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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1902년 2월 28일회기{?}, 12강 1902년 3월 14일 회기, 13강 1902년 3월 22일.
[칸트의 시간관념 비판, 그리고 안티노미에서 시간관념 비판]
벩송: 시간관념(L’idée de temps),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1-1902)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편집, PUF, 2019, pp. 63-66, 67-70, 71-73. (P.395).
제11강에서는 칸트의 시간관념을 다루기 시작한다. 먼저 칸트는 추론의 방법상으로 시간관념을 공간관념과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12강에서 순수이유 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간과 공간의 혼동하는 이유들에 대해 다루고 난 뒤, 「선험적 변증론」의 첫째 둘째 이율배반(안티노미)들을 다룬다.
- 우리가 “순수 이유”에 대한 비판이라 부른 것은 칸트의 의도 상으로 의식의 대상(관념)들에 대해 그 이유와 근원에 대한 탐구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이유와 근원에서 개념화의 조건이 무엇이냐? 즉 어떻게 자르면 관념처럼 되느냐는 것인데, 여기서 ‘자른다’는 것은 일반화의 방식을 거쳐서 추상화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즉 ‘자른다’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혼재 속에서 외적으로 서로 같은 방식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을 잘라내야 한다(일반화). 그리고 형상에 들어올 수 없는 이질적 성질들을 잘라내야 한다(추상화). 그러면 남는 것이 인식 능력인 순수 이성일까? 순수 이유일까? 칸트의 착각이 아닐까? 고대철학 이래로 잘려진 즉 만들어진 어떤 것은 개념화 또는 관념화의 것이다. 이것을 대신하는 것이 수학적 상징 또는 언어의 항들(용어 또는 어휘)일 것인데, 이 항들이 판단으로서 명제가 되기 위해서 조건들이 필요하다. 그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범주일 것이다. 이미 잘려진 항들 사이에 새로운 결합이 판단일 진대, 그 결합은 연합적방식이며 원자론적 에피쿠로스의 것과 같다. 벩송은 이런 방식에서 에피쿠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이 닮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원자들의 결합과 항들의 결합은, - 내가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벩송의 명시적 문장은 강의록에서 처음 만났는데, 같은 방식이다. 나로서는 원자론과 항목론(개념론)은 어린애들의 레고의 조합놀이와 같다고 비유했었다. - 이런 놀이의 극한이 주지주의인데, 윤석열 정부는 들어서면서 반지성주의를 몰아낸다고 했을 때, 푸꼬가 말하는 광기의 방식이고 파라노니에 가깝다고 했다. 이런 방식이 자본을 통한 제국의 방식인데, 야만이다. 앵글로색슨의 철학적 사고가 원자론과 항목론에 기대어 레고놀이에 맞지 않는 형태(형식)들을 쳐내는 방식으로 악의 축이니 하며 악마화 하는데, 이는 16세기 교황청이 원자론과 항목론을 합하여 마녀사냥을 하며, 브루노를 산체로 화형 했던 것과 같은 야만이자 광기였다. 이승만의 보도연맹 학살도 킬링필드와 같은 야만과 광기였다. 이성이 아니라 이유의 발생을 모르고, 자기 이유만이 긍정이라고 여기는 점에서 온 것이다. 인류가 이를 벗어나는 것은, 뻬기가 추기경에게 설득시키려 노력했듯이, 사유가 지속 안에 서야 한다. 벩송의 지속의 사유 속에서 평등과 자유, 평화와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자주와 자유를 위해, 이 땅과 8천만을 사유해야 할 것이다. 분할의 사유는 광기이며 망상이다, 그리고 그 망상과 착란에서는 중세말기 마녀사냥과 같은 야만시대에 살게 될 것이다. (55VKC)
* 이 12강과 13강은 자끄 슈발리에의 것이고, 편저자는 프시샤리의 12강과 13강은 부록으로 뒤에 첨부해 놓았다. 내용은 거의 같은 흐름이지만 노트하기에 차이가 있다. 물론 둘 다 다 받아쓸 수 없어 생략이 많지만, 슈발리에의 것이 좀 더 양이 많고, 강의 흐름을 잘 따라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편자가 12강과 13강은 슈발리에 것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55V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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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1902년 2월 28일회기{?}, p. 63-66.
