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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탐방일자:2011. 6. 4일(토)
*탐방지 :경기고양소재 북한산성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회원 11명
(15회조남직, 24회김주홍, 이기후, 우명길, 29회 오창환, 유한준, 김정호,
이석태,정병기/김의정,49회이원성)
한강 이북의 북한산성과 이남의 남한산성은 수도서울에 인접해 있는 대표적인 석성입니다. 두 성 모두 허물어진 성들을 거의 다 개축해 외모가 산뜻하고 깔끔합니다. 다시 쌓은 두 산성에서 인고의 세월이 묻어나지는 않았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조들의 고귀한 뜻만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산성을 따라 도는 일은 제게는 산행이 아니고 탐방입니다. 산은 자연이 만들었지만 산성은 인간이 역사해 쌓은 것이기에 단순히 자연을 탐하고 즐기는 산행과는 분명 구별됩니다. 산을 오르내리는 것은 산행과 다를 바 없으나 산성을 돌며 대화를 하는 대상은 산이 아니고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린 산성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고교동창들과 함께 북한산성을 일주했습니다. 이틀 전에 부산에서 낙동정맥 첫 구간을 종주하고 올라온 데다 방송대 기말고사가 3주 밖에 안남아 이번에는 매월 첫째 토요일에 실시하는 경동동문산악회의 정기산행을 쉴 생각이었습니다. 이번 정기산행이 단순한 산행이 아니고 북한산성을 일주하는 아주 드문 프로그램이어서 고심 끝에 마음을 고쳐먹고, 남한산성은 이미 두 번을 돌았으면서 아직 온전하게 다 돌아보지 못하고 숙제로 남겨놓은 북한산성을 깔끔하게 일주했습니다.
1.북한산 산 이름에 관해
북한산성에 땅을 내준 북한산의 산 이름에 대한 여러 설이 있어, 탐방에 앞서 제 의견을 밝히고자 합니다. 몇몇 분들이 주장하는 대로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개명해야한다면 이번에 일주하는 “북한산성”도 “삼각산성”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고,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도 “삼각산성탐방기”로 고쳐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고쳐야 할 이유도 없고 고쳐서도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북한산이 삼각산보다 훨씬 전부터 불렸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북한산성’이라는 성 이름입니다. 북한산성 축조는 백제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삼각산으로 불렸다면 북한산성이 아니고 삼각산성으로 불러야 맞습니다.
북한산이 삼각산으로 불린 것은 조선조 때부터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식 님은 그의 저서 “북한산”에서 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은 양주 경계에 있는데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하였다”고 실려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으로 잡혀가는 김상헌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하고 시조를 읊은 것도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워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산은 조선조가 아닌 삼국시대부터 불려온 이름입니다. 고려 인종 때 편찬된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편에 북한산(北漢山)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는 바, “16년 정월에 비사벌에 완산주를 두었다. 10월에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하였다.(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冬十月 王巡行 北漢山, 拓定封疆)”의 문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몇 해 전 한국땅이름학회의 이사님 한 분이 삼각산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뿐이라며, “무슨 말인 고하니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 ‘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라는 글을 카페에 올린 것을 읽은 적이 있어 참고자료로 올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북한산으로 부르는 것이 백번 맞는 것이기에 저는 계속해서 “북한산성 탐방기”라는 이름으로 이 글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2.북한산성이란?
<북한성도(규장각소재)>
북한산성이란 북한산에 쌓은 포곡형(包谷形)산성입니다. 우리나라 산성은 초기에는 주로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해 산허리에다 테를 두르듯 성을 쌓은 테뫼형 산성이 대부분이었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능선을 따라 쌓아 그 사이의 골짜기를 빙 둘러싸는 폐곡선의 형태를 가진 포곡형 산성이 주류를 이루었다 합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머물며 항쟁했던 남한산성은 포곡형 산성이고,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과 온달장군이 전사한 서울의 아차산성은 모두 테뫼식산성입니다.
