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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헤브론으로 가는 길(천연적인 능력과 그 근원을 장사함) 창35:21-22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 야곱은 세 가지를 잃게되는데 첫째는 자기 천연적인 선택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의 천연적인 능력이었고 세 번째는 자기 천연적인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되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천연적인 선택을 잃었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그 천연적인 능력의 근원을 잃은 사건이 생기게 된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다. 장자는 천연적인 힘, 능력, 자랑 이런 것들을 상징한다. 이 장자가 불륜을 저지름으로서 그 가정을 더럽혔고 결국은 장자권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했다. 분명히 르우벤이 먼저 나왔으니까 왕권이 그에게 주어져야 마땅한데 왕권이 유다에게로 돌아갔다. 그것은 르우벤의 이러한 잘못이 왕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한다. 왕권을 상실했다는 것은 결국 장자권을 상실했다는 말이다.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들들을 두고 미래에 관한 예언의 유언을 할 때 그렇게 말한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권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 만은 물의 끓음 같아서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음이라’ 이 말을 하게 된다. 분명히 천연적으로 타고나기는 월등하게 타고났지만 물의 끓음 같았다, 정욕이 이렇게 끓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탁월치 못하다, 너는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 이렇게 말했다. 결국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게 되었다.
자기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은 머리가 될 수 없다. 장자가 될 수 없고 왕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행하는 사람이니까 왕이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본성을 통제할 수 없으면 폭군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해야 할 사람인데 하나님의 통제를 받을 수 없는 사람, 물의 끓음 같은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다.
르우벤의 정욕을 가리켜서 물의 끓음 같았다 했는데 이렇게 자기 본능을 억제할 수 없는 사람은 머리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권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왕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을 대행한다는 명목으로 폭군이 되고 난폭해지게 되고 또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 이렇게 되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장자의 위치에서 탈락됐다.
라헬은 천연적인 선택이다. 가장 좋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야곱은 첫 눈에 라헬을 사랑했고 십 사 년 간을 봉사해서 라헬을 얻었다. 이것은 자기 천연적인 선택인데 사람이 누가 선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다 선택을 하고 사는데 이 선택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자기 좋은 대로 살게 된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형편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생각의 좋은대로 했더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기 좋은대로 한다. 하나님의 생각을 벗어나서 자기 좋은대로 하는 사람은 역시 하나님이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자기 눈에 보는 것 밖에 모르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것을 줘도 영원한 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눈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바꾸어져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하는데 천연적인 것으로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말했는데 니고데모는 세상에서 아주 출중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천연적인 것이고 그의 발은 여전히 천연적인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야곱의 천연적인 선택은 벧엘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 처리가 되어 끝나게 되었다. 그의 십 사 년 간의 노력은 결국 천연적인 선택을 얻기 위한 그런 노력이었고 또 이십 년 간 밧단 아람에서 묶여 살았던 원인도 사실은 천연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라헬이 없었다면 야곱이 이십 년 간 아람에 있었겠는가? 그는 진즉 도망을 했든지 다른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헬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이십 년 간 묶여 살았다.
이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 내 기업이 도저히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을 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요셉을 낳았을 때, 그때 비로소 자기 고향, 자기 부여조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 천연적인 선택이 아람에서 이십 년 간을 종살이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야곱은 또 천연적으로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이것도 그의 탁월한 능력을 말하고 또 자기 어머니가 시켜서 한 일이지만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뺏고 형에게 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살 때도 그는 아주 상술이 타고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람에 가서 라반과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언제든지 머리가 더 좋았다. 그래서 라반을 이기고 늘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도로 뺐기고 도로 뺏기고 그런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에 거기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는 천연적인 능력이 초등하고 탁월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었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도 천연적인 능력은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자기 일 밖에는 못 한다 그런 결론이 나온다.
헤브론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그런 길인데 하나님과 하나되는 그 길에서 결국 자기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하기 마련이다.
창세기 6장 이후에 나오는 네피림들은 거인들이었다. 사람과 천사가 합해진 가장 이상적인 존재였는데 그런 존재들은 결국 광포해서 땅을 패괴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기가 힘이 있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말이다. 자기의 천연적인 능력만큼 자기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또 없다.