지속을 위한 정식화된 관점들의 응용. 칸트(Kant, 1724-1804)는 안티노미들의 형식 하에 모순들을 정식화하였다. 그가 보기에 독단인 한에서 근대철학이 모순들에 이르는 것 같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철학은 몇몇 막다른 골목들에 도달한다. 우리는 칸트의 안티노미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단순하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다음의 두 강의들을 참조, 두 강의들은 첫째의 두 개 안티노미가 나올 것인데, {정태적}안티노미들, 동태적 안티노미들이다.) 우리는 이런 모순들이 해결할 수 없는 두 요소들의 모순적 접근에 근거한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떻게 시간과 공간의 특성에서 반대가[반대특성이] 있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63)
공간과 시간의 특성들은 어떤 것인가? 시간에는계속이 있고, 정의할 수 없는 것, 지각되기에 앞서 느껴진 것이 있다. 그러고 나서 필연적인 다양성, 이질성이 있다. 두 계기들은 항상 다양하게 색채된 것으로 나타난다. (63)
지속은 항상 변하는 비례들 속에서 동등한 어떤 것의 의식을, 본질적인 특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을 함축한다. 이 어떤 것은 기억, 현재 속에 과거의 보존이다. 지속이 있고, 지속이 있는 거기에는 내부, 의식, 기억이 있다. 만일 어떤 한 사람이 매우 일반적 의미에서 의식이라는 단어를 다룬다면, 사람들은 지적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속이 비인격적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하는 존재들[현존들]에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종의 무차별적이고 빈 터전이 아니라는 것을, 첨가했다. 지속은 지속하는 존재[현존]와 분리할 수 없으며, 존재와 공실체적(consubstantielle)이다. 따라서 지속하는 존재[현존]들 만큼 많은 지속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천연 물질의 지속을 다룰 수 있고 또한 묽어진 의식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지속 위에 기생적인 지속들을 정착시킬 수 있다. 거기에는 보는 방법(manière de voir)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지속들(des durées multiples) 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63-64)
공간은 정확하게 [시간과] 반대이다. 공간은 시간 속에서 계속을 갖지 않는다. 공간은 계속의 부정작용(la négation)이 없다. 공간은 필연적으로 동질적이다. 질적인 차이들은 공간에 제시되었다. 공간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 위로 가야하며, 또한 동일한 부분들을 발견해야 한다. 색체 없는 색깔 아래로 발견하러 가야만 한다. 실재적 동질성, 그것이 공간이다. 공간은 어느 정도 정의에 의해서 의식에 외재적인 무엇이다. 이것이 의식의 부정작용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의식을 드러낸다면, 건조하고 색깔없는 공간이 남는다. 만일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백지로 만든다면, 공간만 남는다. 고대인들를 그것을 잘 보았다. 그들은 공간을 비존재(le non-être)라 불렀다. 공간은 외재성과 동일한 전형이다. 공간만이 있다. (64)
칸트는 그것을 말하기를, 우리는, 그것으로 유일한 공간의 부분들로 만들지 않고서는, 조각난 공간들을 표상할 수 없다.사람들은 추상작용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터전들을 해체할 수 있다. 사삼들은 이때에 차이를 볼 것이다. 현상은 반복된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들을 말할 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생각한다. 진실한 지속 속에서 사람들 반복되고 있는 중인 동일한 사실을 표상할 수 없다. 그 사실은 항상 다른 사건 다음에 오는 사건에 더 많은 어떤 것을 보탤 것이다. 인격의 상태는 동일한 채 남아있지 않는다. 앞선 상태의 추억은 현재 상태를 변하게 한다. 의식적 사실은 그 자체와 동일하게 반복될 수 없다. 한 상태가 이어진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상태는 변한다. 하물며, 동반하는 여러 사실들은 의식의 극장 위에 재생산될 수 없다. 만일 사람들이 여러 다른 인격들 위에서 작동하는 동일한 동기(모티브)들에 대해 말한다면, 사람들은 추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다. 결코 동일한 조건도 없고, 동일한 사실들도 없다. (64)
