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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새로운 시작]
33. 이삭이 야곱을 축복함
(창세기 27장)
2020. 8. 1. 이현래 목사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사건은 주일학교 때에도 많이 들은 이야기다. 야곱은 태어날 때도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리고 팥죽을 쑬 때 에서가 들에서 허기져서 돌아와 그것을 달라고 하니까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했고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그래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하였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
장자의 명분은 부모의 모든 것을 위임받는 권리다. 재산은 물론이고 제사장권도 위임받는 굉장히 중요한 권리다. 그런데 에서는 이 명분을 소홀히 여겼다. 그래서 보통 교회들에서는 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야곱이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나는 다르게 본다. 이삭은 자기의 생각대로 큰아들 에서에게 축복하지 못하고 리브가의 소원대로 야곱을 축복하고 말았다. 이삭의 생각과 반대가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나는 이것이 사람의 계획과 방식보다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이 우선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아무리 계획한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였다(잠16:9). 우리는 우리대로 계획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 계획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장자를 축복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마음씨 좋고 너그러운 사람이 우선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상속으로 유명한 사람이 이병철 씨의 아들 이건희 씨다. 여러 아들 중에 이건희 씨가 제일 합당하니까 그에게 총수권을 위임했던 것이다. 이건희 씨는 이재룡 씨를 잘 키워서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자권은 엄청난 돈이 걸려있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 그런 것과 관계없다.
하나님은 데라의 아들 중에 둘째인 아브람을 불렀고, 이삭은 둘째인 야곱을 택했다. 아브라함의 형 하란이 있는데 하란을 제치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이삭은 에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축복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둘째만을 원하시는 것인가? 이스라엘의 족보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지만도 않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했다(롬11:29 참조). 택하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볼 때는 ‘왜 저렇게 하시는가?’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절대로 후회함이 없다. 사람의 생각과 달리 꼭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자신의 목표에 따른 것이다. 당시 제도나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가 있어서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위임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건축을 하자면 곧은 나무가 필요하지마는 경우에 따라서는 굽은 나무가 필요할 때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쓰이기 위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생래적인 것만으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산에 있는 나무를 그냥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듬어야 재목으로 쓸 수 있다.
창세기 2장에는 강들이 나오는데 거기 정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고 하였다. 정금과 호마노는 보석인데 물이 흐르는 곳에 보석들이 연마되고 변화된다는 뜻이다. 보석은 탄소 성분이 고압, 고열로 다져지고 변질되어 만들진다고 한다. 그냥 자연석과 같은 돌이 아니라 연마되고 변화된 것들이다.
야곱을 축복하심에 있어서 이삭을 사용하셨는데 왜 이렇게 사용하셨을까? 젊고 총기 있을 때 사용했다면 결코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삭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지 못했다. 에서와 야곱을 분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다.
이삭의 일생을 보면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일은 실패했을까? 그가 눈이 어둡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해서 실수 같은 것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실수라고 해석한다. 이삭은 축복만 받았고 연단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인하여 받은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항상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이삭을 축복하셨다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축복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이삭은 전형적인 아들의 형상이다. 그러니 이 일에서라고 그의 아버지를 잊으셨겠는가? 이 일에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아버지는 많은 연단을 받은 사람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최고의 관계였다는 뜻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았다. 믿음도 그냥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들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까지 한다. “모르면 그냥 믿어.” 이런 식인데 그 믿음이 잘못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믿음도 잘못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어서야 믿음으로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이삭을 받은 것이다. 믿음과 은혜는 다르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믿음이 있어야 은혜를 받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믿음은 은혜 이후에 생긴 것이지 믿음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기치였다. 가톨릭이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께로 가는 중요한 가르쳐 왔고 심지어는 잉여공덕설이라는 것까지 나왔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로 인해서 지각이 변동되어 소위 종교개혁이라는 대폭풍이 일어났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유럽에서는 중세가 뒤집히는 아주 큰 사건이었다. 믿음은 그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로마서 3장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였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구속 안에서의 믿음이라야 되지 그냥 믿음이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믿음이라는 것이 대단히 혼란되어 있다.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이 믿는 것과 저 사람이 믿는 것이 다르다. 사람됨에 따라 믿음이 다르다. 믿음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니까 그 사람대로 믿는 것이다.
