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가 재앙에 직면한 후, 청나라와 준가르의 관계에 있어서 '어정쩡한 평화 상태' 라고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준가르와 청은 직접적으로 교역을 했고, 이 과정에서 청이나 준가르나 서로 이야깃거리는 많습니다. 청나라의 총독들은 끊임없이 준가르 '오랑캐' 들이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청나라를 염탐하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1739년 산시와 간쑤의 지방관들은, 수요도 없는 준가르의 건포도 1만 7천근을 어거지로 구입하느라 국고에 1만냥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건륭제의 즉위에도 이어진 이 애매모호한 밀고 당기기는, 1745년이 지나면서 끝나버렸습니다. 준가르의 갈단 체렝이 사망했고, 준가르는 그들을 파멸로 이끌 내부 분열로 직면했습니다. 단 5년만에 준가르는 국가가 찢어져버렸습니다.
갈단 체렝의 아들은 세 명이었고, 딸은 한명이 있었습니다. 먼저 후계자가 된 사람은 '체왕 도르지 남잘' 이라는 인물로, 성격적으로 잔인하고 흉폭하고 폭력적이며 편집증적인 문제아였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술을 마시고 개를 죽이는데만 있었는데, 이에 누이인 '울란 바야르'가 체왕 도르지 남잘을 저지하려 하자, 도르지 남잘은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그러자 도르지 남잘의 형이었던 '라마 다르자'는 울란 바야르의 남편인 '사인 볼렉' 과 연합, 1750년 체왕 도르지 남잘이 사냥 여행에 나섰을때 그를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배반을 눈치챈 도르지 남잘은 반역자들을 공격하였지만 패배했고, 두 눈이 파내어진채, 동생 '다와' 와 함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때마침 티베트에 내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준가르의 지배자 라마 다르자는 티베트와의 접촉이 단절되었습니다. 준가르는 티베트와의 연결이 붕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준가르의 수난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또다시 내분이 일어났는데, 과거 일련의 부대를 이끌고 엄청난 행군을 하여 티베트를 공격했던 장군, 체링 돈돕의 손자 다와치, 그리고 체왕 랍탄의 후손 아무르사나 라는 두 명의 장군이 라마 다르자와 대립했습니다.
다와치는 아무르사나와 함께 일단 카자흐로 도망을 쳤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분란으로 라마 다르자마저 내부 반란으로 사망하자 다시 병력을 이끌고 와서 라마 다르자의 수하들을 모조리 죽이고 새로운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후로 그는 곧바로 주정뱅이가 되어 아무르사나와 분쟁을 일으켰고, 서로 대결을 벌였으며 이 대결에서 아무르사나를 패퇴시켰습니다. 아무르사나는 홉도에 도착했고, 그 시점에서 청나라와 접촉했습니다.
처참한 분쟁을 청나라의 관리들은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여지껏 '건륭제의 십전무공' 이라는 허울 좋은 대외원정에서, 청군이 미얀마 - 베트남 - 대만 등에서 보인 추태는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서북 지역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는데, 이 지역의 핵심적인 관료들은 가히 제국의 엘리트라고 할만 하고, 또한 강희제 시절부터 이어진 긴 경험으로 어떻게 사태에 대응해야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준가르는 그 짦은 시간 동안 갈단 체링 - 체왕 도르지 남잘 - 라마 다르자 - 다와치로 이어지는 어지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청은 아무르사나에게서 쓰임새를 찾았고, 그를 지원하여 초원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넒히고자 했습니다. 아무르사나뿐만 아니라, 혼란 속에 탈주하는 수많은 준가르 인들에게 청은 능숙하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그들에게 왕공의 작위를 내렸으며, 건륭제의 여름 별장에 초대하여 어마어마한 환대를 벌였습니다.
과거 옹정제가 대패한 뒤로, 청나라 수년만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준가르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아무르사나는 청이 자신을 준가르 국가의 수장으로 만들어준다면, 자신은 청에 항복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1754년, 각각 2만 5천, 도합 5만의 군단이 초원으로 진군했습니다. 다와치를 박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르사나도 사령관으로 참전했습니다.