엄격히 말해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주어진 동일한 조건들을(원인성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적 세계에서 그러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펼쳐지는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 법칙들은 있을 수 없다. 앞으로 행할 자[선행자]들은 항상 새롭고, 그 행동 또한 새롭다. 공간과 시간 속에 다변성(la diversité)은 절대적으로 다른데, 1) 원인성, 규정작용에서, 2) 연속적 발전, 자유에서. (64)
시간과 공간의 혼동은 극복할 수 없는 난제들로 인도한다. 우리가 시간을 사유할 때, 우리는 신의 점들을, 동시적으로 병치된 요소들을 생각한다.우리가 공간을 통하여 시간을 사유하자마자, 시간은 연속성{과} 이질성을 상실한다. 그것은 동질적인 거대한 강[대하(大河)]이며, 이 강은 공간의 침상(lit)에서[위에서] 달린다. 게다가 시간은 모든 존재들에 외재적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속 일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간을 관통하는 시간의 이런 표상은 시간을 전염시킨다[병들게 한다]. 시간은 또한 공간을 보유한다. 칸트의 공간은 부분적으로 지속으로부터 만들어진다. (65)
나는 다음 강의를 준비할 것이다. 이런 상호 전염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생겨나게 한다. 이것은 공간의 무한성의 문제이다. 우리의 전건들(nos prémisses)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독단적인 결론에 이르는가? 이런 질문을 물질세계의 {무}한성과는 다르다. 이런 질문[물질세계가 무한성인가?]은 과학적이고 또는 과학적일 수 있다. 몇몇 현상들은 설명이 될 수 있는데, 그 경우에는 사람들이 세계의 {무}한성을 인정할 경우이다. 과학이 세계가 유한 또는 무한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이른다고 – 거기에 의심이 계속하여 지배하고 있을 지라도 - 가정하는 것은 전혀 부조리[불합리]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의 안티노미들을 {속에서/의해서} 걷어내는 문제가 아니다. 칸트는 공간을 때로는 유한하고 때로는 무한하다고 {제기한다}. 칸트가 안티노미들에서 그것을 주장하듯이, 사람들은 그것을 유한하고 동시에 무한하다고 표상하는가? 우리는 그것을[그렇다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공간을 무한처럼 표상한다. 만일 공간의 용기(un contenant,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것은 무한하다. 만일 공간이 합(une somme)이었다면, 그것은 유한한 합일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이런 조작작업을 전개한다. 만일 이 조작작업을 더멀리 간다고 하더라도, 용기는 항상 무한할 것이다.우리는 합산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한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유한한 것처럼 표상할 수 없다. 지속은 항상 끝난(terminée) 행동이다. (65)
우리의 고유한 지속은 시초와 유한[에 속할 것이다]. 우주의 지속은 시간 속에서 시초를 갖는 변화들의 계속에 의해 표상된다. 나는 이전에 움직일 수 없는 우주를 표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우주가 지속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모든 지속 모든 시간은 유한하다.순수 지속은 항상 정확한 한계들로 유지한다. 칸트의 제1안티노미는 이런 혼동에서 온다. 공간을 통해 보여진 시간은 무한이 되고, 우주적 용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하게 합산할 수 없다. 우리는 공간을 주어진 순간에 얻어진 합과 일치하게 한다. 때로는 우리가 순수하고 무한한, 때로는 전염[오염]된 공간과 시간을 다루고, 우리는 하나에는 무한성(l’infinitude)을 다른 하나에는 유한성(la finitude)을 부여한다. (65-66) (55V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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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1902년 3월 14일 회기, 67-70 [부록(177-179쪽)에 프시샤리의 노트가 있다.]
우리는 칸트의 제1안티노미를, 즉 수학적 안티노미를, 그리고 제3안티노미, 즉 역동적 안티노미를 연구해 보자. 우리는 이것을 공간과 시간의 성격들에 대한 혼동이 일으키는 난점들의 전형으로서 다루자. 만일 사람들이 이런 대립들이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칸트의 분석 덕분에, 옛 독단론과 칸트주의 자체가 이르지 못했던 이런 이유들을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67)
우선 칸트가 시간으로 만든 이론을 재빨리 연구[검토]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순수이유 비판, 「선험적 감성론」의 한 장 속에서, 칸트는 시간이 다섯 이유들에서 선천적(a priori)이라고 말한다.
