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설] 능제(菱堤)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이다. 능제저수지는 귀[굽이·귀퉁이]가 99곳이나 되는데, 귀가 100곳이 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건립경위]능제저수지는 본래 주변 구릉지의 물을 가두는 재래지(在來池)였으나, 1930년 1월 1일 확장 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2월 31일 준공되어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揚水貯水池가 되었다.
[구성]능제저수지의 제당 형식은 휠댐이며, 제당 체적은 85,400㎥이다. 제방의 길이는 976m이고, 제방의 높이는 7m이다.총저수량은 7,338,000톤이며, 유효 저수량은 7,315,000톤이다. 死水量은 23,000톤이고, 취수 형식은 취수탑형이다. 유역 면적은 178㏊이며, 홍수 면적은 192㏊이다. 만수 면적은 192㏊이고, 수혜 면적은 1,903㏊이다.
[현황] 2016년 현재 능제저수지는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가 관리하고 있다. 한발 빈도는 10년이다. 전라북도 김제시만경읍사무소에서 익산 방향으로 300여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김제시 만경읍과 성덕면이 경계를 이루고 김제와 군산 방향인 국도 29호선이 인접한 곳이다. 낚시터로도 이름을 얻고 있다.
아리랑문학마을은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소설의 배경으로 '수탈당한 땅과 뿌리 뽑힌 민초들'이 민족의 수난과 투쟁을 대변하는 소설 아리랑의 배경을 재현한 곳이다. '아리랑'이 노동요에 망향가,애정가이자 만가(輓歌), 투쟁가로 민족의 노래가 되었던 것처럼 소설 속 징게맹갱(김제만경)은 강탈당하는 조선의 얼과 몸의 또다른 이름이자 끝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싸워나갔던 무수한 민초들의 삶을 배태(胚胎)한 땅이다
= 시설현황
면적 : 29,316㎡
사업기간 : 2008.6 ~ 2012.8
주요시설 : 19동 3,067㎡
-홍보관
모형 : 쌀가마니와 논의 형상을 표현함(1동)
표현 : 문학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수탈 대상인 쌀과 토지를 상징하여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픔에서 벗어나 발전된 미래 지향적 염원으로 현대식 구조로 조성
일본은 왜 수탈의 대상으로 김제를 선택했는가? 지평선을 이루는 징게맹갱 외에밋들,생명의 쌀이 있는 곳
- 근대수탈 기관 ;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4동)
표현 :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탈을 대표한 주요 기관 기관별 활용자료와 당시 사진들을 전시하여 잊혀져 가는 아픈 역사를 상기하여 조국애를 일깨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
일제강점기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미명하에 민초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던 주재소, 면사무소등 근대 기관
-내촌·외리마을
주요가옥 :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손판석, 차득보 가옥 등
표현 : 일제강점기 수탈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을 스토리텔링기법으로 표현하기위한 공간으로 조성
소설 아리랑의 발원지,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수탈과 고난의 삶을 소설 속 주인공의 생활터전을 통하여 느껴보는 공간
-이민자가옥
주요가옥 : 너와집, 갈대집(2동)
표현 :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하여 산지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수탈 정책에 못 이겨 대대로 살아온 토지를 떠나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시베리아 등 이역 땅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서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하얼빈역사
모형 : 1910년경 실존건물을 토대로 60% 정도로 축소 복원
표현 :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당시 조선 통감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푸른 영혼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 현장이다. 하얼빈역은 우리의 가슴 속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 교육장이다. 조국의 아픔과 민족의 설움을 한 청년의 불길 같은 애국심으로 민족의 자존을 세운 승리의 현장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끝없는 항쟁,
1909.10.26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사살
* * * 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 사적 제111호 (1963년 1월 21일)
[성격]
수리시설
[양식]
저수지
[건립시기/연도]
330년 삼국시대
[높이]
벽골제비 1.95m
[길이]
제방 원래 3,300m|현재 2,500m
소재지 ;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그러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제방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 제방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건립경위] 백제는 3세기 말에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아우르고 노령산맥 이북까지 진출하였고,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노령 이남의 잔존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오늘날의 전라남도 해안 지방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 시기는 고이왕으로부터 근초고왕에 이르는 80여 년으로, 고대 국가 발전의 준비 기간으로서 마한 세력을 완전히 아울렀다. 또한 기후가 온난하고 넓은 평야를 가진 서남 지방이 지배 아래 들어오자 수전도작(水田稻作)을 장려하고 관개 시설을 확충해 경제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김제 벽골제의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벽골제의 축조 연대가 330년(백제 비류왕 27)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330년에 김제에 벽골제를 쌓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369년 남방경략(南方經略)을 도모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벽골제비는 1415년(태종 15)에 벽골제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비문이 마멸되어 1684년(숙종 10)에 신털미산정상에 중건되었다.
[위치] 이곳의 지형은 전주의 완산칠봉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자락이 낮은 언덕을 이루면서 김제시 금구면, 용지면, 교동월촌동을 지나 포교의 초혜산에 이르러 멈추고, 상두산에서 뻗어 나온 또 하나의 줄기는 김제시 금산면, 정읍시 옹동, 감곡면을 거쳐 김제시 부량면명금산에 이르러 멈춘다. 이 두 줄기 사이의 가장 좁은 평원에 저수지의 제방을 쌓았다.
[형태]벽골제방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약 3,245m,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으로는 약 3,362m이다. 1975년 벽골제발굴 작업을 하면서 제방의 길이를 실측한 결과 약 3,300m가 나왔으니 문헌의 기록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벽골제비의 크기는 높이 1.95m, 폭 1.05m, 두께 0.13m이다. 벽골제방은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포교(浦橋)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2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 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1975년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 깊이 12㎝의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현황]현재의 김제 벽골제는 길이 2,500m의 제방과 2개의 수문인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만이 남아 있다. 또한 현재의 제방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 관개용 간선 수로로 개조해 놓은 상태이다. 벽골제비는 현재 전면과 후면의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거의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신털미산에 있던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1975년 장생거 옆의 제방 위로 옮기고 비각을 설치하였다가 1980년 벽골제지 정화 공사로 인하여 제방 아래 현재 위치로 옮겼다. 1963년 1월 21일 김제 벽골제비 및 제방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3월 김제 벽골제로 사적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의의와 평가]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最古이자 최대의 농경 수리 문화 유적으로 각종 수리 시설 발달사의 산 교육장이라 할 수 있다.
* * * 김제 금산사 일원
사적 ; 제496호(2008.12.18.)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김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불사 이후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후백제 견훤의 유배지로도 알려진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법상종 관련 불서의 간행 및 유포에 힘쓰는 한편 금산사를 중창하였으며, 임진란 당시에는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조문화재 및 조선후기의 목조건축 등 다량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호국사찰로 역사적·문화사적 의의 등 학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원래는 금산사의 미륵전(彌勒殿) 앞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22년에 대장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사각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둥근 받침들이 있고, 그 상단에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었다. 8각의 간석(竿石) 받침 위에 간석을 찰주형(刹柱型)으로 세우고, 약간의 배흘림과 귀퉁이마다 우주(隅柱)의 선이 있어 안정감을 준다. 또 중대(中臺)는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으로 장식하였고, 팔각의 화사석(火舍石) 4면에는 화창(火窓)이 있다. 그리고 개석(蓋石)에는 2단 받침이 있고, 전각(轉角)에는 귀꽃[隅花]이 장식되었으며, 그 위에 상륜(上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