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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문학 2023년 7월호
<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3부 - 민중의 바다에 뜬 동학(東學)의 달(月) - 10
(37)
동학(東學)교도들에 대한
관리(官吏)의 탐학(貪虐)이 점점 심해졌네.
자칭 암행어사까지 나타나 뇌물을 요구했네.
해월(海月)은 복합(伏閤)에 이르러도
변명(辨明)할 길이 있으니
절대로 푼돈이라도 시급(施給)하지 말라는
통유문(通諭文)을 각 접(接)에 발송했네.
* 주석 : 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적에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이 대궐 문 밖에 이르러
상소하고 엎드려 청하는 일
* 주석 : 통유문(通諭文) - 법(法)이라는 것은 천하(天下)의 공(公)이요 한 사람의 사유물(私有物)이 아니다. 현재 들으니 이(李).노(盧).임(林) 3인(人)이 삼도어사(三道御使)라 사칭하고 왕명(王命)을 받들고 내려왔다 하여 암암리에 모모(某某) 협잡배를 위촉(委囑)하여 하여금 교인(敎人)의 좀 넉넉한 사람에게 다시 이르기를 나는 동학(東學)을 조사하기 위하여 내려왔는데 당신의 성명(姓名)과 하는 일을 이미 정탐(偵探)하여 기록하여 두었으니 만약 뇌물(賂物)을 후(厚)하게 행하면 말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서울에 보고하여 잡아 올리겠다고 한다니 이 세 사람이 모두 왕명을 받았으면 공정(公正)히 조사하여 왕명(王命)대로 함이 사리(事理)에 당연하거늘 어찌 공(公)을 빙자하여 사(私)를 경영하며 주구무엄(誅求無嚴)하리오. 가만히 동정(動靜)을 보니 비록 읍(邑)과 영(營)에 정소(呈訴)하고 써 복합(伏閤)에 이르러도 기필코 변명(辨明)할 길이 있으니 저들이 비록 침어(侵魚)의 단서(端緖)가 있을지라도 각포교도(各包敎道)는 한결같이 이 통유(通諭)를 좇아 절대로 분문(分文)이라도 시급(施給)하지 말 사.
동학지도부는 임금에게
직소(直訴)하기 위한 도소(都所)를
보은군 장내리(帳內里)로 설치하고
도소(都所)의 출입을 해접주(該接主) 이상으로
제한하는 경통(敬通)을 발했네 (12월 6일)
* 주석 : 해접주(該接主) - 동학에서는 40명을 포교하면 해접주(該接主), 300명을 포교하면
수접주(首接主), 1,000명을 포교하면 대접주(大接主) 지위가 부여된다.
주석 : 경통(敬通) - 우경통사(右敬通事)는 지난번 양영(兩營)에 호소하고 법헌(法軒)으로부터 8역(域)의 儒를 포괄(包括)하여 6임(任)의 명을 정출(挺出)하고 도소(都所)를 이곳에 정한 것은 그 규혼의 거(擧)가 있을 때에 의(義)를 세우고 일을 성취(成就)케 함이라 일을 의논하는 마당에 각접영수(各接領首)가 서로 왕래하여 경제(經濟)할 것을 책진(策進)하면 이에 족(足)하거늘 각처제익(各處諸益)이 일이 있든 없든 소문을 듣고 모여오니 이같이 하여 말지 않으면 종일(終日) 영송(迎送)하는데 거의 조금도 겨를이 없을 것이라 종금이래(從今以來)로는 도유(道儒)로서 도소(都所)에 들어오는 자는 해접주(該接主)의 준표(準標)가 아니면 왕래(往來)치 못할 것이니 한결같이 약속을 지키면 천만행심(千萬幸甚)이라
- 12월(月) 초(初) 6일(日) 도소(都所)
손천민(孫天民)은 유(儒)·불(佛)·선(仙)과
동학(東學)의 관계를 밝히고
지방관리들이 동학교도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횡포를 시정(是正)해 줄 것을
탄원하는 조가회통(朝家回通)을 조정에 제출했네