1. 시간은 경험적 개념일 수 없다. 왜냐하면 계속과 동시성은 공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주어진, 지각작용을 위하여, 필연적인 틀들이기 때문이다.왜 계속은 경험 속에서, 특히 내적 경험 속에서, 주어질 것인가? 단지 우리는, 칸트가 왜 계속의 선천성을 지지하는지를, 그리고 실재성을 계속처럼 생각하는지를, 또한 실재성을 마치 밀착되고 줄서있는 먼지 가루의 곱태성(multiplicité)처럼 생각하는지를, 본다. 따라서 다양한 직관에 앞서 이 자료(ce donné)는 접착성도 있고 줄서있음도 있으며, 말하자면 동시성과 계속이다. 그러나 가루의 이런 분리는 우리의 작품이며, 따라서 접착과 줄섬 또한 우리의 작품이다. 이것은 원초적으로 경험 안에 주어져 있으며, 이것이 연속성이다. 따라서 이런 이유[근거]는 시간의 선천성을 증명할 수 없다. (67)
2. 시간은 모든 직관에 기초하여 필연적인 재현[표상]이다. 시간 없이 정신을 직관들을 가질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지속의 도움 없이는 세계를 재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지속의 이런 표상들을 해체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세계가 폐기 되었다고 억지로 생각하지 않고서도 말이다. 세계는 공간의 표상과 전혀 달리 있다. 그러나 칸트의 잘못,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시간은 공간의 형식 하에서 표상하는 것이고, 그 때 진실이지만, 이렇게 이해된 시간은 직관이 있을 수 있도록 필연적이라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는 공간에서만 사물(chose)을 증명했다. (67-68)
3. 시간은 차원일 뿐이다.여기에 경험에서 끌어낼 수 없는 필연적인 공리가 있다. 따라서 시간은 선천적(a priori)이다. 만일 사람들이 공간적 형식 하에서, 즉 공간에서 무한정한 선의 상징 하에서 시간의 표상을 받아들인다면, 시간이 한 차원만을 갖는다[시간은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 그것은 진실이다. - 칸트는 둘째 공리를 인용한다. 둘째 공리는 그에게 선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두 계기는 연속적이고, 동시적이 아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동시적인 두 가지 다른 지속들을, 즉 두 가지 의식적 리듬을, 다루어보자. 나는 공존하는 시간의 두 요소들의 표상을 갖지 못하는가?칸트의 경험에서는 공간이 중요하지, 실재적 지속은 중요하지 않다. (68)
4. 시간은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이다.여러 다른 시간들은 하나의 동일한 시간의 여러 부분들일 뿐이다. 다른 시간들이, 마치 동일한 류의 다양한 종들처럼, 서로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가? 그것들[지속들]로부터 하나의 단순한 상징적 표상을 얻기 위하여, 지속들을 공간 속에 투사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시간을 왜곡한다(déformer).
5. 시간의 표상은 마치 무한처럼 주어진다. 왜냐하면 시각의 규정된 크기들은 시간 일반속에서 잘려진 어떤 것이기 때문이고, 또 전체적 시간은 이런 무제한적인 이유에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작동이며 진보이다. 말하자면 유한하고 제한된 어떤 것이다. 온존재는 마치 비-존재처럼 주어졌기에, 모두 움직이는 모호한 터전[공간]은 마치 무제한성의 어떤 것처럼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만일 시간이 무제한으로 추구되는 선의 형식 하에서 상징적으로 번역되는 경우에만, 마치 무제한성처럼 고려될 것이다. (68)
우리는 이제 곧 혼동을 매우 잘 이해할 것이다. 그 혼동에서부터 안티노미들(les antinomies, 이율배반)에서 알려진 난점들이 생겨난다. 이율배반들에서 칸트는 실재성 자체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다룬다. 칸트는 순수이유 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보다 더 멀리 갈 것이다. 칸트는, 자신이 「선험적 감성론」에서 개념작업을 확립했던 대로 선천적이고 무한한 지속의 개념작업을 보존하면서, 가끔 실재적이고 유한한 지속을 표상한다. 그는 지속의 두 표상 사이에서 이렇게 좌우로 흔들렸다. 하나는 순수표상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이 섞인 표상인, 공간의 두 표상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68-69)
제1 안티노미. 세계는 시간 속에 시초가 있고, 세계는 공간 속에 제한이 있다. - 세계는 시초가 없고, 세계는 공간 속에 제한이 없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이 우리 정신의 선천적 형식들이라고 결론짓는다. (69)
그 증명들을 보자. 1)[테제]세계는 시초가 있다. 왜냐하면 반대 가설에서 시간이 될 것이라는 무한한 이런 종합이 마치 흘렀던 것처럼 말하자면 유한한 것처럼 표상[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티{테제}, 세계는 시초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빈 시간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rien)으로부터, 무로부터 아무것도 없이(ex nihilo nihil), 진행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한된 지속에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지속을 빈 시간으로 둘러쌀 것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테제에서 지속이 마치 하나의 조작처럼, 진보처럼 제기되는 반면에, 안티테제에서 지속은 마치 공간적인 어떤 것처럼, 이미 만들어진 것처럼 제기된다. 이것은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이라고 칸트가 말한다.
