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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과 보편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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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철학 윤리국이 내건 "21세기에 지구촌의 보편윤리는 가능한가"라는 문제에는 세 가지 하위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는 여러 다른 문화집단의 가치들 사이에 어떤 보편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라는 문제고, 또 하나는 그런 보편 적 가치 중에서 인구팽창,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 지구촌 공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보편적 가치는 어떤 것이냐라는 문제며, 나머지 하나는, 적어도 함축적으로는, 21세기 미래로 향해서 어떻게 그런 보편가치를 조성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다.
가치의 보편성과 특수성
나는 여러 문화집단의 가치체제는 서로 다르면서도 그 속에 어떤 공통되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고 또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각 문화집단에 특수한 가치도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도 믿는다. 간혹 세계적 가치와 한국적 가치를, 또는 서양가치와 동양가치를 대립시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쟁이 그리 의미 있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의 손에는 지문(指紋)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모든 사람의 지문은 서로 다르고, 모든 문화집단에 음악이 있다는 보편성과 동시에 그 음계와 박자와 멜로디는 서로 다르다는 특수성이 있는 것처럼, 모든 현상, 모든 존재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같이 짜여져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다못해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둥실 하늘에 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동시에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는 특수성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구름"이라고 인식할 수 있지, 그 구름들 사이에 아무 공통성이 없든지 반대로 아무 특수성도 없다면 애당초 구름이라는 인식도 개념도 말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보편과 특수의 문제는 가치체제에서만 아니라 여러 문화영역―정치, 경제, 사회제도, 학문, 예술, 교육 등―에서 자주 논쟁과 담론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교육학도들 사이에서도 "외국(특히 미국) 교육이론 아니라 한국 교육이론을 찾아야 한다"는 주제로 자주 논쟁이 벌어진다.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다른 사회과학에서도 사정은 같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학문이 추구하는 것은, 본래 여러 특수한 현실적 사실들 속에서 특수하기만 한 양상들은 사상(捨象)하고 즉 버리고, 공통되는 보편적인 양상만을 추상(抽象)해서 즉 뽑아냄으로써 찾아낸 보편적인 개념, 법칙, 이론이다. 따라서 모든 이론은 보편적일수록 더 좋다. 그만큼 그것이 설명해낼 수 있는 현실 현상의 범위가 넓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 외국이론이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맞지 않는 것인지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외국'이론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한국적 사실까지도 설명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보편적이 아닌 이론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학도의 궁극적 목적도 한국에만 적용되는 '한국적' 교육이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도 몽골에도 가능하면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그야말로 더 넓은 보편타당성이 있는 이론을 찾고 거기에 접근하려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수록 이론으로서의 보람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 한국교육의 현실과 실제는 철두철미하게 한국의 특수한 사정에 맞게, 한국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한국적'인 것만 가지고도 모자라고, 더 특수하게 '강원도'적이고 '정선'적이고 '철수'적이라야 한다. 추상된 원칙, 원리, 이론에 특수한 실정을 알맞게 맞추어 "입힐"수록 즉 이론을 특수하게 구상(具象)할수록 현실에 적합한 실제·실천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론은 될 수 있는대로 보편적인 것이 좋고 교육실제는 될 수 있는대로 특수한 것이 좋다. 교육에도 보편과 특수는 서로 '왕래'한다.
우리는 미술, 음악, 문학 등 예술의 경우에도 매한가지 추리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말대로 예술은 가장 특수한 소재로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감정을 들어내는 행위다. "햄릿"이건 "닥터 지바고"건 세계 명작은 다 아주 특수한 시대, 특수한 민족, 특수한 곳, 특수한 처지의 특수한 사건을 다루면서, 그야말로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인간감정을 들어낸 것이기에 명작이다. 특수한 소재가 아니면 문학이 아니고, 보편적 감정에 호소하지 못해도 명작은 아니다. 한때 한국에서 공전의 관객수를 기록한 영화 "서편제"가 많은 희망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칸느 영화제에서 낙선했다. 아무리 예술이 소중하다 해도 제자를 일부러 맹인으로 만들면서까지 예술을 추구한다는 대목은 보편적 인간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후문이었다.