* 주석 : 조가(朝家)회통(回通) - 도(道)라는 것은 사람이 한가지로 행하는 바를 이름이니 사(邪)도 있고 정(正)도 있으며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되 다 심리상(心理上)으로 좇아 논(論)하여 사리중(事理中)에서 구한 것이니 빈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공맹(孔孟)의 도(道)를 행(行)하는 자는 양묵(楊墨)을 가리켜 이단(異端)이라 하고 양묵(楊墨)의 도(道)를 행(行)하는 자는 공맹(孔孟)을 가리켜 이단(異端)이라 하나니 공맹(孔孟)이 사(邪)가 되고 양묵(楊墨)이 정(正)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단(異端)이라는 것은 당세(當世)에 향(向)하는 도(道)와 같지 않은 이름이라 이러므로 옛날에도 또한 유(儒)라 이름하면서 묵(墨)을 행(行)한 자가 있었으니 이것은 곧 유(儒)를 숭상하는 세상에 그 불선(不善)을 가리우고 마음을 속이며 세상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 지공정대(至公正大)한 눈으로 볼 것 같으면 반드시 이름이 다르고 같다는 것만으로써 그 마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분별(分別)하지 못할 것이라 지금 불도(佛道)와 선도(仙道) 또한 그 일단(一端)으로 그 스스로 옳다고 울린지 또한 이미 오래였도다. 지난 경신년으로부터 경주(慶州) 최선생(崔先生) 제우(濟愚)께서 한울님 말씀을 들으시고 도(道)를 창명하시어 학(學)을 동학(東學)이라 하였으니 동학(東學)이란 동쪽나라의 학(學)이란 뜻으로 유불선(儒佛仙) 삼도(三道)를 합한 이름이라. 유교(儒敎)의 말류(末流)는 글을 갖추는데 잘못 되었는데 근세(近世)의 유(儒)는 글을 갖추는 것도 또한 없으며 불교(佛敎)의 말류(末流)는 무멸(無滅)에 잘못 되었는데 근세의 불(佛)은 무멸(無滅)도 또한 없으니 유교(儒敎)는 유교(儒敎)가 아니며 불교(佛敎)는 불교가 아니라 한갓 허명(虛名) 뿐이니 그러므로 동도(東道)는 그 지나친 것을 덜고 그 미급(未及)한 것을 더하며 단점(短點)을 버리고 그 장점(長點)을 취(取)한 것이라 유교(儒敎)로써 윤강(倫綱)을 붙들고 공맹(孔孟)을 존경하되 오직 마음만은 불교로써 다스릴 것이니 유교(儒敎)에는 전해 받는 심법(心法)이 없고 불교는 오히려 전해 받는 것이 있어서 가히써 방심(放心)한 것을 수급(收給)할 수 있을 것이라 유교와 불교를 합한 것을 선교(仙敎)라 이르나니 다 선(善)을 좇으며 지성(至誠)으로 한울을 섬기는 것이라 이름은 비록 다르나 한울을 섬기는 도(道)는 한가지이니 실로 천명(天命)을 들으며 실로 천위(天威)를 두려워하며 실로 천시(天時)를 순(順)히 하는 것이므로 아버지를 섬기는 것으로써 지성(至誠)스럽게 한울을 섬길 것 같으면 효도(孝道)에 힘을 다했다 할 것이오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써 지성(至誠)스럽게 한울을 섬길 것 같으면 충성(忠誠)에 명(命)을 다했다 할 것이니 사람을 가르치되 충효(忠孝)로써 하는 것은 오직 스승의 공(功)이라 그러므로 전(傳)에 이르기를 「군사부(君師父) 삼자(三者)의 은혜(恩惠)로 살아가므로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라」하였으니 만약 이와 같이 못하면 이는 죄(罪)를 한울께 얻으면 빌 곳이 없는 것이라 부박(浮薄)한 세속(世俗)에 내용(內容)을 알지도 못하고 행(行)한 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허무(虛無)란 것을 날조(捏造)하여 인물(人物) 상해(傷害)하기를 좋아하며 공(公)을 빙자하여 사(私)를 경영하며 백성을 소란케 하고 재물을 취하는 자 자칭(自稱) 유도(儒道)니 정학(正學)이니 하니 이것은 옛날 소위 유(儒)라고 이름 하면서 묵(墨)을 행하는 자(者)도 또한 동례(同例)에 서기를 부끄러워하겠거든 도리어 동학(東學)하는 사람을 지목(指目)하여 지성(至誠)으로 한울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속이지 않는 자를 이단(異端)이라 하니 어찌 동학(東學)하는 사람으로서 우습고도 한심(寒心)한 일이 아니리오. 이름과 실지(實地)가 같지 않은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지라 충청감사(忠淸鑑司)는 다만 전순천군수(前順天郡守) 윤영기의 말만 믿고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 있어 사학(邪學)을 엄금(嚴禁)한다 칭(稱)하며 공문(公文)을 발송(發送)하여 잡아가두게 하니 원성(怨聲)이 창천(漲天)하며 돈을 바친 사람은 무죄백방(無罪白放) 시키고 빈한(貧寒)한 사람은 벌(罰)을 주고 정배를 보내며 이 사람 저 사람이 서로 고자질하여 죄가 없어도 죄가 있는 것 같이 하여 백성(百姓)이 