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6월, 아프리카 남부의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Cape Town)항에 입항했다. 당시에는 이 부근에서 가장 개방되었고 아쉬운 것이 없는 항구였다.
이곳의 랜드마크인 테이블마운트의 위용(빌려온 사진)
그러나 아직 인종분리정책(Apartheid)가 엄연히 존재했던 곳이었다. 1948년에 시작된 것이 1994년 유명한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 폐지되었다.
말로만 듣던 이 나라의 인종분리, 즉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확인했다.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컬러드, 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사상 유례가 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세계의 비난을 받아왔었다. 같은 아프리카 어떤 나라에서는 선박이 이 나라에 들렀다는 증거가 있으면 입항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어 가짜 항해일지(航海日誌)를 만들어 다닌 적도 있었다.
‘인종차별’이 그렇게 비참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이었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피부색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이상했다. 검기로 보면 아프리카 흑인들보다 더 새카맣고 반들반들 한 인도사람들은 유색인종 즉 흑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사실, 술집에서 만난 피부가 하얗고 마음씨도 고운 아가씨가 흑인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랬다. 그래서 인도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상점에는 몽둥이가 몇 개씩 상비되어 있어 혹시나 백인이 들렸다 흑인으로 대하면 무조건 몽둥이부터 들고 시작하는 풍경도 살벌했다.
내 뱃전에서 본 테이블 마운트의 한쪽 끝자락
남쪽에는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의미의 희망봉(喜望峯, Cape of Good Hope)이 더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곳이 아닌 아굴라스(Agulhas) 곶이 최남단임) 이 끝을 경계로 인도양과 대서양이 갈라짐과 동시에 두 연안의 해류도 완전히 다르며 특히 인도양 연안의 아굴라스해류는 난류로 유속이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나라의 현관격인 대서양쪽의 케이프타운항과 인도양쪽의 더반항이 있으나 역시 해류를 닮아 그런지 시설이나 인심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케이프타운항에는 테이블마운틴(Table Mount)이라는, 정상을 마치 칼로 벤 듯이 평평한 바위산이 있어 올라가면 광활한 바다와 전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적 명소이기도 하다.
산을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오줌이 찔끔그릴 정도
이 나라를 방문하는 외국 선원들은 ‘상륙증’(shore pass)이라는 증명서를 지참하게 함으로 차별에서 제외되기는 하지만, 체구가 작은 동양 사람들은 현지 빈민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노상강도의 대상이 바로 그것이다.
늘 그렇듯이 현지 사정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터라 나름대로의 대비책은 세우고 상륙(외출)한다. 두 사람 이상 나가거나, 자잘한 잔돈만 주머니에 넣고 큰돈은 양말 속 바닥 같은 곳에 숨기고 고급시계, 반지 같은 것은 아예 지참하지 않는다. 은밀한(?) 볼일에는 불편한 점도 있지만 각오가 필요하다.
어느 날 여름 낮, 좀 걸을까 하고 무심코 혼자 나갔다가 자신도 모르게 제법 멀리까지 걸었다. 별다른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걷고 싶어서였다. 밝은 대낮인 데다 넓직한 대로(大路)라 마음을 놓았던 것이 탈이었다.
맞은편에서 팔에 옷을 걸치고 걸어오던 젊은 녀석 하나가 잠깐 멈추더니 물어볼 것이 있다기에 멈추었는데, 아뿔싸! 팔에 걸친 옷 밑에는 시퍼런 칼날이 삐죽이 들어나 내 복부를 향하고 있었다. 머리털이 쭈빗 일어서고 소름이 확 끼친다. 몸은 굽신굽신하면서도 계속 담벼락 쪽으로 몰아붙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두 세 명이다. 둘은 어느새 내 호주머니를 위에서부터 샅샅이 훑고 있다. 입은 고사하고 온 몸이 얼어붙는다. “잠깐, 내가 꺼내 주마”해도 어림없다. 눈과 마음은 그 놈의 뾰족한 칼끝을 떠나지 못한다. ‘언제 저 놈의 칼끝이 내 몸에 박힐까’,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나 갑자기 큰 소리의 고함이 들렸다. 차를 몰고 가든 백인 남자 하나가 보고는 차를 세우고 내려 소리치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잠깐 멈칫하는 순간에 그 차를 향해서 냅다 튀었다. 진짜로 ‘걸음아 나 살려라’ 였다. 백인이 고함치면 하던 짓을 멈추고 물러서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백인 남자도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차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으나 쿵쾅거리는 가슴은 쉬이 가라앉질 않는다. 차가 움직이자 괜찮다고 했다. 그제야 내 신분을 밝혔다. 자기는 프랑스 출신으로 이곳 주민이라며 부두까지 실어다 주었다.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고 했으나 바쁘다면서 그냥 갔다. 이름도 성도 나누지 못했다. 앗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내 혼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정상을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이로 인한 날카로운 칼끝에 대한 트라우마는 4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방에서 집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식칼을 꺼내면 우선 소름이 전신을 훑고 지난 다음에도 불안이 남는다. 다 쓰고 나면 재빨리 치워 눈에 보이지 않아야 안심을 한다. 큰 사고로 얻은 트라우마에 대해 심리적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이해가 된다.
마운트 테이블에서 내려다 본 케이프타운 항과 시내
남미 어느 나라에선가 길을 가는데 뒤에서 오는 녀석이 느닷없이 내 아래 주머니에 손을 쑥 넣어 잽히는 데로 빼서는 겨우 서너 걸음 앞에서 유유히 걸어가며 힐끗힐끗 돌아봐도 감히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과 충동이었다.
필리핀의 어느 항에서다. 항내 묘박지(錨泊地)에 닻을 내리고 정박 중일 때, 밤늦은 마지막 통선(通船)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각국 선원들이 있기 마련이다. 거리에서 날치기, 노상강도 등을 당한 것은 덩치가 크고 살결이 흰 사람들은 적다. 주로 자그맣고 노리끼리한 동양인(그래봐야 일본인 아니면 한국인들)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 하듯 귀선하는 통선 안에서 온갖 욕설로 필리핀을 욕하지만 혼자만의 분풀이일 뿐이다.
한 번은 옆에 앉은 점잖은 스웨덴 사람(아마도 고급사관임이 분명한 듯)이 무슨 일로 저리들 흥분하냐고 묻는다. 당했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마도 부산이나 인천 등 큰 항구에서 서양인 선원들이 상륙했다가 소위 뒷골목 건달들에게 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낯이 화끈하다. 입이 더 열리지 않았다.
첫댓글 "한국도 마찬가지" 낯이 뜨거웠겠습니다.
세상은 넓은 만큼 가지각색 인종과 행태가 있군요.
소설 속에서나 있음직한 님의 생활에 놀라고 있답니다.
덕분에 세계 곳곳을 간접 체험하게 해 주셔서 너무너무 고맙네요.
대사카페에 불을 밝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페에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기분이 썩 좋거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