삼국사기는 북한산성이 백제의 4대왕인 개루왕5년에 축성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蓋婁王,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개루왕이 즉위5년째인 132년에 말갈족의 침략을 막고자 성곽일부를 쌓다가 만것을 조선조 숙종37년인 1711년에 완전하게 축성한 대표적인 석성으로, 북한산의 기암절벽을 그대로 성곽으로 활용하고 저지대만 축성해서 이루어진 보기 드문 천연성이기도 합니다.
성곽의 둘레가 약 8km에 달하는 북한산성에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낸 성문은 총 16개였다 합니다. “숙종37년에 수문(水門), 북문(北門), 서암문(西暗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일명 위문), 용암암문(龍岩暗門. 일명 용암문), 소동문(小東門), 동암문(東暗門), 대동문(大東門), 소남문(小南門),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대서문(大西門)등 13개 성문을 축조했고 그 3년 뒤에 중성(重成)을 축조하여 중성문(重成門),시구문(尸柩門), 수문(水門) 등 3개의 문을 추가로 지었다”고 박인식님은 그의 저서 “북한산”에다 성문이름을 열거해 놓았습니다. 규장각에 소장된 위 그림 “북한성도”에는 서문, 암문(북문), 동대문, 대성문, 대남문, 암문(부왕동암문), 중성문 등 7개문만 그려져 있고 나머지 문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숙종임금이 이 성을 쌓은 것은 유사시 도성의 백성들도 이리로 옮겨 군관민이 합동하여 항전을 벌이기 위해서였습니다. 120여칸 규모의 행궁(行宮), 장수들이 지휘본부로 쓸 장대(將臺) 3개소, 성을 관리할 사무소인 관성소(管城所), 유영 3개소와 창고 4개를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안에 13개의 절을 새로 짓고 승병들을 끌어들였습니다.
3.산성 따라돌기
13개소의 산성일주가 시작된 곳은 효자리 입구로, 북쪽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대표적인 출발지여서 여러 번 와봤던 데입니다. 북한산의 대표적인 세 봉우리 백운대, 인수봉과 만경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효자리입니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안개가 잔뜩 끼어 어느 한 봉우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통과한 성문은 시구문(尸柩門)입니다. 한글로 ‘시구문’이라고 써넣은 나무 판때기를 성문 상단에 붙여 놓은 이 문이 시구문(尸柩門)으로 불리는 것은 성안에서 생긴 송장을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북한성도’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효자리를 출발하여 반시간 가량 지나 다다른 시구문에서 원효암으로 오르는 돌계단 길이 제법 가팔랐습니다. 원효암을 잠시 들러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석불을 사진 찍은 후 원효봉에 올라섰습니다. 구름의 몸놀림이 바빠진다 했더니 북한산에 드리운 안개들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만난 성문은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의 안부에 자리한 북문(北門)입니다. ‘북한성도’에 그냥 “暗門”으로만 적혀 있는 이문은 당초 홍예식에 문루를 갖춘 큰 문이었으나 오래 전에 문루는 소실되고 이중으로 된 성문만 남아 있었습니다. 크라이밍 장비를 갖추지 않아 염초봉을 오르지 못하고 상운사로 내려갔다가 산성탐방센터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 이 길을 따라 백운대 길로 올라갔습니다.
세 번째 성문은 위문입니다. 백운대와 만경대사이의 고갯마루에 지어진 암문이어서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명명된 이문은 백운대를 오르내리며 꽤 여러 번 만나봤습니다. 해발 725m 지점에 지어진 이 문은 북한산성의 성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성문으로 이문 앞에까지 와서 지척의 거리인 백운대를 오르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위문에서 용암문으로 옮기는 길에 노적봉 산허리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1970년 노적봉을 올라 선배 한 분과 찍은 흑백사진이 젊어 한 때 잠시 록크라이밍을 한 유일한 사진이어서 이글과 함께 올립니다.