도덕, 가치, 가치관도 다 한 원칙이라는 점에서 보편과 특수는 같이 작용한다. 실제에서 도덕적 행위의 상황들은 언제나 다 특수한 상황들이다. 도덕적 가치는 그 모든 특수상황들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이다. 한국 사람에게만 선(善)인 덕목보다 세계인에게도 선이 되는 더 보편적인 덕목이 더 넓고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칸트의 유명한 도덕법칙 "너의 행위가 보편적 입법이 되도록 행위하라"는 원칙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 비슷한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의'라는 덕목이 지니는 보편성이 이들 종교 또는 교리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무섭게 '좁아지고' 국경이 희미해져가는 지구촌에서 사람들이 공존하고 생존하려면 더 보편적 가치들이 더 많아지고 넓어지고 높아져야 할 것은 자명하다. 그것이 지구촌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더 격상(格上)하는 길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여러 문화의 특수성, 다양성은 살아 있어야 한다. 지구에서 '문화다양성'은 '생물다양성' 만큼이나 귀중한 것이다. 생물다양성 속에는 변화하는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가는 생물적 생존의 '전략'들이 숨어 있듯이, 문화다양성 속에도 격변하는 내일에 대한 생존전략들이 깃들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시아적 가치
여러 문화집단의 가치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에 관한 사고에 쇼비니즘적 민족주의의 구름이 끼어들면 우리의 사고는 흐려진다. 어린아이의 발달에서 '자기중심주의'의 단계가 있고, 근대화 이전 또는 그 초기 단계의 문화집단에서는 대개 '민족중심주의'의 단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많은 쓰라린 외침의 역사에서 살아온 나라에는 불가피하기도 했던 지향이지만, 성숙하려면 결국 소비니즘적인 민족주의는 '졸업'해야 할 지향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성의 인지(認知)가 특수성의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국이라는 문화집단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치 내지 가치관의 문제는 1960년대, 경제 비약에 골몰했던 한국도 포함해서, "발전"의 문제가 세계적으로 관심사였을 때에도 많은 담론의 대상이었다. 1965년 고려대학교가 주최한 "아시아 근대화 회의"에서 파이(Pye)라는 이는 "근대화의 정신"으로 다섯 가지를 제언했다. 즉, 효능(效能, efficacy), 합리, 쇄신, 참여, 보편적 시민성의 정신이다. 수긍이 가는 제언이었다. 그리고 이런 근대화의 정신은 전통적인 아시아적 가치, 좀더 좁혀서 유교적 가치인 자연에의 굴종, 정의(情誼)주의, 과거지향적인 선례의 묵수, 권위에의 복종, 가족과 지연 등을 앞세우는 특수주의 등에 대한 반립적인 주제로 받아들여졌다. 근자에 거론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는 그때에는 발전에 역기능적인 것으로 '공인'되었던 셈이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근대화가 '서구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반론도 거셌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자아정체성(自我正體性)의 원천을 전통적인 민족정체성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근대화의 정신"의 제안은 자아개념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졌고 많은 반향을 부르기도 했다. 어찌보면 근대화는 전통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전통을 찾으려 하는 자체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후 약 30년에 걸쳐, 일본이 먼저 곧이어 한국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비약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반대로 근면, 교육숭상, 충성, 가족주의 등의 아시아적 가치가 발전 원동력이 되었다고 그 주장이 정반대로 반전한 것은 하나의 시대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다시 근래 한 미국 경제학자는 그 동안의 아시아의 경제발전은 근면, 충성 등 유교윤리 때문이 아니라 값싼 노동력, 단순기술 등 순전히 경제논리 때문이었다는 주장으로 맞서서 논쟁이 재연되었다. 이미 80년대에도 "일본의 성공"을 두고 그것이 유교교리 때문이라는 주장과 반대로 일찍이 유교를 버리고 '탈아(脫亞)'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양립한 적도 있었다.