내가 힘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때리지 못하면 내가 꼭 때리고 싶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내가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참게 된다. 그런데 힘이 있으면서 참으려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힘이 있는 자가 나는 너를 때리지 않는다 이렇게 맹세할 때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때 당시로서는 자기도 물론 진실하게 말했을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그 힘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절름발이가 된 야곱과 절름발이가 되지 않은 야곱을 비교해 볼 때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절름발이는 뛰고 싶어도 뛸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해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절름발이가 아닌 야곱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뛴다. 튀어버리고 만다.
우리 집에 베스가 그렇다. 자기가 힘이 없으면 죽을 줄 알아도 할 수 없이 붙잡힐텐데 힘이 있기 때문에 주인에게 안 잡히려고 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버린다. 언제든지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은 하나님의 손에 잡혀야 제물이 될 수 있는데 능력이 없으면 잡히지만 능력이 있으면 잡힐 수가 없다. 그래서 양이나 송아지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호랑이나 늑대 같은 것은 잡히지 않으니까 제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천연적인 능력이 하나님께로 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방해가 되는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의 마음과 결정적인 순간의 마음이 달라진다. 자기가 위험하게 된다, 자기가 불리하다, 자기가 어렵다는 입장이 되면 본능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때에도 하나님께 순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은 내가 꼭 옳다, 좋다 그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순종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옳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야 내 길이 옳게 되므로 그렇게 인도하시는데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 생각으로 돌아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평소에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맹세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안 된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을 때 자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싶은데 자기 속에 또 다른 한 법이 있어서 그 법이 자기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그 법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자기는 거기 매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천연적인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양이나 송아지 같은 것은 천연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주인에게 붙들리게 되고 붙들린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되게 된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안심이 되고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저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못 살겠구나, 자기 능력으로 못 하겠구나 하는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그 사람의 맹세가 확실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것으로도 맹세할 수 없는데 자기 자신을 두고 어떻게 맹세하겠냐는 것이다. 내 마음을 믿어라, 내 결심을 믿어라, 내 생각을 믿어라, 이렇게 사람들은 말한다. 말하는데 그것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존재를 봐서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어야지 그 사람의 맹세를 보고 믿는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양은 나는 맹세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는 양을 믿을 수 있다. 그렇지만 호랑이는 아무리 우리에게 맹세를 하더라도 우리는 호랑이를 믿을 수 없다. 호랑이가 와서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믿을 수가 없다.
우리 말 속담에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다는 말이 있다. 고양이가 나는 절대로 주인의 생선에 입을 대지 않을 것이고 나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을 것입니다 하고 백 번 천 번 맹세를 한다 하더라도 고양이의 속성 자체가 어느 순간에 생선에 입을 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양이 있고 송아지가 있다면 생선 가게를 안심하고 맡길 것이다. 양이나 혹은 송아지가 맹세하지 않아도, 나는 생선에 절대로 입을 대지 않겠습니다 맹세하지 않는다 해도 주인에게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생선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한다 해도 그래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양이나 소는 생선을 먹을 수 없으니까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맹세를 보지 않고 그 존재를 본다. 그러니까 그보다 정확한 일이 없다. 천연적인 능력이 처리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있다.
르우벤이 처리되었다는 것은 야곱 안에 있는 르우벤, 야곱 안에 있는 천연적인 능력이 여기서 창피를 당한 것이다. 이 사건 자체가 그렇다. 서모를 통간한 사건이니까 능력이 없이는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자기 힘이 없이는 될 수가 없고 자기 능력이 없이는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나 어떤 힘이 야곱 속에도 있었고 우리 인간 속에도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원하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에게 있다. 그것을 놓지 않으면, 그것이 처리되지 않으면 헤브론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르우벤의 이런 사건은 결국 천연적인 힘의 처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로 갈 때 천연적인 성격도 문제가 되지만 천연적인 능력도 문제가 된다. 이 성격과 이 능력이 하나님과 하나됨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천연적인 성격을 매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 능력을 여기서 제하게 된다. 이미 그때 야곱의 마음 속에는 르우벤이 제외되었다. 장자권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수 십 년 후에 마지막 유언을 할 때 르우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너는 탁월하게 태어났지만 물의 끓음 같기 때문에 너는 탁월치 못할 것이다, 그 말은 장자권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는 말이다.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장자권을 잃게 되었다. 교회 생활을 원하고 교회 생활의 진보를 원한다면 우리는 천연적인 선택을 매장하고 그 능력을 제해야, 그 능력의 속성을 알고 그 능력을 제해야 교회 생활을 원활히 하고 진보적으로 하고 만족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는 자리로 우리가 갈 수가 있다.
