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핸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