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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이명세
타이틀 백
(어둠 속에서 라디오 FM음악 프로그램 진행자의 목소리가 추억을 일깨 우듯 들려온다.)
(소리) (여자의) 안녕하세요? 000(진행자 이름:잘 아려진 사람일것)입니다.어젯밤에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까맣게 이름조차 잊고 있었던 한 친구를 만났죠.
꿈을 깨고 나니까 놀랍게도 제 기억 속에서 아득히 잊혀진줄 알았던 추억들이 하 나,둘 마치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피어나더군요.우리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고 믿는 일들도 사실은 잊혀진게 아니라, 그렇게 우리들 기억의 창고 속에 차곡 차곡 보물처럼 쌓여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 여러분들도 지금 작은 램프불이라도 하 나 밝혀 들고,저랑 같이 저 추억의 시간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지 않으시렵니까?
(소리 끝과 맞물리면서 70년대에 유행했던 귀에 익은 음악 한곡이 기타 반 주로 마치,낡은 축음기에서 흘러 나오듯 깔리기 사작하면서, 화면이 램프불 이 서서히 피어나오듯 밝아진다.가장자리가 장미무늬로 수놓아진 화면이 떠오르면, 크래딧 타이틀과 함께 화면 한쪽으로 70년대를 상징할 수 있는 것들이 빛 바랜 사진의 모습으로 한장 한장, 기억 속에서 인화되듯 떠오른 다. 그 시대의 가수, 영화배우 , 탈렌트, 작가 , 낡은 영화포스터 , 낡은 음 반 자켓...그리고 이제는 가고 없는 정치인의 모습까지.
크래딧 타이틀이 끝나면,
메인 타이틀 “첫사랑”이 붉은 빛으로 새겨진다.)
( F.O )
씬 1 한적한 시골역 (낮)
(따사롭게 내리는 오전의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는 철로를 배경으로 평화롭 게 서있는 역사가 한 장의 흑백 사진으로 인화되듯 떠오른다.
낙엽이 옅은 갈색으로 제 색깔을 띠기 시작하면,정지 되었던 흑백화면은 햇살에 물든 듯 노랗게 바뀐다.
화면 한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낙엽을 날린다.
카메라 서서히 성에가 녹아내리는 대합실 창문으로 다가간다.대합실 안 연 탄나로 주위에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사,오십대의 남녀가 한가롭게 난로 불을 쬐고 있다. 대합실 한 쪽 낡은 긴 의자에는 영신과 벙어리 장갑을 끼 고 교복 위에 덧입은 감색 코트차림의 갈래머리 여고생,국민학교 2,3학년 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남동생이 앉아있다.
남동생은 곶감이나 밤을 싼듯한 보퉁이를 끌어안고 바닥에 닿지 않은 발을 앞위로 흔들면서 풍선껌으로 풍선을 만들고 있다.풍선을 크게 만들려다 튀 어나가 바닥에 떨어진 껌을 줒어 입에 넣고 천연덕스럽게 다시 풍선을 만 든다.)
영 신 ( 혼잣말처럼 ) 대학생이 되면 방금 네가 말한대로 정말 좋을줄 알았는데, 꼭 그렇 지도 않어. 복장 불량하다고 생활지도부 선생한테 안걸리고, 어른들 눈치 안보고 극 장이나 빵집에 갈수 있고...뭐 그냥 그 정도야!
여고생 (눈을 빛내며) 미팅은 몇번 해봤어?
영 신 딱 한번! 그런데 그것도 생각보다 별로야.
여고생 문수오빠 때문에 그런거 아냐?
영 신 누구? 문수? 걔는 국민학교 동창이잖아!
(털장갑을 들춰서 시계를 본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일어서서 대합실 밖으로 나간다.)
씬 2 대합실 밖
(밖으로 나오는 영신.
조금 작은듯한 키에 단발머리를 하고 붉은색 랜드로바,골덴바지에 두툼한 코트를 입고 털실로 짠 목도리 차림의 귀엽고 발랄한 느낌을 주는 모습.
영신 시계를 본다.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표정으로 길쪽을 보는 영신의 시야 속으로 자 전가 폐달을 밟으며 문수가 들어온다. 문수, 영신을 발견하고 기쁘게 페달 을 밟고 오다가 영신이 서 있는 삼미터 전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내린다.
자전거를 끌고 좀 겸연쩍은 듯 영신 곁으로 다가오는 문수.
단정한 머리에 갈색 뿔테 안경, 반코트 차림의 약간 순진해 보이는 모습)
영 신 (자전거를 세우는 문수 곁으로 다가가서)무슨 일 있니?
문 수 지나가다가 네가 보여서...그런데 왜 밖에 나와 있어?...추운데...
영 신 미숙이 언니가 안와서...
(멀리 기적소리,들려온다)
문 수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린다.)
영 신 차 오니까 들어가 볼께.(결심한 듯 돌아서려는데)
문 수 (다급하게 꺼낸 책을 불쑥 내밀며)이거 읽어봐. 차에서 심심 할까봐...
영 신 (얼떨결에 책을 받는다.)...?
문 수 (황급히 자전거에 올라 타서 도망치듯 페달을 밟으며 영신 쪽을 돌아보며 큰 소리 로) 갔다와서 봐!
영 신 문...문수야!
(무슨 책인지 보는데-
기적소리가 가까워진다. 빠앙-!)
씬 3 겨울 들판 (낮)
(쌓아놓은 짚더미가 드문드문 보이는 빈 들판.
짚단을 태우는 듯 한 줄기 여기가 피어오르고, 토끼털 귀마개와 빵모자를 눌러쓴 올망졸망한 아이 대여섯명이 따사로운 햇살속에서 정겹게 연을 날리고 있다.
빠앙 기적소리와 함께,
이런 풍경을 가로지르는 기차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그 위로 깔리는-)
영 신 (소리) 따스하게 내리는 햇살 때문일까? 미숙 언니 덕분에 난생처음 혼자 하게된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씬 4 기차 안 (낮)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에서 카메라 팬하면,
영신,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 위로 계속되는 나레이션)
영 신 (소리) 기차를 혼자 탈때까지만 해도 얼어붙었던 마음은 이제 마치 한 여름날 입안 에서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향기롭게 녹아내리고 있다.
(창 밖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영신.
자세를 고쳐 편히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대고 눈을 지긋이 감는다.)
(소 리) (멋진 남자의) 아가씨! 곁에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영신,눈을 뜨고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면,
퍼머머리, 하이힐에, 겨울 분위기에 맞지 않는 투피스 정장차림, 약간 경망 스럽고, 허영기 있는 모습으로 서있는 미숙)
미 숙 (영신 곁에 앉으며) 그래도 너는 기다려 줄줄 알았는데.. 하긴 뭐 늦게 온 내가 잘
못이지만... 그래도 얘 명색이 우리가 연극반 대표로 연출가 선생님 초빙
하러 가는데, 그냥 갈수 있니??
목욕탕도 가고, 미장원도 가고, 사실 때 빼고 광 좀 내느라고 늦었어.
(한숨을 돌리고) 얘, 내가 얼마나 너를 찾아 다녔는줄 아니?...
남자 화장실 문도 다 열어보고, 열차 안을 몇바퀴나 왔다갔다 했다, 얘.
얼마나 망신스러웠는줄 아니? (갑자기 은근한 목소리로) 그런데..나 어때?
괜찮니?
영 신 (당황했던 표정을 풀며) 근사해 보여? 그런데.. 좀 춥지 않아?
미 숙 지금 추운게 문제니? 서울 가는데.. (밀차를 끌고 가는 판매원에게)
아저씨! (영신에게) 아, 참 아침은 먹었니?
나는 밥도 못먹었다. 얘. (판매원에게) 김밥 좀 주세요. 사이다도.
(영신에게) 먹고 싶은거 있으면 말해. 다 사 줄게.
(지폐가 두둑한 지갑을 열 어보이며)봐, 나 오늘 이렇게 부자야.
공갈좀 쳤지뭐. (판매원에게 돈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받는다)
영 신 (마음의 소리) 미숙의 언니가 곁에 와 앉으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해진다.
역시 아직 난 낯선 세계를 두려워 하나보다.
지금 창밖으로 흘러가는 저 풍경들처럼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때 쯤이면...?
(영신의 소리를 따라, 차창 밖 풍경이 먼 꿈처럼 펼쳐진다. 영신에게 사이다를 따르 는 미숙.흰 종이컴 속에 수정알갱이 같은 기포를 만들며 따루어지는 사이다)
미 숙 어떻게 생겼을까...? (혼잣말처럼) 내가 하이힐을 신으면 되니까 키는 좀 작
아도 되겠고.. 얼굴을 좀 잘 생겼으면.. 피부도 희고..
눈썹은 좀 숱이 많고 짙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좀 야성적으로 보이니까.
그리고 입술말이야. 입술은 좀 두툼하게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키스할 맛이 나지 않겠어? (영신에게) 안그래?
영 신 (얼굴이 민망하듯 붉어진다)
(기적 소리 빠앙-)
씬 5 연극 공연장 (낮)
(영신과 미숙, 조심스럽게 어느 집으로 들어서는가 싶었는데, 그 무대 장치가 없어 지면 빈 연극 무대다.
사람들이 세트를 치우고 있다)
영 신 (그중 한 사람에게) 강창욱 선생님 여기 계시다고 들엇는데..
(그때 뒷편에서 - )
(소리) 날 찾아왔나?
(영신과 미숙, 돌아보며 -
카메라에 등을 돌리고 어둠 속 객석에 앉아 있는 사내)
영 신 00대학교 연극반에서 왔는데요
미 숙 (당황한 듯) 안녕하세요? 서미숙입니다. 영만이 형.. 후밴데요.
저기.. 부탁을 드려 놨다고 해서..
영 신 일전에 저희가 따로 또 편지를 드렸는데 회신이 없어서, 오늘 저희가 이렇 게 연극 반 대표로 왔습니다. 연출을 맡아 주실지 어떨지 대답을 들으려구 요.
(어두운 객석에서 빛이 있는 무대로 걸어 나오는 사내. 강창욱이다
청바지에 두터운 쉐타, 멋 부리듯 목에 두른 모직 목도리, 약간의 장발의 모습)
창 욱 (영신과 미숙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툭 내 던지듯) 돈 가진거 있냐?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는 영신과 미숙)
미 숙 (정신을 차린 듯 큰 소리로) 네, 돈! 많습니다.
씬 6 어떤 골목길 (낮)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이요..“
(누군가 읊조리는 취기 배인 목소리를 쫒아 카메라는 70년대 영화포스터와 군데군데 찢겨지기도 하고 코 밑에 수염이 그려지기도 한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가 붙어 있고, 아이들 낙서도 보이는 낡은 시멘트 담장을 흝으며 흐 른다.
구인 광고 전단이 어지럽게 붙어있고,
아직 덜 마른 취객의 오줌자국이 있는 전봇대를 지나 허름한 선술집 창으 로 다가가면, 영신과 미숙을 동반한 술자리에서 창욱, 시를 읊조리고 있다)
씬 7 선술집 안 (낮)
(겨울햇살이 조각조각 떨어져 있는 선술집 안.
가운데 불을 피울 수 있는 양철로 된 화덕 주위에 둘러 앉아 낮술을 마시
고 있는 영신, 창욱, 미숙.
한구석에는 날품팔이꾼인 듯한 사내가 국밥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화덕 주변에는 구겨서 버린 담배갑고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화덕 가운데는 먹다 남은 꽁치가 타는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다.
-화덕 위에 놓인 양은 재떨이에도 담배 꽁초가 가득하다.
-입 주위와 옷에 줄줄 흘리면서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키는 창욱.
거칠게 술사발을 내려놓고 옷소매로 입 주위를 쓱 닦는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어 창욱에게 술을 따르려던 미숙,
빈 주전자를 들어 흔들면서 주인에게 술을 주문한다.
-젓가락으로 꽁치를 뒤집고 있는 영신, 재미없고 지루한 듯 하다.
-순잘은 들어 건배를 하는 창욱과 미숙.
취중에도 뭔가를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창욱.
-창욱의 얘기에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미숙.
-미숙에게 담배를 권하는 창욱.
-목도리를 풀어서 미숙의 목게 감아주는 창욱.
-두손으로 머리칼을 헤집으려 머리를 긁어대는 창욱.
*그립고 향수가 느껴지고, 낭만이 가득한 시절의 모습일 것.
(이런 풍경들 위로 영신의 소리가 들려온다)
영 신 (마음의 소리) 영신아! 너 오늘 실망했지.
네가 상상한 사람은 낮술에 취해서 술냄새를 풀풀 풍기고,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고, 줄담배만 피는 그런 사람은 아니
었으니까. 그지?네가 술 담배 못한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꿈이 뭔지 자상하게 물어보면서 관심도 가져주고.. 뭐 그런
사람이길 속으로는 은근히 바래기도 했었잖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뭐든지 다 노래가 되고, 시가되고,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분위기. 뭐랄까?
