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자 추석연휴 마지막 날이다. '비 올 확율 60% 이상'이라는 어제 일기예보에 발목이 잡혀 오늘 산행 계획을 접었었다. 오후 들어서도 비가 내릴 기색이 없고 화창하다. 허당처럼 예보에 낚인 기분이다.
끌리듯 등산 스틱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섰다.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산맥의 지맥 청량산에서 뻗어내린 검단산에서 망덕산을 지나 이배재로 내려설 요량이다. 파란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높게 떴다. 깔개를 깔고 잔듸밭에 앉은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들,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젊은 부부, ... 탄천과 하늘,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져 펼친 풍경은 늦여름과 초가을이 뒤섞여 있다.
55번 버스를 타고 모란 상대원을 지나 중원경찰서에서 내려 황송공원 쪽으로 올라갔다. 가로변에 늘어선 은행나무는 가지마다 포도송이처럼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공원 한 켠에 월남참전기념탑이 서있다. 연초 새해 해맞이 산행지였던 하남의 검단산 들머리에도 기념탑이 있었다. 그 때 찾아본 베트남전 참전기록이 산행기에 남아 있었다.
" 64년부터 73년까지 국군 325천여 명이 참전해서 5600여 명이 전사하고, 고엽제에 노출된 3만여 명 중 생존자는 아직도 휴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월맹의 승리로 끝난 전쟁은 양 국민 마음에 오래도록 증오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에 한국군 참전기념탑이 있는지 궁금하지만 국내에는 이곳을 비롯 성남, 양평, 군포, 예산, 통영, 춘천, 제주, 양구, 해남, 청주 등 전국 각지에 월남전 참전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햇볕은 따갑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산행 들머리 부근에서 에너지바와 생수를 사려던 참이었는데, 공원관리소 아저씨가 근처에 매점이 없단다. 긴 인생 노정도 걷다 보면 일이 꼬이고 틀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되돌아가서 되짚어 꼬인 실타래를 풀던지 아니면 난국에서 벗어날 기지를 발휘해야만 한다.
등산로 입구 화장실 옆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빈 페트병 하나를 골라 잡아 베트남전 참전기념탑 앞 상수도에서 잘 휑구고 물을 채웠다. 검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로 들어섰다. 노부부들이나 가족 단위 산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들 대부분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다.
산길 옆에 참호가 보인다. 근처 군 부대에서 만든 것일까, 예비군 훈련용일까? 공원을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뢰 매설' 경고판이 산길을 따라 군데군데 서있고, 그 길을 주민들은 태연히 걷는다. 우리 국토는 전방이나 후방을 가릴 것 없이 어디나 모두 최전선이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강조하던 때가 엊그제 같지만, 요즘 세태는 저런 참호가 이념을 정치도구화 한다고 백안시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산허리를 휘도는 길 벤치에 앉은 장년 부부는 대청봉의 가을을 이야기한다. 검단산 정상 방향으로의 길을 잠시 벗어나 성천(聖泉) 약수터까지 백 여 미터 오르막을 오르는 노고를 감수했다. 성천 약수터에서 수돗물을 비우고 약수를 한 통 받을까 했는데 동물성 대장균이 검출되어 음용이 불가하단다. 약수에 방역 소독을 하고 낡아 스러질듯한 지붕과 삭아 부스러진 벤치도 수리를 하면 훌륭한 쉼터가 될텐데 방치된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사람에겐 무용할지라도 이 산에 사는 동물들에겐 오아시스나 다름없을 터이니 다행한 일이다.
스쳐 지나는 몇몇 산객들이 허리춤에 찬 스테레오에서는 하나같이 귀에 익숙한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온다. 산 허리로 휘돌던 산길은 물 소리가 들리는 계곡을 끼고 산정으로 향하며 오르막이 시작된다. 지난 태풍에 시달렸는지 참나무는 산길 위에 꺾인 가지를 수북이 흩어 놓았다.
검단산 정상 부근은 통신시설과 군부대에 점령 당해 접근이 어렵다. 어떤 나들이객 일행은 극성스럽게도 남한산성 쪽에서 산정까지 깔린 아스팔트 길을 따라 검단산 표지석이 있는 곳까지 차를 몰고 와서 세워둔채 먹자판을 벌였다.
이배재와 갈마치 너머로 영장산을 바라보는 해발 500미터 망덕산에 올라섰다. 산객 한 둘이 무심히 지나쳐 간다. 이배재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과 완만한 능선이 교차한다. 가는 여름이 서운한 듯 아쉬움이 묻어나는 매미 소리를 아랑곳 않고 요란한 풀벌레 소리는 요란하기만 하다.
태양은 여전히 청계산 위에 높아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아직 넉넉하다. 차량들이 힘겨운 엔진음을 내며 오르내리는 이배재 고개에서 무거워진 발걸음을 멈추었다. 금년 말 고개 밑으로 터널이 완공되면 지방도 338호 광주시 목현동과 성남시 상대원동을 연결하는 이배재 고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갈 것이다. 31-3번 버스를 타고 모란에서 내렸다. 인파로 북적이던 평소와는 달리 연휴 마지막 날 모란 거리는 한산하다.
요즘 추석은 어린 시절의 정취를 느낄 수가 없고, 양친이 모두 계시지 않은 이번 추석은 특히나 예전 같지가 않다. 변화와 혁신만이 지고지선의 가치인양 옛것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앞만 보고 내달리면서 보름달 한 번쯤 쳐다보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세태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익숙한 것들이 우리 곁에 좀 더 오래도록 머물러 주면 좋겠다. 이래저래 아쉬움만 더한 추석연휴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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