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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9일 수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또는
[백]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을 만나고,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린 케파의 위선을 꾸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기도를 아직 다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려면, 먼저 내 안에서부터 그 나라를 가로막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때로 우리에게 작은 겟세마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오도록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도 아버지의 나라를 바란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저에게”가 아니라) “저희에게”(11,3) 양식을 주시기를 청한다면 오늘 양식이 없는 이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어야 하고.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내일을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11,4)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 형제의 죄는 하느님께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자신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바치다 보니 쉽게 느껴지는 이 기도는 아직도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세일즈 하듯 기도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수도자가 산에 올랐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듯한 깊은 산중에서 다행히 인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 하는 기도를 듣고, 수도승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신이시여, 어제도 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시진 않은가요. 그럼 제가 등도 긁어드리고 허리도 만져드릴 수 있을 텐데.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잖아요. 혹은 발을 씻겨드리면 참 좋을 테고요….”
수도승은 그만 더 참지 못하고 기도를 멈추게 했습니다. “이봐요, 잠깐. 날 살려준 건 감사하지만, 하느님께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다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기도서를 주며 기도하는 자세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튿날 수도승은 그 집을 떠나왔습니다. 다행히 길을 찾아든 수도승이 산을 거의 내려온 찰나,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이제, 내게서 가장 가까운 이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구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고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주님께서 주시려던 은총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는 마치 세일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사려고 넥타이 판매대로 갔는데 점원이 와서는 “무얼 찾으세요?”라고 물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넥타이에 관심이 있으니 그리로 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그 사람은 ‘이 가게는 손님에겐 관심이 없구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 넥타이를 들었다 놓았는데 파란색 넥타이를 가장 오래 집고 있었다면 뭐라 해야 할까요? “파란색의 다른 상품들을 제가 찾아볼까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노란색 넥타이를 손에 감으며 예쁘죠?”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파란색을 원해요.”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재고가 없고, 요즘 누가 파란색 넥타이를 합니까? 그건 유행이 지났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품을 사러 온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냥 나가려고 할 때 관심도 없는데 쓸데없이 멜빵을 보여주며 “이건 관심 없으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 가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님은 가게 점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바로 판매로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주장하면 사려고 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 사려는 사람도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이 아버지라 불리고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 나라가 임하고 당신 뜻이 이루어지며 당신이 매일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당신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당신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반려견을 계속 데려오며 병이 낫게 안수해 달라고 청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안수하고 있는데 개에게 또 안수하려니 좀 그랬습니다. 물론 반려견에 너무 의지하고 있기에 강아지가 나으면 좋은 일이라 몇 번은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러는 건 좀 그래서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개가 나으면 50만 원 드리려고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개에게 안수하여 돈 버는 사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은총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를 의미를 음미하며 정성껏 바치면 우리의 자세가 주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서 많은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었는데 1917년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당신은 임파선 결핵입니다.”라고 진단하고 “당신은 길어야 석 달 살 것입니다.”라고 통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맨의 마음은 절망적으로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그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솔맨은 아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가 몹시 괴로워하며 매일같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3개월이나 되는 기간을 살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솔맨은 아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않고, 아내의 말대로 남은 3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감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져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해 보았더니,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는데 나의 것만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의 청을 들어주면 그분이 무엇이 좋은 건지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청을 들어주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청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강요하듯 물건을 파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전문 세일즈맨처럼 그 물건을 사면 손님에게 무엇이 좋은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사가 저절로 잘 될 것입니다. 은총도 그렇게 끊임없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를 읽지 않았던 분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도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고, 싸움을 잘했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고, 내세울 무기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골리앗을 보고 겁에 질렸습니다. 소년 다윗은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성서를 읽은 사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다윗과 골리앗의 뒷이야기는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8형제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의 형 3명은 블레셋과의 싸움을 위해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형들에게 줄 음식을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형들에게 줄 빵과 치즈를 들고 블레셋과 싸우는 현장으로 갔습니다. 만일 다윗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빵과 치즈를 가져가라는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전설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룻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지 않고, 고향으로 갔었다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껏 모셨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룻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가문을 정해 주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길’ 기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예수님께서는 3번 넘어지시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단 한 번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서울 대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춘천교구, 원주교구 신학생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형들도 있었고, 저처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신 것처럼 질그릇 같던 우리들을 하느님께서는 사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형들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친구들도 이제 5년 정도 후면 은퇴할 시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까지도 불러주셔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보다 과분한 일이 주어졌다면 하느님의 이끄심을 청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나의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졌다면 그 또한 감사하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아 두려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나 그대에게, 그대 나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심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심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뼛속깊이 스밉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밥이
되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밥이
되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밥이
날마다 소복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더없이 가득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이 되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늘 계십니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레오나르디(John Leonardi)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541-1609년
같은이름 : 레오나르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탈리아의 루카(Lucca) 지방의 디에치모(Diecimo)에서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성 요한 레오나르디(Joannes Leonardi)는 약학을 공부하여 약사로 여러 해 동안 일했다. 그 후 콜룸바누스회에 입회했으며, 고해사제이던 도미니코회 파올리노 베르나르디노(Paolino Bernardino)의 지도를 받아 인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하여 1572년 12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성당에 부임하여 어린이와 성인의 교리교육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 정열을 쏟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자 후원자들과 협력자들이 쇄도하였다.
