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南山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남쪽에 남북으로 솟아 있는 산. 고위산(高位山, 494m)과 금오산(金鰲山, 468m) 등 2개의 봉우리가 남산을 대표하는데, 이 중 금오산은 남산을 통칭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 남북길이 8㎞, 동서길이 12㎞, 34곳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남산의 동쪽에는 낭산(狼山)·명활산(明活山),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벽도산(碧桃山)·옥녀봉(玉女峰), 북쪽에는 금강산(金剛山)·금학산(金鶴山)이 솟아 있으며 토함산(吐含山)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 남산에서는 BC 10∼BC 6세기 무렵의 유물로 추정되는 민무늬토기·간돌도끼[磨製石斧]·간돌칼[磨製石刀]·홈자귀[有溝石斧]·방적차(紡績車)와 함께 고인돌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蘿井), 신라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신라가 종말을 맞았던 포석정(鮑石亭)이 있던 곳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서도 이름이 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崇山信仰)·암석신앙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유적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이다. 금오산·고위산·도당산(都堂山)·양산(楊山) 일대 즉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 등 1813만 4635m²의 지역이 1985년 사적 제311호 <경주남산일원>으로 지정되었다.
: 〔동남산〕 〈왕정골[王井谷]〉 반월성(半月城) 앞 골짜기로 대궐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어 왕정골이라고 불린다. 인용사(仁容寺)터·천관사(天管寺)터 등 3군데의 절터와 석조여래입상 1체, 석탑 5개, 불상대좌 2개, 정자터 3군데가 발견되었다.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신라사람들이 지었다는 인용사 터에는 2기의 탑 잔재와 팔방대좌(八方臺座)의 지대석(址臺石)이 남아 있다.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던 천관사 터에는 탑재(塔材)·주춧돌이 널려 있다. 높이 2m, 나비 1m인 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이 밖에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고려 왕건(王建)에게 글을 올린 곳인 상서장(上書莊)이 있다. 〈절골[寺谷]〉 상서장 동쪽 양지(陽地)마을의 뒤쪽 골짜기로, 절터의 흔적으로는 3층석탑의 탑재가 남아 있다. 〈부처골[佛谷]〉 남산 동쪽 기슭 인왕리에 있는 계곡으로 3군데의 절터, 석불 1체, 마애불 1체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198호로 지정된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은 높이 3.2m, 나비 4.5m의 바위에 1m 깊이로 판 감실(龕室)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전해진다. 〈탑골[塔谷]〉 부처골과 미륵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절터 2군데와 석불 1체, 마애불 22체, 석탑 4기,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탑골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부처·보살·신장상(神將像)·동물·탑·비천(飛天)·수목 등을 새긴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이 있다. 〈미륵골[彌勒谷]〉 배반동(排盤洞) 경주임업시험장 뒤쪽 골짜기로 보리사(菩提寺)와 석불 1체, 마애불 1체, 석탑 2기가 있다. 보리사 경내에 보물 제136호인 경주남!
산미륵곡석불좌상이 있으며 절 입구에서 동쪽 300m 되는 곳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이는 높이 0.9m의 좌불로 전체높이 1.5m의 광배형 감실에 안치되어 있다.
: 〈천암골[千巖谷]〉 화랑교육원의 북서쪽에 있는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사적 제187호 왕릉은 4각으로 다듬은 돌로 둘레돌[護石]을 쌓았으나 덮개돌[上石]·난간 등이 전대의 왕릉에 비하여 빈약하다. 〈철와골[鐵瓦谷]〉 통일전(統一殿)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다른 곳에 비하여 골이 깊고 넓다. 2군데의 절터와 석탑 2기, 정강왕릉(定康王陵) 등이 있으며 1959년 이곳에서 발견된 불두(佛頭)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불두의 높이가 1.53m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상 전체높이는 10m가 넘었으리라 추정된다.