짐승을 키워 보면 짐승들도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짐승마다 다르다. 개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개가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개가 처음부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은혜를 베푸니까 그것을 보고 믿음을 갖게 되고 무서운지 모르고 다가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지 믿음이 먼저가 아니다. 고양이가 사람을 믿는 것과 개가 사람을 믿는 것이 다르다. 연구에 의하면 개는 주인이 다른 데로 이사를 가면 따라가는데 고양이는 안따라간다. 그놈은 집만 있으면 된다. 개의 믿음과 고양이의 믿음이 다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빼 놓은 믿음은 있을 수 없다.
심지어는 믿음이 신념이 되어서 신념과 믿음이 구별이 안된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좋은 것 같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이 신념일 수 있다. 신념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 같다. 나도 믿음이 없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남이 믿는 것을 나는 못믿는다. 그래서 애를 많이 먹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잘 믿는다. 그런 것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삭은 항상 아브라함을 인해서 복을 받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정을 거쳐서 얻은 아들이 이삭이다. 믿음으로도 안되고, 자기 생각이나 관습으로도 안되고 어느 것으로도 안돼서 포기한 상태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는 아브라함도 믿음을 가질 수 없었고 사라 역시 믿음이 없었다. 그렇게 받았으니까 이삭은 순전히 은혜로 받은 아들이지 자기 믿음으로 받는 아들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까지라도 하나님의 선택에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하셨다(창22:14~19 참조).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맹세에 따른 것이지 사람의 어떠함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믿음은 필요하지만 은혜 이상이 될 수 없다. 내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덮을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하신 것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하나님의 맹세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루지 않으셨다. 실패가 없게 하려고 다루는 것인데 다루지 않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게 하려고 다루셨다. 하나님은 크신 목적이 있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이 잘못 되어 버리면 안되니까 다루신 것이다. 그런데 이삭은 전혀 다루시지 않았다. 성경에는 이삭을 다룬 흔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루지 않아서 이삭이 실수했다고 해석하는데 하나님은 일부러 다루지 않으신 것이다. 이삭은 다룰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눈이 어두워진 후에야 야곱을 축복하게 하셨다. 눈이 밝을 때 축복했다면 실수겠지만 눈이 어두워서 축복했으니까 모르고 한 것이지 실수가 아니다.
이삭은 다룰 필요도 없고, 실패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이삭이라는 사람 자체가 그런 사람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이삭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아들이다. 사람의 어떠함으로 말미암았으면 당연히 다루어져야 한다. 생래적인 인간은 다루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그런데 이삭은 생래적으로 온 아들이 아니다. 이 사람은 다루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온 사람인데 다루면 되겠는가. 모리아 산에서 제물이 된 후에 부활로 다시 주신 아들이다. 받을 때도 완전한 은혜로 받았고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지고 다시 받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다시 연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을 하나님이 연단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이삭은 우리의 주 예수-아들의 형상이다.
이 사람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이 조상인 줄 알지만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이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하셨다(창21:12). 이삭이 이스라엘의 씨다. 바로 이분이 우리에게 와야 한다. 사람의 힘으로 된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 나셨다는 말이 이 말이다. 처녀의 몸에서 났다는 말이 이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처녀에게서 나겠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 보시기에 적격자였다. 우리가 볼 때는 욕심 많고 안좋은 인간성을 많이 가진 사람인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택하셨다.
야곱은 꾀를 부리고 지혜를 써서 많이 얻었는데 자기 힘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빈손이 되었다. 특이하다. 그는 얻을 만큼 얻었고 할 만큼 다 해 보았다. 져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밧단 아람에서 이십 년 동안 외삼촌 라반과 겨루어서 한 번도 져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고 팥죽 한 그릇으로 완벽하게 장자의 명분을 샀으며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을 때도 눈이 어두운 틈을 타서 별미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삭이 야곱의 손을 만져 보고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라고 했다고 하였다. 손에 어떤 장치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야곱은 어느 하나도 빈틈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인데 빈손이 된 것이니 게으른 사람이 빈손이 된 것과 다르다. 게을러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면 얻는 사람이 마지막에 완전히 빈손이 된 것이다.
왜 빈손이 되었는가. 모든 것을 다 획득한 바로(가인- 네피림)를 축복하기 위해서다. ‘가인’은 획득한다는 뜻이고 네피림은 천사들과 사람이 결합해서 된 사람이다. 장부요 용사요 유명한 자라는 말은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면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네피림이다. 그런 사람을 축복해야 하는데 누가 바로를 축복할 수 있겠는가.
축복은 원래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이 바로 앞에 가서 무슨 축복을 하겠는가. 반대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빈손이 되어 버린 이 사람이 바로를 축복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이 사람은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역설적인 사람이다.