[제2안티노미]
테제. 세계는 공간 속에서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모든 부분들을 열거하는데 이르기 위하여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공간을 마치 무한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막는 것은 시간이다. 그러나 공간은 모든 표상 모든 종합 보다 더 큰 것처럼 얻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무한정(l’indéfini)한 것이 아니고, 무한한 것(l’infini)이다. 왜냐하면 순수 공간은 ‘완전히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69)
안티테제. 칸트는 세계가 공간 속에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고를 하지 않는다. 추론은 모든 반대로부터 숨어있는데, 왜냐하면 공간은 사람들이 표상하는 모든 부분들을 넘쳐나는 것처럼 제기 하기 때문이다. (69)
칸트는 시간의 경우에 테제에서는 이유[근거] 있고, 안티테제에서 잘못이다. 공간의 경우에서 그는 안티테제에서 이유[근거] 있고, 테제에서 잘못이다. 그가 이중 안티노미에 의해 알린 난점들의 근원, 그것은 서로 서로 전염[오염]된 공간과 시간의 혼동(la confusion)이다. 이때 그는 시간을 순수 상태로 고려해야만했을 것이고, 거기서 사람들은 공간은 무한하고, 시간은 유한하다고 볼 것이다. (69-70) (55V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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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로이센 철학자. 계몽주의 철학자. 순수이유 비판, 「선험적 변증론」, AK III, 294-295)
1882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프랑스 카톨릭 철학자. 벩송과 대화(Entretiens avec Bergson,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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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강 1902년 3월 22일. 71-73
나는 셋째 이율배반에서, 즉 역동적이지만 수학적이 아닌 이율배반에 도달한다.
테제. 자연적 원인성은 현상의 설명에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자유를 제기해야 한다.
안티테제. 자연적 원인성, 즉 결정론만 있고, 자유는 없다.
테제의 증명. 칸트는 자연적 원인성을 자유 원인성과 구별한다. 전자는 한 원인의 조작인데, 이 한 원인은 다른 한 원인에 연관해서 결과이다. 후자는 원인을 갖지 않는 한 원인의 조작이며, 자기에 의해 현존하며[자기원인], 절대적 시작이다. 자연적 원인성이외에 자유 원인성이 있어야 한다. 칸트가 말하기를, 우리가 모든 사물에 원인을 찾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그러한 것은 불완전을 완전하게 하려는 우리의 경향성의 결과이다. 여기에, 우리가 결과들과 원인들의 계열 속으로 항상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이런 퇴행이 항(terme)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적 원인이 없었다는 것을 가정해보자. 그것은 우리가 소위 적용한다는 원리 자체를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절대적 원인을 제시해야 하는데, 절대적 원인은, 말하자면 자유에 대해, 그 원인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71)
논증하는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 아마도 인간 자유의 가설로 보다 세계의 창조 가설로 더 많이 인도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그러나 칸트에서, 만일 자유가 현존한다면, 자유는 절대적 시초이다. 칸트 자신은 그의 논증작업이, 우리의 행동의 기원에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기원에 자유를 위치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잘 인정했다(제3안티노미를 논평). 단지 그는 그것으로부터 부분들의 자유를 결론지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평은 암시적이다 왜냐하면 이 논평은 후기칸트학파가 자아에서 신으로 매우 쉽게 통과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항들을 마치 동일한 실재성 위에 두 관점처럼 { 읽을 수 없는 글} [우리에게 이해하게 해준다]. (71-72)
안티테제 증명. 절대적 시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경험 속에 동일성은 더 이상 없다. 당신은 자연에서 생산되는 공백(hiatus, 단절)을 제시할 것이고, {거기에서} 연속성의 해결, 갑작스런 중단이 {지배하는데}, 그 공백은 자연적 원인성의 법칙을 파괴한다. 따라서 자유 원인성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련의 원인들과 결과들이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72)
그러나 반대가 제안된다. 만일 사람들이 자유를 중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쇄의 시총에서 제시한다면, 이런 중단은 [미래에]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은, 칸트가 경험의 통일성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지속의 무한성도 요청한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자유를 경험의 시작에서 제시한다면, 사람들은 지속의 무한성의 원리에 모순으로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테제에서, 칸트는 절대적 시초에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가정한다. 안티테제에서 지속에서 시초의 불가능성을 제시한다. (72)
