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筏橋)에 가다(제2악장)
최 화 웅
벌교는 포구다.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벌교천은 동쪽으로 순천과 접하고 그 아래로 여수, 서쪽으로는 보성과 긴 고흥반도가 보성만을 가른다. 북쪽으로 율어, 낙안, 외서의 곡창지대가 펼쳐진다. 순천만이 질펀한 갯벌과 갈대로 자연생태공원을 이루었다면 벌교는 보성군의 포구로 주먹과 인물이 빼어나고 꼬막과 짱뚱어가 유명한 곳이다. 남해바다에서 보면 벌교는 북쪽으로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은 조계산을 이고 섬진강을 건너면 저만치 지리산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편으로는 광주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보성군의 인구 30%가 모여 사는 벌교는 해발 560.3m의 제석산을 끼고 흐르는 벌교천 아래 형성된 하구평야다. 벌교의 젖줄. 벌교천에는 제일 위로 봉림교, 그 아래에 횡갯다리라 부르는 홍교, 그 아래 소화다리로 알려진 부용교, 다시 그 아래로 제2 부용교와 경전선 철교, 그리고 하구에 걸친 남해안고속도로까지 모두 6개의 다리가 벌교의 동서 양안을 이어준다.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는 봉림교, 홍교, 부용교, 제2 부용교 등 모두 4개다. 벌교는 벌교천 상류에서 내려다보면 멀찍이 읍 전체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소설 제1권에 나오는 철교에 얽힌 염상구의 이야기가 당시 시대상황을 엿보게 한다. 동쪽으로 경전선 철길 따라 진트재 터널가 보인다. 소설에서 빨치산들이 진트제 터널을 통과하는 순천행 군용열차를 기습하여 무기와 군수품을 탈취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염상구가 벌교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철교 아래 선창에서 물건을 훔치다 들켜 일본선원을 죽이고 도망친다. 해방과 함께 벌교로 돌아온 염상구는 일본놈을 처단한 용감한 독립투사로 변신한다. 소설에서는 “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만들어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그런가 하면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쌍칼 염상구가 깡패 두목 땅벌과 결투를 벌이게 된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 바닥을 뜨기로 하고 철교의 교각이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교각 위에 섰다. 기차가 ”꽤액~~“하고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결국 그 결투에서 염상구가 이겼고 진 땅벌은 그날 밤 옛 부하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리짝만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열차에 몸을 싣는다.”고도 한다.
소설에서 빨치산의 해방구였던 율어와 그 아래 들몰을 거쳐 반대방향 오금재와 낙안으로 이어지는 첫 다리 봉림교가 있다. 그 아래로 한눈에 벌교 시가지가 들어온다. 그 아래 홍교 건너편에 지식인 김범우의 낡은 집을 둘러보고 무심한 홍교를 다시 건넜다. 그 아래로 안창민이 총격전 끝에 피를 흘리며 찾아든 옛 자애병원, 그 아래 읍사무소와 청년단 자리, 옛 금융조합과 경찰서를 거쳐 남도여관과 옛 남국민학교, 술도가와 솥공장, 그리고 염상구가 어슬렁거리던 차부와 벌교역에는 수류탄으로 자폭한 염상진의 목을 내걸었다.
당시 남에서는 공비로 북에서는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버림받은 수많은 사람들. 굶어죽고 얼어 죽은, 아니 맞아죽은 그 수많은 빨치산들은 다 얼마나 죽었는가? 오늘도 제석산 아래 벌교천에는 그 날의 슬픈 역사가 흐르고 있다. 진트재 터널에는 그 날의 역사를 뒤로 한 채 경전선 열차가 60년의 세월을 품고 말없이 달린다. 역사야! 말을 해다오. 왜 이 강토에서 우리는 그토록 서로가 잔인한 원수가 짐승처럼 싸워야 했던가? 과연 누가 우리의 적이고 누가 우리의 아군이란 말인가!
해방 정국이 봉건사회의 모순과 구조를 청산하지 못한 채 친일지배계층과 가진 자를 중심으로 국정을 수행하는 동안 농업노동자로 전락한 허기진 소작인과 백성은 토탄에 빠졌다. 특히 가진 자들과 지주의 착취와 횡포에 소작인들은 짓밟히고 시달리기만 했다. 사회혼란 속에 80%에 달하는 소작인과 어민을 중심으로 가난한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 더불어 잘 사는 평등한 자주국가의 건설을 그토록 염원했건만 민중의 염원을 수용하지 못한 국가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갈등과 불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사회무질서 속에서 염상진과 염상구 형제의 대립이 보여준 시대상황이 당시의 실상이었다. 벌교가 그 비극의 현장으로 태백산맥의 중심무대가 된 것이다. 그 불길은 지금도 꺼지지 않은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통합과 화합을 위해서는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고 비판적 견해도 수용해야 한다. 상대가 자신의 생각과 견해가 다르다고 이단이고 빨갱이로 몰아가는 정치권과 종교계는 심판받고 청산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좌파, 종북, 빨갱이라는 망발의 근원이 된 해방정국과 분단현실로부터 출발한 메카시즘의 폐해라고 하겠다. 그 결과 휴머니즘과 진보개혁사상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아직껏 색깔논쟁을 일삼으며 정치적 공격을 일삼고 있다. 세상이 갑갑답답하다.