아주 신성하고도 신비로운, 뭐 그런 분위기를 가졌길 바랬고... 그렇지만 너도 알잖 니? 기대는 항상 실망을 동반한다는거. 사실, 예술가를 너무 신비한 존재로만 생각 한 너도 좀 어리 석었고, 그렇지 않니?
(영신과 창욱, 미숙 세 사람만 있던 선술집에는 어느새 형광등이 꺼지고, 투명인간으로 아까부터 그 자리에 있다가 이제 막 마술에서 풀린 것 처럼, 사람들로 가득해 지는 선술집)
씬 8 영신의 방 (밤)
(카메라 잉크병에서부터 책상 위를 흝어가면,청색 잉크가 담긴 만년필에 의해 글씨가 적히고 있는 가장자리에 예쁜 무늬가 있는 일기장.
뭔가 적힌 다음에 그 위에 줄이 찍찍 그어지는 게 자주 반복 되다가 다시 씌어지는 글씨와 함께 나레이션 시작 된다.)
영 신 (마음의 소리) (한숨을 쉬듯) 아! 엊도 아무일이 없었고,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
아마 내일도 아무 일도...없을 것이다.
(벽쪽에로는 나란히 놓인 책상 두 개, 이불장을 겸한 옷장, 문학전집이나 화집, 여학생 잡지 등이 꽂힌 작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놓여있는 석고로 된 토르소.
벽에는 영신이 그린 그린 몇점과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다.전체적으로는 깔 끔하고 잘 정리된 화사한 느낌)
씬 9 영신의 창문 앞 (밤)
(담장 밖에 켜있는 보안등 불빛이 비쳐들고 있는 창밖에 서있는 영신의 동 생 영선. 양쪽으로 짧데 땋아내린 갈래머리에 사랑스런 모습, 급하게 달려 온 듯 후후 뽀얀 입김을 불어 내면서 한쪽 손을 반코트 품안에 넣고 서 있 다.)
영 선 (아주 조심스럽게) 언니! 언니!
영 신 (창문을 살살열고,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쉿,쉿! (영선의 빈 손을 보고 실망한 듯) 벌써 문 닫았구나!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짓다가 품 안에 든 봉지를 꺼내 김이 모락모락 나 는 만두를 하나 입에 넣는 영선. 기쁜 표정으로 바뀌며, 지레 환성이 터져 나올까봐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쉬쉬 거리며 한손을 창틀 밑으로 늘어뜨리는 영신. 안방의 눈치를 살피다가 발두꿈치를 들어 봉지를 건네주고,조심스럽 게 화면밖으로 사라지는 영선. 뒤이어 영신도 만두를 하나 꺼내 먹으면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눈발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한다.)
영 신 (마음의 소리) 동생과 벌이는 이 한겨울밤의 만두 수송 작전은 007 영화처럼 스릴 이 넘친다. 이런 재미도 없다면 이 겨울밤은 더 춥고, 더 길게 느껴지겠지?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
(소 리) (어머니의) 누구 왔냐?
(소 리) (영신의 당황한 듯 급하게) 바람에 그냥 문이 열렸나봐요.
(내리는 눈발이 점점 더 굵어진다.)
( 길게 F.O )
(어둠속에서 분홍빛으로 떠오르는 자막)
“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에서-
(자막 사라진다.)
씬 10 주택가 골목길 (아침)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고,적산 가옥들,세탁소,이발소,구멍가게 가 있는 주택가 풍경이 먼 기억속에서 인화되듯 흑백으로 떠오른다.참새들 의 조잘거림과 함께 화면이 제 색깔로 바뀌면, 아침 햇살이 내려서 더 희 게 빛나는 눈을 쓸고 있는 구명가게 주인 아저씨, 츄리닝 차림으로 가게문 을 열고있는 건장한 모습의 젊은 세탁소 주인 모습이 보인다.)
씬 11 영신의 집 안 (아침)
(쌀통 위에 놓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오전 10시 무렵의 주부 프로그램 진 행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는 부엌겸 좁은 거실. 들창을 통해 들어온 겨울 햇살이 가득 흘러 넘치고 있다.중앙에 있는 연탄 난로 위 양은 대야에서는 빨래가 삶기는지 김을 모락 모락 피워 올리고 있고,
영선,이제 일어났는지 상의와 바지가 따로 떨어진 누비잠옷 차림으로 식탁 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이때 밖으로 연결된 부엌문에서 들려오는 영신의 엄마, 깔끔해 보이는 40대.
밖에서 다듬은 겨울 푸성귀와 도마를 담은 소쿠리를 들고 있다. 김치뿐인 식탁을 보고 부엌으로 가서 반찬 두어가지를 꺼내온다.)
엄 마 (반찬을 식탁에 놓으며 느닷없이) 너도 담배 피냐? 연극 한답시고 담배나 피고,남학 생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깡패들처럼 그럴거면 연극같은 거 하지도 마라. 니네 아버지 봐라. 너희 둘 공부 시키려고 얼마나 고생 하시니? 담배값 아끼 려고 담배까지 다 끊으시고...
(난로가로 가서 연탄불을 확인하고, 불문을 조절한 다음, 난로 뚜껑을 닫 고, 다시 대야를 올려 놓고, 막대기로 짤래를 뒤집고 부엌 뒷문으로 휙 나 가는 엄마)
영 신 (마음의 소리) (관객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카메라를 보며) 엄마는 늘 저런식입 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형가들처럼 늘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죠.
사실 남학생들 속에 있다 보면, 옷에 담배냄새 배는건 당연 하잖아요.술이야 딱 한 잔 마셔본 적이 있지만 맹세코 담배만은 피운적이 없다구요! (생각해 보니까 분하 다는 듯이 발딱 일어서며 큰 소리로) 엄마!!
(땡땡... 시계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뒤이어 경쾌한 피아노 음악이 흐른다)
씬 12 시골 국만학교 운동장 (낮)
(창문의 커텐이 다 내려져 있는 학교 건물 앞에 게양된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조례대 위에는 눈사람이 하나 세워져 있다.
운동장에는,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자기 몸집보다 커진 눈덩이를 신나게 굴리며 그네를 타는 아이들. 양지바른 계단이나 벽에 기대 앉아서 햇빛을 쬐고 있는 아이들. 눈 내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이 놀고있는 풍경 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멀리 지나가는 영신)
( WIPE )
씬 13 멀리 철길이 보이는 풍경 (낮)
(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듯한 눈 쌓인 들판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 전봇대의 짙은 나무색이 흰 눈발과 선명한 대 조를 이루고 있고,허공을 가르는 전선위에는 참새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눈 덮힌 산들은 저멀리 배경처럼 서있고,멀리 기차가 조용히 지나간다.경적 뿐 인 이들 풍경을 가르며 바쁜 듯이 반쯤은 일어나서 페달을 밟고 화면 앞을 지나가는 영신. 볼은 빨갛게 상기 되어있고, 숨이 벅찬지 입에서는 연신 흰 입김이 훅훅 나오고 있다.
( WIPE )
씬 14 신작로 (낮)
(자전거 바퀴 자국이 있는 눈덮힌 신작로.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수들이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가끔 툭 툭 눈덩이를 길 위로 떨어뜨리고 있다.늘어선 가로수 사이사이로는 눈덮힌 논들이 보인다.화면 아래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나온 영신은 인적이 드문 시작로를 달려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영신의 뒷모습이 사라진 길 끝 위 겨울 하늘에는 눈빛보다 좀 흐린 구름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 WIPE )
씬 15 학교 복도 (낮)
(쪽마루가 깔린 복도쪽으로 난 창문들은 하얗게 얼어 붙어있다.신발을 벗 어들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영신. 왁자하게 하꺼번에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 에 놀라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가 연극연습실로 쓰고 있는 교실 창으로 살 금살금 다가가 몰래 숨긴채 안을 들여다 본다.)
씬 16 연극 연습실
(남학생 한명이 중국 무술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쌍절곤을 휘두르는 연기 를 코믹하게 해보인 다음 위자에 앉는다. 커텐이 예쁘게 걷혀져 있는 운동 장 쪽으로난 창에서 비쳐든 햇살은 교실안 마루바닥에 떨어져 빛무늬를 만 들고 있다. 분필로 “우리읍내”라는 글씨가 적혀져 있는 칠판 아래는 교단 이 있고, 한쪽 옆에는 교탁이 보인다.
주전자에 든 물이 끓고 있는 난로를 중심으로 스무명 정도의 연극반원들이 큰 반원을 그리며 철제의자에 앉아있다. 그 속에는 앞에서 소개된 문수,미 숙의 모습도 보인다.
학생들은 차례 차례 일어서서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학생 1 (교련복 차림의) (무뚝뚝한 어투로) 저는 법대 3학년,이홍민입니다.
특기는 없고...사 실 이번에는 연기보다 무대 연출을 좀 해 보고 싶습니다. 이상입 니다.(자리에 앉는다.)
학생 2 (약간 뚱뚱한 남학생) (일어나서 갑자기 혁대를 풀어 들고 뱀장수 흉내) 자,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리산 청석골에서 이슬만 먹고 자란 비-암 , 비-암으로서 자, 오줌만 쌌다 하면 오줌줄기가 힘없이 뚝뚝 떨어지는 분,아침에 일 어났다 하면 식은 땀이 찔찔 흐르는 분...잠시만 봐.
(연극반원들 정신없이 웃고 박수친다.)
은 희 (수줍음을 몹시 타는 듯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인채로) 저는요...원래는 안그런데 사 람들 앞에 서면 떨려서 말도 잘 못 하구요... (울 듯이) 국문과 1학년 양은희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휴~쉬며 털썩 주저 앉는다.)
윤 미 세익스피어가 얘기했듯이 우리 인생은 어차피 한바탕 연극 아니겠습니까?...
(자기 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윤미의 모습 위로 영신의 나레이션)
씬 17 학교 복도 (낮)
영 신 (마음의 소리) (카메라를 보고 얘기한다.) 쟤는 늘 저렇게 말만 뻔지르르 하답니다. 윤미가 하는 말중 반은 다 거짓말 이라고 맏어도 될 정도죠.그런데다 생전 가야 차 값 한번낼줄 모르는 학생이구요. 그것 뿐일줄 아세요?
미팅 광이라서 맨날 수업도 빼먹고 남자 꽁무늬를 졸졸 쫒아 다닌답니다.어쩌면 저 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어느새 영신의 코앞에 다가와 있는 창욱, 창문을 열며)
창 욱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박영신이지?
영 신 (무안하지만 이름을 기억하는데 대한 기쁨으로 따라 미소짓는다.
창 욱 의자 거기다 갖다 줄까?
씬 18 연극 연습실 안 (낮)
(고개를 들고 창욱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연극반원들 사이에서 속에 불만 이 가득 하면서도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섭섭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이럴수가!
...... 정말 이럴수가! ... 암만 생각해도 이럴수가!
(창욱의 소리가 파고든다.)
창 욱 (일어서서) ...... 누군가 인생은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만남을 통해서 성장을 하고 어른이 되고,그러면서 자기 삶을 넓혀 나가는게 바로 인생이라는 얘기죠.여러분은 지금 “우리읍내”라는 연극 , 그 연극 속의 인물들 ....... 여러분 각자와는 다른 개성을 지닌...... 그런 인물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습니다.그 만남이 여러분 추억의 앨범에 영원히 꽂혀있기 위해서는 그 만남에 최선을 다해야 될 겁니다.대학시절 한때 가질 수 있는 취미활동이나 오락 쯤으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겁니다.여러분 앞에는 이제 취할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숨도 조심스럽게 내쉬고, 눈을 진지하게 빛내며 창욱을 바라보고 있는 연 극반원들. 영신도 고개 들어 창욱을 바라본다.
날이 풀리는지 얼었던 유리창이 수정 물방울을 만들면서 즐겁게 녹아내리 고 있다. 어느새 창욱이 서있는 교실 깊숙한 곳까지 비쳐 든 햇살, 온몸에 햇살을 받고 서있는 창욱의 모습이 마치 빛의 기둥처럼 느껴진다.
역광에 눈이 부신 듯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 다음에 얘기를 계속하는 창 욱)
창 욱 “항상 취해야만 해요.
그게 전부죠. 그게 유일한 문제죠.
여러분들이 어깨를 무너뜨리고
땅쪽으로 여러문을 눕히는
시간이라는 무거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쥐하겨야 해요........“
보들레르의 시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취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술에 취하고 담배 에 취하고, 아니면 여자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그러나 연극같은 예술에 취해서 젊은 날을 보내는 것 이상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겁니다......
