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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해병 특검_안식일의 주인은?
마가복음 3:1-6
1.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4.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6.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지난주 화요일(28일)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윤 대통령의 열 번째 거부권에 따라 다시 국회로 돌아간 채해병 특검법이 재의 표결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출석한 의원 294명 가운데 찬성 179명, 반대 111명, 무효 4명의 결과였습니다. 국민의힘은 부결을 당론으로 정했고 흔들림 없는 대오를 과시했습니다.
방청 현장에선 전 해병대원들의 "여당은 보수정당이 맞느냐" "당신들의 아들, 손자가 죽었더라도 이렇게 하겠느냐"라는 분노가 쏟아졌습니다. 1년여 세월을 구천에 떠돌고 있을 채해병의 평온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2주입니다. 오늘 복음서 성서일과는 안식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정결 예법과 함께 유대백성들에게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금기였습니다.
안식일은 히브리인들의 시간 개념으로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를 말합니다(레 23:3; 마 12:9-10). ‘안식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솨바트’는 ‘일을 중지하다’, ‘행동을 멈추다’, ‘휴식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때문에 안식일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쉬는 날’을 말합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느님의 천지창조 사역입니다. 6일 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제7일에 휴식함으로써 창조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고 복된 날로 만드셨습니다(창 2:1-3).
또 하나의 기원으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창조 때부터 요구된 안식일 준수 명령은 출애굽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출 16:22-30; 20:8-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모세의 명령으로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안식일 전 6일째 되는 날 만나와 메추라기를 2일분을 거두었던 것이죠. 신명기에는 하느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으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조항까지 부여합니다(신 5:15).
그런데 이런 안식일의 의미는 퇴색하고 오히려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는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구약성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일하지 말라고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미쉬나란 책에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39가지로 규정합니다. 미쉬나는 유대교 랍비들의 구전을 집대성한 책으로 랍비 유다(A.D.135년 출생)에 의해서 6부로 구분되었고, 각 부는 63개의 논문 또는 소책자로 정리되었습니다.
미쉬나에 기록된 안식일 금지된 39개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씨 뿌리기, 밭 갈기, 수확, 곡식단 묶기, 타작, 키질, 곡식 분류, 곡식 갈기, 체질, 반죽, 빵 굽기, 양털 깎기, 양털 빨기, 양털 다듬이질, 양털 염색, 실 잣기, 실 엮기, 두 개의 고리 만들기, 두 개의 실을 엮기, 두 개의 실을 풀기, 묶기, 풀기, 두 개의 조각을 꿰매기, 두 개의 조각을 찢기, 사슴 사냥, 사슴 도살, 사슴 가죽 벗기기, 사슴 가죽에 소금치기, 사슴 가죽 염장, 가죽 문지르기, 가죽 자르기, 두 글자 쓰기, 두 글자 쓰기 위해 두 글자 지우기, 건물 짓기, 건물 부수기, 불 끄기, 불 켜기, 망치질, 물건 옮기기>
어때요. 금지된 내용 대부분은 하루하루 밥벌이하며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민중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죠? 가진 자들에게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당 벌어 사는 이들에겐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 중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본문 앞에 기록된 안식일 논쟁 때문에 예수의 뒤를 밟아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걷다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 때문에 벌어진 논쟁이었죠(마가 2:23-28).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24절)" 하고 시비를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하고 반문하시죠. 에비아달 대사제 때에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고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주었던 일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반문을 통해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 불러내 앞으로 나오게 하시고 바리사이 사람들을 향해서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습니다(마가 3:4).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의 주장에 설득되거나 승복한 것은 아닙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거나 벌레 씹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바라보며 예수님은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고 합니다(5절).
그런 후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손을 펴자 그 순간 예전과 같은 건강한 손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함으로, 병자도 고쳤고, 그의 가족도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사회적 처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시대 회당의 구조는 지금 우리 예배실과 다릅니다. 좌우로는 계단을 만들어 회중이 앉도록 했고, 중앙의 공간에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회당 중앙에 손 마른 사람을 세워놓고는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한 것이죠. 너희가 생각하는 안식일은 어떤 안식일이냐는 물음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미쉬나적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미쉬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을병이면 안식일이라도 고쳐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병은 그냥 놔두어야 합니다.
출산하는 여인이나, 죽을 듯한 질병의 경우는 안식일에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건 사고의 경우에도 적용되었죠. 벽이 사람 위에 무너졌다면,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정도 만큼 벽을 치워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치료하지만 이미 죽었다면 그의 시체는 다음날까지 그곳에 그대로 두어야만 했습니다.
바리사이파 관점에서 본다면 ‘한쪽 손이 오그라든 것’은 죽을병은 아닙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고쳐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죠.
하지만 예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사회적 처지는 비참했을 것입니다. 정규직 취업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막노동도 쉽지 않았겠죠. 혹 부양할 가족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처지는 더욱 처참했을 것입니다.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삶이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죠. 어쩌면 생명의 위기가 코앞에 있는 사람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이 있다고 한다면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일 수도 있죠. 그러니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정의의 문제고 생명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죠.
