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
《네이버 지식백과 ‘철학사전’》 〈묵자〉 : “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 수공업자 ‧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類(보편)’와 ‘고故(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다.”
요약하면 ‘농민 ‧ 상인 ‧ 수공업자의 입장에 서서 기득권 세력과 싸운 묵가는 ’서로 사랑하라‘는 겸애 정신을 바탕으로 지배자에게만 이익이 되는 일은 없어져야 하고 천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 집단이다. 이들은 제자백가 중 특히 논리적이었다.’ 정도로 읽힌다.
묵적은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10년쯤 뒤인 기원전 479년경 태어나 맹자가 출생하기 10년쯤 앞인 기원전 381년경 타계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묵적은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유를 배우면서 그를 극복해 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묵적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농민 출신 철학가답게 서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사상으로 체계화했다. 당시는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던 시기였으므로 가장 두드러진 피해자는 농민을 비롯한 일반 민중들이었다. 묵가는 ‘비공非攻’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했다. 전국 시대에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권력자인 제후들에 맞선다는 뜻이다. 그래서 묵적과 묵가 사상가들은 직접 군대를 결성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침략을 당하고 있는 약소국을 돕기 위해 직접 제작한 방성防城 기구를 갖추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묵가가 그렇게 한 데에는 전쟁 유발을 하늘의 뜻에 반하는 죄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묵가 사상 중 ‘천지天志’와 ‘명귀明鬼’의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묵가는 ‘비공’과 더불어 ‘절용節用’을 주장했는데, 절용은 절약 차원의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불요불급한 낭비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재정이 세상을 위해 제대로 쓰이도록 해야 마땅하는 철학이었다. 비슷한 인식에서 ‘절장節葬’ 즉 장례 간소화를 요구했고, ‘비악非樂’ 즉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라를 멸하고 왕위를 빼앗은 데 반발하는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주 무왕은 ‘천자天子’, 즉 왕은 하늘이 낳는다는 이치를 내세웠다. 무왕 본인과 그 아버지 주 무왕이 임금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는 논리였다. 묵가가 ‘하늘天의 뜻志’과 ‘귀鬼신의 지켜봄明’을 내세운 데에는 왕과 그 신하들이 잘못을 범할 때 벌을 내릴 존재가 있다는 인식이었다. ‘비공’ ‧ ‘절용’ ‧ ‘절장’ ‧ ‘비악’ ‧ ‘천지’ ‧ ‘명귀’는 하나같이 지배층이 싫어할 생각들이었다.
묵가는 또 ‘상현尙賢’을 주창했다.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라는 뜻으로, 신분을 가리지 말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등용해서 중용해야 옳다고 보았다. 또 ‘비명非命’이라 했다. 비명은 정해진 운명이 없다는 뜻으로, 사람 개인과 사회의 명운은 명命이 아니라 역力(노력)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묵가는 “命者 暴王所作 窮人所術 非仁者之言也”라고 단정했다. “운명이란 것은 포악한 임금이 지어낸 것이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떠받드는 것일 뿐 어진 사람이 말할 바는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운명론을 지지하는 유가에 견줘 아주 다른 인식이었다. 유가는 귀신을 인정하지 않고, 음악과 번잡한 장례를 좋아했다는 점에서도 묵가와 달랐다.
그러면서도 사회 전체를 뒤집는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고 ‘상동尙同’을 내세웠다. 상동은 군주를 높이 받들고 따르라는 의미이다. 당대가 전제 군주 사회였으므로 현실적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주장이었을 터이다. 그 시대에는 군주만이 민중을 위해 재화를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러한 묵가의 사상은 ‘겸애兼愛’로 대표된다. 이 겸애는 여러 종교에 나타나는 박애博愛와는 다르다. 박애는 차별을 두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종교적 개념이다. 박애가 실현되려면 사회적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 겸애는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두루 사랑을 주자는 박애가 아니라, 즉 사회적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사랑, 상대가 있는 사랑愛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서로 상대를 자기 자신처럼 여기라는 뜻이다. 겸애는 유가의 인仁에 해당한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차별이 생기고,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도모한다는 인식이다.
물론 묵가의 상징적 주제인 겸애도 제후와 기득권이 좋아할 바가 아니었다. 겸애를 실천하려면 상대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 군주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가진 권력과 재화를 베풀어야 한다. 사대부인 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허례허식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여 그것을 민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묵가 사상가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짐승가죽옷을 입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 또는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장자》의 표현).”
묵가가 보기에 유가는 그런 실천을 행하지 않았다. 묵가는 그런 유가를 “위선자” 집단으로 보았다. 서로가 이익을 제공하는 교상리交相利를 의義로 여기면서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交相利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묵가에게는 “말로만 사랑仁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한 채로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묵가는 주장을 펼칠 때 근거를 대었다. 무엇을 주장하려면 묵가는 그 주장의 논거로 삼표三表를 제시하라고 주문한다. 삼표는 지난 날 성군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적 표본, 백성들이 경험으로 얻은 사실적 근거, 정책 실행시 그것이 국가 ‧ 백성의 이익에 부합하는 현실적 유용성 세 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철학이 일반적으로 직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데 견줘 묵가의 철학은 매우 합리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유가를 국가 경영의 기본 철학을 채택한 한 무제 이래 “겸애라고 하는 유의미한 정치철학적 주장을 했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한 사유 방식을 최초로 피력했다는 측면에서도 중국철학사에 특기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묵가는 철저한 탄압을 받아 소멸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