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0일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엄창섭 분회장이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사의 부당노동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고(故) 최종범 씨의 사망 이후,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인천지역 분회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 동인센터 엄창섭 분회장을 만났다. 그가 전한 소식에 따르면,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최종범 열사 대책위’는 유가족과 함께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무기한 노숙농성에 돌입한 상태다.
가장 먼저, 엄 분회장에게 노조가 설립되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물었다.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우리의 요구가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회사에 무언가 불만을 표시하거나 요구하면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추후에 있을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0월 30일 중부지방노동청 앞에서 전국금속노조 인천지부가 연 기자회견 이후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엄 분회장은 최근 주말에 휴무가 늘었다며 업무일정표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도 협력업체의 재량이 미치는 범위 안에 제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뀐 것은 없습니다.”
최근에는 근로자들에게 공개돼 있던 업무일정표도 열람이 어렵게 됐다고 했다. 원청사인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이를 막은 것이다. 이는 법정 근로시간을 위반하거나 낮은 임금 수준에 대한 시비를 피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여전히 노조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업장에서의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다. 지난 11월 13일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삼성전자서비스 본사를 방문하고 박상범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와 면담을 갖기도 했다. 이날 고 최종범 씨 유가족의 요구와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해 논의됐지만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협력사의 문제로만 돌렸다. 심지어 삼성전자서비스는 실태조사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을지로위원회가 문제를 지적하니 원청사에서 협력업체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나섰죠. 원청사가 실태조사를 맡는다는 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죠. 또, 실태조사를 하겠다는 것은 자신들은 실태를 모른다는 제스처잖아요? 근로관계 등에 대해서 시치미를 떼려는 행동일 뿐인 것이죠.”
삼성전자서비스의 각 지역 센터는 협력업체가 하청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곳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 협력업체에 고용돼 있다. 그러나 노조가 밝힌 바에 따르면, 협력사 근로자들은 사실상 삼성전자서비스에 종속돼 있어 실질적인 고용관계는 삼성전자서비스와 맺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노조가 결성되고 삼성전자서비스가 사사건건 협력업체의 노무관리에 관여하던 일도 줄었다고 하는데, 그 속내는 불법파견 시비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고 최종범 씨의 사망 이후 삼성전자서비스의 부당함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노동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더구나 유가족까지 노숙농성에 나서며 고인에 대한 공개사과와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도 더 이상 불법파견이나 열악한 근로조건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회피할 수만은 없게 됐다.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저 최종범이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 거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천안분회 고 최종범 씨가 지난 10월 31일 저녁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긴 문자의 내용이다.
최 씨가 사망한 다음 날인 11월 1일 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최종범 열사 대책위’를 구성하고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사를 상대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다. 대책위는 최 씨의 죽음을 “삼성 자본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규정하고 “이 땅의 비정규직의 처지와 조건을 대변하고 사회에 고발한 것”으라 주장했다.
현재 대책위는 노동 및 사회단체 등 200여개 단체가 참여하며 투쟁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지난 12월 3일부터 대책위와 유족들은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은 “우리는 이제부터 사람이냐, 개새끼냐는 엄숙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냐 개새끼냐는 엄숙한 문제
삼성전자서비스센터 근로자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출범하면서부터다. 전국 98개의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은 지난 6월 22일부터 전국금속노조 가입을 준비했고, 7월 14일에는 서울여성프라자에서 노조(지회)의 출범식이 열었다.
노조가 출범하고 이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 등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이들이 협력업체에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한 시민은 이들이 “항상 친절하고 깍듯한 모습을 보며 당연히 삼성의 정직원일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더구나 이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비인간적인 노무관리로 인한 업무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고 최종범 씨의 사망 직후인 11월 1일에 금속노조가 공개한 전화 녹취 내용은 이들이 어떤 근무환경에 노출돼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전화 내용은 고객민원이 접수된 것에 대해 협력업체 사장이 최 씨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통화시간 4분여 동안 협력업체 사장은 최 씨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다.
노조가 설립되자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는 노조가입을 방해, 조합원과 비조합원 간의 근무배치에 차별을 주고, 조합원 표적감사, 업무개편으로 노조간부의 직책 강등 등 다양한 부당노동행위와 탄압을 일삼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난 9월에는 협력업체 사장이 묵인하는 가운데 비조합원이 조합원을 대걸레자루로 폭행하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부당노동행위, 노조 탄압과 무력화 시도는 인천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10월 30일에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전국금속노조 인천지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러한 실상을 고발했다. 기자회견 후 금속노조는 삼성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고소장을 중부고용노동청에 접수하기도 했다.
두려움, 노조 가입이 망설여지는 이유
노동조합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인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삼권의 주체다. 노동조합 조직은 노동자 스스로 기업의 횡포에 저항하고 인간적으로 대우받을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노조조직률은 세계에서도 최하위권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실, 노조조직률은 해를 거듭하면서 더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1990년 17.2%이던 노조조직률이 2010년에는 9.7%로 떨어졌다. 2008년에 나온 OECD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아이슬랜드(79.4%), 스웨덴(68.3%), 캐나다(27.2%), 독일(19.1%), 일본(18.2%)보다 낮은 노조조직률(10.3%)을 기록했다. 심지어 미국(11.9%)보다도 낮다. (참고: 분노의 숫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2012.5.7)
노조가 없다는 것은 노동자를 보호하고 기업의 횡포에 저항하기 힘든 현실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을 노동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OECD 회원국 평균인 연간 1,765시간보다 325시간(8.1주) 이상 더 일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통계에 나타난 것에 비해 더 열악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0월 14일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폭로한 ‘2012년 S그룹 노사 전략’ 문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몇몇 기업들은 노조를 파괴하고 와해시키기 위해 매우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있다. 공기업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는 않다. 지난 11월 10일에는 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인천공항공사의 ‘노조파괴전략 6단계전략’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률이 떨어지는 배경에는 노조를 인정하지 않은 기업의 위법적 태도가 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역시, 노조가 결성된 이후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노조 가입을 망설이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엄창섭 분회장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노동자 개개인에게 내재된 ‘두려움’도 한 몫하고 있다고 했다.
“노조 가입을 망설이는 사람들 가운데 팀장급 정도 되는 장기근속자들이 많아요. 숙련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기 때문은 아닙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근속은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간혹, 이들에게 듣는 항변은 ‘언론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기나 하냐, 삼성과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 때문인 것이죠.”
삼성전자서비스 동인천센터 외근사무실 입구에 마련된 '고 최종범 열사 분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