유교에 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논쟁적인 견해가 많다. 만년에 친일파라는 낙인을 받았지만, 청장년기에는 대단한 사상가였던 윤치호(尹致昊)는 유교 때문에 조선조가 망했다고 볼 만큼 철저한 '반유교론자', '반 양반논자'였다. 한 논자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윤치호는 유교 윤리를 "허례적 형식윤리", "이기적 가정윤리", "압제적 계서윤리", "배타적 절대윤리", "사대적 종속윤리"라고 혹평했다. (유명렬: "윤치호의 전통관과 국가관", 사학연구, 1979). 최근 Time지(1999. 5. 31)엔 묘하게 대조되는 두 글이 동시에 실려 있다. 하나는 "It's True, Asians Can't Think"라는 글, 유교윤리가 창의력을 말살하기 때문에, "비꼬인 유교를 버리기 전에는 아시아는 서양의 꽁무니만 따라갈 게다"라고 붙인 부재 그대로 맹렬한 유교비판의 글이다. Sin-Ming Shaw라는 이름으로 보아 필자는 중국사람인 것 같다. 대조적인 또 하나는 T. R. Reid라는 미국 사람이 "Confucius Lives Next Door"라는 책에 관해서 쓴 서평란이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일본의 목가적인 번영과 안정은 유교교리 때문이고, 따라서 다음 세기는 유교윤리가 지배적인 윤리가 될 것이리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이에 반해 평자는 일본사회가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는 평론을 펴고 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에 한 저자(김경일)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으로 유교윤리가 한국의 여러 사회비리의 원인이라고 맹렬하게 유교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또 최근에 이에 대한 격렬한 반론이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으로 나왔다(최병철).
나의 생각은 이렇다. 유교윤리에는 여러 덕목이 있다. 그 덕목과 발전과의 관계는 어떤 덕목, 어떤 발전, 어떤 발달단계를 두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교육숭상은 경제발전에도 정치발전에도 유익하겠지만, 지나친 가족주의는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유리하지만 '선진' 단계에서는 도리어 불리할 것이고, 또 정치발전에도 그리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복종과 충성은 단순 기술 위주인 경제발전 초기에서는 기능적이겠으나, 경제력에 창의력이 관건인 다음의 단계에서는 역기능적일 것이라는 추리는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유교윤리 또는 아시아적 가치 자체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시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삼강오륜'도 옛날 같지 않고 가족주의도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은 젊은 세대와 중년 세대의 행태에서도 이미 명백하다. 아시아는 이제 옛날보다 훨씬 덜 아시아적이고 아시아적이라고만 극명하게 특징짓기에는 아시아 각국의 문화는 이미 너무나 다양, 다원, 다층, 다문화적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동양의 근대화'라고 부르건, 또는 '동양의 세계화', '동양의 서양화', '동양의 미래화'라고 부르건, '지구촌'이라는 명제 하에서는 불가피한 변화고, 동양 각국이 그 문화적 특수성과 다양성을 잃지 않은 한, 필요한 변화일지도 모른다.
