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이 여행9 - 에치젠의 이치조다니 무사마을에서 아사쿠라씨를 생각하다!
여행 12일째인 2019년 4월 15일 후쿠이역 앞에 자리한 도요코인 호텔에서 체크아웃 을
하고 배낭은 호텔에 맡기고 나와서... 에치젠 종이 마을 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이치조다니 를 볼려고 후쿠이역 동구에서 1일권을 구입해 2번 정류소에서 버스에 오릅니다.
9시 20분에 출발한 죠코지 淨敎寺 (정교사) 행 버스는 시내를 빠져나가 벚꽃이 만발한
들판과 강변을 지나 동쪽으로 달려서 조창씨 유적 자료관 을 지나 다음 정류소인
이치조다니 一乘谷 (일승곡) 復原町並(복원정병) 에 내려서는 210엔 입장료 를 냅니다.
유적지 마을 로 들어가니 여긴 이치조다니 유적 중에서도 입체 복원 마을 인가
본데 450년전에 아사쿠라씨의 도읍 으로 당시 마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으니... 집집마다 살림살이와 부엌이며 화로에다가 온갖 가구들을 구경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건 집집마다 거의 우물 이 있으며 또 집에는 하수도 가 잘 갖추었으니
그럼 "계획된 도시" 라는 얘기라 놀라운데..... 집들을 살피다 보니 이
마을은 무사들의 주택인 부케야시키 武家屋敦 (무가옥돈) 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치죠다니 一乘谷 (일승곡) 유적은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 에치젠국
(越前国 월전국, 후쿠이현) 다이묘 아사쿠라씨 朝倉氏 의 저택과
성밖 마을에 4개의 산성과 4개의 정원 을 포함한 전 영역을 가리킵니다.
1464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는 아들이 없는지라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
로 지명했는데... 그 1년 후에 도미코에게서 친아들 요시히사 가 태어나니 부인은
쇼군직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지라 정권의 실력자 야마나 소젠에게 협력 을 부탁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요시미 는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 와 손을 잡았는데 시바 가문과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독 상속 문제 까지 더해져 1467년 오닌의난(應仁亂) 이
발발했으니...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동군은 24개국에서 16만명, 그리고 야마나
소젠의 서군은 20개국에서 9만명 을 동원해 교토 시내에서 전투 가 벌어지게 됩니다.
병력 수에서 앞선 동군으로 기울던 전세는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등 6개국의 영주 로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의 28세손 오우치 마사히로씨가 2만 군세 를 이끌고
서군에 참가하니 승부를 낼수 없는 가운데 교토 민가의 절반이 소실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지방에서 병사를 이끌고 상경한 무장 들은 막대한 전비 를 쓰며 전투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으니 논공행상이 없자 빚더미 에
올라앉으면서 자기 고향으로 귀향해 자립 하니... 일본은 300여개 나라 로
쪼개져서 약육강식 전투로 날을 지새는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 에 접어듭니다
이치죠다니 一乘谷 (일승곡) 성의 역사는 교토에서 동서 25만 대군이 시가전을 벌이던
1471년 아사쿠라 다카가게 가 에치젠의 슈교(守護 수호) 인 시바 가문 을 쳐부수고
이치죠다니강 일대의 천연 요새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시작되어 5대 103년간 이어 집니다.
이치죠다니 에는 2개의 문을 끼고 1.7km 의 좁고 긴 성밖 마을 城下町 이 전국에서
가장 앞서 형성 되었으니 오닌의 난을 피해온 교토의 문화인들 에 의해 에치젠
지방의 중심지로 번창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 군대에 의해 잿더미 로
변했는데, 무가 저택과 거리 모습을 복원 하여 당시의 모습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치조다니 (一乗谷)는 동, 서, 남쪽이 산 으로 둘러싸이고 북쪽에 아스와강 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로 산봉우리에는 성채(城砦)와 망대 등이 세워져 성역 전체가
광대한 요새였으니 사카이시(坂井市)로 이어지는 수운(水運) 과 오노시(大野市)
로 이어지는 미노가도 (美濃街道), 에치젠시(越前市)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 였습니다.
가장 번영했을 때 인구가 1만명 을 넘었으며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아사쿠라씨는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패배하여 긴 역사의 막을 내리는데 1967년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후 당주(当主) 저택과 무가 저택, 사원, 민가, 도로 까지
발굴되어 1971년 특별사적 으로 지정되었고 1991년 4곳 정원이 특별명승 으로 지정됩니다.
1565년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 암살
당하자 아사쿠사 요시카게 는 쇼군의 동생 요시아키를 맞아 보호 하지만 상경전
에는 관심이 없자 실망한 요시아키는 미노(기후시) 로 가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쇼군에 복귀 하나... 이후 아사쿠사씨는 오다씨의 공격을 받고 망합니다.
