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민족주의
이 용 우
요즘 토론토 거리를 지나다 보면 저건 어느 나라 국기(國旗)인가 하는 깃발들이 많이 눈에 띈다. 카메룬, 온두라스, 우루과이, 코트디부아르,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등 평소엔 이름도 들어보기 어려운 나라들도 많다.
캐나다가 아무리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타민족에 대해 참 너그럽다는 생각도 든다. 평상시엔 캐나다 국민의 일원으로서 각종 혜택을 누리며 살지만 막상 월드컵 같은 대회라도 벌어지면 원래의 자기 나라로 돌아가 ‘딴사람’이 되는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너그럽게 이해하고 오히려 격려까지 보내주니 말이다. 월드컵 축구와는 별 관계가 없는 캐나다의 국기를 매달고 다니는 차들을 보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이민자들은 마음 속으로 자신이 진정 캐나다인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이런 나라에 전쟁이라도 난다면 과연 이민자들은 캐나다라는 나라를 지키겠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 나갈까 하는 부질 없는 생각도 해본다. 자기네 모국과 캐나다가 토론토에서 축구경기를 벌인다면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재미 있는 현상도 벌어질 것이다.
축구는 인류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돼 있는 현 회원국은 210개국으로 유엔(193개)이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205개)보다 많다. 대중스포츠로 축구와 야구를 꼽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야구는 자본주의 색깔이 강하다. 서민들의 경기인 축구는 별로 돈이 안 든다. 둥근 공과 웬만한 공간만 있으면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야구는 많은 장비와 그에 따른 돈이 든다.
불어 약자 FIFA(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로 표기되는 국제축구연맹은 19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됐다. 오늘날 불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들에서도 이름을 불어로 표기하는 것은 이 단체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축구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FIFA가 4~5주에 한번씩 발표하는 각 국가별 랭킹이다. 랭킹 선정의 기본 요소는 경기의 중요도(친선전, 월드컵, 대륙간컵 등)와 그 경기에서의 승-무-패 여부, 해당 대륙의 전력, 득점, 경기장소(홈/어웨이 여부) 등 다섯 가지. 가장 최근 발표에서 한국은 57위에 올랐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승팀인 스페인이 1위, 이어 독일이 2위를 지켰고 올해 주최국 브라질이 3위에 랭크됐다.
그러나 이 같은 순위는 그냥 듣기 좋은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세계 랭킹 1위로 ‘무적함대’로 불리는 스페인이 이번 월드컵에선 랭킹17위 칠레와의 2차전에서 0-2로 완패, 조기 탈락했다. 그럼에도 스페인은 이번 월드컵이 끝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랭킹 1위다.
월드컵이 만들어내는 경제효과는 막대하다. 특히 개최국일수록, 대표팀 성적이 좋을수록 경제 유발 효과가 크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개최 효과는 26조원에 달했다. 투자·소비 지출 증가로 인한 부가가치는 물론, 국가 브랜드 홍보, 기업 이미지 제고와 경기장 건설 등으로 인한 고용창출 등, 유무형의 효과가 엄청나게 작용한다. 1950년에 이어 남미에선 처음으로 월드컵을 두 번 개최하는 브라질의 경우 경제적 파급 효과가 5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인은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축구엔 흥행요소가 두루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올림픽이 개최도시 이름을 쓰는데 비해 월드컵은 국가 이름을 쓰는 데서부터 그렇다. 경기 유치 주체가 올림픽은 도시, 월드컵은 해당국가 축구협회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만큼 민족‧국가적 요소가 강하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 당시 캐나다의 언론에는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천안함 사태로 남북관계가 긴장상태에 놓인 가운데서도 월드컵에서 북한팀을 응원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기사가 그것이었다. 캐나다의 한 신문은 당시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북한을 응원하는 서울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천안함 사건으로 격앙된 위기에도 불구하고 민족에 대한 동질성과 동정심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평했다.
당시 월드컵을 앞두고 토론토 한인타운에는 현지 언론이 잇달아 방문해 북한과의 경기 때 한인들은 누구를 응원할 것인지 큰 호기심을 나타내며 취재를 해갔다. 올해 브라질 대회에는 북한이 참가를 못해 아쉽다.
축구에 민족적 요소가 강하다 보니 각 국가의 역사적 원한관계가 경기장에서까지 분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과 일본, 네덜란드와 독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맞붙을 경우 긴장이 감돈다. 심지어 축구경기 과열이 전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한다. 실제로 중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축구장의 격돌이 전쟁으로까지 이어진 적이 있다.
세계인의 양대 스포츠 축제로 올림픽과 월드컵을 들지만 월드컵은 올림픽보다 한 수 위다. 월드컵 기간 중 전 세계의 TV시청자 수는 올림픽을 능가한다. 올림픽은 여러 경기가 분산돼 열리지만 월드컵은 집중적이어서 시선을 모으기에도 최적이다.
월드컵을 통해 전 국민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국민통합’에 더 없이 적합하기 때문에 한때는 독재자들이 축구를 이용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은 제2회 월드컵대회를 개최해 파시즘의 선전장으로 활용했고,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과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독재자들은 인권탄압과 경제정책의 실패를 축구대회로 만회하려 했다.
해외이민사회에서도 월드컵을 통해 동포들이 한마음으로 뭉치니 이보다 더 좋은 화합도구가 없다. 한인회관이 메어터지고 교인들의 피땀 어린 성금으로 지어진 대형교회에서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아까운 한인시설들이 오랜만에 제 구실 좀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모든 것이 월드컵이 가져다주는 효과들이다. 승부는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