(창욱의 얘기는 계속되고 있고,
주전자에서 끓고있는 물소리는 마치 빈 그릇을 채우듯이 교실 안에 차오르 고 있다. 이윽고 다른 모든 소리는 교실안에 가득해진 뜨겁게 끓는 물소리 에 부드럽게 녹아든다.)
씬 19 영신의 일기장
(푸른색 잉크가 든 만년필에 의해 씌어지는 - )
영 신 (마음의 소리)
......
해삼
멍게
말미잘
악마, 악마!!
뭐? 만남이 어떻고 예술이 어떻다고?
애들도 그렇지? 그게 멋있다고? 그 넋나간 표정하며, 기립박수라니!
정말 철없다. 정말 철없어!
씬 20 영신의 집 안 방 (밤)
(웃목에는 장롱, 재봉틀, 코미디 종류의 프로그램이 방송되고있는 흑백텔레 비젼, 사기로 된 요강이 놓여있고, 방 한쪽으로는 나이롱 줄로 된 빨래줄이 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방.
아랫못에 깔린 조각이불에 다리를 묻고 생각에 잠긴 영신. 눈동자를 이리 저리 치켜 드는 곳마다 창욱의 얼굴이 나타난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급기야 열 손가락으로 머리속을 신경질적으로 해 집는다. 파자마에 가디건 차림의 호인형 아버지,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담 배를 꺼내물며)
아 빠 (영신에게) 왜 , 머리 안감았냐?
영 신 아니, 머리 속이 이상해서!
아 빠 ......
영 신 꼭 이상한 벌레같은 게 한 마리 들어와가지고 아무리 쫒아내려고 그래도 안나가는 것 같아서 ......
아 빠 (웃으면서) 거참 벌레치고는 이상한 벌레구나.
(바깥에서 엄마의 소리 들린다.
“영선아 , 밥 먹고 공부해라”
이어 밥상을 들고들어도는 엄마)
엄 마 (아빠에게) 당신 끊었다더니 또 담배에요? 그 재떨이 좀 치워요.
아 빠 (재털이를 한쪽으로 밀쳐 놓으면서) 담배 끊었다고 해도 그 친구가 자꾸 사서 집어 넣어주는 바람에......(아쉬운 듯 담배불을 끈다.)
엄 마 (아랫목에 묻어 둔 밥을 꺼내며 영신에게) 너는 니일 다 했으면 동생 공부나 좀 봐 주든지 그러지 테레비나 보고 있냐?
(밥 그릇을 밥상에 놓으면서 혼잣말처럼) 애들 공부 끝날 때 까지는 테레비 안사려 고 했더니 이이는 우겨갖고......
(텔레비젼을 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영선, 밥상머리에 앉는다.)
아 빠 (엄마에게) 보기 흉하니까 당신도 방에서는 마스크 좀 벗구려.
엄 마 (웃으며 마스크를 벗으며) 외뭉이 세서 겨울에는 자꾸 콧물이 쭐쭐쭐 나오니까 그 렇죠. 그러는 당신이 그럼 담배값이라도 줄여서 보일러나 놔 주구려.
(대문쪽에서 찌이익 하는 옛날 초인종 소리 들려온다.)
영 선 (문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누구세요?
(잠시후 방으로 다시 들어온 영선, 영신에게) 언니 나가봐.
문수 오빠가 잠시 보재.
엄 마 (영선에게) 문수면 들어오라고 그러지 그랬냐?
영 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나가봐 , 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영신)
씬 21 영신의 집 대문 앞 (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영신.
대문 앞에 있을 줄 알았던 문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영신 두리번거리 는데 대문에서 조금 떨어진 어둠 속에 있다가 그때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영신쪽으로 아가오는 문수)
영 신 왠일이니? 들어오지도 않고......
문 수 (망설이다가) 그냥...... 밖에서 차나 한잔 할까 하고......
영 신 ......
씬 22 다방 안 (밤)
(그다지 넓지 않은 실내 중앙에는 연탄 난로가 놓여있고, 그 위에 올려진 주전자에는 김이 새어 나고 있다. 손님이 몇 명 없어 한산하고, 여종업원은 한 구석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아있다.
한복차림의 마담은 계산대에 앉아 손거울을 보며 머리 매무새를 다듬고 있 다.낡은 스피커에서는 이장희의 “그애랑 나랑은”이 낮게 흘러 나오고 있다.
“ 그애랑 나랑은 비밀이 있었네
그애랑 나랑은 남모래 만났네...“
구석진 자리에 마주 앉아 있는 영신과 문수.
영신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 부르면서 커피잔을 만지 작거리고 있는 문수를 곁눈질로 관찰하다가 얘기를 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영 신 고민 있으면 말해봐. 뭐든지! ......너, 아버지한테 혼났니?
그래, 니 아버지는 목사님이라서 그런지, 좀 딱딱하고 고지식하더라, 그렇지?
문 수 저...너 그 책 읽어봤니?
영 신 무슨 책? (생각난 듯) 아직 못 읽어봤어. 그거 물어 보려고 그랬니?
문 수 (당황해서) 아 아니...(뭔가 말할 듯 하는데) 저 , 그, 그게...
영 신 (옆좌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을 힐끗 보고) 너는 담배 안배우니?
얘, 담배 배우더라도, 그 사람처럼 피우지 마라.
문 수 그 사람? 누구?
영 신 그 연출가 말이야! 얼마나 꼴촌줄 아니? 서울서 보니까, 담배를 시키는데, 꼭 두갑 씩 시키더라. 두갑씩
문 수 영만이 형 아버지는 나처럼 담배도 안피시는데, 그집에 이제 담배냄새가 꽉 차겠구 나!
영 신 그 사람 영만이 형 집에 묵어? 서울에서 왔다 갔다 안하고?
문 수 영만이 형 군대갔으니까 방도 비어있고, 또 영만이 형이 부탁 한거잖아?
영 신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그래?
씬 23 어느 집 앞 (밤)
(담 밖에서 뒷꿈치를 들고 안을 기웃기웃 하는 영신.
대문쪽으로 다가가 잠기지 않은 문을 살짝 밀치면서 안을 들여다 보는데)
(소 리) (남자의) 강선생님이슈?
(놀라서 후다닥 도망치는 영신)
씬 24 멀리 철길이 보이는 풍경 - 씬 13과 동일 (밤)
(들판에 쌓여있는 아직 덜 녹은 눈은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올 때 마다 그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칸마다 불이 켜진 기차가 멀리 기적소리를 내 며 지나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은 정다운 느 낌을 주고 있다.
텅 빈 가슴 속에서 부는 쓸쓸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발길로 툭 툭 돌맹이 를 차면서 걷고 있는 영신.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창 욱 영신이 집이 이 근처 인가보지?
(소리에 돌아보는 영신.
구름을 벗어난 달빛을 받아 환한 표정으로 창욱이 서 있다.)
영 신 (당황해서)
문 수 (부드럽게) 아니면 ,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
영 신 아니, 저... 친구 할머니가 좀 아파서...
창 욱 아까는 내가 좀 심했지? 화났다면 사과 할께.(손을 내민다.)
(놀라서 돌아서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영신.
영신을 일으킬려고 손을 잡아주는 창욱.
일어서서 창피하고 부끄러운 듯 창욱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달빛을 밟으 며 뛰어서 달아나는 영신)
씬 25 영신의 방 (밤)
(넘어졌던 영신이 창욱의 손을 잡았을 때 마음에 팍, 팍, 팍 일어나던 스파 크처럼 켜지는 형광등. 불이 켜질때의 느낌이 꼭 어둠을 깨는 마른 번개의 모습같다. 낮은 스탠드가 켜져있는 아랫목에는 영선이 공부를 하다 잠들었 는지 책을 베고 엎드린채 잠들어 있다.)
영 신 (마음의 소리) (거울 속에 들어서며) 왜 그러지?
백미터 달리기를 했을 때 처럼 호흡도 가쁘고, 왜 그러지?
정말 왜 그러지? 맥박도 팔딱팔딱 빨리 뛰고, 왜 그러지?
얼굴도 확확 달아 올라서 화끈거리고...(두손으로 얼굴을 부비듯 감싸며) 그래, 밖은 춥고, 내가 급히 달려와서... 그럴거야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그런데 왜 가슴은 지금 까지. 이렇게 두근거리지? (부정하면 부정 할수록 강하게 되살아나는 긍정을 확인 하려는 듯, 얼굴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석에 이끌리듯 거울 앞으로 다가선다.)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풀썩 자리에 주저앉는 영신.
바지가랭이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린다.
생채기가 나 있는 무릎 부분에는 붉은 장미꽃잎이 들러 붙은 듯 피가 배어 나와 있다. 속 마음을 들킨 듯 갑자기 얼굴이 발그스레 물든 영신.
시간 경과 -
스탠드 불빛 아래서 일기를 쓰고 있는 영신)
영 신 (마음의 소리 -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듯이) 뭐가 온건가?
내게 뭐가 온건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캔바스처럼 하얗던 내 마음에, 오색 물감 을 칠하는 저 사람은 누구지? 도둑인가? 추운날 마시는 뜨거운 보리차가 내속에 따뜻하게 흘러 넘치는 이 느낌. 허락도 없이 내 마음의 방에 몰래 들어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니는 저것은 무엇인가? 바람인가?
......무엇이 들어왔지?...사...랑..? 사랑......
(일어나서 창문을 여는 영신
사랑의 빛이 열려진 창을 통해 불어들어 온 듯 책상 위만 밝던 방안이 빛 으로 기닥차서 방안 전체가 불 켜진 등불같다.)
( 길게 F.O )
어두운 화면에 등불 하나 켜지듯이 주황빛 자막이 나타난다)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슈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 박정만의 <작은 연가>에서 -
( 자막 F.O )
씬 26 어둠 속
(어둠 속에서 소리 들려온다)
영 신 (마음의 소리) 지금 그 사람은 무얼 하고 있을까? 밥을 먹고 있을까? 밥을 먹고 있 을까? 킥,킥......차를 마시고 있을까......아니면......?
(어두운 화면에 영신의 자전거가 떠오른다.
자전거는 혼자 저절로 미끌어지듯 화면 밖으로 달려나간다.)
씬 27 신작로 (밤)
(논위로 쏟아지는 달빛 때문에 대낮처럼 하얀 밤길. 양 옆으로 늘어선 가 로수들의 그림자 위에만 소복히 어둠이 내려 있는 듯한 길을 자전거를 타 고 신나게 달리는 영신. 손전등을 들고 심부름을 갔다 오던 오누이가 마치 도깨비를 본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들 시야로는 자전거가 사람을 태우지 않고 저혼자 달려 길 끝으로 사라 진다.)
씬 28 창욱의 방 창문 밖 (밤)
(어두운 담벽을 지나 미끄러지듯 창으로 다가가는 카메라. 책상과 옷장, 연 극관계 서적과 시집이 많은 책장이 있는 방 벽에는, 연극 공연 포스터들과 공연 때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방 입구쪽에서는 끓고있는 커피포트와 커피잔이 놓여있다. 공연에 필요한 두꺼운 마분지로 된 미니어쳐 -의자, 테이블, 사다리 등-를 책상 위에 늘 어 놓고 연출 구상을 하는 창욱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카메라 어두운 담벽으로 간다.
길게 초인종 소리 -)
(소 리) (나이든 여자의) 누구왔소? (사이) (혼잣말처럼 안에 대고) 아무도 아니에요. 누가 장난친 모양이에요.
(다시 카메라 창욱의 창으로 가면, 방문이 열리며 영신이 살그머니 들어온다.
창욱, 문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 본다)
씬 28-1 창욱의 방안 (밤)
(창욱, 뒤돌아보면 ,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살며시 닫히는 문.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창욱.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포트에서 빈 커피잔으로 물이 따루어진다.
티스푼을 들고 커피잔에 든 커피와 설탕, 프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잘 녹아 섞이도록 정성껏, 그러나 소리는 나지 않게 젓는다.
커피잔이 공중을 날아가서 책상위에 놓여진다.
창욱은 커피잔이 원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무심코 잔을 들어 커 피를 마신다.
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는 창욱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신.
창욱이 일하는 모습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각도로 바라보는 영신.
- 멀리 벽에 기대어서
- 책상에 걸터앉아서
- 창욱의 등 뒤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 창욱위 얼굴 앞 책상에 턱을 괴고
일에 열중해 있는 창욱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창욱 의 몸쪽으로 손이 간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리듯 -
거대한 자력을 가진 자석에 저절로 이끌리듯이 창욱도 영신의 손을 잡는 다. 그때 창욱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영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 짧게 F.O )
씬 29 연극 연습실 안 (낮)
동 수 (카메라를 보고 말하듯이)....... 자, 이제 여러분도 저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셔서, 젊 은이란 어떤 것이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젊은 날 중에서도 특히 ,첫사랑...... 첫사랑에 빠졌던 시절 말입니다.