세계가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바다에 가면 바다라는 세계가 있고 산에 가면 산이라는 세계가 있다. 바다에 갈 때 필요한 장비는 산에 갈 때는 필요가 없고 등산할 때 필요한 장비는 바다에 갈 때는 필요가 없다. 세계가 달라서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한 곳은 가인과 네피림이 필요한 곳이고 한 곳은 야곱처럼 다 잃어 버리고 빈손이 된 사람이 필요한 곳이다. 세계가 다르다.
같은 세계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헛일이다. 가인과 네피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왜 이러냐 왜 저러냐, 네가 잘했느냐 내가 잘했느냐, 무엇이 옳으니 무엇이 그르냐 하고 있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산에서 필요한 장비를 바다에서 쓰겠는가. 바다에서 쓰던 장비를 산에 가지고 가면 어디 쓰겠는가. 서로 안맞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진실, 진실’ 하지만 진실이 아닌 세상에서 어떻게 진실을 찾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은 그런 줄 알아야 한다. 바다에 갈 때는 바다라고 알아야 하고 산에 갈 때는 산인 줄 알아야 되지 바다인지 산인지 모르고 덤벙거리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잘 보여진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을 자세히 보자. 그러면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얻었지만 다 잃어 버린 사람과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상대가 되겠는가. 그런데 전혀 다른 세계니까 야곱은 바로를 만나서 두 번이나 축복했던 것이다. 훨씬 풍요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니 십자가에 버림 받으셨으나 높은 이름으로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다. 그 이름을 높여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가 바로 우리 주님의 형상이다.
야곱은 험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말하고 바로를 축복했다. 바로 우리 주님이 그러하시다. 십자가만큼 예수를 낮춰 버린 데가 없다. 더 이상 낮출 수 없도록 낮춰 버린 것이다. 야곱은 그분의 형상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그분이 승승장구할 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아무 말도 못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우리의 구원이 있다. 우리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탄에게 속아서 거품이 생겼던 것이다.
세상은 거품을 가지고 서로 이러니 저러니,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고 있다. 입장이 달라지면 말이 달라진다. 그것을 보고 전에는 이렇게 말하더니 왜 지금은 저렇게 말하느냐고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알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다른 것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한다.
야곱은 우리 주님의 형상, 예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런 모든 사람들의 총화라고 할 수 있고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사람들의 대표자고 이런 사람들을 포함한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 한 사람을 알면 모든 사람을 아는 것이다. 예수를 알아야 이삭을 알 수 있지 예수를 모르면 이삭을 알 수 없다.
이삭은 왜 그렇게 복을 받았는가. 그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물이 고일 수밖에 없는 땅에 물이 고이지 물이 고일 수 없는 땅에는 비가 아무리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 제주는 현무암 화산지대여서 비가 와도 다 스며들어서 바닷가로 나온다. 부자들은 바닷가에 살았고 중산간에는 보통 사람들이 살았다. 산간에는 물이 없어서 바닷가까지 물을 길러와야 했기 때문에 못사는 사람들이 살았다.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그러니 누가 이 사람보다 더 높고, 더 부한 자가 있는가! 세상에는 없다. 같은 계열에서는 이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바로는 잠깐이었으나 야곱-이스라엘은 영원하다. 할렐루야! 한 사람은 굉장한 것 같은데 잠깐이었고 한 사람은 낮아질 데까지 낮아졌는데 영원하다. 만민을 포함하고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다.
석가모니는 뛰어난 사람이다.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도에 전념해서 어떤 경지에 이른 분이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 안에 누가 포함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도 그렇게 되어 보겠다고 따라가고 있지만 거기서는 아무도 그 사람 안에 포함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주님 예수 안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그를 찾아가면 그 안에 포함된다. 이것이 비밀이다. 그분은 더 이상 망할 수 없도록 완전히 망했다. 그런데 그 안에 내가 있다. 거기 내 집이 있고 내 거처가 있고 내 영생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예수를 아는 길이다.
다른 것은 아무리 알아봤자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인구가 얼마인가. 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와 관계없는 것만 많이 알고 있다. 그러니 사람이 안변하는 것이다. 가치관이 바꿔져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가치관이 바뀌겠는가. 예수의 가치가 높다고 알아야 가치관이 바뀐다.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해서 벼슬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가치였다. 그러니 너도 나도 할 수만 있으면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해방 후만 해도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경제가 풍성해지고 좋아지니까 요즘 아이들은 과학자가 되고 싶고 회사 사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사회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한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알아야 가치관이 변하지 제일 좋은 가치관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해서 가치관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이 바꿔지려면 가치관이 바꿔져야 한다. 사람이 바꿔지면 가치관은 저절로 바꿔지게 마련이다. 생명의 원칙이다.