인간 자유의 문제를 모든 것의 기원의 문제로 귀착시키는 것은 칸트의 작품이었다. 거기에서 두 가지 가능한 해결책들이 나온다. 만일 기원들에서 모든 것[전체]이 있다면, 만일 지속이 유한하다면, 모든 것의 시초에 자유가 있고, 따라서 사물들의 내부에 자유가 있다. [그런데] 만일 전체의 기원이 없다면, 만일 지속이 무한하다면, 자유도, 절대적 시초도 없다. 따라서 자유를 계열의 내부에 두는 것은 무용하며, 그것은 경험의 통일성의 원리에 모순되게 말하는 것이다. (72)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지속의 유한한 성격을 증명한다면, 안티노미는 사라지고, 자유는 마치 가능한 것처럼 나타난다. 오직 셋째 안티노미에서 다른 것이 있다. 원인성의 개념작업(une conception)이 있고, 칸트에게 알맞은, 현상들의 다양체[다곱체] 일반의 개념작업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되돌아 갈 것인데, 그러나 역동적인[동력학의] 길에 의해서 이다. 칸트는 현상들의 세계에서, 마치 바깥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 서로서로의 외적 사실들로부터 재통합하는 것처럼, 원인성을 표상한다. 이 외적 사실들은 마치 먼지 가루들 또는 진주들처럼 병치되어있다. 그런데 원인적 관계는 다양한 재료를 지닌 다양한 내적 관계가 아니다. 원인적 관계는 다양한 재료들에 적용된다. 원인적 관계는 그 재료들을 끌어안기 위해 사실들의 곱태성에 첨가된다.
약간 거친 개념작업화인데, 원인성으로부터 또한 자유로부터 뉘앙스도 정도[차이]도 없다. 절대적 원인성과 절대적 자유 사이에 가능한 매개도 없다.따라서 이런 조건들 속에서 칸트는 공손하게 사실들의 세계 바깥에 자유를 인정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73) [칸트의 자유는 가능성처럼 사실들 밖에, 의식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그는 도덕형이상학에서 바깥에 이상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안티노미는 외재성[데우스엑스마키나]을, 사실들과 연관하여, 인과적 관계의 엄격성을 요청한다. 사람들은, 마치 개념작업에게 태어나게 했던 가설처럼, 이런 개념작업이 신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를 자문할 수 있다.시간의 가설은 상징적으로[기표적으로] 공간의 언어로 번역된다. [한편] 사실들을 통합하는 관계는, 이 사실들의 연속성 자체이기 때문에, 서로 안에 서로 이어가는 사실들의 연장[이어감]이라서, 그들에게 외부에 있지 않다. 다른 한편 이런 관계의 필연성 속에 정도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행동이 자유이라면, 사람들은 결코 자기의 모티브[동기] 속에서 그것의 결과될 것[미래]을 다시 말하면 [아제의] 행동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선형성이 있는 것이며 규정작업[결정론]이 없다.
가장 능란한 화가도, 어린아이의 모습에 비추어서, 성숙한 어른 과 노인의 모습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코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도덕적 영역에서 우리 의식은 우리에게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자유를 부정하면, 그것의 증명을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제3 이율배반에서 칸트에 의한 자유의 배척[배중률]은 지속과 그의 공간적 상징의 혼동에 근거하며, 이 혼동으로부터 결과 되는 원인성의 개념작업에 근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가 믿었던 대로, 엄격하고 탄성없는 원인성의 동일한 전형만 있는지, 또는 어떤 비결정에서 도처에 자리[장소]가 없는지를 아는 것이다. (73)
(9:12, 55V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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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칸트의 네 가지 이율배반
첫째 (양적인 관점의) 안티노미
- 명제: 세계는 시간안에서 시작되고, 공간적으로도 한계안에 포함되어 있다.
- 반명제: 세계는 시작도 없고, 공간적으로 한계도 없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다.
둘째 (질적인 관점의) 안티노미
- 명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짜맞춰진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실재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다.
- 반명제: 세계 안에 있는 그 어떤 짜맞춰진 것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단순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셋째 (관계적 관점의) 안티노미
- 명제: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인과관계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즉 오직 하나의 인과관계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에 의한 인과관계가 있다.
- 반명제: 자유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오직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생겨난다.
넷째 (양상의 관점의) 안티노미
- 명제: 세계에는 그 부분으로서나 또는 그 원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있다.
- 반명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세계 안에서도 세계 밖에서도 세계의 원인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55V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