(카메라 빠지면, 불 피워진 난로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모여앉은 연 극반원들이 “우리 읍내”대본을 손에 들고 독해를 하고 있다.
성에가 끼어있는 켜텐이 걷혀진 창으로는 아직 햇살이 비쳐들지 않아 교실 안은 좀 썰렁한 느낌이 들지만, 독해를 하는 연극반원들 목소리와 표정은 진지한 열기가 넘친다.)
학생 1 내가 무슨 화를 내.
학생 2 요새 날 이상하게 대하지 않니?
(스탑워치로 시간을 재면서 학생들 독해를 듣는 창욱,눈을 감았다 뜨기도 하고 먼데 창밖을 보기도 하고 담배불을 붙여 물기도 한다.
그런 창우의 일거수 일투족을 넋나간 듯 훔쳐보는 영신. 학생들 독해는 계 속 되고, 그 위로 깔리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지금 저 사람은 알고 있을까? 속에 바람이 가득한 풍선처럼......내 머리 속이 온통 자기 생각으로만 가득한 거, 내 눈에 보이는건 대체, 어떤 인연이 저 사람을 내게 오게 했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양 순 (영신을 툭투툭 친다)
창 욱 박영신 !
영 신 (벌떡 일어서며 국민학생 처럼 큰 소리로) 네!
(놀란 듯 일제히 영신을 바라보는 연극반원들.
시간 경과 -
창으로 비쳐든 햇살이 교실 안을 환하게 채우고 있다.
난로가에서 남학생 몇 명은 도시락과 주전자에 끓인 라면을 도시락 뚜껑에 퍼서 먹고 있다.
햇살이 따사로운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은 여학생 몇 명은 빵과 우유 를 먹으면서 영화 본 얘기를 주고 받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빵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남학생은 교실 안을 도망 다니다가 그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다른 남학생에게 붙잡혀 빵모자가 벗겨진다.
장발 단속에 걸려서 머리가 깎였는지 쥐가 파먹은 듯 머리카락이 움푹움푹 하게 잘려 나간 모습이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 모습을 보라면서 박장대 소를 하는 남학생.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는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치고있는 남학생. 그 주변에 선 여학생 몇 명은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창욱은 칠판에다 무대장치를 그려 설명을 하고 있고, 홍민, 미숙, 양숙, 윤미, 은희는 차욱의 설명을 열 심히 듣고 있다.
이런 풍경을 스케치 하듯이 흝던 카메라는 슬쩍 자리를 뜨듯이 교실 밖으 로 빠져 나간다.)
씬 30 운동장 스텐드 (낮)
(교실 복도를 빠져 나온 카메라가 기둥 하나를 돌면, 내의 차림으로 농구 를 하고 있는 몇 명의 학생들이 있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있는 여신의 모 습이 보인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믈을 손수건으로 닦기도 하고, 막히는 코 를 뚫기 위해 코를 홱홱 풀기도 하며 계속 훌쩍거린다.
이런 풍경 위로 흐르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주먹 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박으면서)
바보 ! 멍청이 !
영 신 ......어젯밤에 몇번 씩 읽고 연습까지 했으면서. 멍청이 ! 박영신 ,이 바보야 !
(날아온 농구공이 영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굴러간다.)
학 생 (달려와서 공을 즛으며 영신에게 큰 소리로) 죄송합니다.
(농구공에 맞은 머리 보다 마음이 더 아픈 듯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발 끝으로 쌓인 눈을 헤적이는 영신.
남학생은 이상하다는 듯 슬금 슬금 영신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다 들고 있던 공을 친구들에게 던져주고 자신도 달려간다.
이때 영신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문수.
영신 가까이 와서 영신 곁에 앉는다)
문 수 (영신의 눈치를 살피며) 배 안 고프니?
(하며 갖고 온 봉지에서 병에 든 우유를 꺼내 영신에게 내민다)
...... 데운거야.
(우유병을 받는 영신. 봉지에서 꺼낸 카스테라의 비닐 포장지를 반쯤 벗겨 서 영신에게 건네주는 문수)
영 신 (빵을 받아 한 입 베어 문 뒤 불쑥) 너, 누구 좋아해 본적 있니?
문 수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글세.
(한숨을 크게 내 쉬는 영신)
씬 31 신작로 (석양)
(하늘을 곱게 물들인 노을빛이 산에, 나무에, 들판에, 길에까지 내리고 있 다. 교복차림으로 재잘대는 남학생과 여학생 몇 명을 태운 경운기가 털털 거리며 영신 곁을 지나 마을로 향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기운없이 걷는 영신. 이런 풍경들 위로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바람아 ! 너는 아니? 누굴 좋아하는 기분말이야.너는 발이...많아서 못 가는데가 없으니까, 누굴 좋아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많이 가 봤을거야.그치?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아 ! 너는 아니? 너는 높은데 있어서 모든 걸 다 볼 수 있으니까,아마 누구 좋아하는 사람 마음도 다 내려다 봤을꺼야. 그렇지? (나무를 슬 쩍 건드리며) 나무야 ! 너는 아니?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하는 얘기 많이 들었으 니까, 아마 알거야. 그렇지?(돌맹이를 하나 툭 차면서) 돌아 너도 알지?
씬 32 논둑길 (석양)
(더 짙어진 석양빛이 빈 들판에 가득하고, 들판 멀리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소롯이 피어 오르고 있다.석양빛에 얼굴이 곱게 물든 영신, 논둑길을 걸으며 나즈막리 노래 부른다)
영 신 “해는 저어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눈물만 흐른다.
내 친구 어디 두고
나 홀로 앉아서......“
씬 33 밤 하늘
(까만 밤,
하늘에는 다이아몬드를 쏟아놓은 듯이 별이 반짝이고 있다.
저 멀리 별똥별 한가 어두운 허공을 가라ㅗ지르며 떨어진다.
병똥별이 떨어지는 속도와 같이 화면이 어두워진다
어두운 화면에 바구니에서 글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이 녹색으로 쏟아져 내리는 자막.
“아름다움이 슬프다는 얘기가 있어
마음에 한줄기 시내가 흘러
달이 밝아서 온 길도 나중엔 흐리었다.“
- 김광섭의 <달밤>에서 -
( 자막 F.O )
씬 34 일력
(어두운 화면에 인화되듯 일력이 나타나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한 장씩 안타깝게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툭툭툭 떨어져 나간다)
씬 35 어디를 봐도 떠오르는 얼굴
(음악이 시작된다.
세수를 하다 본 거울속에 -
밥을 먹는 우거지가 담긴 국그릇 속에 -
찾잔 속에 -
눈을 감아도 어둠 속에 -
문수를 봐도 문수의 얼굴에 -
이런 풍경들 위에 그리움의 빛깔로 떠오르느창욱의 얼굴)
씬 36 영신의 방 (밤)
(엄마의 화장품으로 처음 화자을 한 영신이 슬립 차림으로 마릴린 몬로처 럼, 오른 손으로 왼쪽 어깨 끈을 살며시 내리는 모습이 거울 속에 비친다.)
씬 37 연극 연습실 - 망설임과 질투의 장면들
- 휴식시간에 친구들과 큰소리로 웃고 떠들다가 창욱이 등장하면 갑자기 죄인이라도 된 듯 입다물고 고개를 푹숙이는 영신 -
- 식탁엔 식탁보를 씌우는 등 무대장치를 만들고 있는 연극반원들 -
- 소품인 벤취에 페인트칠을 하다가 무대장치를 옯기려는 창욱을 도와주 러 급히 가려다 페인트통을 엎지르고 민망해하는 영신 -
- 연극반원 한 사람이 이고 온 큰 함지박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연극반원 들. 흰 밥상보를 벗기면 총각김치가 담겨있다.
창욱에게 주려고 고구마 껍질을 벗겼으나 동작 빠른 윤미가 먼저 건네준 고구마를 받아서 먹는 창욱. 손이 머쓱해져서 윤미에게 눈을 곱게 흘기며 자신이 깐 고구마를 우적우적 먹는 영신. -
씬 38 교문 앞 (밤)
(군데군데 쌓여있는 잔설이 달빛에 흰빛을 더하고 있다. 연극연습이 끝난 연극반원들, 서로 내일 만나자는 인사를 하며 헤어지고 있다.
신발끈 핑계를 대며 주춤주춤 뒤로 처지는 영신.
멀리 어둠속에서 걸어 나오는 창욱.
영신을 발견하고 왜 안가냐고 묻는 시늉을 한다.
뭔가 말을 할 듯 하다가 신발 끈 때문에 그렇다는 시늉을 하며 먼저 가시 라고 손짓을 하는 영신.
영신에게 신발 끈을 묶은 다음에 잘 가라는 듯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는 창 욱.
창욱에게 하려고 준비한 말을 차마 못해서 안타깝고,그런 자신에게 속이 상한 듯 창욱이 사라진 속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서 있는 영신.
음악 끝난다)
씬 39 교회 종탑이 보이는 마을 풍경
(지붕에 잔설이 있는 집들 사이에 솟아있는 교회종탑에서 울려퍼지는 종소 리가 새벽의 푸른 안개 속으로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종소리가 아침이 오는 길을 틔운 듯 마을이 서서히 환하게 밝아진다.)
씬 40 시골 교회 (낮)
“내 주는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어라...“
(카메라, 찬송가가 평화롭게 흘러나오는 창으로 다가가면, 햇살이 은총처럼 비쳐들고 있는 자그마한 교회당안 풍경이 보인다.
낡은 양복을 정성껏 다림질 해서 차려입은 남자들, 소박한 양장차림의 부 인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부인도 있다.
쪽 진 머리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할머니들, 교복 차림의 중,고등학교 남.녀 학생들,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은 국민학생들이 앉은채 찬송가를 부르 고 있다. 풍금반주를 하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문수.
창 밖에서 영신이 , 예배 끝나면 뒷뜰로 나오라는 신호를 하고 있다)
씬 41 교회 뒷뜰 (낮)
(파아란 하늘에는 흰 구름 한점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마른 잔디와 사철나무 등에 잔설이 남아있는 교회 뒷뜰에서 초조한 듯 서 성대고 있는 영신)
(소 리) (문수의) 왠일이니?...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는 영신)
문 수 (다가오면서) 우리 아버지 무섭다고 한번도 교회 안 오더니
...... (영신의 나들이 옷차림을 보고) 어디 가는 길이니?
영 신 응...문수 너, 영만이 형네 같이 안 갈래?
문 수 (의아한 듯) 영만이 형이 벌써 휴가 나왔나...?
영 신 아니 그게 ... 그게 아니고...
문 수 아, 강선선생님 뵈러 가려고 그러는구나?
영 신 (당황한 듯) 아니 그게 아니고 ... 영만이 형 구들장도 고치시고, 보일러 놓으시잖 아? 엄마가 돈이 얼마나 드나 알아보라고 한지가 옛날인데, 여태 못가서. 생각 난 김에 갈려고 ... 문수 너 같이 안 갈래?
문 수 ......
씬 42 영만의 집 (낮)
(사철나무와 잎 진 라일락 나무가 있는 작은 뜰을 가진 한옥집.
마당 한쪽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다. 지붕위에 쌓여있던 잔설이 햇살에 녹아 서 처마밑으로 똑똑똑 물소리를 내며 떨어녀 내리고 있다.
햇살이 따뜻하게 떨어져 내리는 마루 끝에 걸터 앉은 영신과 문수에게 나 이가 지긋하고 대머리에 인자한 모습의 영만이 아버지가, 보일러에 관한 얘기를 진지하게 하고 있다)
영 신 (마음의 소리) 나는 왜 바보 같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왜 문수한테 솔직하지 못했을까? 강선생님 댁에 간다고 말했으면 됐을걸.
(문수를 본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얘기를 듣고있는 문수.
창욱의 방 쪽으로 힐끗 보는 영신의 시야에 창욱의 신발이 들어온다.)
지금 저 방에서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이 레코드판을 같이 듣고 있어야 할 내가.
아~(한숨 쉬며) 이렇게 보일러 얘기나 듣고 있어야 하다니 ...! 도대체 강선생님은 내가 온 걸 아시는 걸까? ... 아시면 좀 나오실 일이지...
영만부 (영신에게) 그래 집이 몇 평 정도 되지?
영 신 (창욱의 방쪽을 대고 큰 소리로) 아, 네 , 그게 ... 30평정도는 될거에요.
영만부 (혼잣말처럼) 그거 다 놓으려면 비용이 꽤 들겠는데 ...
영 신 (짜증이 난 듯 더 큰소리로 영만 아버지에게) 얼마쯤 드는데요?
영만부 (영신에게) 글쎄 ...
문 수 (영만 아버지에게) ... 선생님은 잘 계시죠?
영만부 안 들러봤나? 계실텐데 ...
문 수 (영신의 눈치를 보며) 아 , 예, 좀 있다 들를려구요.