지탱하기 어려우므로 의송(議送)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 제사(題辭)에 이르기를 「이것은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좇아서 한 것이오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하니 만약 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팔도(八道)가 같을 터인데 어찌 홀로 충청도감영(忠淸道監營)만 그러하며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었다면 윤영기의 감언이설을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라 이르지 못할 것이니 신하(臣下)가 임금섬기는 명분(名分)이 가히 이 같지 못할 것이라. 영동(永同) 옥천(沃川) 청산군수(靑山郡守)들은 백성을 들볶아 재물을 빼앗은 것이 각각 수만양(數萬兩)이라 가산(家産)을 탕패(蕩敗)하고 이산(離散)한 사람이 적지 않으며 전라도는 김제 만경 정읍 여산(礪山) 등(等) 읍이 모두 탐관(貪官)의 화(禍)를 입어 죽어나가는 사람이 연속부절(連續不絶)이라 환난(患難)에 서로 구원(救援)하며 원통한 일을 펴게 하는 것은 주자(朱子)와 율곡(栗谷) 양선생(兩先生) 향약일조(鄕約一條)요 도의(道義)로 사귀며 마음으로 서로 합하는 것은 무리를 모으려는 계책(計策)이 아니라 그러므로 송(宋)나라의 인종(仁宗)은 말씀하기를 정자(程子)의 무리와 같다면 어찌 많은 것을 근심하랴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가히 사랑스러운 것은 임금이 아니며 가(可)히 두려운 것은 백성이 아닌가 하였으니 이제 무리를 막는 길은 조정(朝廷)으로부터 어루만지며 거느림만 같지 못하니 이제 부보상(負褓商)의 예(例)와 같이 한다면 백성(百姓)들은 스스로 돌아가 각각 그 업(業)에 편안할 것이니 비록 많다고 한들 무엇을 근심하리오. 또는 도가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금을 섬기게 하면 지성(至誠)으로 한울께 빌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도울 것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뒤지리오. 이것이 요직(要職)에 당(當)하여 힘쓸 것을 아는 군자의 급히 힘써야 할 큰 정사(政事)이니 헛된 이름의 같다 다르다 하는 것으로써 도탄(塗炭)에 빠진 민정(民情)을 살피지 아니치 못할 것이니 공평히 헤아려 살피시기를 천만(千萬) 바라옵니다. - 임진(壬辰) 12월 일 도소(都所)
‘지성(至誠)으로 수도(修道)하라’는
통유문(通諭文)을 보낸 해월(海月)은
청주 송산리(松山里) 손천민(孫天民)의 집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보은군 속리면 장내리(帳內里)에
대접소(大接所)를 설치했네 (1893년 1월)
* 주석 : 통유문(通諭文) - 천지부모(天地父母)의 네 글자는 비록 각각 다르나 그 실(實)은 도시(都是) 천(天) 일자(一字)라 그러면 천지(天地)가 곧 부모(父母)요 부모(父母)가 곧 천지(天地)로서 천지부모(天地父母)가 처음부터 사이가 없는지라 명내재천(命乃在天)과 천생만민(天生萬民)은 선성(先聖)의 이른바요 건칭부(乾稱父) 곤칭모(坤稱母)는 선현(先賢)의 논(論)한 바이나 천지(天地) 섬기기를 부모 섬기는 것 같이하여 출입(出入)에 반드시 고(告)하며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禮)를 한결 같이하여 오만년(五萬年) 이후(以後)를 개벽(開闢)한 것은 선생(先生)의 시창(始創)한 것이니 반드시 그 그러한 이치(理致)가 있으므로 이에 그 그러한 도(道)를 창시(創始)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덕(德)을 알고 이 도(道)를 닦게 한 것이라. 만근이래(輓近以來)로 인륜(人倫)이 멸시(蔑視)하여 정녕(丁寧)히 부모가 나를 낳고 나를 기른 줄을 알되 만홀(慢忽)히 하여 써 효도(孝道)하는 자(者)가 심(甚)히 적거든 또 하물며 미묘난측(微妙難測)한 것은 형상은 없으되 자취는 있으니 천지부모(天地父母)의 이치를 누가 능(能)히 경외(敬畏)하여 효도로써 받드리오. 