: 이 밖에도 《삼국유사》 중 <거문고갑을 쏘라>는 전설을 가진 사적 제138호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국사골[國師谷]〉 탑마을과 서출지가 있는 안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4군데의 절터와 석탑 4기, 석등 2기, 대좌 2기 등이 발견되었다. 절터에서는 축대·기단면석·갑석과 탑의 뚜껑돌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상사바위[想思巖]·고갈바위·큰지바위·부석(浮石;버선바위) 등의 기암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오산골[鰲山谷]〉 남산동 남쪽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개선사(開善寺)터와 마애불 1체가 발견되었으며 골짜기 아래에는 몇 기의 고인돌이 있다. 개선사터에 있는 높이 1.7m, 나비 0.56m의 약사여래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대지암골[大地巖谷]〉 남산동 탑마을을 지나는 골짜기로 탑마을에서는 4군데의 절터와 보물 제124호인 남산리삼층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양피사(讓避寺)의 것이라는 설과, 피리사(避里寺;뒤에 食佛寺)의 것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 〈쑥두듬골[蓬丘谷]〉 남산동 남쪽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골짜기로 절터와 석탑 2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동탑(東塔)은 불국사역 앞 로터리에 옮겨져 있다. 〈승소골[僧燒谷]〉 남산동 계곡 중 마지막 지류가 있는 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높이 3.6m의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천동골[千洞谷]〉 승소골과 봉화골 사이의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등 1기, 돌기둥[石柱]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 2m, 나비 0.6m의 돌기둥에는 100개 가량의 감실을 파고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이 있다. 〈봉화골[烽火谷]〉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 마애불 8체,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대 1기, 경석(經石) 1개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200호인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은 큰 바위에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칠불암 뒤에 높이 솟은 바위에는 보물 제199호인 높이 1.9m, 나비 1.3m의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 〔서남산〕 〈식혜골[識慧谷]〉 동남산의 왕정골과 가장 가까운 골짜기로 사제사(四祭寺)를 비롯한 2군데의 절터, 남산성과 포비암(布飛巖) 등이 있다. 사제사터에서 발견된 팔부신중을 새긴 기단면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적 제22호인 남산성은 진덕여왕 때 쌓은 것을 문무왕 때 보수한 것으로 둘레가 4㎞에 이르며, 포비암은 식혜골 정상에 있던 바위로 베짜던 곳이라 하여 베나리바위라고도 한다. 〈장창골[長倉谷]〉 식혜골에서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7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4기, 석등 2기, 당간지주 1개 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 삼화령석조미륵삼존불상(三花嶺石造彌勒三尊佛像)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고 천은사(天恩寺)터에는 초석, 탑의 뚜껑돌 등이 남아 있다. 또 식량저장소였던 장창과 사적 제173호인 일성왕릉(逸聖王陵)이 있다. 남간사(南澗寺)터 부근에는 신라 초기 6촌(村)의 하나인 양산대(楊山臺)가 있으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관련된 사적 제245호 나정(羅井)도 이 골짜기에 있다.
: 〈포석골[鮑石谷]〉 탑정동(塔井洞) 포석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원래 부흥골[富興谷]이었으나 포석정의 이름을 빌어 포석골이 되었다. 10군데의 절터와 석불 2체, 마애불 1체, 석탑 8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연꽃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는 높이 1m의 마애여래상 외에도 사리탑·남근석(男根石)·상사바위가 있다. 대표적인 절터로는 창림사지가 있으며 목 없는 비로자나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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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느리골[潤乙谷]〉 포석골의 상류로 해목령(蟹目嶺) 남쪽에서 남산성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다. 2군데의 절터와 마애불 3체,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0.8m의 약사여래삼존불은 ㄱ자형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기암골[碁巖谷]〉 포석골의 한 갈래로 배실이라고도 한다. 3군데의 절터와 석불 1체, 석탑 4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머리 없는 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산봉우리의 바둑바위 부근에 금송정(琴松亭)터가 있다. 〈선방골[禪房谷]〉 포석정의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보물 제63호인 배리석불입상은 배동삼체석불이라고도 하며 조각솜씨가 석굴암과 견줄 만하다. 주위에는 삼불사(三佛寺)·망월사(望月寺)가 있다. 〈삼릉골[三陵谷]〉 배동(排洞) 배리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냉골[冷谷]이라고도 한다. 8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으며, 사적 제219호인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신덕왕릉(神德王陵)·경명왕릉(景明王陵) 외에 경애왕릉(景哀王陵) 등 4개의 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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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도 목 없는 석불좌상, 삼릉계선각불상군으로 불리는 6존불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호인 마애관세음보살상, 제158호인 마애선각여래좌상, 제159호인 마애석가여래좌상, 보물 제666호로 지정된 경주삼릉계석불좌상 등, 석불 3체와 마애불 11체가 있다. 〈삿갓골[笠谷]〉 삼릉골의 지류로 경애왕릉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3군데의 절터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경주남산입곡석불두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상반신만 남아 있으나,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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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수골[藥水谷]〉 배동 뒷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산호골[珊瑚谷]이라고도 한다. 6군데의 절터와 여래좌상 1체, 마애여래대불 1체, 석탑 1기가 발견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부분이 손실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마애불은 높이 10m로, 남산의 마애불 중 가장 크다. 박혁거세 6세손인 지마왕(祗摩王)의 능으로, 사적 제221호인 지마왕릉도 있다. 〈비파골[琵琶谷]〉 배동 앞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석가사(釋迦寺)·불무사(佛無寺) 등 4군데의 절터와 4기의 석탑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절의 창건연대는 692년으로 전해진다. 〈용장골[茸長谷]〉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의 계곡으로, 용장사를 비롯한 11군데의 절터와 석불 5체, 마애불 1체, 석탑 6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은 각각 보물 제186호와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두와 약사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보물 제913호로 지정된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은 높이 1.62m, 나비 1.1m로, 삼층석탑 아래의 높이 10m 암벽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용장골에서는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귀부(龜趺)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용장사는 김시습(金時習)이 ?
