에 서있다. 이 최소한의 질문에 답하라.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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