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륜산은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두륜산 도립공원에 있는 산이다. 한반도 육지의 최남단 군인 해남에 육지의 마지막으로 흔드는 손수건인듯 능선과 암봉, 기봉과 남국적인 수목으로 아름답게 수놓인 산이 두륜산이다. 서울 경기, 강원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하루에 다녀오기에는 벅찬 머나먼 남쪽에 있는 산, 두륜산이란 단어의 울림엔 국토의 남단이라는 점 이상의 묘한 향수와 애정을 유발하는 울림이 있다. 두류산이란 이름이 조국을, 숱한 전설, 역사를 상기시키듯이 두륜산도 그런 울림을 갖는다. 더구나 대가람 대흥사가 거기 있어 그곳은 더욱 그런 느낌을 강열하게 한다. 순전히 산행을 위한 대상산으로서도 두륜산은 훌륭한 코스를 제공한다. 두륜산의 주봉(정상)은 가련봉이지만 두륜산이란 이름은 만일재를 사이에 두고 정상 남쪽에 솟아있는 두륜봉에서 나왔다. 두륜은 산꼭대기가 둥글다는 뜻이다. 두륜봉 정상은 길이 50미터정도의 타원형으로 되어있고 타원형의 외곽은 높은 단애로 되어 있다. 이 산을 오르는 길은 좁은 험로와 석문이 있는 동쪽으로 난 길을 이용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타원형은 동쪽이 넓고 서쪽이 낮은 형국이지만 대흥사 앞마당에서보면 마치 네발가진 동물이 도약을 앞두고 웅크린 모습을 닮았다. 두륜산 산행은 구림리 상가촌을 통과한 뒤 일주문을 지나 고계봉과 향로봉 사이에 형성된 좁은 협곡을 따라난 평탄한 도로를 걸어가면서(차를 타고 갈 경우 이 부분은 생략되지만 이길은 차를 타고 지나치기엔 너무 아까운 길이다.둥근 꽃봉오리가 검푸른 잎새 사이로 원앙금침에 수를놓은 듯 붉게 빛나는 동백, 느티나무, 삼나무숲, 편백나무숲이 우거져 대낮에도 어두울 지경으로 남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길을 지나 사찰경내로 들어와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다보이는 대흥사를 바라보면서 천불전앞을 지나 서산대사의 유물관리소와 그를 기리는 사당인 표충사앞을 통과하기전 왼쪽으로 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데 왼쪽 길이 일지암-만일재, 오른쪽 길이 진불암-만일재길이 된다. 두 길은 만일재아래 만일암터에서 만난다. 만일재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두륜봉,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가련봉이다. 산행은 두륜봉을 올랐다가 내려와 가련봉능선을 타는 순서로 진행되어야 한다. 만일재는 가을엔 하얀 억새꽃이 바다를 이루는 곳이지만 봄철엔 메말라 있는 억새줄기사이로 암사면과 암봉 여기저기에 분홍빛 진달래가 곱게 대조되고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부는 수수한 산록에 회색빛 암봉이 좌우로 높이 치솟아 있는 사이의 평탄한 재이다. 재위에서면 강진만과 면한 해남 북일면 일대의 드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두 봉우리는 높지만 사람을 질리게 할만큼 높은 봉우리는 아니다. 재에서 10분이면 두륜, 20분이면 가련봉을 오를 수 있다. 두륜봉정상은 평탄한 반석으로 되어 있고 조망이 좋다. 암벽밑을 돌아 단애사이로 난 길을 올라가면 철사다리와 석문을 통과, 곧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두륜봉을 내려와 가련봉을 오르면 정상은 3개의 암봉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3개의 암봉사이로 로프를 이용하여 오르내리는 코스는 꽤 위험하기도 하므로 주의해야 할 지역이다. 정상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면 고계봉에서 계곡으로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와 일지암에서 표충사로 뻗은 능선에서 계곡으로 뻗은 완만한 산록이 만나 질펀한 평지를 이루면서 고계봉능선끝머리와 향로봉이 뒷받치는 협곡을 향하여 도도히 흘러내려가다가 절묘한 곳에 산간평지를 펼쳐놓았다. 그곳에 가람은 자리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두륜산의 특징은 묘한 데 있다. 그것이 두륜산의 특징이라는 것을 두번재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산에서 조금만 내려와도 산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산이나 다 그렇다. 그런데 두륜산은 더 그렇다는 점이 두륜산의 특징이다. 능허대에서 오심재를 내려오면서 되돌아 본 능허대는 내려온 지 얼마되지 않아 실제보다 훨씬 더 높아 보였고 고계봉도 오심재에서 북암으로 내려가면서 보니 안부에서 본 높이가 금방 두 배나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 시원스런 키의 증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두륜산의 봉우리들은 어깨가 없다. 목과 머리만 있다. 능선과 안부가 평행으로 연결되다시피하는 산들과는 다르다. 게다가 봉우리와 능선으로부터 산록으로 흘러내리는 곡면이 아주 완만하여 상대적으로 어깨가 없는 산봉우리를 실제 이상으로 높아보이게 만든다. 대흥사로 내려가면서 고계봉-가련봉-두륜산-507봉-대둔산-연화봉-향로봉에 둘러싸인 산간의 분지형 산록에서 본 봉우리들은 그래서 아주 또렷해 보이고 수려해보인다. 원경과 중경사이의 경치가 주는 짜릿한 맛이다. 대흥사앞뜰에서 본 가련봉과 두륜봉이 특히 그러했다.