위문에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자 말갈은 과연 어떤 종족이었기에 백제로 하여금 이 험한 곳에 성을 쌓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북한산성을 쌓은 것은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라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기루왕29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요청했고 그 몇 년 후 말갈과 가야와의 전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신라는 이청을 받아들여 두 나라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우호적일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백제를 집적거린 것은 말갈이었다고 이이화님은 “한국사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강원도 산악지대에 출몰해 게릴라수법에 능한 말갈의 군사 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포악하기 이를 데 없어 백제가 선제 공격을 한 일은 없었다 합니다. 말갈의 침입방향은 북쪽과 동쪽에 걸쳐 있어 임진강과 북한산, 그리고 한강 상류가 요충지였으며 그래서 백제는 북한산에 산성을 쌓은 것입니다.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급기야 북한산성을 버리고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것은 서력475년의 일이니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342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네 번째 만난 문은 용암문(龍岩門)으로 이 문 또한 암문이어서 용암암문(龍岩暗門)으로도 불립니다. 저희들은 이미 시구문을 통과하면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 하산을 하려면 반드시 성문을 통과해야 하는 데 이 문을 통과해 내려가면 도선사에 이르게 됩니다. 이 구간 일부 성곽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습니다.
성곽을 따라 올라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동장대(東將臺)에 이르렀습니다. 1712년에 지어진 동장대가 일반 장수가 지휘했던 남장대나 북장대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최고의 지휘관이 지휘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동장대도 기실은 소실된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동장대에서 성주능선을 따라 내려가 다다른 다섯 번째 성문은 대동문(大東門)입니다. 이 성문을 통과해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진달래 능선이고 동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아카데미하우스에 닿습니다. 대동문은 앞서 지나온 암문과 달리 문루가 세워져 제대로 된 성문다웠습니다. 70세가 넘는 연세에도 젊은 후배들 앞에 서서 산행하시는 최고참 선배께서 선약이 있어 이문으로 먼저 하산하시고 저희들은 보국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정릉 길로 올라오는 분들이 북한산을 오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보국문(報國門)을 여섯 번째 성문으로 지났습니다. 동쪽에 있는 암문이어서 동암문으로 이름 붙여졌다가 성문 아래 보국사가 있었다 하여 보국문으로도 불리는 이 문 주위가 시끌벅적한 것은 중흥사를 거쳐 올라오는 산객들과 정릉에서 출발한 산객들이 이 문에서 만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국문에서 보현봉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쌓아 마치 돌계단처럼 보이는 성곽을 따라 올랐습니다. 햇볕이 쨍쨍 나 오전 안개 속을 걸을 때가 그리울 정도로 더웠습니다. 보현봉의 동쪽 어깨 위에 있는 대성문(大城門)이 일곱 번째 다다른 성문으로 이 문은 정릉에서 올라온 산객들을 보국문과 나눠 맞습니다. 서울의 성북구와 종로구, 그리고 경기도의 고양시가 만나는 접점에 세워진 이 문 옆에 북위37도37분43초, 동경126도58분28초, 표고가 693m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대성문은 경복궁과 북한산성 내 행궁을 이어주는 길목을 지키는 문으로 여러 성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문입니다.
여덟 번째 성문은 대남문(大南門)입니다. 북한산의 삼각봉들이 한눈에 잡히는 대남문의 성루에 올라 백운대를 바라보는 두 눈을 조금 아래로 해서 내려다보면 북한산 산속에도 이런 넓은 곳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서울 정도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1년에 복원된 문루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며 바로 아래 문수사에서 식수를 받아오는 한 후배를 기다렸습니다.