영만부 (혼잣말 처럼) 우리 내외야 뭐 하나 밖에 없는 아들놈 군대 보내고 나서 좀
적적 했는데... 영만이 신신당부도 있고 해서 한다고는 해 드리는데...
글쎄.. 서울 양반이 돼놔서 아무래도 좀 편치는 않으시겠지?
.. (영신에게) 그래, 공사는 언제쯤 하면 될까?
(문 열고 나오는 창욱. 자동인형처럼 발딱 일어나는 영신)
영 신 안녕하세요? 선생님!
(뒤따라 일어서는 문수,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창 욱 여기 놀러 왔냐?
영만부 (창욱에게) 보일러를 놓는다고 그래서.. 어디 나가시나 보죠?
창 욱 (영만 아버지에게 ) 집에 일이 있어서, 서울 좀 나져 오려구요.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영 신 (나가져는 창욱을 불러 세우듯 황급하게) 저, 선생님!!
창 욱 (돌아보며 영신에게) 왜, 무슨 할 얘기 있나?
영 신 (인사를 꾸벅 하며) 서울 잘 다녀 오세요, 선생님!
(엉겹결에 영신을 따라서 꾸벅 인사하는 문수)
창 욱 (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그래 갔다 와서 보자.
(영만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자, 다녀 오겠습니다.
영만부 (창욱에게) 연탄불 갈아 넣어 놓겠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창욱.
눈 녹은 물이 처마밑으로 똑똑똑 떨어지고 있다.)
씬43 영신의 방 (밤)
(전축의 턴테이블 위에 레코드 판이 올려진다.
이어, 바늘이 올려지고, 판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감미로운 슬픔처럼 흘러
나와 방 안에 낮게 깔린다.
카메라 빠지면 영신이 창욱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가지고 갔었던 것임임을
말해주는 레코드판 포장지가 보인다.
전축앞에 두 다리를 오무려 세우고 오도커니 앉아 있는 영신)
영 신 저는 선생님의 모든 것을 다 알아요.
(영신의 소리를 따라가면, 전축 옆 벽에 기대 앉은 창욱)
창 욱 (부드럽게 웃으며) 다 안다고..?
영 신 그럼요! 선생님은 제 이름이 박영신이고, 미술대학 1학년... 그리고 열 아홉 살 난
철부지 계집애라는 거... 기껏 뭐 그정도 밖에 모르시죠?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의
모든 것을 다 알아요.
창 욱 ......
영 신 나이는 서른 둘, 키는 176.5센티미터, 혈액형은 에이형. 생일은 12월10일
(아쉽다는 듯이)이미 지났죠?
그리고,... 좋아하는 색깔을 보라색, 담배는 늘 청자, 커피는 블랙인데, 기분이 약간
울적할 때는 달콤한 설탕 한 스푼. 일이 잘 안 풀릴때는 이렇게 (오른손 주먹을
쥐고 검지 손가락을 물어 뜯는 시늉을 해 보이며) 하시죠? 아니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시거나...
창 욱 (놀랍다는 듯이) 야! 박영신, 앞으로 셜록 홈즈같은 역을 맞기면 되겠는데..?
영 신 그 뿐인줄 아세요? 회식날 할머니 집에서 막걸리 마시며 브레히트에 대해 얘기
하실 때, 담배불티 하나가 떨어져서 선생님 와이셔츠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그것도 저는 봤어요, 선생님도 모르고 계셨죠??..
(창욱,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으로 웃옷을 들춰보면,
하얀 와이셔츠 포켓 근처에, 아주 가까이 들여다 보아야 볼수 있는 담배불
자국이 나 있다. 이 풍경 위로 깔리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어떻게 그 모든 것 까지 다 일고 있는가, 궁금 하시죠?
(나레이션과 함께 편지지에 편지를 쓰고 있는 영신의 손)
영 신 (마음의 소리) 저는 천사거든요, 선생님이 학교에 처음 오셨을 때, 철학자 쉐스포트
가 그랬다면서, 말씀하셨잖아요. 천사는 온 몸이 눈이라고, 그래서 모든 것을 볼수
있다고..
(구겨지는 편지지.
머리를 괴고 생각에 잠긴 영신의 책상 위에는 디자인이 각양 각색인 예쁜
편지지들이 다양하게 파지와 함께 놀려있고, <편지 교본>과 여러권의
시집이 놓여 있다. 문이 열리면서, 연탄을 갈러 가려는지 연탄집게를
들고 털 조끼를 입은 엄마가 들어오며)
엄 마 영선이 왔니?
영 신 (돌아보며) 아뇨, 아직 아 왔어요,
엄 마 아니 그럼 너 혼자서 그렇게 중얼중얼 했니?
영 신 ....
엄 마 공부 계속 할거면 계란 후라이라도 하나 해다 줄까?
영 신 괜찮아요, 엄마. 금방 잘 거에요.
엄 마 그래, 그럼 어서 하고 자라, (나가며 혼잣말처럼) 애가 오늘 도서관에서 밤 샐
모양인가..
(시간 경과 -
중얼 거리며 방 안을 서성대는 영신)
영 신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고 있는 시간입니다.
...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너무 감상적이야, 유치해... (거울을 보며)
선생님! 제마음의 풍경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지금 제 앞에 계시다면요...
(석고상을 마주 보고) 선생님, 사랑... 아니 존경해요.. 저도 선생님 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고개를 가로 젓는데, 창밖에서 들려오는 “찹쌀떡, 메밀묵!”소리.
영신, 커튼을 젖히고 내다 보면 방한복에 방한모를 푹 눌러 쓴 소년이
겨울밤의 정적을 깨며 찹쌀떡과 메밀묵을 팔러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총총총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아가씨의 모습도
보인다.
시간 경과 -
창틀을 흔들고 윙윙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는 바람소리.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영신)
영 신 소방서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거기에 <르네상스>라는 작은 음악다방이 있습니다.
토요일 연극연습이 끝나고 나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97... 날짜를 쓰려는데 그 위로 선홍색 액채가 한방울 똑 떨어진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영신.
댕댕! 다섯시를 알리는 괘종 시계소리가 들린다. )
( 길게 F.O )
(어두운 화면서 새벽의 푸른 빛으로 나타나는 자막)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을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
- 안도현의 <기다리는 이에게> 중에서 -
( 자막, 사라진다 )
씬 45 음악다방 르네상스 안 (낮)
영 신 (부끄럽고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제 편지 받으시고 당황 하겼죠?
사실 저도 무척 많이 망설였어요...우체통 앞에서...부칠까 말까...편지를 받고 화를 내시면 어쩌나...두렵기도 했고...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읽어버리면 어쩌나...걱정이 되기도했고...그렇지만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인 끝에 결국 용기를 내서 부쳤 죠.
(카메라, 빠지면, 영시느이 앞 자리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다. 젊은 남녀 들이 쌍쌍이 앉아서 커피나 차를 마시며 낮은 얘기를 주고 받는 실내에는 클래식 음악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구석자리에는 책 일기에 열중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도 보인다.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서 있는 전신주에 매달린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는 영신.
시계는 5시 40분쯤을 가리키고 있다.
창밖으로, 창욱이 길 건녀편 전봇대 위에서 <르네상스>안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어서서 카운터로 가는 영신.)
영 신 저는 박영신이라고 하는데, 혹시 저 찾는 전화 없었나요?
......제가 딴 생각 하느라도 못 들었나 해서요...
종업원 (기억을 더듬듯이) 박영신씨라... (웃으며) 주가 전화 하기로 한 모양인데 이거 미안 해서 어떡하나? 전화가 오후부터 불통인데, 아직 고치러를 안오네...!
영 신 (낭패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며) 네, 그렇군요.
(자리에 돌아와 앉는 영신.
창밖으로 창욱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다방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는 영신.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네 얼굴매무새를 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문 쪽으로 시선을 준다.
이런 풍경들 위로 깔리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안오는 걸까? 오늘 따라 내가 대사를 까먹어도 야단을 안치고, 말없 이 웃기만 하더니 ... 그게 여기 안 올 작정을 하고, 미리 나를 위로 하려던거 아니 었을까?...아니야...그렇담 왜 안오는거지?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나? 교통사 고? 교통사고 당한 건 아닐까? 학교 앞 그 건널목,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인데...?아닐 거야...왜 안오지? 편지를 못 받았나?... 나쁜 자식! ... 그래, 차라리 잘됐어.끄까짓 연극, 관심도 없었는데, 뭐.
앞으로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지 뭐.(눈물이 핑도려는걸 억지로 참으며) 나쁜자식!
남 자 (예쁘장하게 생긴) 저... 친구분이 안 오시는 모양인데... 제가 차를 한잔 사도 되겠 습니까?
(하면서 영신의 앞자리에 앉는다)
씬 46 학교 운동장 (밤)
(눈부라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어둠에 잠긴 운동장.
코트주머니에 두손을 찔러 넣고 걸어오는 영신)
영 신 (혼잣말처럼) 멍청한 자식! 내가 바람이나 맞을 사람 같애?
바보같은 놈 !
(휘몰아친 바람에 겨울나무의 잔 가지들이 툭,툭 부러져 떨어져 내리고 있 고, 땅바닥에 쌓였던 눈들은 쓸리듯이 분분이 날리고 있다.)
영 신 ... 그런데 지금 내가 어딜 가고 있는 거지?...
씬 46-1 학교 안 계단 (밤)
(어둠이 눈처럼 소복소복 쌓여있는 계단을 오르는 영신.
발소리가 메아리를 만들고 있다
반 쯤 열려진 창문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쳐 들고 있다.)
씬 47 연극 연습실 안 (밤)
(어둠 속에서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온다,
교실 안을 한바퀴 둘러보는 영신.
교실 한쪽에는 연극에 필요한 완성된 소도구들
- 색칠된 사다리, 식탁, 벤취, 의자, 탁자 등 - 이 놓여 있고, 한쪽에는 완 성된 의상들이 옷걸이에 걸려있다.
칠판에는 배역과 연극연습 일정표 등이 적혀있다.
창욱이 잘 앉는, 불꺼진 난로가 의자에 가 앉는 영신.
창욱이 생각에 잠겼을 때의 동작, 창욱이 담배를 피울때의 동작, 창욱이 좀 심각해졌을때의 동작, 난로불을 쬐는 동작드을 흉내내어 본다.
거울앞에 가 서는 영신.
머리에 쌓였던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창가로 가는 영신.
커텐을 살며시 젖히고, 눈 내리는 창 밖 어둠 속으로 하염없이 눈길을 준 다.)
씬 48 창욱의 집 앞 (밤)
(눈이 세차게 퍼붓는 골목길.
전봇대에 매달린 방범등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전선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지, 불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있다. 그 불빛에 기대어 서서, 커텐이 내려진 채 불이 꺼진 창욱의 창을 바라보는 영신.
영신의 마음에 가득해진 어둠처럼 화면 한 쪽에 떠오르는 자막)
“아는가, 그대
그대를 위해서 비워 둔
내 마음의 빈 방에
가득한 이 어둠을
아는가, 그대
깊고 깊은
내 그리움의 심연을 ... “
(자막, 사라진다)
씬 49 술집이 늘어선 골목길 (밤)
(카메라, 불빛이 흘러나오는 술집 창들을 영신의 슬픔처럼 흝고 흐르다가 <할머니집> 이란 옥호가 페인트로 씌어진 술집 창에 이르면 깍두기 안주 만 놓고 술을 마시고 있는 창욱의 모습이 보인다.
반쯤 연 문을 잡고 울먹거리는 영신, 머리에 쌓였던 눈이 녹아서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다.
누가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큰 울음이 터져 나올 듯한 모습으로 서서 말없 이 창욱을 본다. 술잔을 내려놓던 창욱,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문쪽으로 시 선을 주다 영신을 발견한다. 고통스러운 듯 다시 주전자를 들어 술잔이 철 철철 넘치도록 술을 따르는 창욱.
슬픔이 폭발한 듯 흐느끼며 뒤돌아 뛰쳐 나가는 영신)
씬 50 술집 밖 (밤)
(<할머니집> 가까운 전신주에 기대어 소리내어 우는 영신. 온몸이 슬픔과 설움에 젖어 있는 듯 하다. 영신 곁으로 느리게 다가와 영신을 어떻게 달 래야 할지를 몰라서 잠시 주춤대는 창욱.
영신의 들먹거리는 어깨에 말없이 한 손을 얹는다.
비에 젖어 작은 새처럼 오돌오돌 떨고 있는 영신.
창욱,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눈에 젖은 영신의 목에 감아 준다.)
씬 51 밤거리
(어느새 눈은 그치고, 간혹 부는 바람에 날리는 눈.
세상이 온통 흰 옷을 입은 듯 하다.