두륜산은 동백꽃을 즐길 수 동백꽃 산행지로도 이름 나 있다. 두륜산 동백은 대흥사 뒤편 및 곳곳에 동백나무숲이 흩어져 있다.
특히 산자락의 동백숲에는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들이 많다. 대흥사에서 출발해 진불암에 다다를 때까지 붉은 색조로 펼쳐지는 꽃길 퍼레이드가 장관이다.
가을이면 가련봉과 두륜봉 사이 헬기장 부근이 억새천국이다. 사람 키 보다 높은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두륜산에는 신라 진흥왕 5년(514년) 아도화상이 세운 대둔사(대흥사)가 있으며, 절 안에는 표충사를 비롯하여 탑산사 동종 등 보물 4점, 천연기념물 1점과 수많은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해남 두륜산 '마지막 단풍', 저무는 가을 속으로
▲ 두륜산의 명물 구름다리를 건너는 등산객.
해남 두륜산(頭輪山·703m) 중턱 진불암(眞佛庵)은 가을빛으로 화사하게 빛나고 있건만 스님과 보살들은 겨울맞이에 바빴다. 보살들은 대나무 평상에 걸터앉아 발간 땡감 껍질을 깎아내느라 칼 든 손을 바삐 움직이고, 스님은 향적당(香寂堂) 툇마루 한쪽 편에 마련한 망사 건조대 안에 감을 매다느라 조심스럽게 손을 놀렸다.
바람이 휙 불어왔다. 노란 잎으로 하늘을 가린 은행나무에선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자 아낙은 잰 걸음으로 은행나무 아래로 다가가 나뭇가지로 노란 잎 들쳐대며 은행을 주워댔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만 가는데 연못 속 금잉어는 겨울이 다가오는 게 싫은지 바람에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자꾸자꾸 연잎 밑으로 몸을 감춘다.
“이거 오늘도 틀린 것 같아-.”
올 들어 세 번째. 이른 봄과 초여름에는 매번 구름안개가 우리의 바람을 무참히 깨뜨리곤 했다. 이번에는 하늘이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려는지 밤새 퍼붓던 비가 영산강을 건널 즈음 멈추고 영암을 가로지를 때는 먹구름이 옅어지더니 해남 땅에 들어서자 하늘이 터졌다. 그런데 장춘리(長春里) 숲길을 거쳐 진불암에 올라서는 사이 또다시 먹구름이 밀려와 한숨짓게 한다.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를 하고 지저귀는 산새소리를 길동무 삼으며 단풍빛 화사한 산길로 접어든다. 진불암에서 낙엽 스치는 허릿길 따르다 일지암 갈림목을 지나면서 등산인들이 많아졌다. 가까이 광주·순천, 멀리 서울·부산 등지에서 왔다는 이들은 ‘차(茶)의 성지’ 일지암에서 차 향기를 듬뿍 맡고 왔는지 얼굴에 넉넉함이 배어난다.
만일암터를 지나면서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진다. 장벽같은 위세의 가련봉과 두륜봉을 덮은 먹구름이 더욱 무거워지고, 바람이 점점 강해지더니 이제 숲은 소리내어 울부짖는다. 산죽밭 빠져나가 만일재에 올라서는 순간에는 고개를 못 들 정도다. 그런 을씨년 분위기 속에서도 삼삼오오 둘러앉아 늦은 점심 먹는 등산인들은 즐겁기만 하다. 만일재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먹구름이 산은 누르고 있었으나, 호수와도 같은 해남과 완도 앞 바다는 어림도 없었다.