무릇 지금 하품지인(下品之人)은 보이는 데만 강(强)하고 무형(無形)한 데는 소홀함은 이치(理致)가 진실로 그러한지라 족(足)히 심(甚)히 책(責)하지 못할 것이나 도(道)가 이미 창시(創始)되었은즉 어찌 가(可)히 다만 후각(後覺)에만 돌려 전연(全然)히 포기(暴棄)하는 밖에 내버려 두리오. 그러므로 생각을 반복(反覆)하여 천박(淺薄)함을 불구(不拘)하고 논(論)하여 말하고 이끌어 깨우쳐 진심봉행(盡心奉行)하여 써 그 근본(根本)을 찾고 써 그 근원(根源)을 달(達)하게 하면 황연히 적자(赤子)의 마음을 회복(恢復)하여 확실히 천지(天地)의 이치(理致)를 분변(分卞)할 것인즉 성철(聖哲)의 역(域)에 이르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으리라. 개차신발(盖此身髮)은 다 이것이 천지부모(天地父母)의 준 바요 나의 사물(私物)이 아니니 어찌 소홀(疏忽)히 하리오. 지금 세상 사람은 다만 부모(父母)의 혈기포태(血氣胞胎)의 이치(理致)만 말하고 천지조화(天地造化)의 기틀을 이루고 이치를 부여한 근본(根本)을 알지 못하여 혹(或) 이기포태(理氣胞胎)의 수(數)를 말하되 낙지이후(落地以後)에 천포지태(天胞地胎) 자연이기(自然理氣)의 중에 장양(長養)되는 것은 전연(全然) 어두우니 가히 탄식할 일이로다.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어느 것이나 천지귀신조화(天地鬼神造化)의 자취 아님이 없거늘 혹 천리(千理)를 말하고 혹 천덕(天德)을 말하나 그러나 절대로 효경(孝敬)이 없어 하나도 받들어 섬기지 않으니 실로 쾌연(快然)의 이치(理致)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부모(父母)가 나를 낳고 나를 기르되 자연히 장성(長成)하는 것은 천지(天地)의 조화(造化)요 천지(天地)가 나를 화(化)하고 나를 이루게 하되 천명(天命)을 받아 어루만지고 기르는 것은 부모(父母)의 은덕(恩德)이니 천지가 아니면 써 나를 화생함이 없고 부모가 아니면 써 나를 양육함이 없을 것이니 천지부모(天地父母)가 덮어 기르는 은혜에 어찌 조금인들 사이가 있으리오. 천지(天地)가 이미 부모(父母)의 이름이 있고 또한 부모의 은덕(恩德)이 있은 즉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로써 받들어 같이 섬기며 공경하여 같이 봉양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으며 또한 옳지 않으랴. 선성(先聖)이 다만 신체발부(身體髮膚)를 부모(父母)에게서 받은 은혜(恩惠)만 알고 천지(天地)에게서 받은 근본(根本)을 명확히 말하지 않은 까닭은 선성(先聖)이 어찌 알지 못한다 하리오. 때에는 그 때가 있으며 운(運)에는 그 운이 있어 먼저 미래(未來)의 도(道)를 발(發)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라. 한울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써 만민(萬民)을 화생(化生)하고 오곡(五穀)을 장양(長養)한 즉 사람은 곧 오행의 빼어난 기운(氣運)이오 곡식(穀食)도 또한 오행의 원기(元氣)니 오행의 원기로써 오행의 빼어난 기운을 사양(飼養)하여 화생(化生)하고 성장(成長)케 하는 자(者) 한울이 아니고 누구이며 은혜(恩惠)가 아니고 무엇이라 하리오. 그러므로 우리 스승께서 오만년(五萬年) 무극지운(無極之運)을 받아 덕(德)을 천하(天下)에 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덕(德)을 알고 이 도(道)를 행하게 한 것이 다만 이 한가지뿐이라. 우리 스승의 대도종지(大道宗旨)는 첫째는 천지(天地) 섬기기를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도(道)요 둘째는 식고(食告)니 생존한 부모를 효양(孝養)하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라 내수도(內修道)를 가히 힘쓰지 않으랴. 