이곳 벌교에서는 독립운동가 용암 나철(1863~1916) 선생도 태어난 곳이다.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난 나철 선생은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나 구국운동을 전개한다. 1905년에는 일왕 궁성 앞에서 단식항쟁과 암살계획으로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다. 1910년에는 단군교를 대종교로 창교하여 만주지방에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민족의 재발견을 역설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끝내 숨져 백두산에 묻혔다고 한다. 지역주민과 독립운동단체에서는 기념공원 설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 잔인하고 슬픈 역사의 현장에는 화해와 회개를 꾀하는 문학관 맞은편에 음악당도 들어섰다. 태백산맥 문락관에 앞서 채동선 음악당이 개관한 것이다. 민족음악가 채동선(1901~1953)은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벌교 출신 음악가다. 그는 1932년 정지용의 시 ‘고향’에 독창곡을 작곡하고 교향곡 ‘조국’과 ‘한강’, ‘개천절’, ‘한글날’, ‘3.1절 노래’, ‘진도아리랑’ 등을 작곡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정지용 시인이 월북시인으로 ‘고향’을 노래하지 못하게 되자 박화목의 ‘망향’과 이은상의 ‘그리워’로 바꿔 부르는 동안 3곡의 작곡자가 된 셈이다.
고 향
정 지 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매 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돌아와도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첫댓글 오래전에 읽어 가물가물한 태백산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님의 글 잘 읽고 갑니다.
벌교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벌교에 가보고 싶어지네요..
글을 읽으며 어쩌면 이리 다방면으로 박식하시고 신부님 말씀대로 백과 사전이실까 감탄하고 있어요.
저희에게 많은 것들 아낌없이 나누어 주심에 감사드려요.^^*
형님! 스테파노가 나주에 있는 동안에 오세요. 기다릴께요.
@청초이 고마워요^^ 율리아나♡
사비노에게 꼭 그래달라고 부탁해야지~
아주 오래전 선암사에 가보고는 그곳에서 살고 싶어 오기 싫었다는..^^*
그리운 선암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좁은 시야로 제 테두리 안에서만 살고있는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저는 가을날 눈부신 갈대와 석양노을이 지는 순천만과 선암사를 좋아합니다.
통합과 화합을 위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수용해야한다는 말씀 마음에 새길께요.
푸르른 신록처럼 늘 깨어 사시는 선생님! 건강하시길....
박학다식 하심 존경합니다.^^*
학문의 지식과 지혜 몰랐던 부분다방면
으로 많이 배움 또한 감사드립니다.
벌교에대해 가보고도 좁게 알았던것 시야 넓게 해주셨네요.담에가보면새롭
겠습니다. 무리 안하셨으면 좋겠어요^^
기도속에 만나요♥"God with us"!!
국장님 저는 벌교가 꼬막만 유명한 줄 알고 꼬막 먹으러 다녔는데 다음엔 두루두루 돌아 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역사는 왜 이다지도 슬프고도 기구한지, 영문도 모른채 분단된 우리 나라를 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리와 역사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도 벌교하면 꼬막밖에 몰랐거든요...ㅠㅠ
영원한 저희의 선생님이 되어 주셔야겠어요~^^
'아리랑'에 이어서 '태백산맥' 그리고 '한강'까지 정말 감명 깊게 읽었는데 세월이 약인지 다 잊어버리곤
벌교에 가서 꼬막 세트메뉴로 먹고 순천만에서 갈대밭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곤 했건만은
그곳이 이곳이라곤 생각조차 나지 않은 바아보랍니다^^
그리움님! 넘치는 에고의 열정적 파토스를 어떤 병마가 막을 수 있을까요?
작아지면서도 한없이 커지는 겸양의 미덕을 신앙안에서 발견하고 배우고 싶습니다.
모든것을 조화롭게 이끄시는 주님께 그리움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제 기도속에는 안젤라도 함께 합니다.
보성군의 녹차밭과 벌교 꼬막이 유명하다는 사실만 알았는데 이렇게 슬픈역사가 ~~
가만히 정지용의 시를 읽어보며 서재에서 글을 쓰시고 계실 모습을 그려봅니다.
치유자이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