날씨는 더욱 고약해지지만 그렇다고 두륜산 명물을 안 보고 내려설 수는 없는 일. 거대한 절벽을 이룬 두륜봉을 마주보고 왼쪽 사면을 가로지르다 철계단길을 오른다. 이제 원초적인 자연의 소리, 바람만이 산의 정적을 깨뜨릴 뿐이다. 바람은 가을을 밀쳐내고 추운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다리를 빠져나가 두륜봉에 올라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먹구름 사이로 파란하늘이 드러나고, 부챗살처럼 햇살이 내리쬐었다. 완연한 가을빛이었다.
● 코스 가이드
전국의 산들은 을씨년스런 늦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이번 주말 한반도 남단 해남땅의 두륜산을 찾으면 올 마지막 단풍을 기대해도 좋다. 도립공원 두륜산의 매력은 울창한 숲과 더불어 정상인 가련봉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685m) 등, U자형으로 이어지는 8개 봉우리를 오르는 산행의 묘미와 산봉에서 바라보는 남해 조망이 일품이라는 점. 국보 1점. 보물 3점 등의 문화재를 여럿 지닌 대흥사가 자리하고 있어 불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산이다.
산행 코스는 가련봉~두륜봉을 거치는 대흥사 원점회귀 코스와, 대흥사~만일암터~안부~두륜봉~위봉~쇠노재 종주 코스, 그리고 6봉을 잇는 장춘리~오도치~혈망봉~연화봉~두륜봉~가련봉~노승봉~고계봉~장춘리 코스 등이 있으나, 초행자에게는 장춘리 숲길을 따라 대흥사까지 다가간 다음 대표적인 암자와 두륜산 명물 구름다리를 잇는 일지암~북미륵암~오심재~능허대~가련봉~두륜봉~진불암~대흥사 코스를 권할만하다. 약 10km로 4~5시간 걸린다.
국내 최장으로 꼽히는 두륜산 케이블카(1.5km)는 고계봉 북릉까지 올라간다. 종점에서 남쪽으로 500m쯤 올라가면 정상 전망대다. 이용료(왕복) 대인 6800원, 소인(4세~초등학생) 4000원. 만 3세 이하 무료. 전화 (061)534-8992. 홈페이지 www.skycablecar.co.kr.
● 대중교통
해남행 노선버스는 서울 강남터미널 호남선(02-6282-0600) 동서울터미널(02-453-7710), 광주종합터미널(062-360-8114), 목포공용터미널(금호고속 061-276-0221 해남교통 533-8826), 부산 서부터미널(051-322-8301) 등지에서 운행한다. 해남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흥사행 노선버스는 약 30분 간격(06:30~19:40)으로 다닌다.
● 숙박(지역번호 061)
대흥사 진입로변의 유선관(534-3692)은 사찰 객사로 이용되었던 유서 깊은 숙소다. 2인실 3만원. 저녁 1만원, 아침 7000원씩에 정식을 차려낸다. 한정식은 1만6000원. 집단시설지구에는 해남유스호스텔(533-0170). 남흥각(534-5222) 등의 숙박업소가 있다. 대흥사(534-5502) 템플스테이는 한국 최고라는 평을 듣는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 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 1357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創建緣起)가 전하고 있다. 이들 창건 연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찰의 전통과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대흥사에도 몇 가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창건 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 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 역사를 총 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먼저, 『만일암고기』에 전하는 창건 연기는 426년(백제 구이신왕 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 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흥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되어야할 내용이다.
