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번화가로 변모한 을지로
일본인들은 장안을 드나들며 진고개 일대를 마음에 두었다가 남산 중턱의 높고 널찍한 예장동에 공사관을 지었다. 이 건물을 통감부, 총독부 청사로 쓰면서 가난한 남산골 샌님들을 꾀어 집을 저당잡고 돈을 꾸어주었다.
그리고 일부러 기일이 되면 다른 곳으로 피해 숨어 있다가 기한이 지났다며 마구 집을 몰수하는 등 온갖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고개 일대를 점유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장악원 자리에는 착취의 본거지인 동양척식회사를 설치하는가 하면, 종로 육의전 중심의 500년 북촌 상권을 탄압하면서 진고개 즉, 본정통을 일본인의 상권의 중심지로 키워 나갔다. 그들은 남촌을 근거지로 삼아 진고개를 혼마치(本町)라고 부르면서 서울 제일의 번화가임을 자랑하였다.
일제침략기의 중구의 충무로, 명동, 을지로 등지는 서울의 번화가, 즉 다운타운(down – town) 그 자체였다. 대기업체의 본사가 집중해 있는 오늘날의 중구 관내보다 오히려 잡다한 상업 기능은 일제강점기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명동 일대가 번화가를 형성하였고, 각각의 거리마다 그 특징이 있었다.
음식업에 대해서 「대경성안내」책자를 인용해 보면
「밤의 경성에 화려한 환락을 뿌리는 붉은 등, 푸른 등의 거리, 그것은 상당한 성황을 이루고 있다. 환(丸)빌(마루 비루)회관을 제외하고 카페, 바(Bar) 만으로 약 1,000명의 여인이 째즈음악 흐르는 밤의 경성을 서비스하였다.
일본인가에서 왕좌를 점하고 있는 것은 명동의 환빌회관이다. 여급의 총수는 50여명, 이른바 미국식이며, 째즈 기분이 넘쳐 밤마다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환빌회관에서 조금 북쪽 모퉁이에 국수가 있다. 품위 면에서는 경성의 제1이며, 위의 2개와 어깨를 겨루는 것으로 소공동 경성공회당 지하의 화랑식당이 있었다.
회현동 1가에는 현대적인 유리로 장식한 3층 누각을 지은 삼양헌도 경성 카페계의 일류급에 속하였다. 위의 4개 업소에 다음 가는 것이 은송정(을지로입구), 부사(남대문통), 바론(저동), 킹그(충무로5가), 본정바 등이 중류급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일본은 전승국으로 되어 전시물자와 기타 상품의 수출이 증가하면서 경제가 호황을 맞았다. 그러자 경성부의 토지가격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 당시 을지로 지역의 토지가격을 지역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경성시가지 토지가격표(1평당)
행정구역명 | 1915년도(원) | 1918년도(원) | 1919년도(원) |
황금정1정목 | 70 | 50∼100 | 80∼200 |
황금정2정목 | 80 | 80∼100 | 100∼300 |
황금정3정목 | 25 | 20∼50 | 30∼70 |
명치정(명동) | 40 | 50∼120 | 80∼250 |
남대문통2정목 | 120 | 180∼250 | 250∼350 |
남대문통3정목 | 140 | 150∼200 | 200∼380 |
남대문통4정목 | 100 | 150∼200 | 200∼380 |
장곡천정(소공동) | 45 | 40∼100 | 60∼130 |
*자료 : 경성부, 『경성부사』 2권(번역본), 2013, 6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