문수봉을 오른 쪽으로 에돌아 아홉 번째 이르른 성문은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으로 문수봉과 나한봉의 안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문에서 조금 올라 나한봉 전위봉인 715.7m봉에서 오른 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지금은 터만 남은 남장대지와 행궁지를 차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앞서 지나온 대동문이나 대남문처럼 성위에 문루를 올린 정식 성문과는 달리 청수동암문은 적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비상출입구로 만든 암문이어서 그 자리가 깊숙하고 후미졌습니다. 이 문을 통과해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비봉능선을 타게되어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웠던 비봉을 지납니다.
나한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암릉코스 의상능선은 지난 가을 한 번 지난 길입니다. 나월봉을 넘어 얼마 후 내려선 고갯마루에 세워진 열 번째 성문이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으로 원각문으로도 불립니다. 오른 쪽으로 북한산성계곡 길이 갈리고 왼쪽으로 삼천사계곡 길이 갈리는 십자안부에 자리한 이 암문 위에 쌓은 여장(女墻)이 눈에 띄어 반가웠습니다. 한수이북의 북한산성이 강 건너 이남의 남한산성과 크게 다른 점은 남한산성의 여장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했는데 여기 부왕동암문에서 여장을 만나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부왕동암문에서 가사당암문으로 이동하는 길에 옛 성곽 그대로를 보았습니다. 서울시에서 1990년에 시작한 복원공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숙종37년인 1711년에 북한산성을 개축하기까지 수많은 설전이 오갔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와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 때에도 개축 건이 논의 됐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은 왕권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개축을 반대한 신하들을 제압하고 밀어붙인 숙종은 착공 반 년 만에 대 역사를 끝냈습니다. 시일을 끌다가는 국론분열과 청의 개입으로 북한산성을 다시 쌓는 일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을 했기에 숙종은 전광석화로 성 쌓기를 마무리 진 것입니다. 혹시라도 숙종임금을 두고 장희빈에 놀아난 유약하고 방탕한 임금으로 알고 있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조 다음으로 오래 집권한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통해 신하들을 갈아치우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기에 북한산성은 물론 청주의 상당산성도 석성으로 개축했고 벌봉을 둘러쌓은 외성을 남한산성에 붙여 석성으로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용출봉과 의상봉 사이의 안부에 문을 낸 마지막 암문인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에 도착해 열 한 번째 성문을 만나보았습니다. 부왕동암문에서 용혈봉을 오르는 길에 바위에 바짝 붙어 일광욕을 즐기는 나비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주홍색바탕에 검은 점이 고루 퍼져 있으며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작은은점선나비인 것 같았습니다. 이 나비는 장마철에 빠끔히 얼굴을 내민 태양이 딴 생각 먹기 전에 전날 내린 비를 맞아 축축해졌을 두 날개를 말리려 하는지 제가 바짝 다가갔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일광욕을 즐겼습니다. 철책을 잡고 오른 용출봉에서 내려선 가사당암문에서 직진해 오르면 의상봉입니다. 북한산성계곡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자리 잡은 원효봉과 의상봉은 높이를 겨루면서도 서로를 높이 보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처럼 보엿습니다. 의상봉을 올라 그대로 진행하면 대서문에 이르게 되는데 이번에는 오른 쪽으로 꺾어 중성문으로 향했습니다.
하산 길에 국녕사를 지나면서 여타 부처님과는 달리 합장수인을 하신 국녕대불(國寧大佛)을 만나 뵈었습니다. 동양최대의 좌불답게 규모가 엄청 큰 국녕대불은 북한산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을 지켜주는 부처님이라 합니다. 제발 불력이 불상의 크기에 비례해 발해 어지럽게 사는 중생들을 구해주었으면 합니다만, 어디 말처럼 쉽겠나 싶기도 합니다.