창건 이후 대흥사의 연혁을 전해 주는 자료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대흥사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시대의 상황을 전해 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대둔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천태종 소속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 스님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책 스님이 대흥사 북암(北庵)에 한동안 주석하였으며, 『대둔사지』를 편찬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사용하던 발우가 이 곳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책 스님이 대흥사 인근의 백련사(白蓮寺, 현 대흥사의 말사)에서 출가하고 그 곳에서 장기간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이 기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등 세 분 고승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들 고승도 역시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보여지긴하나 구체적인 행장은 알 길이 없다. 여하튼 고려시대의 대흥사와 관련한 자료는 매우 부족한 현실이며, 이것은 당시 대흥사가 왕실이나 불교계에서 크게 중시하던 사찰이 아니었다는 측면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대흥사의 위상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이 곳 대흥사에 전해지고 조정과 불교계에서 모두 대흥사를 중시하기 시작했던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흥사에서는 13 대종사와 13 대강사가 계속 배출되어 조선불교계를 이끌어왔으며, 조선의 조정에서는 표충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써 호국정신의 근원지와도 같은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대흥사는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30본말사법 제도 아래에서 44개의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 도
내 용
통일신라시대
늦어도 통일신라 후기 이전에 대흥사가 창건됨.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을 이 무렵 조성함
13세기
진정국사 천책 스님이 산내 암자인 북암에 주석함. 천책 스님의 발우가 18세기 후반까지 북암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함
고려시대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을 조성함. 신암, 사은, 성유 등 세 분 고승의 부도를 세움
1604년(조선 선조 37)
서산대사의 입적 이후 그 분이 사용하던 의발을 이 곳에 모셔옴
1606년(선조 39)
사명대사 등이 서산 스님의 의발을 봉안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보장록(寶藏錄)」을 남김
1630년(인조 8)
극현(克玄), 덕호(德浩) 등의 스님이 진불암을 중건함
1647년(인조 25)
서산대사의 탑과 부도를 건립함
1655년(효종 6)
향산(香山)에 있던 서산대사의 옥발우, 가사, 신발 등의 유품을 대흥사로 모셔 옴
1665년(현종 6)
심수(心粹) 스님이 대웅보전 중창 불사를 시작함
1665년(현종 6)
심수(心粹) 스님이 대웅보전 중창 불사를 시작함
1667년(현종 8)
대웅보전 중창이 완성됨
1668년(현종 9)
취여 삼우(醉如三愚) 스님이 「대둔사대웅전중건기」를 지음
1672년(현종 13)
사찰 내의 대종(大鐘)이 얼마동안 저절로 울리다가 멈추자 도(道)의 관료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함
1675년(숙종 1)
융신(融信) 스님이 만일암을 중건함
1683년(숙종 9)
진불암을 중건함
1692년(숙종 18)
「풍담대사비명(楓潭大師碑銘)」을 건립함
1703년(숙종 29)
보적사(寶積寺) 동종을 조성함(현재 대웅보전 내부에 있는 종임)
1709년(숙종 35)
진불암의 동종과 봉향각(奉香閣)의 동종을 조성하여 봉안함
1727년(영조 3)
채팽윤(蔡彭胤)이 지은 「해남대둔사사적비명」을 건립함
1740년(영조 16)
위일(位一) 스님이 고진불암을 중건함
1743년(영조 19)
두원(斗元) 스님이 향적전을 중건함
1749년(영조 25)
영산회상도(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조성하여 봉안함
1761년(영조 37)
청운당을 중건함
1780년(정조 4)
청담(靑潭) 스님이 은선암을 중건함
1778년(정조 2)
「청허당대사비명(淸虛堂大師碑銘)」을 건립함
1788년(정조 12)
계홍(戒洪), 천묵(天默)등의 스님이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한 사당의 건립과 사당의 편액을 내려달라는 내용의 문건을 조정에 올림
1789년(정조 13)
조정의 명으로 사당을 건립하고, 정조대왕이 「표충사」이라는 친필편액을 써서 내려줌. 아울러 예조의 담당자를 대흥사에 파견하여 서산대사를 추모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봉행함. 윤지범(尹持範)이 「표충사상량문」을 지음
초의대종사탑비명」을 건립함. 1942년 박한영 스님이 「두륜산월초당화상창공송비(頭輪山月初堂和尙彰功頌碑)」를 지음
1967년
응진전 삼층석탑을 해체 보수함. 이 때 상층 기단에서 금동여래입상 1구가 발견됨
1970년
북미륵암 건너편 동쪽 산등성이에 있는 석탑에서 3구의 금동불상이 발견됨
1978년
서산대사유물관을 건립함
1989년
영월당 해체보수공사
1990년
종무소 해체보수공사
1992년
대흥사 일주문 신축공사, 매표소 이설공사 백화암 요사채 신축공사
1993년
남암 복원공사
1993년
동다실 해체보수공사, 대향각 복원공사
1995년
북암 요사채 해체복원공사 표충사내 명의제·강례제 해체보수공사
1997년
대흥사 박물관 보수공사 대향각 복원공사
1998년
대흥사 수련원·서산관·초의관 신축공사 대웅보전 보수공사
해남 두륜산의 북미륵암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9 대흥사
[북미륵암]
북미륵암은 대흥사 경내인 표충사에서 산길로 왕복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데 표충사에서 북암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오는 방법보다 반대편인 오심재 약수터에서 시작하여 두륜산을 넘어 북미륵암을을 답사한 후 대흥사로 내려오는 방법을 택하면 좋다. 북미륵암에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대형 마애불이 있는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온화한 미소가 가득한 멋진 마애부처로 우리나라에 있는 어느 마애불보다 보관 상태도 좋고 조각 수법도 뛰어나다. 어렵게 올라갔지만 마애불을 보는 순간 그 힘든 산행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만큼 대단하다.
