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2009 산림문화 작품 공모전 금상
제목 : 도토리를 주우며 작가 : 박은숙
나무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언젠가 우연히 땅 속에 묻혀 있던 나무들의 뿌리를 보고 난 후부터 더욱 그렇다. 제법 큰비가 내린 후였다. 불어난 계곡물이 계곡 흙까지 다 쓸고 가서 나무들의 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물가에 서 있던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흙까지 뿌리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여태껏 나는 여름 느티나무의 무성한 잎들이라든가 긴 등을 올곧게 편 전나무의 당당함을 보며 감탄해왔다. 그러나 의연하게만 보이던 나무들도 살아가기 위해 손등의 핏줄이 불거지도록 세상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의 나는 알지 못하였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나를 채찍질한 적도 있었다. 겉으로는 평안한 듯 근심 걱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집마다 잔걱정 없는 집 또한 없을 것이다. 다만 산다는 것이 때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손등의 핏줄이 불거지도록 저마다 안간힘을 쓰며 보이지 않는 가슴속 희망 한 줌 꽉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참나무 늘어선 길을 걷는다. 아름드리 참나무는 그늘조차 푸짐하다. 천천히 나무껍질을 쓰다듬는다. 메마른 껍질은 거칠고 투박하다. 밤새워 이불 흩청을 하얗게 삶아 빨고 풀을 먹이시던,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등 같다. 물든 나뭇잎마다 비바람을 맞거나 벌레 먹은 상처가 무성하다. 자식은 부모의 상처를 먹고 자란다. 저 무성한 상처들이 가지마다 매달린 도토리를 키웠을 것이다. 상처마다 열매를 품고 아픔으로 키워냈을 것이다. 바람이 이따금 세차게 분다. 나무가 ‘툭’하고 도토리를 떨쳐낸다. 탯줄이 잘린 도토리들은 길 위거나 길섶, 풀밭 위거나 돌멩이 틈새에 떨어진다. 마치 부모의 품을 벗어나 저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자식들 같다.
곰실곰실 마른 잎들 사이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도토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놀다 이불 밖으로 빼꼼 내다보는 장난기 많은 아이의 얼굴 같다. 눈에 띄기 좋게 길섶에 나와 있는 도토리는 양팔을 흔들며 안아달라고 보채는 유치원생 같기도 하고 길 위로 뛰쳐나와 당당하게 버티고 선 씨알 굵은 도토리는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을 보는 것도 같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몰래 달아나다 개울 속으로 빠진 개구쟁이 도토리들도 몇 있다.
길섶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토리와 눈이 마주친다. 도토리는 초롱한 눈망울로 반짝거린다. 그 눈망울은 막 목욕을 끝내고 방실방실 웃는, 티 하나 묻지 않은 아가의 눈망울 같다고나 할까. 새까맣고 맑기만 하여 내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급기야 내 눈에는 도토리들만 보인다. 아쉽게도 나무는 도토리를 한몫 내어놓지 않는다.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품안의 도토리를 조금씩 풀어놓는다. 더 이상 주울 것이 없어 돌아서려 하자 바람은 나무를 부추겨 또 도토리 몇 알 내어놓게 한다, 아이들을 종일 곁에 두고 싶어 과자 부스러기를 틈틈이 쥐어주시던 그 옛날 할머니들 같다. 마침 내 나무는 내 하루해를 온통 붙들어버린다.
참나무 늘어선 길을 저만치 앞서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뒤따르는 나보다 한 발 먼저 도토리를 줍는다. 내 몫의 도토리가 적을까봐 나는 안달이 난다. 살면서 내게 우선순위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내가 거둘 내 몫이 적을까봐 초조해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바람은 간간이 불어 와 뒤에 가는 내 앞에도 도토리를 풀어놓아 주었다. 앞서간 이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도토리도 있어 뒤따르던 내가 굵은 도토리를 줍는 횡재도 있었다.
인생이란 참나무 늘어선 길을 걸으며 도토리를 줍는 일 같아서 지금 앞서 간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뒤처졌다고 낙심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내겐 내 몫의 도토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도토리를 줍다보니 한나절이 훌쩍 지나버렸다. 어쩌면 한 생이 지난 것도 같다. 잘 여물어 떨어지는 도토리가 행복의 또 다른 말이라면 행복은 내 생에 걸쳐 쉬엄쉬엄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평생 동안 사는 재미를 잘 찾아보라는 신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지냈다. 병원비가 나가지 않았으니 그만큼 돈을 번 셈이고 내 몸을 내 의지대로 부렸으니 고마운 일이다. 행복은 주위에 널려있다. 다만 행복은 사방으로 흩어진 도토리를 줍듯이 찾으려고 애쓰는 자의 눈에 띈다.
부산시 북구 화명동
지난 9월 15일로 마감된 제 9회 산림문화공모전 시 수필 부문에는 총 806편이 응모되어 제 8회 때보다 104편의 증가를 보였다. 세월이 갈수록 참여도가 커져간다는 느낌이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많은 분들이 점차 더 깊은 관심을 보여 본 행사의 취지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올해도 이 많은 작품들을 세분의 심사위원들이 3주 이상의 긴 기간 동안 번갈아 숙독한 뒤 일차 예심을 했고 다시 9월 30일 최종심사와 토론을 거쳐 합의한 결과는 발표 내용과 같다.