아사쿠라씨 朝倉氏(조창씨)가 다스렸던 에치젠 越前(월전)국 은 후쿠이 福井(복정)현 이니
아사쿠라 요시카게 (朝倉義景) 는 제11대 당주로 1548년 16세로 가독을 승계하니
아사쿠라 소테키가 정무와 군사에 대해 보좌하다 1555년 23세에 비로소 정무 를 맡습니다.
그런데 16세기 센고쿠 시대에 전국의 200여명 영주 중에는 교토로 올라가 권위를 잃고
기울어 가던 아시카가 막부를 대신해 일본을 통치할 야심 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한 다이묘들이 있었으니.... 스루가국(시즈오카현) 의 이마카와 요시모토,
가이국(야마나시현) 의 다케다 신겐 에 오와리국(나고야) 의 오다 노부나가 세명 입니다.
야심은 있으되 소극적으로 행동한건 에치코국(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과 사쓰마의
시마즈씨, 시코쿠의 조소카베씨, 미카와(아이치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이고 야심이 없었던 대영주 는 야마구치의 모리 데루모토,
사가미국(오다와라)의 호조씨에 여기 에치젠국(후쿠이현)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입니다.
에치젠국 (후쿠이현)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는 일본의 패자가 되려는 야심이 없었던지라
아시카가 요시아키 가 바라는 교토 상경전에 냉담 했기 때문에 요시아키는 실망하고
미노 를 지배하며 세를 떨치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에게 의지하러 떠납니다.
이때 아사쿠라 요시카게 는 이시카와현 남부 가가에서 내습해온 잇코잇키 (一向一揆)
불교도 농민군과 교전을 하면서 호리에가를 공격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1568년 오다 노부나가 는 상경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 으로 옹립하지만
노부나가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니 막부정치 부활을 꿈꾸던 요시아키와 대립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 가 아시카가 막부를 손에 넣기위해 교토로 올라가는 길목인 비와호수
오미국에는 아사이 가문의 거성 이 위치하니... 군사력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와 오미 남부에 롯가쿠 라는 강적 을 상대해야 했던
아사이씨는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 와 정략결혼해서 혼인 동맹 을 맺게 됩니다.
교토에서 아시카가 쇼군을 끼고 권력을 쥔 노부나가 는 허울뿐인“쇼군의 명”을 내세워
에치젠(후쿠이) 의 영주 아사쿠라 요시카게 에게 교토 상경을 명령 하지만 거부되자
1570년 4월 에치젠국은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의 공격 을 받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동맹국인 에치젠(후쿠이시) 이치조다니성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에 대해 오다 노부나가의 매제 인 오미 近江(근강) 북부 지방의
영주인 아사이 나가마사 는 이제 누구편에 서야할지 오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사이 나가마사 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리 를 지켜 옛 동맹국인 아사쿠라 요시카게 를
돕기로 결심하니 카네가사키성에 있던 노부나가 는 후방의 매제 아사이씨가 배신
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믿지 않았으나 배신감에 치를 떨며 생애 처음으로 퇴각 합니다.
카네가사키의 퇴각 으로 후쿠이에서 교토로 퇴각 하기 위해서는 후위를 추격하는
아사쿠라씨와 아사이씨 연합군을 막아야 했으니.... 노부나가는 10여명 의
부하들만 데리고 황급히 먼저 떠나고 나머지 3만의 부하들도 차례로 그 뒤를 따릅니다.
노부나가군은 퇴각하면서 아사이 - 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게 되는데..... 퇴각전 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바로 기노시다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로 그는 자원해서
신가리 (殿 뒷부대) 로 후방의 적을 막아냈으니 그 전공으로 금을 상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기노시다 히데요시 의 분전 덕택에 오다군은 비와호수 북쪽 산악지대에서 교토를 거쳐서
무사히 본거지인 오와리(나고야)로 퇴각에 성공했으나 3천명의 희생자 를 냈다고 합니다!
마을을 둘러보며 이런 저런 옛날 일들을 회상하고는 바로 나가면 되는데 문을 찾지 못하고
다시 입구로 되돌아 나와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강에 놓인 다리 를 건너가니
넓은 터 가 보이는데 여긴 아사쿠라씨의 성이 있던 아사쿠라관(조창관) 유적지 라고 합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는 오다 노부나가가 권력을 휘두르자 전국의 유력 다이묘들에게
노부나가를 공격 하라는 서신 을 보내나 처음에는 눈치만 보며 미적거리던 영주들이
오다군의 "카네가사키 퇴각" 을 보고 비로소 마음이 바뀌어서 쇼군의 명을 받들게 됩니다.
반 노부나가 세력 은 아사쿠라 ~ 아사이씨 연합 에다 교토 미요시씨 와 가이국(야마나시)
의 다케다 신겐, 주코쿠의 모리 테루모토, 사찰 세력인 혼간지 와 엔라쿠지,
그리고 용병 세력 사이카 까지 승낙해서는 노부나가 1차 포위망이 결성되니...
오다 노부나가 는 동서남북 네방향에서 연합군의 공격으로 오사카 시텐노지에 갇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