다음 구절에 가서 삽입구를 넣었다. 야곱의 아들은 열 둘이다 이렇게 해서 죽 넣어 놓았는데 이것은 천연적인 소산을 모아 놓은 것이다. 르우벤 한 사람만 이야기했지만 르우벤 외 다른 모든 아들들도 천연적인 능력 안에서는 같이 묶어진 것이다. 누구든지 천연적인 능력이 있으면 결국 그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르우벤과 같은 환경, 조건, 여건이 되면 그런 것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아들들을 열거했다. 이것들은 그의 아들들이 다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갔을 때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대표자일 뿐이지 베드로만 그렇고 다른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갑자기 야곱의 아들은 열 둘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사람의, 천연적인 인간의 속성 속에는 자기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천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밧단 아람에서 얻은 아들들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은 베냐민은 밧단 아람에서 얻은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보면 밧단 아람에서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결국 세상에서 얻은 아들이다,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이다 이런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어떻게 그렇게 썼는가?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어떻게 그렇게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써 놓았는가? 너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밧단 아람에서 낳은 자들이다 그렇게 써 놓았다. 그 한 마디 속에 아람에서 얻은 것은 다 같다 이런 말이 있다. 육신 안에서 얻은 것은 다 같은 것이다. 육신 안의 속성은 다 이런 것이다,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27절 이하에 가면 기럇아르바에 갔을 때 이삭을 만나게 되는데 이삭이 나이 많아서 기운이 다해서 죽었다 그렇게 되어 있다. 아버지는 천연적인 생명의 근원이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 아버지에게서 왔다. 그러니까 그 근원이 우리에게 있는 한은, 뿌리가 있는 한은 언제든지 가지는 나오게 되어 있다. 나무를 잘라버려도 언젠가 다시 나온다. 왜냐하면 근원이 있으니까.
여기서 이삭이 장사되었다는 것을 쓰고 있다. 이것이 시간적으로 봐서 어떤 시간이었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기는 어렵다. 성경은 시간이나 그런 것을 맞추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니고 어떤 항목을 따라서, 목적을 따라서 써 놓았다. 35장에서 세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넣어 놓은 것은 야곱의 마지막 처리를 위하여,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서의 마지막 정리를 위해서 세 가지, 사실은 네 가지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전부 열거해 놓았다.
기운이 다 하여 죽었다. 백 팔십 세니까 기운이 다 하여 죽었다 했다. 이 말은 천연적인 생명의 근원이 다 했다 이런 뜻이다.
천연적인 생명의 근원은 기운에 달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숨이 코에 붙었다 이 말은 우리 인생의 천연적인 선택이나 천연적인 능력이나 이것의 근원이 어디 있는가 하면 숨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숨이 들락날락 하는 동안에 오만 생각을 다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천연적인 선택을 하고 그 선택 속에서 싸우고 이것이 좋으니 저것이 좋으니 하고 발버둥치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숨이 들락날락 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한다. 물의 끓음 같이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그 때도 알고 보면 역시 숨이 코에 붙은 순간이다. 그 순간에라도 숨이 끊어져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데 사람은 어리석게도 숨을 쉬고 있으면서 싸우고, 숨을 쉬고 있으면서 선택하고, 숨을 쉬고 있으면서 물의 끓음 같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운이 다 했다 그 말은 결국 숨이 다 했다 그 말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까 산 혼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것 이하도 될 수 없고 그 이상도 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이 사람을 가지고 우리가 기고만장할 수도 없고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할 수도 없다.
권세의 길을 보면 그 권세의 길에서 떨어지면 금방 추풍 낙엽인데, 그리고 자기가 박해하던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를 해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든지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을 행사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다음에 어찌 될지 생각하지 않고 천년 만년 가지고 있을 줄로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나오고 권세는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 말을 외우고 있으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숨이 코에 붙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내 기운, 내 선택, 내 능력, 그 모든 것이 굉장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온 세상을 다 바꾸고 변화시키고 휘두르고 할 수 있는 모든 엄청난 것인데 사실 그 뿌리를 보면 숨이다. 숨밖에 안 된다. 큰 나무인데 뿌리는 조그만 것과 똑 같다.