그때 마침 트렌토(Trento) 공의회가 열리고, 프로테스탄트가 기세당당하게 활동하므로 요한과 그의 후원자들은 새로운 교구 사제회의 구성을 계획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대항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1574년 9월 1일 ‘복되신 동정녀의 개혁 사제회’를 결성했다.
이 사제회는 1619년 8월 14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라 개칭되어 승인받았다. 이들은 초기에 루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루카 지방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강력한 반격을 가한 요한의 사도적 열정과 개혁은 교황의 도움으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1584년 그는 로마(Roma)에 있는 친구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를 방문하여 그의 소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를 알현하였다. 그와 동료 사제들은 이탈리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609년 로마(Rome)에 독감이 퍼지자 요한은 독감에 걸린 14명의 동료 수도자들을 간호하던 중에 감염되어 그 해 10월 9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1861년에 시복되었고, 1938년 4월 17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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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 아브라함 (Abraham)
신분: 구약인물
활동지역:
활동연도: +연대미상
같은이름: 아브람, 에이브러햄
성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들에게 믿음의 모범 또는 믿음의 조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셈의 후손이며 데라의 아들이고 사라(Sara)의 남편이며, 이사악의 아버지로서 히브리 민족의 선조이다. 그리고 아들인 이스마엘을 통하여 퍼지게 된 다른 셈족들의 선조이기도 하다(창세 17,5; 25,10-18). 그의 삶에 관해서는 주로 창세기(11,26-25,10)에 소개되어 있고, 사도행전 7장 2-8절에 요약되어 있다.
구약성서에 보면 그의 이름은 ‘아브람’과 ‘아브라함’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언급되어 있다. 즉 창세기(11,26-17,4)와 일부 다른 성서의 구절(1역대 1,27; 느헤 9,7)에서는 아브람으로, 그리고 그밖의 부분에서는 모두 아브라함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브람’은 ‘아브’(아버지)와 ‘룸’(높다, 존귀하다)에서 파생된 ‘람’의 합성어로, ‘존귀하신 아버지’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나의) 아버지는 존귀하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어원론적 해석은 불투명하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었다(창세 17,4-5). 여기에서 하느님은 약속 성취의 징표로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부여하신다. ‘아브’는 아버지를 의미하며 ‘라함’은 많은 민족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에 대한 성서의 해석은 유음 현상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동생인 나홀과 하란, 아내인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하란으로 이주하였다(창세 11,26-32).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75세였다(12,1-4). 그가 세겜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약속의 땅의 중심인 그곳에서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12,6-7). 그러자 그는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친 뒤 그곳을 떠나 베델 동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옮겨가, 서쪽으로는 베델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도 제단을 쌓고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그리고는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가 흉년이 들자 이를 피하여 이집트로 갔다(12,8-10). 그리고 다시 베델 쪽으로 와서(13,3) 롯이 분가를 한 다음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나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쳤으며(13,18), 그 후 브엘세바에 정착하였다(20,1-2. 14-15; 21,22-34; 22,19). 그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분가하여 소돔 근처에 살게 되었을 때 소돔 지역의 왕들과 북쪽 지역의 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롯은 북쪽 왕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14장). 그러자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하여 북쪽 왕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미 공인된 지도자로서 행동하였다. 그리고 이집트와 그랄과 브엘세바에서도 한 집단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많은 목축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13,20), 부하들도 많았다(14,14). 또 가나안족과 브리스족(12,6; 13,7)과 함께 어울려 살았으며, 블레셋 사람들(21,34)과도 어울려 살았고, 헷 사람들과 거래를 하기도 하였다(23장).
