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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말씀 : 누가복음 14:1-35
요절 : 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주 소반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식기를 받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쓰는 작은 상을 소반이라 합니다. 나주 소반을 만드는 김춘식 장인은 국가무형문화제 99호로 지정된 이 기술의 전승보유자입니다. 그는 1960년대 초에 상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고, 장인태 장인으로부터 나주반의 구조와 제작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망가지고 헌 상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수고를 무수히 반복하였고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만드는 나주 소반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국가의 인정과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그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과정이 결코 편하거나 쉬울 수 없습니다. 저의 목자생활 동기 중 한 분은 이 길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자기는 결코 가지 않겠다 말하며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결단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 분명히 결단하기를 기도합니다.
율법에 매이지 않으신 예수님(1-6)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바리새인들이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수종병 든 사람을 어떻게 하는지 보며 문제를 책잡으려 했습니다. 수종병은 몸이 붓는 병입니다. 심장의 기능이 떨어지면 심장으로 들어오는 혈액이 정체되면서 몸을 붓게합니다. 부종 때문에 걷기도 힘들고 심하면 눌리는 듯한 통증을 겪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수종병 든 이 사람의 어려움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한 율법을 어기나 안 어기나 그것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잘 아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환자이면 당장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하는 것이 당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시대를 반영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준을 고수하면서 그것으로 자기를 높이고 방어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대학에서 학과로 융합 교과목, 혁신 교과목을 개발하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선뜻 나서는 교수님이 없습니다. 기존에 해온 교과목이 좋으니 그대로 가겠다 합니다.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바꾸려 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공격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매여 살아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잠잠하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서 보내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수종병든 사람은 움직이면 쉽게 숨이 차서 남들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그가 병이 낫고 편안해 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안식일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며,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셨습니다. 또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한 여자를 안수하여 고치실 때 분 내는 회당장에게 외식하는 자라 하시고,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외식하는 사람과는 다르십니다. 율법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생명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또 우리가 따라야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7-14)
7절을 보십시오. 그 때 그 자리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는 것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모임에서 자리는 중요합니다. 당시 식사 테이블이 둥근 반원의 형태였습니다. 반원의 중심되는 자리에 주인이 앉았습니다. 주인과 더 가까이에 앉을수록 주인과 더 친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하십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하십니다. 그러면 청한 자가 와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 앉으라 할 것이니 그 때에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몸소 지켜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식사 자리에서 발 냄새가 풀풀 나는데도 아무도 먼저 나서서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가장 낮은 하인이 발을 씻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하면 자기 서열이 가장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에 물을 받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겸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자기를 식사자리에 청한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하십니다. 이들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내가 아무리 도움을 주어도 돌려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이 자리에 주로 바리새인 동료들을 초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친절을 베풀고 식사자리를 마련할 때, 계산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내가 쓴 돈이 얼마고 나중에 얼마나 돌려받을지를 따졌습니다. 준만큼 돌려 받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였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예 베풀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조건 없이 순수하게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십니다.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이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시고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장모이신 천사라 사모님은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계산이 정확하시다 말하곤 하십니다. 젊은 시절 헌신하여 드린 것을 받아주시고 갚아주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제센터가 개척되기 전 김해에서 부산까지 그 때는 차편이 많지 않아 힘들게 다니셔야했고 심지어 눈이 많이 오면 4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을 공부하며 도왔던 학생들이 세계 여러 곳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쓰임받고 있습니다. 본인도 독일선교 가정으로 나가셨고 그곳에서 천모세 목자님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 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한마디 말씀을 받고 누워계신 천모세 목자님 옆에서 26년간 믿음을 지키셨을 때 치료에 드는 모든 비용과 자녀 교육까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데지금까지 먹고 지내는 것에서 부족함이 없다 하십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또 수고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이 가장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돌려받지 못하거나 이 세상에서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이를 믿는 사람이라면 갚을 것 없는 사람을 청하여 베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주고 나누고 베풀 때 오히려 더욱 풍성해 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낮아지고, 믿음으로 베풀며 살아서 높여주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15절부터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지 그 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청함에 응한 자들로 채우라 (15~25)