안식일 법은 당시 유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 이 법은 제정된 취지와는 매우 다르게 적용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창조와 생명, 평등과 회복, 해방과 자유를 보장한 이 법이 오히려 민중들에게 불평등과 억압을 주는 악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기까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따른 수많은 법적 제재 조항을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문자적으로만 추구하는 자들의 허구성을 고발하시고(눅 11:46), 안식일에 대한 정의를 바로 잡으려 한 것이죠.
올바른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로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의 것이라는 말입니다(마 12:3-8; 눅 6:5). 예수님은 천지창조 사역에도 함께 하셨고, 출애굽의 해방 사역도 함께 하셨으며, 마지막 심판 날 구원사역을 완성하실 것이기에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모든 피조물 역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죠(막 2:27).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주신 이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단순히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라고 표기했으나, 의사 출신 누가는 구체적으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제롬(히에로니무스)이 인용한 외경(外經)에 따르면 석공(石工)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이 오그라들었다’라는 말은 뇌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닌, 혈액 순환이 불순해 손 근육 기관이 상실된 것을 의미했다고 하죠. 바싹 마르고 오그라든 손 때문에 이 사람은 노동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마 12:9~13; 막 3:1~5; 눅 6:6~10). 노동을 할 수 없어 죽지 못해 사는 고통을 격고 있는 이 사람에게 안식일은 쉴 수 있는 날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릴 안식일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그의 휴식과 해방의 기쁨을 되찾아 주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의 가치라 보았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생명을 살리며 해방시켜 주는 날이어야 한다(마 12:12; 막 3:4; 눅 13:16)는 것입니다.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에게 질병은 생계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상황에서 한쪽 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생명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며 그의 내면적인 고통까지 들여다보셨습니다.
인간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간에는 생각과 이해관계가 달라 모여 살다 보면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를 해결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 규범이 필요합니다. 관습이나, 도덕, 법 등이 이에 해당하죠.
관습은 통과 의례 즉, 출생·결혼·장례 의식 같이 오랜 시간 반복되어온 행동 양식 등을 말합니다. 도덕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인의예지신 같은 것을 말하죠. 법은 사회 구성원이 합의를 통해 지키기로 한 사회적 약속으로 국가 등이 정한 규범입니다. 법은 관습이나 도적과 달리 강제력이 따른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법을 어기면 사회적 제재를 받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법은 정의와 공공복리를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를 법의 이념이라고 하는데요,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다음의 2가지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공공복리와 조화롭게 추구하려는 합목적성입니다. 개인의 삶이 공공복리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하는 법적 안정성을 통하여 사회정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법으로서의 효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과연 법의 효용이 존재하는 사회인가 의문이 많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개 법치주의라는 모토를 걸고 있습니다. ‘법 앞에 평등’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법으로 통치를 하겠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법치주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민주 정치와 법치주의의 관계는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구별함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전체주의 국가나 독재 정부, 군주국가 등에서 나타나는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을 통치자의 의사를 실현하는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와는 다르다.
이에 비해 법의 지배는 누구나 법과 동등한 권위를 지닐 수 없고 통치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법에 종속된다. 법은 국민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고 민주 정치는 국민의 정치이자 국민에 의한 정치라는 점에서 법의 지배는 국민의 지배 즉 민주 정치를 의미한다. 또한, 법치주의를 통해 민주 정치는 더욱 발전하게 되고 민주 정치를 통해 법치주의가 지향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 더욱 잘 실현될 수 있게 된다.>
이 교과서에 의하면 오늘 우리나라는 법치주의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가 이뤄지는 나라라 하겠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독재 사회라는 것이죠. 윤석열 정부는 ‘법’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하위법인 ‘시행령’을 바꿔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자의적 법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도 여의치 않으면 거부권과 검찰권을 휘둘러 입법부와 사법부를 무력화시키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죠.
5월 29일, 예고한 대로 윤석열 대통령은 바로 전날(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4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습니다. 취임 후 15번의 거부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 4개 법안은 ‘선구제 후회수’ 방침을 담은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과, 민주화운동 사망자·유가족을 예우하는 민주유공자법, 한우산업 발전을 위해 농가를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한우산업 지원법’ 제정안, 농어업인 대표조직 설립의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한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입니다.
이 가운데는 여당 의원이 주도해 여야가 함께 발의한 ‘지속가능한 한우산업 지원법’과 ‘농어업회의소법’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거부권 행사의 이유도 야당 단독으로 본회의에 상정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여야 합의가 안 된 법안은 앞으로도 무조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한 삼권분립 위반인 반헌법적인 태도로 그 댓가를 꼭 치르게 될 것입니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법기술자들이 이 ‘법’을 강자와 가진자를 위한 ‘법’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올바른 법정신이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제대로 된 법정신의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작은 예수들에게 하느님의 은혜와 복이 넘쳐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