이삭은 온전한 씨였고(22:17참조), 야곱은 풍성한 열매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를 만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삭이라는 사람을 씨로 삼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새로운 인류,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씨가 필요하다. 그 씨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당시 사회에서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에게 의논을 하겠다고 왔는데 예수님은 대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아야 되지 가치관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보겠는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누가 가져가겠는가. 그것을 보화로 여긴 사람이다. 그것이 보화라고 알면 다 가져가 버리지 남겨 두겠는가.
아프리카 사람들은 길바닥에 보석이 굴러다녀도 그것이 값비싼 보석인 줄 몰랐다. 그것을 유럽인들이 마구 긁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 유럽이 부유하게 된 것이다. 내가 살던 노화도에 옥산이 있었다. 그리고 목포에서 조금 나가면 거기도 옥산이 있었다. 거기서 사기그릇 재료가 나왔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그런 산인 줄 모르고 거기서 나온 돌조각을 갈아서 벼루를 만들기도 했다. 몇십 년만에 가보니까 그 산이 다 깎여서 완전히 평지가 되어 버렸다. 그 산 전체가 옥이었던 것이다. 단양에는 시멘트 공장이 많은데 거기는 산이 전부 석회석이다. 그 높은 산을 다 깎아먹어서 지금은 평지가 되었다. 거기서 나온 시멘트로 우리가 건설을 한 것이다. 그 전에는 비싸게 수입해서 썼는데 단양에서 시멘트를 생산하면서부터 수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리 옥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산을 사놓지 않았겠는가.
어떤 세계에서 높은 사람은 어떤 세계에서 낮은 사람일 수 있고 어떤 세계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일 수 있다. 이것을 알면 내가 어디 속해야 될 것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될지 알게 된다.
가치가 달라지면 특별히 다른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모르니까 팔아먹는 것이지 자기 밭에 보화가 있는 줄 알면 팔아먹겠는가. 세상에는 무엇이 없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거기서 굉장히 많은 것을 찾고 어떤 사람은 맨날 찾아도 못찾아서 배고프다. 바로는 잠깐이지만 야곱은 영원하다.
이삭은 온전한 씨고 야곱은 풍성한 열매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은 풍성한 열매가 되라는 것이었다. 씨는 온전해야 된다. 순수해야 하고 순도 100%라야 된다. 그래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어떤 것도 섞이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씨가 이삭이다. 내가 누구에게 씨가 되려면 순도가 맞아야 된다. 그런데 풍성해지려면 연단이 필요하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많은 과정을 겪어서 열매를 맺는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씨다.
일본은 육종학이 발달해서 좋은 씨를 만들어서 한국에 팔아먹는다. 부가가치가 엄청나게 높다. 충주에 있을 때 잠종장을 하는 어떤 여 장로님이 있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누에씨를 자가 생산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집집마다 씨가 달라서 명주가 일정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에서 각 도에 한 농가를 선정해서 잠종장을 하게 해서 거기서 나온 누에씨를 각 농가에 보급했다. 충청북도에 하나 있는 잠종장을 그 장로님이 했는데 그분이 나에게 “이렇게 깨끗한 장사가 없습니다. 일 년에 삼 개월만 사람을 사서 일하면 됩니다.”라고 하셨다. 누에를 키워서 누에고치가 되게 하려면 굉장히 어렵다. 세 번 잠을 재워야 되고 뽕잎을 계속 먹여야 한다. 그런데 잠종장에서는 일 년에 삼 개월만 일하면 되고 정부에서 수매를 했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열매는 수고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고 씨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니 씨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삭은 씨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이삭은 사람에게서 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새로운 인류의 씨로 보았다. 그래서 처녀에게서 잉태했다고 한 것이다. 처녀에게서 났다는 말은 남자가 섞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육신에 속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야곱은 열매로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이 되고 교회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를 합한 것으로 열두 지파는 야곱의 아들들이다.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낳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네 명의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아서 열두 명을 채웠는데 그 과정이 아주 재미있다. 만일 마지막에 요셉과 베냐민이 나오지 않았으면 야곱은 계속해서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야곱이 사랑한 아내는 네 명의 여자 가운데 라헬뿐이었는데 라헬은 출산을 못하고 다른 아내들에게 열 명의 아들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라헬은 요셉을 낳았고 베냐민을 낳다 죽었다. 그래서 열두 명이 된 것이다. 계시록을 보면 열둘은 삼과 사를 곱한 숫자로 무한히 확대되는 숫자다. 야곱은 그 숫자를 채운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요셉을 잃어버렸고 베냐민도 잃어버리게 될 지경이 되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두 아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요셉을 편애했으면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죽여 버리려고 했겠는가. 야곱은 그런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외에는 싫어했다.