문을 닫는 상점이 하나 둘 보인다.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걸으며 집으로 가는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창욱,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차도 쪽으로 서서 걷고 있다.
창욱 뒤에 약간 지쳐서 뒤뚱거리며 걷는 영신.
카바이트 불을 밝히고 장작불을 피워서 고구마를 굽고 있는 고구마장수의 수레를 지나는 영신과 창욱)
창 욱 중학교 다닐 때 였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때였지. 숟가락이 든 빈 도시락 을 달랑거리면서. 어두운 긴 골목길을 걸었을 때 였는데, 꼭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오는것만 같았지.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어. 어둠 뿐이었지. 그러 면 막 두려워지곤 했어. 그래서 눈을 힘주어 꽉 감았다가 뜨고 앞을 보면, 거기도 어둠 뿐이었지. 어둠...... 살면서 늘 그랬어. 앞을 봐도 어둠이고, 뒤를 봐도 어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
씬 52 육교 위 (밤)
(육교 위를 걷는 영신과 창욱)
창 욱 ... 그때 한 여자를 만났지.
어둠 속에서 좌초한 나를 인도해 줄 등대불 같았던 여자, 그래서 결혼을 했지.
영 신 .......
씬 53 기차 건널목 (밤)
(기차가 달려 오는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고, 기적소리가 들려
오는 풍경 위로 영신의 나레이션 )
영 신 (마음의 소리) 결혼을 하면 눈 앞의 어둠이 다 걷힐 줄 알았는데, 그건 아름다운
오해 였다고 그는 말했다. 어느날 문득 결혼생활 이라는 것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이고, 때로는 구차하게 만드는 덫처럼 느껴졌다고... 그러면서 그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너무 크게 가졌던 게 실수였던거 같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지?...
(기차가 남긴 기적소리의 여운과 뽀얀 김이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영신과
창욱. 차단기가 올려지고, 건널목을 건너는 영신과 창욱.
영신과 창욱은 약간 사이를 두고 떨어져서 걷고 있다.
이 풍경들 위로 계속되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 그래, 맞아. 시간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좀 돌아보고 싶다고 했어
이곳까지 연극 연출을 하러 내려 온것도 사실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씬 54 영신의 일기장
(썼다가 지운 흔적이 많은 일기장에 씌어지는 일기.
그 위로 계속되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나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고...
(잉크가 안 나와서 글씨가 흐려진다. 잉크를 채운 만년필로 다시 씌어지는 일기)
고백을 했다. 그리고 그는 길이 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걷고 또 걸었다. 내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일까?...
씬 55 다리위 (밤)
(눈 쌓인 얼음 사이로 흐르는 강물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다리위
창욱은 쓸쓸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다리 난간을 잡고 등을 보이며 서
있다. 영신,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하는 적당한 말이 뭔지 몰라서 말을 못
하는 사람처럼 안타깝고 민망한 마음으로 몸둘 바를 모르고 불안정하게
서 있다. 담배불을 붙이던 창욱, 영신의 불안정한, 그러나 사랑이 어려있 는 눈과 마주친다. 자신도 모르게 담배불을 떨어뜨리고 돌연 영신을
껴안고 입맞춤 하는 창욱.
기습적인 입맞참에 눈이 동그래졌다가 눈을 감는 영신,
늘어뜨렸던 두 팔은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하며 어쩔줄을 몰라 하다
가 나중에는 창욱의 목을 감는다. )
(F.O)
(어둠속 - )
영 신 (마음의 소리)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리 그 꿈을 기억
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고, 얼굴에 손을 대보니 눈물만 번져 있었다.
씬 56 꿈
(햇살이 비단실처럼 부드럽게 내리는 봄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영신의 눈에 벚껓 꽃보라 속을 양산ㅇ르 바쳐 들고
환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창욱과 여자.
여자의 얼굴 모습은 양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영신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창욱을 부른다.
그냥 지나치는 창욱)
(F.O)
(어둠 속에서 보랏빛으로 나다나는 자막)
“..........................................................................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는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 붓고 할 것을 믿는다... “
-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중에서 -
(자막, 사라진다. )
씬 57 연극연습실 (낮)
(어둠 속에서 난로 위에 올려진 크고 오래된 듯한 누런 주전자가 인화되듯
떠오른다. 빠앙 기차 소리에 주전자 뚜껑이 물이 끊는 듯 들썩 거리며
뽀얀 김이 솟아오른 것과 동시에 카메라 빠지면, 활기차고 분주하게 연극
<우리 읍내>2막 교회 결혼식 연습 준비를 하는 연극반원들.
연극무대 뒤벽으로 쓸 교실 한 쪽에는, 환등 슬라이드로 색 유리창의 모습
이 비춰지고 -
효과음이 녹음된 릴테잎을 점검하는 창욱과 홍민.
기차소리에서 교회 종소리를 찾아낸다.
연극반원들, 의자, 식탁, 연탄, 촛불, 꽃등을 일사분란하게 준비하는 모습도
보인다. 목사 복장을 한 동수, 대본을 펼쳐들고 카메라 앞을 지나 가며)
동 수 이 결혼식에서 저는 목사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몇마디 더 말씀을 드릴 권한이
있는 것이죠. 이제 잠깐 동안 연극이 다소 엄숙해질 겁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혼인
을 성스러운 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극의상을 입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나눠 피며 카메라 앞을 지나는
연극 반원들.)
반원1 이번 대학생 연극경연대회는 몇팀이나 참가해?
반원2 한 열팀 정도...? 작품이 뭐뭐지?
반원3 아마... 우리 학교 빼고는 거의다 부조리극일걸? 베케트나 이오네스끄...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밀리 역의 윤미 카미라 앞을 빠르게 지나가며
호들갑 스럽게)
윤 미 내 부케 어디가t지? 양순아, 내 부케... 못 봤어?
(촛불을 나르던 양순 )
양 순 윤미 닌 꼭 뭐만 없으면 나한테서 찾니?
(의자에 앉아서 대본을 읽는 영신.
조금 서먹서먹한 상태로 창욱 쪽을 자주 곁눈질 하나 창욱은
연극 반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느라 분주할 뿐이다.
연극 반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며 영신 곁으로 다가오는 창욱.
영신, 무릎 위에 펼쳐 놨던 대본을 떨어뜨리며 엉겁결에 벌떡 일어서나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창욱.
눈물을 질질 흘리며 영신 곁으로 다가온 미숙, 제대로 눈도 못 뜨며)
미 숙 눈물 흘리는 약 좀 개발해야지 안되겠다, 야. 셰익스피어 때나 이거
(수건을 들어 보이며) 양파즙 짜서 눈물 흘리지.. 나좀 봐라. 눈도 못뜨고...
(쏘옴즈 부인 목소리로 )이렇게 조촐한 결혼식을 본 것 같지는 않다니까요,
헌데 늘 눈물이 나오거든요. 왜 그런지 늘 눈물이 터진다니까요...
(자리로 가 앉는 미숙.
미숙의 대사를 듣는둥 마는둥 하며 분주한 창욱을 바라보는 영신)
영 신 (마음의 소리)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가보, 내 입술을 아직 그 느낌을 갖고
있는데. 마치 눈이 내려 앉아서 차갑게, 아주 차갑게 녹아내리는 듯 하던 그 느낌.
내 입술을 기억하는데.. 영신아 저 사람은 그렇지도 안은가봐.
(어느새 다가온 문수)
문 수 (걱정스런 목소리로) 무슨 일 있었니? 어디 아프니?
(문수 소리에 깨어난 영신, 문수의 시선을 피해 대본을 보며 빠르고 작은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뒤, 창욱에 들으라는 듯이 웹 부인 대사를
과장되게 큰 소리로 연습한다.)
영 신 왜 이렇게 울음이 쏟아지는지 알수가 없군요, 울 일이 있어야 말이죠.....
(약간의 시간 경과 -
교회 종소리가 성스럽게 울려퍼지는 연극무대에는, 결혼식 장면이 진행
되고 있다. 연극 반원들은 각자 위치에 앉아있고, 신부 에밀리 역을 맡은
윤미와 신랑 죠오지 역을 맞은 문수는 무대 중앙에서 결혼예물을 주고받고
있다. )
동 수 저도 한때는 이백쌍 이상이나 결혼을 시켰죠. 잘 한 일이냐고요? 글쎄요...
(연극반원들의 연기를 비켜보며 영신 옆 자리에 와 앉는 창욱.
고개를 슬쩍 돌려 영신을 살피읏 바라보는 창욱.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가 창욱과 눈길이 마주치자 황망히 눈길을
거두는 영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웻주머니에서 꺼낸 담배갑을 위로
흔들어 담배를 꺼내려다가 툭, 툭 바닥으로 담배개비를 두 세 개 떨어
뜨린후 담배를 입에 무는 창욱. 당황해서 선냥을 빨리 꺼내다가 바닥에
떨어뜨린다.
얼른 몸을 굽혀 선냥을 줏으려던 영신, 역시 성냥을 줏으려 하는 창욱과
손 끝이 마주친다.
창욱의 손 끝에서 전류라도 느낀 듯 손을 거두는 영신
선냥불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 창욱, 영신 쪽으로 은밀하게 성냥곽을
밀어 놓고 무대 쪽으로 가며 )
창 욱 (동수에게) 자, 다시 한번 더!
동 수 죠오지와 에밀리는 결혼을 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춘남녀가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고.. 자, 멘델스죤의 결혼행진곡을 연주해 주세요.
(맨델스죤의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고, 누가 볼헤라 조심스럽게 성냥곽을
살펴보는 영신.
성냥곽을 살며시 열어보면, 성냥개비가 두 개 들어있는 성냥관 바닥에
<떠나자>란 글씨가 적혀있다.
손을 오무리면서 닫은 성냥곽을 힘주어 쥐는 영신.
얼굴이 상기되면서 심장이 빨리 뒤기 시작한다.
음악은 계속 흐르고, 주전자의 물을 뚜껑을 들썩거리면서 끊고 있다.)
씬 58 영신의 집 앞 골목길 (밤)
(저녁 어둠이 깔린 골목길.
어느집에선가 “영수야 동생 찾아와라 밥 먹게”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구멍가게에서는 동네 아저씨 두세명이 날로가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소년 한명이 세탁소 앞 영화 포스터를 붙인 뒤, 세탁소 주인에게 초대권을
건네주고 영화 포스터를 잔뜩 실은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다.)
씬 59~60 영신의 방 (밤)
(빛 한줄기 스며들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
치익 소릴르 내며 성냥불이 하나 켜진다.
성냥불빛에 의해 희미하게 드러나는 영신의 모습.
창욱이 건네 준 성냥곽을 불빛에 비춰보고 있다.
다시 치익 소리를 내면서 켜지는 성냥불.
얼굴 가까이 대고 불꽃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신. 밖에서 - )
영 선 (소리) 학교 다녀왔습니다.
엄 마 (소리) 그래, 어서 손 씻고 건너와서 아버지랑 같이 저녁 먹어라.
영 선 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불을 켜는 영선.
70년대 여학생 코트 차림에 청색 학생 가방을 들었다.
불이 켜지면, 영신, 책상 앞에 앉아있다.
“어머, 언니 있었네?”....
영 신 .............
영 선 (옷을 갈아 잎으며) 깜깜한데 혼자서 뭐하고 있어?
영 신 .............
(영선, 영신의 대꾸가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가 려는데 - )
영 신 불이나 좀 꺼주고 나갈래?
(불을 끄고 나가는 영선.
어둠 속에서 마치 다시 성냥불이 켜지듯이 스탠드데 불이 켜 진다.
영선은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다.
옷장에 딸린 서랍을 열고 하얀 팬티를 하나 꺼내어 정성스럽게 접은 다음
백에 넣고 다시 양말을 꺼내 백에 넣는 영신.
스탠드 불이 마치 성냥불이 사그라지듯 꺼진다.)
씬61 한적한 시골역 (새벽)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며 자욱한 안개 속에 꿈처럼 잠겨 있는 역사.
카메라, 역사 유리창 가까이 접근해 간다.
불기없는 써렁한 대합실 안에서 서성대는 영신.
창가쪽으로 와서 밖을 내다보다가, 성에 낀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어
<사랑>이라고 쓰는 영신.
유리창에 쓰인<사랑>이란 글씨가 이른 아침 오렌지 빛 햇살을 받아 녹아
내린다.
빠앙 - 먼 기적소리 들린다.)
씬62 기차안 (아침)
(달리는 차창 밖 겨울 들녘에는 아침 햇살이 따라롭게 번지고 있다.
카메라 빠지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영신.
헛기킴과 함께 카메라 안으로 들어서는 창욱.
창욱을 본 영신은 어색해져서 자리에서 엉덩이만 들썩들썩 하다가
결국 일어나지는 못한채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하고, 눈길 줄 마땅한
데를 못찾아서 난감해 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준다.