대구에 가면 히말라야시다를 많이 심어 놓았다. 세력이 아주 좋은 나무다. 우리나라 나무 가운데 그렇게 세력이 좋은 나무가 없다. 그런데 전부 이렇게 지주목을 세워 놓았다. 왜냐하면 위의 둥치는 큰데 상대적으로 뿌리는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람이 세게 불면 큰 나무가 넘어져 버린다. 인간이 꼭 그런 것과 같다. 위에 있는 세력을 보면, 나타나 있는 세력을 보면 엄청난데 근원을 보면 숨에 불과하다. 숨이 멎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진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그것을 붙들고 있다.
숨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 이것만 우리가 안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을 겸허하게 살게 될 것이고 온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
에서와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했다 이렇게 말했는데 에서와 야곱 이렇게 말했을 때 이것은 천연적인 형제간이다. 타고난 형제들이 천연적인 근원을 장사했다 이런 말이니까 결국 천연적인 근원이 결국 천연적인 것들에 의해서 끝났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결국 이런 천연적인 것들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하면 마지막에 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벼 잎이 아무리 무성해도 이삭이 없으면 허망한 것처럼 인생이 만일 참 열매이신 그리스도가 없다면, 영원한 한 인격이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너무 허망하다, 백 팔십 세를 살면 결국은 기운이 다해서 죽는 다. 아마 제일 오래 산 사람일 것이다. 아브라함 보다 훨씬 오래 산 사람이니까 오래 산 사람인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허망한 것이다. 끝나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이런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시편에 그런 말이 있다. 여호와께서 나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나로 하여금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말이 나온다. 내 나이가 얼마인가를 계산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백년을 살 것인지 십 년을 살 것인지 하루를 살 것인지 그것을 계산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지혜롭다는 것이다.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사람이 자기의 모든 것이, 모든 근원이 숨에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은 지혜롭게 되고 그 뿌리가 깊이 깊이 박혀있어서 천년 만년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그것 하나밖에 없다.
지혜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의 근원이 숨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일이고 또 이것을 우리가 세상 앞에 선포하고 살아야 한다
바울은 어떻게 주님께 끝까지 충성스러울 수 있었는가 하면 예수 죽인 것을 자기는 짊어졌다고 한다. 자기는 어떤 사람인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엄청나게 있지만 아무리 있다고 하지만 자기 근원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 죽이던 사람이다 그것이다. 그 근원을 짊어짐으로서 그는 위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근원을 짊어짐으로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사랑을 입을 수 있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이었는데 다른 왕과 무엇이 달랐는가 하면 자기는 목동이었다는 것이 항상 자기의 근원이다. 내가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목동이다. 나는 이세의 여덟 번째 아들로 내 아버지도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는 이것이 다윗의 인생 근본에 항상 깔려 있다. 그가 다른 왕들과 전혀 다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스라엘에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찬양을 받을 만한 왕은 몇 사람밖에 안 된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탁월한 사람이 다윗이다. 메시야의 개념도 다윗에게서 나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같은 왕을 기다리는 동안에 메시야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왕이고 위대한 왕인지 모르는데 그 영광스럽고 위대한 뒤에 자기는 항상 이세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하는 것이 깔려 있다. 일곱을 단위로 하니까 여덟 번째는 세상에서 없는 것이다. 없는 아들이다. 부활 안에만 있는 아들이다. 하나님 안에만 인정되는 날이지 여덟 번째 날은 없는 날이다. 그리고 자기는 양을 치는 목자다, 자기 아버지도 자기를 인정하지 않아서 사무엘이 아들들을 천거하라 했을 때 천거하지 않은 아들이었다. 그것을 자기는 평생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왕이 되었다.
천연적인 선택과 천연적인 능력과 천연적인 생명의 근원, 이 세 가지를 놓고 볼 때 그 근원은 천연적인 생명에 있다. 이 뿌리가 숨에 있다는 것만 안다면 천연적인 선택과 천연적인 능력을 제외시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고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벧엘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우리 인생을 정리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의 천연적인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고 그의 천연적인 능력도 탁월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천연적인 선택과 능력의 근원은 숨이 코에 붙은 인생에서 나온 것이고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인생을 어지럽게 하고 이 모든 것이 인생을 교만하게 하고 자고하게 하는 것들인데 이런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청산시키고 아버지께로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것을 속히 청산하게 하셔서 우리가 아버지께로만 가고 아버지께로 하나 되는 일만 남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주님에게 가는 길에 우리에게 거리낌이 아무것도 없도록 처리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