야곱은 이런 연단의 과정을 수없이 겪었다. 그래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과정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저런 민족이 없다. 이천 년 동안 세계 각처에 흩어져서 디아스포라가 되었는데 한 민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야곱의 연단의 결과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 교회다. 그분은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교회는 역사 속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많은 연단이 필요한 것이다. 적이 많으니까 적을 뚫고 나가야 살 수 있다. 세상은 그래서 교회를 그냥 두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변질시키려고 한다. 방법을 써서 시대적인 요청이니 과학적인 요청이니 하며 교회를 계속 변질시키려고 한다.
씨가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씨가 온전해야 살아남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씨가 온전하지 못하니까 문명을 견뎌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과학이 들어오면 과학에게 못견디고 철학이 들어오면 철학에게 못견디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온전한 씨만 살아남는다.
이삭의 축복은 온전했다. 우리가 볼 때는 눈이 멀어서 엉터리로 축복한 것 같은데 이삭은 온전하게 축복했다. 만일 이삭이 젊었으면 절대로 그렇게 축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축복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게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무엇이 보였겠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거리밖에 안됐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라며 조롱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나온 말이 무엇인가. “너희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삼일이면 다시 살아난다.”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 말밖에 못했다.
씨가 온전치 않았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 그렇게 단련된 씨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회개를 많이 하면 죄가 사해지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거듭나야 죄가 없어지지 거듭나지 않고는 죄가 없어질 수 없다.
이삭의 축복은 온전했다. 한 점의 오차도 없는 온전한 축복이다. 온전하게 하려고 해서 온전한 것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씨 자체가 온전한 씨였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의 목표가 이것이다. 씨가 온전해서 세상에 전파되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목표고 내가 전하는 복음의 목표다. 내가 세상을 흔들겠는가, 뒤집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는가. 씨만 온전하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나라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전혀 만나보지 못한 나라를 만날 것이라며 뒤엎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맨날 시끄럽기만 하다. 우리는 생전 처음 이런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해방 이후로 지금 같은 때가 없었다. 말 그대로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씨가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씨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가 바뀌려면 사람이 바꾸어져야 되지 사회 자체만 바꿀 수 없다. 사람이 그대로 있는데 사회가 바꿔지겠는가.
우리가 키를 잡고 있다. 바로가 아니라 요셉이 키를 잡고 있었던 것처럼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키를 잡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키를 잡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한다. 마지막 남을 것은 이삭으로부터 난 것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삭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은 다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 생명으로 난 것만 영원하게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돌아서면 세상을 축복하는 것이 된다. 세상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있어야 세상에 축복이 되지 이것이 없으면 축복이 될 수 없다. 원천이 있어야 강이 맑아지지 원천이 없는데 강이 맑아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대해 가진 사명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고 세상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되겠는가. 소가 “사람을 위하자.” 하며 데모한다고 되겠는가.
사람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 새로운 사회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사회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결국 변화의 핵심이다. 순수한 사람, 참 사람이 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참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문제가 더 많다. 옛날 어떤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을 부르짖었다.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정부가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고 파출소마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고 써붙여 놓았다. 아이러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등을 주장하지만 막상 가보면 평등이 없다. 아파트 한 채에 45억이나 한다는데 어떻게 평등이 가능하겠는가.
우리가 역사적 사명을 가져야 되지 세상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큰 싸움이 없고 폭탄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기대할 것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에 대한 사명을 갖고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맨날 교회가 이래야 되느니 저래야 되느니 하는데 그런다고 교회가 되겠는가. 사람이 바꿔져야 되지 교회 매뉴얼만 바꾼다고 되겠는가. 사람대로 되는 것이지 교회 매뉴얼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인생들이다. 잠깐 왔다가는 인생이지만 우리 같은 인생, 우리 같은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 같은 교회가 없으면 교회가 변화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 같은 교회가 있어야 교회들이 살아날 수 있고 사회도 살아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