동양과 서양
그러나 동시에, 지구촌이라는 명제 하에서는 '서양의 동양화', '서양의 세계화', '서양의 미래화'도 불가피하고 필요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찍이 로마 클럽이 경고한 인구팽창, 산업화, 공해, 식량감산, 자원고갈 등 이른바 지구촌의 여러 위기상황은 주로 서구 문화와 서구 가치가 주도해온 가치없는 산업화의 소산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서양의 가치 지향도 지구촌의 공존과 구제라는 명제에 적합하게 변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만일 19-20세기에 동양도 서양처럼 강력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동양은 서양처럼 마구 자연파괴를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네스코에서 주관한 한 위원회는 "인류 생존과 번영에 관련이 있는 이념과 가치를 새로이 종합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생명에 대한 존중, 자유, 정의와 평등, 상호존중, 배려, 성실"을 "세계시민윤리"로 설정했고(Our Global Neighbourhood, 1995), 또 한 위원회는 이러한 윤리로 "1) 인간의 권리와 책임, 2) 자유롭고 공정하고 정례적인 선거, 3) 언론과 정보의 자유, 결사 자유, 소수의 권리 보호와 같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요소, 4) 평화적인 갈등 해결과 공정한 협상을 약속, 5) 세대 내무와 세대 사이의 평등"을 제시했다. 또 한 연구소는 "세계윤리"로 "사랑, 진실성, 공정, 자유, 조화, 관용, 책임, 생명존중"을 제시했다(Prospects for a Univeral Ethics, 1998). 기타 다른 여러 위원회에서 지구촌에 있어야 할 보편적 윤리를 여러 가지로 구상하고 제안했다.
이런 제안된 가치들에 이의를 달 생각도 없다. 다 '실현'되면 지구촌 구제에 도움이 될 가치들이라는 수긍이 가는 덕목들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보고서 자체를 직접 읽어보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어딘지 미진한 느낌은 남는다. 이런 미진감은 이런 제안들이 "이념과 가치의 서구적 종합이 더 이상 인류생존과 번영을 위한 확실한 지침일 수 없는 듯하다"고 스스로 전제하면서도 아직도 서구적인 종합의 여운이 많고, 덕목의 나열을 넘어서 지구촌 문제의 더 깊은 원천적인 정신 문제에 관한 심층적 천착이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온다.
나는 가설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때가 있다. 우선, 어쩌면 서양에서 데카르트는 '근세의 시조'다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 따라서 정신이 있는 인간과 정신이 없는 자연을 칼로 벤듯이 갈라놓는 이른바 '데카르트의 이분론' 때문이다. 그의 이런 이분론은 정신있는 인간이 정신 없는 자연을 마음대로 부수고 자르고 죽이고 해도 좋다는 것을 '재가'한 격이 되었다. 그때부터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가차없는 파괴와 착취와 살생에 박차가 가해진 셈이다. 동물, 식물, 대지, 공기 등 자연에는 어떤 정신이나 영혼이나 신령이나 귀신이 없다고 보는 한, 그것은 느끼지도 않고 아픔도 모를 것이기 때문에 살생, 착취는 정당화된다. 이런 이분론의 버릇은 급기야 우리와 그들, 계급과 계급, 우리나라와 남의 나라에도 전이해간다고 보아야 한다.
인디언 추장 씨애틀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땅의 일부고 땅은 우리의 일부다. 향기 나는 꽃들은 우리의 자매들이다. 곰, 사슴,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로 덮인 산머리, 초원의 물기, 말의 체온, 그리고 사람, 이 모두가 한 가족이다.... 개울과 강을 흘러가는 저 빛나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고 우리 조상들의 피다... 물의 속삭임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공기는 소중하다. 우리의 조부에게 그의 첫 숨을 주었던 저 바람은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가기도 한 바람이다. 바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삶의 정기를 준다..."
이런 씨애틀 말이 단순히 한 시적 표현이 아닌 한 이념이고 신념이라면, 거기에서는 마구잡이 자연 착취와 살생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과 같은 맥락에 있다.
지구촌의 보편윤리에는,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는 원시적 물활론, 우주 모든 것에 신성이 있다는 범신론 또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말하는 불교 교리는 아니더라도, 어떤 모양으로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론 또는 합일론이 짜여져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지구촌 구제의 길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종교에도 관계가 있다. 기독교를 포함해서 많은 종교에서 신(神)은 어떤 사람의 모습을 가진 '인간형상적'인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깊은 뜻에서는 어떻든, 적어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리, 설교에서는, 신은 인간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인간 모습의 신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인간을 닮은 신은 신을 닮은 인간에게 우주에서 특별한 자리, 우주 중심의 자리를 준다. 즉, '인간중심적' 우주관이다. 그것은 신을 닮은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서 다른 모든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처결, 착취, 파괴해도 좋다고 '재가' 한다.