가르단의 시대로부터 이어진……아닙니다. 저 고대에 키루스 대제를 죽였던 마사게타이 부족, 그리고 한고조 유방을 백등산에서 포위했던 묵돌의 시대로부터 하여, 수천년의 세월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던 정주민과 유목민의 대결이 이제 마지막 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 청제국, 러시아, 할하 몽골, 준가르, 카자흐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원 세력을 동원했습니다. 청은 할하 몽골에 압력을 넣었고, 준가르는 애타게 러시아의 원조를 찾았으며, 제 3자인 카자흐에게는 청과 러시아의 지원 요청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이 당시 카자흐 중(中) 호르드의 지도자는 아블라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일전에 다와치와 아무르사나가 라마 다르자에게 몸을 피해 카자흐로 간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앞에 언급했습니다. 아블라이는 이때 그 둘을 보호해 준 적이 었있지만, 준가르 국가의 분열을 보고 이를 기회로 삼아, 그들의 땅과 가축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원정은 대단히 순조로웠습니다. 다와치는 술만 마시면서 거의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고, 청군은 순조롭게 진군하여 1755년 7월 2일 한번의 기습으로 다와치의 1만 부대를 흩어버렸고, 다와치는 도망을 치다가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따지자면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친왕에 임명되고, 황가의 여성과 결혼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습니다.
청군은 골치거리인 보급 문제 때문에, 초원에서 군대를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어 서둘리 철수 했지만, 그 짦은 시간에 이미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했기에 아쉬울 것은 없었습니다. 건륭제는 넌지 자신이 강희제와 옹정제, 그 두명의 위대한 군주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루었다고 자축했고, 이번 원정에서는 다른 원정이나 과거 초원으로의 진군과는 달리, '적은 비용' 이 소모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건륭제의 자신만만함과 달리,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거은 아니었습니다. 사냥은 끝났지만 사냥개가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아무르사나였습니다.
아무르사나는 황제의 승리를 축하했고, 자신을 준가르 국가의 유일한 칸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건륭은 준가르가 분열되기를 원했기에 네명의 동일한 작위 중 하나를 주어, 아무르사나가 준가르의 절대자가 되지 못하게 하려 했지만, 아무르사나는 "준가르는 오직 하나의 칸만 원한다." 며 거절했습니다. 그는 청이 준 인장, 예복을 쓰는 것을 모두 거절했고, 대신 갈단 체렝의 인장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세를 조금씩 모아갔습니다.
초원이 다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으로 아무르사나가 카자흐의 5만 대군을 모았다는(불가능한) 이야기도 들려왔고, 부르트, 야르칸트, 카시가르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여러 징조가 아무르사나가 청에 "모반" 을 하려 한다고 알리고 있었지만, 건륭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할하 몽골의 에린친도르지라는 인물이 아무르사나를 사로잡아 오겠다고 말하자, 이를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눈치를 챈 아무르사나는 구금에서 탈출, 이르티시 강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청군은 이리에 단 오백여 병력만 남겨놓고 철수한 상황이었기에, 아무르사나의 공격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이리와 우르무치에서 청군이 패퇴하였고, 퇴각한 청군은 바르콜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초전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건륭제는 이제 "아무르사나를 체포" 하고, "그의 세력을 쓸어버리겠다." 고 선포했습니다. 건륭은 광대한 제국의 모든 힘과, 그 연락망을 동원하여 아무르사나를 압박하기로 했습니다. 몽골 추장들에게는 아무르사나에 대한 추격 명령이 내려졌고, 이를 성공한다면 막대한 상이 약속되어있었습니다. 카자흐의 아블라이는, 저 먼 베이징의 늙은 황제는 무시무시한 손길이, 아무르사나가 카자흐로 도주할 경우, 그를 사로잡으라고 압박하는것을 느꼈습니다.
마지막이 될 이 싸움에서, 건륭은 이전의 강희제 - 옹정제와는 분명히 다른 자신만의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이고,
초지는 모두 황폐화한다. 홀로코스트와 대파괴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초원의 마지막인가요?!
연재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