도유(道儒)가 식고(食告)의 이치(理致)를 잘 알면 다만 삼재(三災)를 면(免)할 뿐만 아니라 도통(道通)도 또한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어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스승의 도(道)를 배반하여 한울의 마음을 거슬리며 한울의 이치(理致)를 업신여기면서 말하기를 도(道)를 닦는다고 하니 천우신조(天佑神助)는 오히려 말할 것 없고 한울이 내리는 꾸지람을 받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지라 지금 우리 도유(道儒)는 이미 천지부모(天地父母)의 도(道)를 받아서 길이 모시기로 하였으나 처음에는 부모의 도(道)로써 효경(孝敬)하다가 나중에는 심상(尋常)한 로인(路人)으로써 대접하면 그 부모(父母)의 마음이 어찌 가(可)히 편안하며, 그 자식이 어버이를 배반(背反)하며 잊어버리고 어디를 가리오. 한울이 간섭(干涉)하지 않으면 고요한 한 물건덩어리이니 이것을 죽었다고 할 것이오 한울이 항상 간섭(干涉)하면 지혜스러운 한 영물(靈物)이니 이것을 살았다고 할 것이라. 사람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어찌 천지(天地)의 소사(所使)가 아니리오. 오래도록 힘써 행하면 천지(天地)가 감응(感應)하리니 감응하여 드디어 통(通)하는 것이 한울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잘 생각하고 자세히 살필지어다. 부부(夫婦)도 또한 천지(天地)니 천지(天地)가 화(和)하지 못하면 이에 한울이 싫어 하나니라. 싫어하면 화(禍)를 내리우고 기뻐하면 복(福)을 내리울 것이니 가내(家內)가 화순(和順)하도록 더욱 힘쓰는 것이 어떠할꼬. 말을 일으켜 이에 미치매 크게 두렵고 크게 두려우니 경계(警戒)하고 삼가서 함께 대도(大道)를 이루도록 복축(伏祝)하고 복축하나이다. 나의 이 말이 노망이 아니라 오직 성인(聖人)의 가르침이니 영세(永世)토록 잊지 않는 것이 어떠하리오.
해월(海月)은 각지 도인(道人)에게 경통(敬通)을 발했네
신원(伸寃)과 신앙(信仰)의 자유를
조정(朝廷)에 상소(上疏)하는 작업에는
손병희(孫秉熙), 김연국(金演局), 손천민(孫天民)의 지휘 아래
박석규(朴錫奎). 임봉호(任竅鎬). 박윤서. 김영조. 김낙봉(金洛鳳)
권병덕(權秉悳), 박원칠(朴元七), 김석도(金錫道),
이문찬 등이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네.
* 주석 : 경통(敬通) - 하수(河水)의 맑음이 오히려 더디고 한울걸음이 어려움이 많아 서교(西敎)는 바야흐로 성(盛)하고 우리 도(道)는 잠자고 쇠(衰)하도다. 우리 선사(先師)께서는 무극대도(無極大道)로써 세상에 빛남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그 화(禍)를 입었으니 어찌 차마 말하리오. 무릇 우리들 사문(師門)에 몸을 담아 좇아 배우는 자(者) 선사(先師)의 신원(伸寃)할 일을 어찌 감히 침식(寢食)할 사이라도 조금인들 게을리 하리오. 바야흐로 염원(念願)을 진소(陳疏)하고 의거(義擧)를 의정(議定)하기 위하여 이에 써 포유(布諭)하노니 각지도유(各地道儒)는 일제(一齊)히 내회(來會)하여 협상시행(協商施行)할지어다. 신사(神師)께서는 드디어 선사(先師)의 신원(伸寃)과 신앙(信仰)의 자유(自由)를 위해 조정(朝廷)에 직접 상소(上疏)키로 하고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논의(論議) 하였다. 우선 상소(上疏)에는 소두(疏頭)가 있어야 하는 데 대개 소두(疏頭)된 자는 참형(慘刑)을 당할 위험이 있었으니 그것은 조선조말기(朝鮮朝末期)에 유생(儒生)들이 상소(上疏)를 하다가 소두(疏頭)된 자(者)가 참형(斬刑)을 당한 사례가 있었으므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소두(疏頭)될 자를 자원(自願)에 의하여 선발(選拔)키로 하였는데 즉석에서 수십인이 응하므로 그 중에서 박광호라는 두목(頭目)을 소두(疏頭)로 정하게 되었다. 다음 손천민으로 소문(疏文)을 짓게 하고 남호원으로 서사(書寫)를 하게 하여 서내홍을 하여금 먼저 서울에 올라가 도소(都所)를 한성남서(漢城南署) 남소동(南小洞) 최창한의 집에 정하게 하였다. 이때의 도인(道人) 대표(代表)는 박석규.임봉호.박윤서.김영조.김낙봉.권병덕.박원칠.김석도.이문찬 등이며 총지휘자(總指揮者)를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으로 정하였다.