이에 반해서, 힌두교에서 최고신인 브라만은 사람 형상이 아닌 비인격적 존재다. 따라서 사람에게 특별하게 친하지도 않고 특별한 자리를 주지도 않는다. 노자(老子)가 말한 "천도무친(天道無親)", "천지불인(天地不仁)"도 비슷한 뜻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람은 우주질서 속에서 '제 분수'를 제대로 지켜야 하는 셈이다. 기독교 신학자인 틸리히(Tillich)도, "절대 신앙"은 "신 위의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고, "신 위의 신"은 흔한 유신론과는 달리 "안주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단어도 개념도 없고, 이름도 교회도 제례도 신학도 없는 신이다"라고 말했다.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흔히 기독교 벽화에 나오는 인간형상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만은 알 만하다.
여기에서 특정 종교들을 가릴 생각은 없다. 다만 지구촌의 보편윤리에는 어떤 모양으로든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적 우주관에 대한 경고는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인간은 결국 어릴 때의 '자기중심주의', 좀 커서 '가족중심주의', 그리고 더 커서 '민속·민족중심주의'를 차례로 벗어나서 끝내는 '인간중심주의'도 졸업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진부해 보일는지 몰라도,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의 문제도 지구촌의 전망에서 재음미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행복=수단/욕망," 즉 행복은 수단을 분자로 하고 욕망을 분모로 한 계산치로 보았다. 높은 '행복치'는 수단을 크게 함으로써도 가능하고, 욕망은 작게 함으로써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재벌의 행복치는 분자인 수단의 팽대에 의한 것이고, 도통한 고승의 행복치는 분모인 욕망의 축소에 의한 것인 셈이다. 전자는 서양식 행복 추구 방식이라 했고 후자는 동양식 행복 추구 방식이라 했다.
이렇게 극단으로 대치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한정된 생태계와 한정된 자원의 지구촌이라는 전망에서는 최대 욕망과 최대 수단을 추구하는 고삐 풀린 생산과 소비의 형태에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고전적인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의 대치를 벗어난다 해도 적어도 절제(節制)의 윤리는 다시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절제는 옛날에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다 미덕이었다. 거기에는 물욕의 절제만 아니라 감정 일반의 절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옛날 그렇게 절제를 강조한 것은 사회 전체의 궁핍의 탓도 있지만, 그런 속에서 착취로 지배층만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 강요한 덕목이었다고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절제는 수단의 한계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한계 때문에 필요하다는 한 '네오 스토이시즘'을 주창해 볼만한 것이 아닐까? 지구촌의 전망에서 그 보편윤리 속에 절제의 윤리는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천착이 필요한 문제들은 달리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천착을 통한 지구촌 구제를 위한 보편가치의 종합은 다분히 '서양의 동양화', 또는 '전통적 서양가치의 미래화'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가치의 종합
지구촌 보편적 가치의 판명은 필연 어떤 가치들의 어떤 종합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미국 문화인류학자 클럭크혼(Kluckhohn)이 옛날 1961년에 제안한 가치관의 종합적 도식이 아직도 아주 유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지구촌의 가치 종합에도 어떤 암시를 줄 듯하다. 그는 어느 문화집단에서나 사람들이 삶에서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다섯 가지 "인간 실존의 기본적 문제"에 대한, 각각 세 가지 "해답" 중에서 어느 답을 택하고 있느냐에 따라 한 문화집단의 기본적인 가치관의 체제가 정해진다고 말하면서, 한 가치관의 종합도식을 제시하고 있다.