璲탭玖庸?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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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룡골[天龍谷]〉 남산 최남단에 있는 골짜기로, 천룡사터를 비롯한 3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 외에도 주춧돌·귀부·법당터·석조(石槽)·부도·대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천룡사는 원래 수리사(水利寺)였으나,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건하면서 천룡사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폐사(廢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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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릉(三 陵)사적 제2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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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송림속에 박씨왕의 능이라 전하는 3기의 왕릉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54대 경명왕릉, 53대 신덕왕릉, 8대 아달라왕릉이조영되어있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의 호석(護石) 둘레에 큰 받침석을 기대어 놓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원형의 봉토분(封土墳)처럼보인다. 오아릉 가운데 제53대 신덕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이어 1963년 7월 19일에도 도굴되었다. 그 결과 신덕왕릉은 1963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일훈에 의해 조사 보고 되어 신라 왕릉과 석실분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있다.
구조를 보면 할석(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 중앙에 비교적 긴 이중의 연도가 달렸는데 천장이 재래식 굴뚝처럼 올라간 형식이다. 현실내에는 연도와 직각되게 넓고 높은 관?
?棺臺)를 만들고 그 위에 긴 판석 2매를 놓아시상(屍床)을마련했다. 그리고 북벽과 연접한 동·서벽에 연도의 천장 높이만 하게 장방형구획을 만들고 상하로 나누어 백(白)·황(黃)·주(朱)·청색(靑色) 등을 칠함으로서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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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신덕왕릉의 구조는 경주시내 노서동에 있는 3기의 석실분과 충효리 고분군·서악리석실분 등과 같은 계통을 보이고 있어 이 왕릉이 통일기 전후의 고분임을 시사하고 있다.따라서 10세기의 신덕왕릉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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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아달라왕과 신덕왕은 서로 700년이란 시간적인 거리가 있어 같은 박씨들의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와 시대가 내려가도 고토(故土)에 와서 묻힌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유의건의 「라릉진안설」에 입각하여 김씨와 석씨계 중에는 이와 같은 예를 발견할 수 없는 점과 서로 가까운 혈족인 왕들은 동일 묘역에 2∼3기씩 근접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러한 경우도 시간적으로 가깝고 연속된 경우이고 삼릉처럼 700년의 장기간의 공백을 넘어 존재하지는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고분들이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능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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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견해들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에 조선시대 경주부 망성리에 살았던 선비인 화계유의건이 남긴 『화계집(花溪集)』이라는 문집이 있다. 이 문집에는 「라능진안설」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 영조 6년 경술년(1730)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시형(金始炯)이 박씨문중과 타협하여 전승(傳承)을 잃어 버린 왕릉을 찾는 작업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양 문중은 남산을 기준으로 하여 동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들은 김씨왕의 능으로 하고 서남산일대에 있는 능들은 박씨왕의 능으로 하였다. 이 작업으로 경술년 이우에 등장한 왕릉은 모두 17기로 그 이전의 11기를 포함한 28기의 능이 일반인들에게 왕릉으로 새롭게 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정부에서 사적(史蹟)으로 지정한 것들이 영조 당시 나타난 왕릉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정한 것으로 검토없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리고 17기의 왕릉들 앞에는 작은 능표석이 서 있는데 이것들은 대개 조선후기인1871년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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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삼릉이 700년이란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3왕릉으로 명명된 것은 다름아닌 1730년에 새로이 3기의 고분이 왕릉으로 지정될 때 박씨문중에서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제53대 신덕왕이 아달라니사금의 원손(遠孫)으로 기록된 것을 참고하고, 아울러 제54대 경명왕은 신덕왕의 태자(太子)라는 점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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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조선후기의 장자상속제(長子相續制)에 따른 사회변화의 하나인 집성촌(集姓村)의 성립과 함께 발달된 촌락과 가족묘의 공간구성 우너리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종가집을 중심으로 발달된 집성촌과 조상묘를 중심으로 동일 묘역에 배장(陪葬)하는 습성이 이러한 추정을 낳게 한 것이다. 즉, 그들은 조선후기의 가족 및 사회제도에 대한 인식을 신라시대 고분에다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아래의 제55대 경애왕릉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서 장지(葬地)를 해목령(蟹目嶺) 아래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릉 아래에 둔 것은, 경애왕을 경명왕의 동모제(同母弟)라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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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 (鮑石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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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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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沼)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 왕실에서 향락의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鮑石亭)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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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 지금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인 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음각된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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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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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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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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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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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景哀王)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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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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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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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남산은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닦던 신라의 성산이다. 신라는 서기 660년 백제를 병합하고, 668년 고구려를 통합하고, 676년 이 땅에 주둔하던 당나라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므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삼국문화를 융합하여 통일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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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역사적 성업을 완수한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발전하는 조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이 곳에 통일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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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전에는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회랑에는 삼국통일의 기록화가 전시되었다. 경역에는 삼국통일기념비와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사적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