소두(疏頭)에 박광호(朴光浩)
손천민(孫天民)이 상소문(上疏文)을 짓고
서소(書疏)에 남홍원(南弘源)
한성남서(漢城南署) 남소동(南小洞) 최창한(崔昌漢)의 집을
한성도소(漢城都所)로 정했네
* 주석 : 상소문(上疏文) - 각도에서 모여온 유학신, 박광호 등은 송구한 마음으로 임금님 앞에 삼가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통천강련(統天降蓮)하시고 조극돈륜(肇極敦倫)하시고 정성광의(正聖光義)하시고 명공대덕(明功大德)하시고 요숙순미(堯淑舜微)하시고 우모탕경(禹謨湯敬)하시고 응명입기(應命立紀)하시고 지화신열(至化神烈)하옵신 주상전하(主上殿下)께 목욕재계하옵고 백배상언(百拜上言)하나이다. 엎디어 생각건대 궁군(窮窘)하면 부모를 부르고 질통(疾痛)하면 천지(天地)를 부르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요 이지자연(理之自然)이라 이제 전하(殿下)께서는 즉(卽) 신등(臣等)의 천지부모(天地父母)요 신등은 또한 전하(殿下)의 화육중(化育中) 적자(赤子)라 이 궁군(窮窘) 질통(疾痛)의 지(地)에 즈음하여 외월(猥越)의 죄(罪)를 헤아리지 않고 제성이족(劑聖裏足)하여 천위지척(天威咫尺)의 아래에 부르짖는 것은 참망공구(僭妄恐懼)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지원극통(至寃極痛)의 상황(狀況)을 천지부모(天地父母)에 호소치 않으면 복재지간(覆載之間)에 다시 어디에 돌아가리오. 옛적부터 성제명왕(聖帝明王)과 현상양좌(賢相良佐)가 사문(四門)을 열고 사총(四聰)을 달(達)하며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사시(四時)를 순(順)히 하여 천하(天下)를 태산(泰山)과 같이 편안한데 둔 것은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리(天理)를 좇으며 인륜(人倫)을 밝히고 기강(紀綱)을 세운 따름이라 만근이래(挽近以來)로 실천행도(實踐行道)하는 참된 선비가 거의 없어 허문(虛文)을 표창(表彰)하여 한갓 외식(外飾)을 숭상(崇尙)하며 경전(經傳)을 표절(剽竊)하여 부박조명(浮薄釣名)하는 선비가 십중팔구(十中八九)라 언염사습(言念士習)에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이 가히 없어졌다고 이를 것이니 일이 국치(國治)에 관계(關係)되어 실로 작은 일이 아니므로 스스로 통한(痛恨)이 철천(徹天)하여 통곡유체(痛哭流涕)함을 깨닫지 못하였더니 어찌 다행히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사 무왕불복(無往不復)하여 지난 경신년 여름 사월에 황천(皇天)이 묵우(默祐)하고 귀신(鬼神)이 음(蔭) 하여 경상도 경주(慶州) 고(故) 학생신제우(學生臣濟愚) 비로소 천명(天命)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 덕(德)을 펴니 최제우(崔濟愚)는 즉 병자공신(丙子功臣) 정무공진립(貞武公震立)의 칠세손(七世孫)이라 도(道)를 행(行)하고 교(敎)를 편지 불과 삼기(三期)에 잘못 위학(僞學)이라는 이름으로써 허구날조(虛構捏造)의 비방(誹謗)을 횡피(橫被)하여 갑자삼월초(甲子三月初)10일에 마침내 정식(正式)으로 형(刑)을 영영(嶺營)의 아래에서 받았으니 그윽이 당시(當時) 광경(光景)을 생각하면 천지(天地)가 참담(慘憺)하고 일월(日月)이 빛이 없는지라 만약 일호(一毫)라도 부정한 죄과(罪科)를 범(犯)하였다면 법(法)에 있어 마땅히 벨 것이니 어찌 감히 죄 씻을 것을 도모하리오 마는 사람의 잘못 날조(捏造)한 것을 입어 이 원만(圓滿)하고 티 없는 대도(大道)로 하여금 이와 같은 만고(萬古)에 긍(亘)하는 창유(創有)의 횡액(橫厄)을 만나니 어찌 한심(寒心)스럽지 않으리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道理)에 만약 이지러지는 일이 있으면 감(敢)히 도학(道學) 이자(二字)로써 용훼(容喙)치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감히 신원등설(伸寃等說)로써 천청(天聽)에 무달(誣達)하리오. 그 글은 시서역춘추(詩書易春秋)요 그 법(法)은 예악형정(禮樂刑政)이요 그 도(道)는 온량공검(溫良恭儉) 효우육연임휼(孝友陸任恤) 지인성의충화(知人聖義忠和)로서 기질(氣質)을 변화할 따름이라. 