감히 해남 답사의 꽃이라 할 만하다. 북암 주변에 삼층석탑도 두기나 있으니 함께 답사하면 더욱 좋다..
- 위치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아이코드:062-657-2251) - 문의 : 061-534-5109
북미륵암
국보 308호(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바위면에 고부조되어 있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본존불의 육계가 뚜렷한 머리는 언뜻 머리칼이 없는 민머리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다. 그러나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유난히도 굵고 짧아진 목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삼도를 나타내었다.
손과 발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를 하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여 사실성이 엿보임과 더불어 곱상한 느낌을 준다. 법의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로 그 주름은 거의 등간격으로 선각화 하여 사실성이 뒤떨어지고,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키를 드리운 것처럼 늘어지는 등 도식적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대좌는 11엽의 앙련과 12엽의 복련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게 조각되어 살집 있는 불신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와 몸 광배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으로 아무런 꾸밈도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둔중한 체구로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북미륵암 3층석탑 보물 제301호
두륜산 정상 부근의 북미륵암에 세워진은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으로 일반형에 속한다. 기단은 지대석 위에 귀기둥과 탱주를 새긴 하대석과 중석을 갖추고 있고 갑석은 4매로 되어 있다. 상층기단 중석과 갑석은 1매석으로 되어 있는데 갑석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고 각 탑신에는 네 개의 귀기둥을 본떠 새겼다. 옥개석들은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받침은 1, 2층의 옥개석은 4단, 3층은 3단이며, 전체의 개석 윗면은 얇은 탓으로 경사도가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현재 노반이 남아 있고 노반형과 앙화형의 석재가 놓여 있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 석탑은 비교적 정제된 석탑이며 양식적으로는 약화된 점도 있으나 신라 석탑의 형식과 양식을 일부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성년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본다
대흥사 북미륵암 동3층석탑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암반 위에 단층 기단부를 안치하고 그 위로 탑신부를 구성하여 고려시대(10∼11세기)에 조성한 신라양식의 3층 석탑으로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어 가치가 있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은 신라 전형양식의 3층 석탑이다. 자연 암반을 뒷면에서 보면 평평하지만 전면에서 보면 높이 92cm의 높은 층단을 이루고 있어 자연 암반 자체가 지대석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암반과 하층기단 사이에 벌어지는 빈틈으로 빗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단부 밑에 깊이 15cm가량 되는 두 줄의 홈을 파놓았다. 또 기단부 옆에도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주 엷게 홈을 파놓은 지혜를 발휘했다.
기단부 구성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좌우로는 벽판석이고 전후면은 삽입식인데 각 면의 양 귀퉁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중앙에 탱주 1주씩을 표출하였다. 그런데 중앙의 탱주가 상하의 폭이 같은 기둥이 아니고 위쪽은 좁고 아래쪽이 넓은 이를테면 팔자(八字)형으로 되었다. 위쪽은 폭 24cm, 아래쪽은 가장 넓은 면이 74cm나 된다. 이러한 탱주 기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이 석탑은 비록 단층 기단이긴 하나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과 동시대인 10∼11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같은 북미륵암 경내에 있는 보물 제301호인 삼층석탑 조성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원래는 3층 옥개석이 파손되어(현재 이 탑 옆에 있음) 있었던 것인데 4∼5년 전 새로 3층 옥개석과 상륜부를 제작하여 복원하였다. 비록 석탑의 일부 부재를 새로 만들어 보충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균형미를 잃지 않고 있으며 또한 매우 정제된 우수한 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