결정 과정에서 심사위원들 간에 이견은 없었으나 다만 대상을 시로 하느냐 혹은 산문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의 논란이 없지도 않았다. 그것은 작년의 대상작품이 시였으므로 올해는 산문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도 있었기 때문인데 그 작품 수준으로 보아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시에 대상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심사 기준은 이미 공모전의 발표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첫째 그 주제나 내용에 있어서는 산림과 관련된 생각, 산림자원의 소중함에 대한 각성, 산림문화의 활성화나 산림 자원에 대한 국민적 관심 등이 얼마나 잘 반영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기술면에서는 문학적 완성도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었다. 전체적으로 산문보다는 시의 수준이 높았고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시가 더 참신했다.
시 분야 투고작들의 경우 예심에 오른 50여 편은 기성 문단에서 발표되는 작품들의 수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특히 대상을 포함한 몇몇 작품들은 문단 등단 데뷔작으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 용기를 갖고 문단 등용에 도전하여 우리 시의 큰 별들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본 심사에서는 공모전의 취지에 따라 비록 문학작품으로서는 우수하다 하더라도 산림에 관한 메시지가 결여된 것들은 수상에서 제외되었음을 밝힌다.
대상작인 <젖은 책을 말려요>는 숲을 한권의 책으로 비유하여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 우수작이다. 숲이 겪는 4계절에는 사실 우주적인 삶의 일상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거기에는 슬픔과 기쁨이, 행복한 일과 불행한 사건이 각각 꽃과 잎, 새싹과 낙엽, 봄과 가을의 풍경을 통해 보여주는 시각적 기호들이 있다. 이를 날카롭게 포착한 시인의 감수성이 참신하다. 동상작인 <낙엽을 따라가다> 역시 대상에 못지 않은 수준작이라 할 수 있다. 나무를 우체부로, 낙엽을 편지로 비유시킨 상상력이 탁월하다. 시는 무엇보다 상상력의 산물이다. 훌륭한 상상력 없이 훌륭한 시가 씌어질 수 없는 것이다. 동상의 <숲을 위한 기도>는 산불을 통해 숲이 지닌 생명력을 발견한 작품이다. 생명이 지닌 모순의 진실을 잘 파악해 냈다. 입선작인 <숲에 갖히다>는 숲속길을 인생행에 병치시킨 작품이다. 철학적 사유는 살만하나 미학적인 측면이 다소 부족하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입선작 처서는 철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의 색깔을 염색공정에 비유시키고 있다. 발상이 참신하고 아름다웠으나 상상력이 전체적인 일관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다. 또 다른 입선작 <금강송>은 사물을 감각적, 정서적으로 잘 묘사해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관습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산문 투고작들은 대체로 네가지 경향으로 분류되었다. 첫째 나무나 숲에 관한 사실적 혹은 학술적인 보고, 둘째는 숲체험이나 산행길에 대한 추억, 셋째는 숲에 관련된 픽션, 넷째는 나무나 숲에 대한 인생론적 혹은 철학적 단상 등이다. 첫째, 둘째경향은 대개 그 내용이 획일적, 도식적이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미흡하였다. 필자 자신의 생각이나 깨달음도 부족해 보였다.
금상 수상작인 <도토리를 주우며>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사물을 특징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 한 그루의 생존을 통해 삶의 일반적 진실을 유추해 내는 관찰력과 상상력이 참신했다. 사소한 대상으로부터 깊은 철학적 단상을 이끌어내는 그 사유의 깊이도 대단했다. 잘 정돈된 어휘, 우아한 문체, 구성의 완결성도 돋보였다. 은상 수상작인 <식장산 벌레>는 사물을 단지 묘사하거나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대신 그것을 내적인 성찰로 승화시킨 미묘한 내면심리가 눈을 끌었다. 동상 수상작 <작은 아버지의 소나무 부활기>는 일종의 꽁트이다. 결말부분의 반전이 압권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리얼리티가 부족해보였다. 그럼에도 숲에 대한 애정이라는 메시지 전달은 성공적이라고 보여진다. 입선작 <단석산의 밤길>은 우연한 등산길에서 얻은 생의 지혜를 담담하고 소박한 문체로 술회하고 있다. 생활 철학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또 다른 입선작인 <산불>은 <산불>체험을 통해 자신이 겪게 되는 심리적인 변화와 성장통을 환상적 내면공간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다소 산만하고 문체도 거칠지만 이번에 수상한 분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또 가장 발전의 가능성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대성하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오탁번(고려대 명예교수 소설가 시인)
문정희(시인)
**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홈페이지
첫댓글 이 게시판에 올려 주신 작품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자주 들러서 정보 얻어갈게요.
감사합니다. 보니님~
진즉 이 작품을 찾았으면 좋았을텐데, 저도 이제사 찾았습니다.
모두 함께 열공해야겠지요? ㅎㅎ
건필하십시오! 자운영님 ^^*
** 보니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에 좋은 수필을 많이 접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