열두 번째 지난 성문은 중성문(中城門)입니다. 중성문은 다른 12성문을 축조한 뒤에 쌓은 중성(重城)에 문을 낸 성안의 성문이어서 “북한성도”에는 중성문(重城門)으로 나와 있습니다.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이 뚫릴 때를 대비하여 성안의 백성들과 행궁과 유영, 창고등의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는 이 성문안으로 들어가 위로 올라가면 당시 행궁보다 조금 컸던 중흥사의 옛터를 만나보게 되고 아래로 내려가면 마지막 성문인 대서문에 이르게 됩니다.
이번 탐방 길 마지막 차례인 열세 번째 성문 대서문(大西門)을 통과해 산성환주를 마쳤습니다. 대서문에서 출발해 시구문을 지났으면 이번 산성환주가 완벽한 폐곡선을 그렸을 텐데 효자리에서 출발해 첫 번째로 시구문을 지났기에 저희들은 페곡선의 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13개 성문 중 마지막으로 대서문을 지나고 보니 성이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해 이 성안에 성을 다시 쌓아 중성문을 낼만 했다 싶었습니다.
대서문에서 산성환주를 마감하며 몇 자 부기합니다. 박인식님이 그의 저서 “북한산”에서 언급한대로 왜 구한말 의병들이 북한산성으로 들어가 항거하지 않았을까는 궁금하고 아쉽기도 한 대목입니다. 숙종임금이 힘들여 개축한 북한산성이 그 후 이렇다하게 쓰인 적이 없었던 것은 외침이 없었기 때문이라지만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 당했을 때 그 규모가 8,800명 정도였다 합니다. 이 정도 인원이면 북한산성에 들어가 항일전을 펼쳤음직도 한데 그리하지 못한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박인식 님은 당시 군 수뇌들이 북한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떠올리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는데 이는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 통탄해할 일인 것입니다. 북한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일본군은 한일합병 뒤 곧바로 일본헌병대를 이 성안에 주둔시켰는데 말입니다.
4.북한산성 탐방을 마치며
북한산성계곡을 가운데 두고 이 계곡을 빙 둘러싼 능선을 따라 쌓은 북한산성은 대포와 폭격기의 출현으로 쓸모가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시에서 큰 돈을 들여 이 성을 복원하는 것은 산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데 그 뜻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니 그 보다 진정 우리가 복원해야 할 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산성을 쌓은 애국심인 것입니다.
천안함 피폭을 두고 아직도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 야당에서 추천한 헌법재판관 한 분도 국회청문회에서 정부에서 북한이 저지른 짓이라 발표했으니 믿기는 하나 직접 보지 못해 확신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환주한 북한산성도 직접 쌓은 것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이 성을 쌓았다는 역사적 사실도 직접 보지 않아 확신하지 않는지,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쌓은 것으로 확신하는 지 그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래서 성을 지키는 수성(守城)이 어렵다고 할 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라는 지켜나가야 하기에 또 하나의 북한산성을 쌓는 일은 멈추어서 아니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데 참고한 문헌은 박인식 님의 "북한사", 반영환 님의 "한국의 성곽",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와 이병도님이 역주한 "삼국사기"이며, 산성의 안내판에 실린 글도 일부 참고했습니다. 저자분들에 감사드립니다.)
<탐방사진>
첫댓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그 오랫동안 인수와 선인으로 쏘다니기만 했지, 진정코 북한산의 진면목을 접해 본적이 없었슴을 고백합니다.
이번 선배님의 글로서 처음으로 쭈욱 내려가며 알게 됨을 다시한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늘, 세세한 자료와 함께 깨우쳐주시니 그저 고마움을 전합니다.
좋은 글 잘 일어 봅니다. 잘 몰랐던 사실들을 선배님의 글로 알게 되어서 기쁨니다^^
30여분동안 나에게 미소를 선사해준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도 12성문을 한번에 돌아 본적은 없는데 정말 잘 봣습니다. 흑백사진. 뻣뻣한 삼자일에 US비나
니카바지. 잠시 눈 감고 40년전을 그려 봅니다.
건강이 좋아지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그동안 안부인사도 못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