요약해서 그의 가치관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즉,
1)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예속관, 조화관, 정복관,
2)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성악론, 백지론, 성선론,
3) 시간관에 대해서는: 과거지향, 현재지향, 미래지향,
4)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수직 관계, 수평 관계, 개인주의,
5) 인간적 가치에 대해서는: 정감 지향, 이성 지향, 행동 지향으로 도식화했다.
여기에서 각 차원의 세 가지 가치관들을 세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가치관 도식의 몇 가지 의의를 관찰하고 싶다.
첫째는 이 도식은, 많은 주요 가치덕목과 윤리덕목을 이 도식에 관련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인용한 여러 보편윤리의 제안들, 예컨대 사랑, 공정, 자유, 조화, 관용, 생명존중 등 덕목은 크게 견강부회하지 않아도 각기 다 이 도식의 어떤 '관'에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사랑은 종적 그리고 횡적 인간관계 지향에, 자유는 개인지향, 진실은 이성관에 관련된다.
둘째는 이 도식이 동양과 서양 여러 문화집단의 가치관을 종합적으로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정복관은 다분히 서양적이고, 조화관은 다분히 동양적이며, 인간관계에서 종적 지향은 다분히 유교적이고, 횡적 지향은 서양적이다.
셋째, 이 도식은 근대화 등 사회변동에 따른 가치관의 추이도 시사한다. 예컨대 인간 대 자연에서 예속관은 다분히 원시사회나, 전통사회의 특징이고, 정복관은 근대 산업사회의 특징이며, 인간 가치에서 전통사회는 다분히 이성·수양·격조 지향적이고 산업사회에서는 행동·생산·업적 지향적이다.
넷째, 아주 심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 개인이나 문화집단은 한 우세한 특정 가치관을 보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열세라도 다른 두 가지의 가치지향의 작용도 동시에 엿보인다. 극도로 침체된 사회만 단일 가치 사회일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정복관이 우세한 사회도 호된 지진이나 태풍을 당하면 자연에 대한 외포감, 예속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행동지향·업적지향의 개인이라도 기본적인 인간적 정감과 격조에 대한 바람은 있고 남에게도 그렇게 기대한다는 관찰도 가능하다. 변화가 많은 사회에서는 다가치적, 가치유동적 현상이 더 심하다.
다섯째, 나아가 '건전한' 개인, 건전한 문화집단의 경우엔 그 기저에 각기 세 가지 가치관들의 어떤 조화로운 종합이 있으며, 따라서 지구촌의 보편윤리도 어떤 모양으로든 그런 조화로운 종합을 반영해야 할 것이라는 추리도 가능하다. 도리어 인간은 어떤 한 가치지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기본에는 예컨대 예속관, 조화관, 정복관의 적절한 종합; 과거, 현재, 미래지향의 적절한 규형; 종적, 횡적, 개인적 인간관계의 적절한 조합; 정감적 유락 지향, 이성적 격조 지향, 행동적 생산 지향의 적절한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전인적'인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가 급격하게 한 동네가 되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구촌 구제를 위한 보편적 윤리는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보편적 윤리가 각 문화집단의 문화적 특수성, 다양성과 공존하고 공존할 수 있고 공존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구촌 구제를 위한 그런 보편적 가치 추구는 전통적인 동양가치의 서양화, 근대화, 미래화도 포함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전통적'인 서양가치의 동양화, '근대화', 미래화도 포함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동양적이냐 서양적이냐에 있지 않다. "문화의 충돌"의 개연성이야 높건 낮건, 지구촌의 구제와 생존을 위해서는 지구촌의 여러 문화집단의 가치관의 어떤 '조화로운 종합'의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가치의 변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타당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한 사회에 또는 세계적으로 조성해갈 수 있을까? 이 문제의식도 당연히 보편가치 추구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고 또 포함되어야 한다. 아니면 그 추구는 순전히 개념적 유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가령 어떤 신자가, 누가 그의 인간형상적 유일신 신앙은 자연보존에 역기능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신앙을 쉬 버릴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종적 관계, 가족주의, 조상숭배가 근대사회의 발전에 역기능적일 수가 있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쉬 바꿀 수 있을까? 바꾸게 할 수 있을까? 이것도 당분간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가치의 변화가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가치변화에 관한 어떤 뚜렷한 견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 답을 논의할 생각도 준비도 없다. 다만 몇 가지 관련된 문제를 기술함에 그칠 수밖에 없다.