영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창욱 역시 좀 어색한지 연신 엇기침을 하다
담배를 피워물고 창밖을 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영신과 창욱, 동시에 창밖에서 눈길을 거두어 서로를 보고 뭔가 말을 꺼내
려고 망설이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영 신 .......저..........저.......(창욱이 나타났을 때부터 만지작거리던 가방끈은 이제
비비 꼬여 있다.)
창 욱 ........음.........음......(창욱 역시 영신처럼 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새 담배를 꺼내 물고
피우던 담배불로 불을 붙여 계속해서 줄담배를 피운다.)
영 신 ...........저.............
창 욱 ..........음.............
영 신 (창욱과 눈길이 마주치자) 선생님.. 먼저.. 말씀 하세요.
(담배불을 끄며, 턱짓으로 영신이게 먼저 말하라는 시늉을 하는 창욱)
영 신 (마지못해).... 아참.... 진지는 드셨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푹 숙인다. )
(그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는 창욱. 웃는 창욱을 보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는 듯 영신 역시 창욱을 바주보고 환히 웃는다.
빠앙 - 기적 소리.)
씬 63 역 광장 (낮)
(음악, 시작된다.
낯선 도시의 간이역 건물이 보이는 광장.
커다란 보온통을 놓고 데운 병우유와 잔 코코아, 잔 커피등을 파는 리어카
옆에 서 있는 영신과 창욱.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를 받아서 영신에게 건네주는 창욱.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를 받아서 영신에게 건네주는 창욱. 커피잔을 감싸
안고 온기를 느끼던 영신은 한모금 커피를 마신다.
입안에 든 커피가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이 다 데일 정도지만 창욱 때문에
내색을 할 수가 없어서 커피를 입안 이리저리 굴리다가 뜨거움을 므릅쓰고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꿀꺽 삼키자 눈이 더 동그래진다.
고개를 돌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커피를 호호 불어 식힌다.)
씬64 중국 음식점 안 (낮)
(작은 읍내 허름한 중국 음식점 안. 짜장면은 먹고 있는 영신과 창욱.
창욱은 허기가 몹시 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는다. 영신은 한두가닥씩
한번 먹고 손수건으로 입 언저리를 닦고 또 한번 먹고 임을 닦는 것을
반복한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릇을 다 비운 창욱이 젓가락을 놓자, 영신도 따라서
젓가락을 놓는다.
창욱, 왜 그것밖에 못 먹느냐는 듯 영신의 그릇을 가져가서 다시 젓가락을
든다.)
씬65 호젓한 산길 (낮)
(카메라, 쌓인 눈 위에 나 있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가면, 창욱의
하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걷고 있는 영신과 창욱의 뒷모습.
숲에서 나온 다람쥐 한 마리가 두사람 곁을 쪼르르르 지나간다.
창욱, 영신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다가 자신도 넘어진다.
눈길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소리내어 웃는 창욱.
웃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소, 눈꽃 핀 나뭇가지에서 영신도 따라
웃고 있다.)
씬66 산사 (낮)
(풍경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퍼지고 있는 인적 드문 겨울 산사.
-대응전 안에서 영신과 창욱은 합장을 한다.
-탑 앞 눈 쌓인 절 마당에서 발자국으로 눈꽃을 만들고 있는 영신.
-<사진>이라고 쓰인 노란 완장을 두른 사진사가 영신과 창욱에게 사진을 찍으라
고 권한다.
-영신의 동의를 억고 자세를 취하는 영신과 창욱.
영신은 두 손을 앞으로 다소곳이 모아 쥐고 있고, 창욱은 뒷짐을 지고 있다.
-사진사가 다정한 포즈를 가르쳐주면,창욱은 조심스럽게 영신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는 영신에게 고개르 들라고 말하는 사진사.
찰칵- 소리와 함께 다정한 연인같은 영신과 창욱의 모습이 스톱모션 된다.
음악 끝난다.)
씬67 여관 복도 (밤)
(소 리) (여자의) 이쪽으로 오세요.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벗은 신발을 들고 불빛이 희미한 복도
를 걷는 창욱.
그 뒤로 -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따라 걷는 영신.
걸음을 옮길때마다 마루바닥이 삐걱대는게 신경 쓰이는지, 뒷끔치를 들고
조심스레 걷는다.)
씬68 여관방 (밤)
(불이 켜지면 드러나는 빈 여관 방.
아랫목에는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고, 한쪽 벽에 플라스틱 못 옷걸이에는
철사로된 옷걸 리가 망가진채 매달려 있고 방문 옆 벽에는 빛바랜 범죄자
수배전단, 낡은 달력 (국회의원 사진이 인쇄된) 그림 옆에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적힌 조악한 액자 따위가 걸려 있다.
선반에 신발을 올려놓고 아랫목 이불에 발을 묻고 벽에 기대어 앉는 창욱,
약간 취한 모습이다.
창욱처럼 선반에 신발을 올려놓고, 여관 간판 불빛이 보이는 창가 벽쪽으
로 가서 다리를 한쪽 뒤로 모으고 앉아 양말위로 약간 드러난 맨살에 신경
이 쓰이는 듯 바지 끝을 밑으로 끌어 내리다가 다리를 앞으로 모으고 앉아
깍지를 끼는 영신)
창 욱 (담배 불을 붙이며) 발 시렵지 않아?
영 신 (되묻는 듯 고개를 들고) 네?........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네에...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주전자와 컵을 받친 쟁반을 들고 들어온
다. 동시에 벌떡 일어서서 쟁반을 받아드는 영신)
아줌마 편히 쉬세요. (나간다.)
영 신 네!
(대답하고, 자신도 모르게 문을 잠갔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잠근 도어문을
푼다. 쟁반을 어디다 놓아야 될지 몰라서 잠시 망설인다.)
영 신 (창욱에게) 이거 어디다..... 놓을까요?
(영신을 말없이 올려다 보는 창욱.
영신, 창욱 근처에 쟁반을 내려놓고 다시 제자리로 가서 앉는다.)
창 욱 (물을 한잔 따뤄 마시며) 영관 방 처음이라서... 좀 낯설지?
영 신 아뇨, 괜찮아요,. (공연스레 단추를 만지작 거린다.)
창 욱 코트나 벗어서... 걸어놓지, 그래.
(담배를 물고 붙이는 창욱,.
거꾸로 물어 필터에 불이 활 붙는다.
재떨이에 담배불을 비벼 끄고, 영신을 쳐다보며 다시 담배를 피워 문다.
일어나서 주춤거리며 코트를 벗는 영신)
영 신 (마음의 소리)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신아!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사랑하는 사람... (마음의 소리 끝나고, 창욱을 보며)
저... 화장실좀.... (문 열고 나간다.)
씬69~71 여관에 딸린 목욕탕 (밤)
(욕탕의 불이 켜지면, 쪽마주가 깔려있고, 욕탕 입구 왼쪽 벽에는 붙박이
옷장, 그 맞은편에는 작은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 욕탕 대기실의 모습이
욕탕 대기실의 모습이 욕탕의 간유리를 통해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해 드러난다.
옷장 밑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영신이 집에서 챙겨갖고 온 흰색
팬티가 얌전하게 놓여져 있고, 그 위로 옷을 벗는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 는 영신의 쉐타, 바지, 내의, 양말, 브래지어, 팬티.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거울 속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는 영신)
영 신 (낮게) 엄마.... 미안해요.... !
(열린 문 큼으로 김이 새어 나오고 있다.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
영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욕탕에 가득한 물을 바가지로 퍼서 바닥
에 쪼그리고 앉은태로 온몸에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는 소리.
비누칠해 얼굴을 씻는 물소리.
손을 씻는 물소리.
온몸에 비누칠을 하는지 일어섰다 몸을 구부렸다 하는 모습이 간유리를
통해 간간히 비친다.
침묵속에서 정성스럽게 온몸 구석구석을 씻는 물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더운 김이 뽀얗게 서린 간유리)
씬72 여관방 (밤)
(결심한 듯 쉐타를 벅으려는 영신.
코고는 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돌아보면, 창욱 벽에 기대었다 잠든 듯 스르
르 미끄러져 바닥에 잠들어 있다.
영신, 재털이와 주전자를 한쪽으로 치우고 창욱을 바고 눕히려는데 꿈결인
듯 영신을 끌어안는 창욱. 잠시후 팔을 풀고 돌아 눕는다.
영신, 창욱에게 베게를 배어주고, 이불을 덮어준 뒤 창욱의 얼굴이 보이는
한 쪽으로 가서 벽에 기대어 코트를 이불삼아 무릎을 덮고 앉는다.
영신, 창욱이 구려버린 답배갑을 뜯어 창욱의 잠든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다.)
( F.O )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자막)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멀리도 왔네
지금은 얼마만큼 떨어져 왔나
아득한 먼 벌판에 눈 멎는 소리
당신은 못 듣는가 “
- 최인호의 <밤눈>중에서 -
(자막, 사라진다.)
씬73 골목길 (아침)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란 아이들
노래가 아련하게 들려오면서, 사진이 인화되듯 떠오르는 골목길.
한복을 입은 남자아이 서너명이 제기차기를 시작하면, 정지되어 있던 화면
이 살아난다.
닫혀있는 세탁소 문에는 “오늘, 설날은 쉽니다”란 글씨가 나붙어 있고,
문을 연 구멍가게에서는 선물상자를 사 들고 나오는 한복 차림의 남자도
보인다.
한복에 댕기를 맨 아가씨가 지나가자 그 뒤에서 개구쟁이들은 폭음탄을
꽝- 터뜨리고 도망을 친다.
깜짝 놀라서 귀를 막고 주저앉는 아가씨.
카메라, 이런 풍경들을 지나가면)
씬74 영신의 방 창밖 (아침)
(폭음탄 소리 속에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 영신.
방문을 열고 한복차림으로 옷 고름을 매면서 들어오는 영선)
씬75 영신의 방 (아침)
영 선 언니~ 아무리 매도 이상하게 되는데, 옷 고름 좀 매줄래?
(영선의 저고리 옷 고름 매주는 영신)
영 선 세배 안 드릴꺼야? 왜 옷도 안 갈아 입어?
영 신 ..........
영 선 아, 이제 일년만 있으면 나도 대학생이 된다. 대학생!
고생이여, 굳바이! 언니는 한설 더 먹는거, 하나도 안 즐거운가 보지?
어휴! 날씨도 화창한데, 얼굴 좀 펴라, 펴!
(하며 나간다.
책갈피에서 사진을 꺼내는 영신. 여행지에서 창욱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씬76 한적한 시골 역사 (밤)
(카메라, 소리를 내면서 스산하게 부는 바람소리를 따라 가면, 희미한 불빛
빛이 새어나오는 역사가 어둠 속에 서 있다.
이 풍경 위로 깔리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설 때문에 일주일 동안 연극연습을 쉬게 되었지만, 나는 하나도 즐겁
지가 않다. 그가 떠난 지 스물 다섯 시간 삼십오분 사십초... 사십 일초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시간은 왜 이리 느리게 흐르는 걸까?
씬77 신작로 (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겨울나무들이 겨울바람에 잔가지를 부딪치면서 떨고
있고, 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초생달이 쓸쓸하게 떠 있다.)
영 신 (마음의 소리)...... 그가 이 도시를 잠시 비웠을 뿐인데도, 도시 전체가 텅 빈 느낌이
든다. 내 마음도 텅 빈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두드리면, 마치 빈 항아리처럼 소리
가 날 것 같다.
씬78 교정 (밤)
(어둠 속에서 낙엽이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수위아저씨가 손전
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어둠에 잠긴 교정을 살피고 있다.)
영 신 (마음의 소리)...... 그가 오지 dskg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바람이 장독대를
스티는 소리만 나도 귀를 기울이고, 개 짖는 소리만 나도 길 쪽으로 귀를 열고,
괜스레 빈 우편함을 다시 한번 열어 보기도 한다.
(영신 마음의 소리 위로 찌익- 찌익- 하는 부저소리가 들린다.)
씬79 영신의 집 마당
(맨발로 후다닥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가는 영신. 대문을 열자,
장난에 성공했다는 듯이 와- 소리를 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조무래
기들 모습이 보인다.
힘이 쭉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되돌아 들어가던 영신,
고요 뿐인 밖을 내다 본다.)
씬 80 시골교회 밖 (밤)
(마을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잠겨서 잠들어 있다.
풍금 반주와 함께 노래소리.)
“얼어 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차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영신 노래 소리가 환한 형광들 불빛과 함께 새어나오는 창으로 다가가면,
교회 안에서 스토브를 곁에 켜놓고 풍금을 치면서 눈을 지긋이 감을채
노래를 하는 문수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들어서 창을 두드리려다가 맥
없이 손을 그냥 내리는 영신.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씬 81 다방 (낮)
(창 밖으로 서울역이 보이고 클래식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는 한적한 다방
안.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영신.