선사(先師) 최제우 말씀하시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유아지갱정(唯我之更定)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각래부자지도즉(覺來夫子之道則) 일리지소정야(一理之所定也)요 논기유아지도즉(論其唯我之道則) 대동이소이야(大同以小異也)라 하시니 소이(小異)라는 것은 또한 이상한 별건사(別件事)가 아니라 성경신(誠敬信) 삼단(三端)으로 써 하는 것이니 천지(天地)를 공경스럽게 받들어 일마다 반드시 고(告)하기를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니 이 일단도리(一段道理)는 실로 선성미발(先聖未發)의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신선사(臣先師)께서 비로소 창명(創明)한 종지(宗旨)라 대개 그 종지(宗旨)는 한울 섬기기를 부모와 같이 하여 유불선(儒彿仙) 삼교(三敎)를 겸(兼)하여 통일(統一)한 이치(理致)인 고(故)로 조금 다르다고 한 것이요 그 겸유(兼有)한 원인(原因)을 연구하면 머리깎고 검은 옷 입고 장왕불고(長往不顧)하여 그 군부(君父)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불선(佛仙) 이교(二敎)중에 자비(慈悲)와 수련(修煉)의 서로 맞는 이치(理致)를 겸(兼)하였으니 실(實)로 공부자(孔夫者) 광명정대(光明正大)의 도체(道體)에 부족함이 없고 또 대개 동학(東學)이라는 것은 그 학명(學名)이 본래 동학(東學)이 아니라 그것이 한울에서 나서 동쪽에서 비롯되었으되 당세(當世) 사람이 잘못 서학(西學)으로써 배척하여 여력(餘力)이 없는 고(故)로 선사신제우(先師臣濟愚) 문제자(門弟子)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도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즉 동학(東學)이니 하물며 땅이 동서(東西)로 나뉘었으니 서(西)를 어찌 동(東)이라 하며 동(東)을 어찌 서(西)라고 하겠는가. 공자(孔子)는 노(魯)나라에서 나시어 추(鄒)나라에서 풍화(風化)가 미쳐 추로(鄒魯)의 풍(風)이 이 세상에 전하거늘 우리 도는 이 곳에서 받아 이 곳에 펴니 어찌 가히 서(西)로써 이름하리오 하였은즉 서학(西學)으로써 배척(排斥)하는 것도 부당(不當)한 것이요 또한 동학(東學)으로써 물리치는 것도 부당(不當)한 것인데도 영(營)과 읍(邑)이 속박(束縛)하며 주찬(誅竄)하기를 용조(容措)할 바 없게 하니 어찌 아프고 원통하지 않으리오. 대개 수심정기(守心正氣)하고 경천순인(敬天順人)하여 각각 그 바탕을 따르면 성자(聖者)는 성인(聖人)되고 현자(賢者)는 현인(賢人)이 될 것인즉 공부자(孔夫子)의 도(道)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조금 다르다고 해서 이단(異端)으로써 지목(指目)하리오. 대저 이 도(道)는 심화(心和)로 근본(根本)을 삼나니 마음이 화(和)하면 기운(氣運)이 화(和)하고 기운이 화하면 형체(形體)가 화하고 형체가 화하면 천심(天心)이 바로 되고 인도(人道)가 설 것이니 진실(眞實)로 이와 같으면 선사신제우(先師臣濟愚)께서 전성미발(前聖未發)의 도(道)를 시창(始創)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로 하여금 다 천리(天理)의 본원(本原)을 알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일편되게 동학(東學)으로써 이름하리오. 실로 천하(天下)에 무극(無極)한 대도(大道)라 신등(臣等)이 어찌 감히 아곡지언(阿曲之言)으로써 천폐(天陛)에 무진(誣陣)하여 위로는 써 기망(欺罔)의 죄(罪)를 지고 아래로는 써 외설(猥褻)의 주(誅)를 빠르게 하리오. 엎디어 원하오니 전하(殿下)께서는 이 화육중(化育中) 적자(赤子)를 가긍(可矜)히여겨 빨리 신사(臣師)의 억원(抑寃)을 펴게하고 빨리 종전(從前)에 정배간 교도(敎徒)를 용서(容恕)하여 덕음(德音)을 크게 펴고 화기(和氣)를 존영(尊迎)하소서. 신등(臣等)은 성황성공(誠惶誠恐)하여 읍혈격절(泣血激切)함을 맡길 길이 없어 병영(屛營)에 간절(懇切)히 비나이다.