15절을 보십시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만찬을 함께 할 복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비유의 말씀을 통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있는 자들인지 가르쳐주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식사를 했는데, 한번은 오전 10시 쯤 아점을 먹고 저녁이 어두워지면 점심겸 저녁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잔치는 통상 저녁에 열었는데, 이 때 미리 초청할 사람을 정하여 앞서서 한번 초청하고 잔치 시간이 가까워오면 다시 또 초청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잔치할 시간이 가까워 오자 주인은 미리 잔치에 청하였던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한번 더 정중히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 일치하게 잔치에 가기를 사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천국 잔치에 미리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복된자로 여겼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 초청받았다고 하여 당연히 잔치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을 크게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원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돈이 많았고 유대의 정치권력까지 강력하게 거머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건배사는 ‘이대로!’ 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여기가 천국이다, 부활도 못 믿겠다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무기로 백성들을 확실히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면 백성들이 절대 복종하고 높임을 받으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필요없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오로지 로마타도,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과 부흥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대면서 초청받은 천국잔치에 No show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사실을 그대로 고하니 집 주인이 노하였습니다. 종에게 말하여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멸시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명백한 죄로 인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세리나 창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천국 잔치에 들어갈 길이 열렸습니다. 감사함으로 청함에 응하면 됩니다. 그런데 종이 이들을 데려오고도 아직 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주거지에서 떨어져 사는 사람들, 당시 이방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까지 천국 잔치가 허락되었습니다. 감사함으로 청함에 응하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천국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내가 한번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로 여기지 말아야함을 가르쳐줍니다. 이번 주에 대학교 수시모집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각 지역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아주던 주요 대학들, 지거국들마저도 정원을 채울 수 없이 낮은 경쟁률의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괜찮다 하는 대학이라도 상황에 따라 정원이 조정되고 학과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학과가 없어지면 교수도 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떠할까요? 지금 내가 신앙생활 이만큼 했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장받을 수 없고 결코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제자의 길을 계속해서 가야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주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셔서 계속해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우리를 천국잔치에 초대하여 주십니다. 내가 이 정도면 되었다는 마음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이 베푸시는 천국잔치의 초청에 감사함으로 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여 제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25~35)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큰 일을 할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오는 무리를 돌이켜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26,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미워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다른 것을 앞에 둔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와 처자식와 형제자매, 나아가 자기 목숨보다도 예수님을 앞에 두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제자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밑바닥을 다 드러내는 수치와 괴로움입니다. 제자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군대 훈련병이 되면 행군이라는 것을 합니다. 이 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아 군장을 싸서 매고갑니다. 긴 행군 길에 내 군장을 누가 대신 져주지 않습니다. 내가 져야합니다.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앞에 가는 전우의 군장을 보면서 묵묵히 내가 지고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무겁고 힘들지만 앞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가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28을 보십시오. 망대를 건축한다고 널리 알리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망대 건축 비용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여 중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남대학교에서 야심차게 아산에 분교를 열었는데 중간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 캠퍼스에 가보면 다 짓지 못한 건물이 흉물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리 계산하고 준비하지 않아서 중간에 멈춘다면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도 이루지 못하고 망했다' 하는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는데 이거 내 계산이랑 다른데 하고 중간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어떤 임금이 전쟁을 하겠다고 1만명 군사를 이끌고 나갔는데, 적국에서 2만명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작전을 잘 짜서 어떻게든 이길 궁리를 하든지, 안되겠으면 사신을 보내 화친이라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가다가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선생님이신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33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러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하였지만 실상은 돈과 쾌락과 자기영광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대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예수님이 배푸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만 있고 땅위의 유익과 세상 영광을 탐한다면 천국잔치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배우며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이 제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주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말씀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도 아깝지 않겠다 나름 많은 고민과 계산 끝에 내린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의 결단을 축복하시고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캠퍼스 교수목자로 하나님을 섬기고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한 영혼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것은 저에게 지기 힘들고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이제와서 제가 이만하면 되었다 안주하고 그럴듯하게 외식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캠퍼스 개척이 힘들다고 내가 져야할 십자가가 무겁다고 멈추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하겠습니다. 나에게 보내신 한 영혼을 위해 내 스타일, 내 삶의 패턴, 경상도식 말투까지도 바꿔 가겠습니다. 제가 2006년 1월 곤지암 수양관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 한 결단을 기억하고 이 길을 계속해서 끝까지 달려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율법, 물질, 자존심, 스타일,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버리는 길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버림당하는 아픔과 죽을 것 같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단하지만 이 길을 끝까지 갈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가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참된 영광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 결단하며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을 축복하시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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