우르와 하란을 떠나기 전에 도시를 배경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은, 하란에 살고 있는 그의 친척들이 천막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24,10-11), 유랑하는 반유목민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12,8-9; 13,18; 18,1). 그러나 그는 마므레, 브엘세바, 블레셋 지역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으며(13,18; 18,1; 22,19; 21,3-4). 그곳 정착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23,10. 18). 이 지역 왕들과도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만큼 그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외국인 거주자였던 것 같다(15,13; 23,4).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특별한 체험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우선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이 되게 해줄 것을 약속하였는데(12,1-3), 이 약속은 13장 16절에서 다시 확인된다. 이 약속 실현의 첫 번째 과제는 그가 아들을 얻는 것이었다. 아직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었다. 그런데 환시 중에 하느님을 만났고(15,1), 여기에서 다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15,5-6).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고, 이로써 “주님께서 그것을 정의로 인정해 주셨다”(15,6). 그리고 하느님은 그와 언약을 맺었다(15,7-21). 이집트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모든 땅을 그의 후손에게 줄 것을 약속하셨다(15,18). 여기에서 하느님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만일 그가 약속을 어기면 이 제물처럼 되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셨다(15,8-17). 즉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약속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200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5,13-16). 이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것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초월적인 신앙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깊은 감정적 움직임이 동반된 것이었다. 이 순간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었고, 이러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믿음도 훗날 흔들렸다.
그의 아내 사라는 아직 아이가 없었으므로 당시의 관습대로 남편에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주어 아이를 갖게 하였다(16,1-16). 결국 아브라함과 이집트인 여종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 86세였다(16,15-16).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다시 언약을 하셨고(창세 17장), 이때 그의 나이는 99세였다(17,1). 여기에서 하느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이며 후손을 번창하게 해줄 것을 약속하고(17,1-8), 이 새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지시하였다(17,9-14). 이 약속과 함께 부인 사라의 이름도 사래에서 사라로 바뀌었다.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에 따르면 그의 운명이 바뀌는 것으로, 결국 사라가 하느님의 역사(役事)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사라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다시 확인되었다(18,1-19).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이사악이 태어났고, 이로써 약속 실현의 결정적인 조건이 갖추어졌다(21,1-7). 그러나 이사악을 매체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된다(22,1-14). 모리아 산에서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증거하였다. 그의 아내 사라는 127년을 살고 죽어서(23,1) 헤브론 맞은편 막벨라 밭에 있는 동굴에 안장되는데(23,17-20), 이 땅은 헷 사람 에브론에게 산 땅이었다(23,3-16).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오자 엘리에젤에게 하란 지역에 사는 자신의 친척 중에서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 주도록 하여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24장). 아브라함이 늦은 나이에 크투라와 결혼하여 얻은 자식들은 드단과 미디안 부족의 조상이 되었고(25,1-6),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었다(25,7-11).
신약성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급되고 있다(사도 13,26). 아브라함은 레위 제사장들의 선조로 언급되며(히브 7,5),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라고 선포된다(마태 1,1). 그러나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혈통과 관련하여 새로운 이해가 선포되었다.
성녀 사라 (Sara)
신분 : 구약인물
활동지역 :
활동연도 : +연대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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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다(창세 18,1-15)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Hector Valdivielso Saez)
활동년도 : 1910-1934년
신분 :: 수사, 순교자
지역 : 투론(Turon)
같은 이름 : 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토,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베니토, 분도, 엑또르, 헥또르, 헥터, 헥토르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는 1910년 10월 31일 아르헨티나(Argentina)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de Bari) 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1914년 에스파냐로 되돌아 왔고, 그곳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사회 수사들과 알고 지내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1924년 그는 언젠가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서 선교사로 활동할 날을 소망하며 수련기를 마치기 위해 벨기에(Belgie)로 갔다. 1926년 8월 7일 수련기에 들어가 1927년 10월 7일 첫 서원을 하며 예수의 베니토(Benito, Benedictus de Jes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원의와는 달리 장상에 의해 1929년 8월 24일 에스파냐 아스토르가(Astorga)의 학교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1933년에 투론의 학교로 다시 파견되었다.
청소년에 대한 그의 헌신은 곧 그에게 순교의 월계관을 준비시켜 주었다. 당시 투론 지역은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에스파냐 내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934년 10월 초 수사들은 그 달의 첫 금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고해성사를 달라고 미에레스에 있던 예수 고난회 소속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Innocentius de la Immaculada) 신부를 청했다. 그런데 그 달 5일 새벽에 좌익 혁명군들이 학교에 들이닥쳤고, 며칠 뒤인 8일 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Cyrillus Bertran) 교장 수사와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를 포함한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러 온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 신부가 아스투리아스(Asturias)의 혁명 세력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하고 끌려 나가 총살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과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를 포함한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는 1990년 4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11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으로는 첫 번째 성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에서 “순교자는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자이며, 그들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