계미년(癸未年)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각지의 유생(儒生)들이 한성으로 올라왔네. (1893년)
동학교도들도 유생(儒生)으로
가장(假裝)하여 한성도소(漢城都所)에 모였네 (1893년 2월 8일)
광화문 앞에 나아가 업들인 동학교들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3일 동안 계속되었네 (1893년 2월 11일-13일)
서장옥(徐長玉)이 이끄는 일부 동학교도들은
영(英), 미국공관(美國公館)과 예배당(禮拜堂)
일본공관(日本公館)에
‘속히 나가라’는 벽보(壁報)를 붙여
민심을 불안하게 하였네.
당황한 일본영사관은 자국거류민에게
거류(居留)인민(人民)에 내유(內諭)를 시달했네
* 주석 : 거류(居留)인민(人民)에 내유(內諭) - 근대적(近代的) 시위운동(示威運動)의 선구(先驅)였던 진사신원(辰巳伸寃運動)을 통하여 동학(東學)은 각국 영사관(領事館) 문벽(門壁)에 「침략행위」를 삼가도록 괘서(掛書)를 써 붙이는 한편 특히 일본(日本)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크게 성명(聲明)한 바 있다. 이에 당황한 일본(日本)영사관(領事館)이 자국거류민(自國居留民)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내유(內諭)한 바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근년(近年) 동학당(東學黨)이라 일컫는 외국인(外國人) 배척(排斥)의 사상(思想)을 지니는 일당(一黨)이 당국(當國) 남(南)쪽에 일어나 마침내 당원(黨員) 약간(若干)이 상경(上京)하여 당국(當局)에 강소(强疏)함에 이르고, 다시 연이어 다수(多數)의 당원(黨員)이 상경(上京)하리라는 풍문(風聞)이 있은즉 그들의 기염(氣焰)이 과연 치성(熾盛)할 때에는 아거류인민(我居留人民)에 대하여 여하(如何)한 위험을 미치게 될는지 모를 일이라, 더욱 만일의 경우에는 조선정부의 임무(任務)로서 응당(應當)히 재외외국인(在外外國人)을 보호하리라는 것은 물론이지만, 차제(此際)에 아인민(我人民)에 있어서 예(豫)히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함이 요긴(要緊)할 것인즉 각자(各自)에 있어서 다음의 사항(事項)을 심득(心得)할 사.
-. 동당원(同黨員)의 거사(擧事)에 대하여 어떠한 탐지사실(探知事實)이 있을 때에는 시급(時急)히 당관(當館)에 보고(報告)할 사(事)
-. 미리 각자(各自) 자용(自用)의 식품 등을 준비하고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할 사(事)
-. 형세(形勢)가 절박(切迫)할 때에는 노약부녀자(老弱婦女子)로 하여금 인천(仁川)으로 피난(避難)할 준비(準備)를 할 사(事). 단(但) 시의(時宜)에 따라서는 인천에 전보(電報)하여 기선(汽船)을 용산(龍山)에 회항(回航)할 것임.
-. 거류민(居留民) 가운데 장년자(壯年者)는 아경찰관(我警察官) 및 관원(館員)에 합동(合同)하여 수어(守禦)에 진력(盡力)할 사(事).
右 內諭 候事 명치 26년 4월 13일 영사(領事) 빈 촌 준(彬 村 濬)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업에 편안하라.
그러면 마땅히 너희의 원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왕의 비답(批答)이 내리자 (13일 午時)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였네
* 주석 : 비답(批答) - 상소(上疏)에 대(對)하여 임금이 내리는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