문을 밀고 들어오는 창욱을 발견하고 어색하게 손을 들며 엉거주춤 일어
나려다가 도로 앉는다.)
창 욱 (영신의 맞은 편에 앉으며) 전화벨 소리만 듣고도 나는 영신인줄 알았지. 십리 밖에
서도 시냇물 냄샐르 맡는 사슴처럼 나는 어디에 있어도 네 발소리를 들을 수 있으
니까.
영 신 거짓말이시죠?.... 오늘 같은 날.... 제가 여기 와있으니까 그렇게 말씀 하시는 거죠? 위로 하려고....
(창욱 곁을 지나가는 다방 종업원)
창 욱 차 마셔야지? (종업원에게 차를 주문 하려다가) 아니, 차 보다도 ... 뭘 먹어야지.
배고플텐데. 먹고 싶은거 없어?
맛있는거 오늘은 내가 뭐든지 다 사줄게.
영 신 하나도 배 안고파요.
창 욱 그럼 가고 싶은데는 없어? 영화보러 갈까? 덕수궁? 창경원? 남산? 어디가 좋을까?
어디든 좋으니까 분부만 내리십시오.
영 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얼굴을 창욱 가까이 가져가며) 뭘 먹는 것도 싫고, 어디가
는것도 필요 없고, 그냥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아요.
(두사람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고, 텅 빈 자리만 남는다. 영신이 전화를
걸기 전에 상상이었음이 알려진다.
공중전화 박스쪽)
영 신 (수화기를 들고 혼잣말로) 강창욱 선생님 댁이죠? 음,음,... 강... 선생님 댁이죠?
(다이알을 돌린다)
(소 리) 네, 강창욱입니다.
영 신 ........
(소리) 여보세요? 말씀 하세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영신,
용기를 내서 다시 동전을 넣고 다디알을 돌린다.)
(소리) (여자의)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전화를 끊고, 다시 다이알을 돌리나
뚜뚜뚜 하는 통화중 신호음만 들린다.)
씬 82 한옥이 보이는 골목실 앞 (낮)
(봄날 같은 햇살이 보도블럭 위에 소복소복 내려 있는 골목길. 한복 차림
의 꼬마가, 누나인 듯한 여자아이가 페달을 밟고 있는 세발자전거 뒤에 타
고 즐거워 하고 있다.
화면 안으로 들어서며 망설이듯 서성대는 영신의 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황습히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영신의 발.
열린 대문에서 나온 교복차림의 남학생과 한복 차림의 여학생 두어명이
“안녕히 계십시오”인사를 하자, 배웅 나온 부부는 “새해 복 많이 받고,
살펴 가거라“는 인사를 하며 전송을 한다.
사람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서는 영신의 발.
이때, 화면 밖에서)
(소리) (여자의) 아직도 집을 못 찾았수?
씬 83 구멍가게 앞 (밤)
(가게 밖에 걸려 있는 백열 전구의 불을 켜는 아주머니. 색동 포장지로
포장을 한 선물 꾸러미들이 쌓여 있는게 불빛에 의해 환히 드러난다.
아줌마 .... 대낮부터 찾더니 아직도 집을 못찾은 모양이지? 반장님이 댁에 안 계신가? 오자 주소 한번 다시 줘 봐요. 내가 통장님한라도 여쭤볼테니...
영 신 차.. 찾았어요.. 가서 세배도 드리고, 떡국도 먹고,... 놀다가 지금 가는 길이에요. (이 가게에서 산 듯한 선물을 흘낏 거리며) 이 선물은... 선생님이 선말 많이 들어
왔다고, 저보고 다시 가져가라고 그러셔서...
아줌마 (의아한 듯) 아까 찾던 집이... 친척집 아니었던가?
영 신 아, 예. 큰아버지 직업이 선생님이거든요.
씬 84 한옥이 보이는 골목길 (밤)
(불이 켜진 집들에서는 윷놀이를 하는지 “윷이요, 걸이요”하는 소리와 함께
왁자한 웃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불켜진 방범등 뒤에 숨어있던 영신,
결심한 듯 어느집 대문을 향해 걸어간다.
낡은 나무 대문을 살며시 밀치는 영신. 삐걱 소리와 함께 외등이 켜진다. )
(소리) (여자의) 누구세요?
(목소리에 놀라서 발소리를 죽이고 후다닥 다시 방범등 뒤로 가 숨는 영신
예쁜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자가, 대문 밖에 나와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다 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고, 외등이 꺼진다.
다시 대문쪽으로 와 마치 어둠을 열 듯 대문을 여는 영신.
대문 밖의 어둠과는 달리 대문 안 마당에는 불빛으로 환하고, 마루 앞 댓
돌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이 가득하다.
유리로 된 마루문으로는 마루에 낮아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까 대문 밖에 나왔던 여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가득 차린 상
을 들고 나온다. 마루문을 열고 신발을 끌면서 나와 상을 받아 들고 다
시 마루로 들어가는 창욱.
뒤따라 마루로 들어서며 마루문을 닫는 여자.
그 모습을 슬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영신, 대문 안쪽에 선물
상자를 자신의 마음조각처럼 내려 놓고, 어둠을 닫듯이 다시 대문을 닫고
, 웃음 소리가 왁자하게 대어 나오는 골목길로 돌아선다.
두 볼에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다.
선홍색으로 선명하게 새겨지는 자막-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중에서-
(자막, 사라진다)
씬 85 연극 <우리 읍내>
(경쾌한 음악이 시작된다.
빈 화면 좌우에서 분장을 한 연극반원 전체가 우루루 몰려 들어와 사진
찍는 포즈로 정렬을 마치면, 찰칵 소리와 함께 화면이 정지된다.
화면이 풀리면, 연극의 한 장면, 한 장의 스틸 사진으로 찍혀진다.
이때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이 경쾌한 뮤지컬과 슬랩
스틱한 분위기로 묘사된다.
그위로 깔리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왠일일까? 나를 속인 사람이 없는데도 왠일일까? 나는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자. 영신아 무엄이 어고 무엇이 갔는가를.
무엇이 눈앞에서 신시루 처럼 피었다 스러졌는가를...
(연극반원 모두가 무대에 나와 손에 손을 잡고 끝 인사를 한다.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장내가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들린다.)
씬 86 분장실 (낮)
(거울 앞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는 영신)
동 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연극의 한 대사를 읊는다.) 안녕, 이제 우리 읍내도 끝이야..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아버지. 째깍거리는 시계야 너도 잘 있거라. 그리고 엄마가
가꿔놓은 해바라기도... 맛있는 음식과 커피도, 새로 깨끗하게 다림질해 놓은 옷과,
더운 물이 나오는 목욕탕도... 잠자는 것과 눈을 뜨는 것도.
아, 저 아름다운 대지. 대지는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어서, 그 진가를 아무도
모르는 것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 있는동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겠지?
윤 미 (동수의 대사를 받아서) 깨닫지 못하죠. (잠시 사이) 성인들이나 시인들은 혹씨, 깨
닫는 사람들도 있겠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일분 일초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에
요.
미 숙 (영신에게 다가오며) 오! 웹부인, 영신아.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니? 네가 우는
연기를 할 때 너무 슬퍼ㅓ 나까지도 다 눈물이 나려고 그러더라. (영신의 뺨에
얼굴을 부비면서) 정말 잘 했다.
(연극반 남학생들, 가발을 벗거나 환호를 하거나, 박수를 지면서 우루루
들어온다. 그속에는 문수도 들어있다.
연극반원들 뒤를 따라 온 듯 한 창욱, 마치 영신에게 보내듯이 조용한 박
수를 치면서 문에 기대어 서 있다. 그 모습이 영신이 앉아있는 앞 거울에
비친다. 거울속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영신과 창욱.
영신과 창욱, 두 사람만 있는 듯, 모든 소리들은 침묵 속에 잠긴다.)
영 신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이리 오세요 가까이.
창 욱 아냐, 갈수가 없어, 네가 있는 그곳은 어쩐지 너무 멀고, 아득하게 느껴져.
.... 갈수 없는 곳처럼...
영 신 그렇지 않아요. 걸음을 떼어 보세요. 한 두걸음이면 오실 수 있는 거리에요..
창 욱 ..... (담배를 꺼내 물고 성냥불을 켜지만 잘 켜지지 않는다. )
영 신 제가 켜 드릴까요? 그러고 싶어요.
창 욱 (담배를 도로 담배갑에 넣는다) 영신의 말처럼 담배는 이제 좀 줄여야겠어.
(두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다.)
씬 87 술집 (밤)
(눈발이 하나 둘 내리고 있는 술집 앞)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마지막 정을 나누노라면
기쁨보다 슬픔이 앞서...“
(카메라, 노래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가 <할머니집>이라고 쓰인 창을
뚫고 들어가면, 술이 거나하게 취한 연극반원들,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거
나, 박수를 치거나, 옆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하면서 <석별의 정>을
합창하고 있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영신,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않고
술잔의 막걸리를 홀짝 홀짝 마신다.
앞에 사이다 잔을 놓고 영신 곁에 앉아있는 문수, 걱정스러운 듯 영신을
바라보다가)
문 수 괜찮니? 제발 좀 이제 그만 마셔라. 너 혼자 벌써 주전자 한통을 다 비웠어.
영 신 (약간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괜찮아. 하나도 안 취했어. 볼래? 뜰에 깐 콩깍지는
깐 콩깍지는 안 깐 콩깍지냐. 간장 공장 공장장은 김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
은 공공장장이다..
(박수치는 연극반원들)
동 수 (일어서며) 자, 여러분, 잠깐만 주목해 주십시요, 한때는 패주고도 싶었고, 한때는
미워도 했었고...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연장을 품었을 수도 있는....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지만.. 하여튼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연극이 뭔지를 알게 해 주시고, 예술
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를 알게 해주신 강창욱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박수지는 연극반원들)
창 욱 피천득 선생님이 그러셨던가요?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는 사람이라고... 저야말로 이 세상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으니까..
(영신이 창욱을 바라보는 시야로 주전자가 젓가락이 술잔들이 풍선처럼
하나둘 둥둥 떠오른다.)
창 욱 ... 제가 여러분을 처음 만났을 때 말씀을 드렸듯이 앞으로 여러분은 무엇에 취해서
사셨으면 합니다. 연극에 취하고 문학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그렇지만 가장
권하고 싶은 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하라고 한 유명한 연극배우죠?
사라베른하르트처럼, 여러분도 사랑에 취하라는 것입니다. 사람 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죽어있는 모든 것까지도...
(연극반원들과 돌아가며 작별인사를 하는 창욱. 동수에게는 포옹해서 등을
두드려 주기도 하고, 돌아가면서 악수를 한다. 윤미는 창욱의 손들에 입맞
춤을 하기도 하고, 헤어짐의 섭섭함을 참을수 없는 양순은 창욱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린다.
영신 앞에 다다서서 두손으로 영신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창욱. 느닺없이
볼에 눈을 감고 입맞춤을 하는 영신.
자리에 앉은 영신은 탁자에 푹 고꾸라져 잠에 빠진다. )
씬 88 어둠속
(어두운 구름을 벗어난 것처럼 거울 속에 스며드는 둥근 보름달. 카메라
빠지면, 마치 달빛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잠에서 깨어나는 영신.
탁상시계를 달빛에 비춰본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영신, 무엇에 끌린 듯 커튼이 걷힌채로 있는 창으로 가 창밖을 바라본다.)
씬 89 창밖 (새벽)
(어느새 눈은 그쳐있고, 창문 밑에는 누군가 밤새 서성대다 갔는지 그 자
리에만 눈들이 어지럽게 밟혀져 있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나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작별 인사를 하듯 빙긋이 웃는 창욱의 모습이 인화되듯 나타났다, 등을
돌려 사라진다.)
씬 90 한적한 시골역 (새벽)
(역사쪽을 향해 눈위에 찍혀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 빠앙- 기적소리.
침묵 속에서 눈송이가 바람에 날리듯 하다가 눈송이들은 어느새 흩날리는
꽃들로 바뀌고, 봄빛이 가득해진다. 이 풍경들이 한 장의 정지된 흑백사진
으로 바뀐다. )
( F.O )
(어둠속에서 돋아나는 새순처럼 연두빛으로 떠오르는 자막)
“금인 시간의 비밀을 알고 난 뒤의
즐거움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처음과 깥은 항상 아무것도 없고
그 사이에 흐르는
노래의 자연
울음의 자연을
헛됨을 버리지 말고
흘러감을 버리지 말고
기억하렴“
- 정현종의 <기억제> 중에서 -
(자막, 사라지고.
귀에 익은 70년대 음악이 흐르고,
그동안 영신이 사랑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 때문에 즐거워 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성장한 모습들이, 하나씩 떠올라 화면을 메운다.)
- 끝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