첫째, 한 사람 또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은 그 내면화(內面化) 정도가 각기 다르다. 자아개념, 자아정체성 깊숙이 내면화되어 들어가 있는 가치는 여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은 대개 선거제도에서는 쉬 동의하지만 조상숭배에는 쉬 버리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가치변화의 의도적 가능성에 관해서 꽤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한다. 그러나 긴 세월의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정책만 있다면 바람직한 가치의 내면화를 유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둘째, 한 사회에서의 여러 가치들은 그 수용범위가 다르다. 누군가 문화를 대다수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중핵가치", 각기 일부층에서만 통용되는 "전문(또는 특수)가치", 그리고, 대다수에 의해서건 일부에 의해서건 그것을 수용할 것인가 아닌가에 찬반의 논쟁이 남아있는 "선택가치"로 나누었다. 효는 한국의 중핵가치고, 전인(全人)은 아마도 교육자들에게 잘 통하는 전문가치지만, 근자에 교육부가 강행하고 있는 "수행평가"는 아직도 논쟁이 많은 선택문화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보편가치 변화의 문제는 우선 바람직한 가치가 한 집단의 선택가치에서 중핵가치 또는 적어도 전문가치로 포섭되고, 전문가치에서 중핵가치로 수용되도록 그 수용범위를 넓히는 여러 노력을 의미하게 된다.
셋째, 여러 다른 생활영역, 활동영역 여하에 따라 적절한 가치가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일련의 가치가 모든 활동영역에서 다 같이 기능적 또는 반대로 다 같이 역기능적으로 작용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수신 재가 치국 평천하"가 그것이다. 수신 잘하면 재가도 잘 하고 재가 잘하면, 치국, 평천하도 잘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실제에서 이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치국 잘한 사람이 재가에는 실패한 사람도 있고, 효는 수신과, 재가에는 좋으나, 치국과, 평천하에 반드시 이롭지는 않다. 사회활동의 각 측면 또는 각 영역 또는 각 단계에 고루 기능적 또는 역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가치도 있겠지만, 각 영역의 내적 논리에 따라 그 윤리도 다를 수도 있다. 경제발전, 정치발전, 자연보전에도 언제나 어디에서나 다 같은 논리에 따라서 같은 윤리가 작용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에겐 윤리적 유연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넷째, 가치 변화 또는 요새 자주 거론되는 의식개혁은 그저 "바꾸자"라는 소리 높은 외침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결국 어떤 환경조건―자연, 가정, 학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그리고 그 제도와 정책 등―의 의도적, 무의도적 변화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가치 내지 가치관은 결국 이런 환경조건에서의 '생존가치'에 따라서 내면화되는 셈이다. 따라서 지구촌에 어떤 보편가치를 조성하려 한다면, 그 판명과 선언을 넘어서 어떤 환경조건을 어떻게 조성해야 하느냐에 보다 많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한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의식구조, 정신 상태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환경조건은 가정의 부모, 학교의 교사, 매스미디어의 언론방송인,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의 행태라고 본다. 이들의 행태와 이들이 펼치는 프로그램, 제도, 구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구촌 보편윤리의 조성도 몇몇 학자와 사상가에 의한 그 선언에는 그것이 세계는 부모, 교사, 언론방송인, 지도층의 관심사, 소관사가 되도록 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창안하고 실시하는 일이 필히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문> 지구촌의 보편윤리 조성은 가능한가? (1000자 ± 1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