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강 파도 소리에 잠을 잊고 새벽녘에 심해에서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이한다. 여행지 낯선 곳의 하룻밤은 잠이 아까울 정도다. 모기와 날 벌레까지 달려드는 여름날은 깊은 잠에 빠져드는 청춘들을 질투하듯 귓전에 앵앵거린다. 백 여 킬로미터 길을 달려온 버스는 안전 점검을 받느라 엔진 뚜껑이 닫힐 줄 모른다. 직장에서 모처럼 날을 잡아 너나없이 몽땅 모여 거제로 여름 휴가를 왔다. 잠 못 든 것을 빌미로 새벽녘 그녀와 함께 아침밥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평소 말 붙일 시간도 없는 사이가 봄 눈 녹듯 스르르 인연이 트이게 된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옆 자리에 앉아 손바닥을 쉼 없이 비비며 여름철 홍수에 떠내려가는 농작물 마냥 이런 말 저런 말 꿰뚫어지는 게 없다.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날 친구 소개해 준다는 말을 빌미로 한 두 번 만나는 계기가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시간으로 다가간다. 몇 개월 오간 정 끝에 가족 간 인사를 시작으로 결혼 의식에 이르고 부부로 인연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시간이 몇 개 모자라는 삼십 여년이다. 의견 충돌과 익숙하지 않는 습관들로 갈등을 겪고 여러 동생들과 부딪힌다.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하는 눈치를 떠나 오직 혼자 뿐인 아내를 감쌀 줄 모르는 철부지 남편일 뿐이었다. 시집살이는 아무리 마음 편하다 할지라도 친정만 할까. 반찬 한 가지부터 무슨 일이든 트집 잡으려는 누이들의 언행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내의 마음을 도무지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이 남아있다. 결혼 일 년 만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에 이어서 둘째는 딸이다. 그 시절 흐름에 따라 남매는 한글 이름을 얻었다. 작은 병조차 없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며 각자의 삶을 누리고 있다. 부부가 나이 들어 가는 것은 자녀가 자라는 사이 시나브로 느끼게 된다. 아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아내가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다. 검진 결과 사전 조치로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을 넘겼다. 지속적으로 처방 약을 먹고 관리를 해야만 한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떨어진 가을날 무릎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약국에서 나쁜 징조가 생겼다. 순간적으로 혈액 순환에 장애가 일어났다. 약사의 빠른 상황 판단으로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이동이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보내는 첫날 밤이 그렇게 길게 느낄 수가 있나. 손바닥 만한 창 너머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아내의 형체를 겨우 바라본다. 병상에 누운 사람에게 따로 해줄 것이 없다. 직원이 드나드는 문틈 사이로 발끝을 세워 기약 없이 바라본다. 두 손 모아 병세가 나아지기를 기원할 뿐이다. 담당 의사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나 외에 다른 가족들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허수아비인가. 멀리 있는 아들에게 연락을 한다. 밤이 깊어 새벽에 병원에 도착하였다. 아들을 집에 가 쉬게 하고 보호자 대기실에서 버텼다. 새벽녘 중환자실 창 틈으로 아내가 누운 침상을 바라보는데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인다. 그 순간 ‘이제는 되었다’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면회 시간에 마주한 아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진다. 곁에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일 주일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겨진다. 얼마나 다행인가. 저마다 다른 고통을 덜어낸 같은 병실 환자들의 격려를 받는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보일 정도로 신체 능력과 인지 능력이 개선된다. 태산이 무너지듯 한 일이 며칠 사이 큰 걱정을 덜었다. 아내는 자식 둘을 돌보면서 집에서 개인 교습소를 열었다. 초등학생 교육을 이어 가면서 경제적인 면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 덕분으로 살던 집보다 방 숫자가 많은 집으로 이사도 하였다. 또 상가에 세를 얻어 본격적인 보습 학원으로 성장해 가는 능력을 펼쳤다. 수년 간 무리한 탓에 병을 얻어 수술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학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결정을 하면서 삼십 여 년 경제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아내의 가계 경제 협조에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누리게 되었으리라. 뒤늦게 그 고마움을 쑥스러워 말하는 것조차 망설여지다 겨우 입을 연다. 나 역시 삼십 여 년의 직장 생활을 이어가다가 정년을 이 년 남기고 마무리 하였다. 몇 년 전부터 아내가 자기랑 여행도 다니고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유혹을 하였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편하게 놀면서 지내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라는 결론에 책상을 정리하였다. 퇴직 후 첫 육 개월은 그동안 미뤄뒀던 여행으로 채워졌다. 둘 만의 시간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어느 날부터 아내는 전원 생활이 꿈으로 자리잡았다. 영상 자료를 찾아 발품을 판다. 이 마을은 이래서 싫고 저기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경남 일원을 다닌 지 이 년 만에 가슴이 넉넉해지는 집을 찾았다. 서로 다른 두 세 군데 부동산 업자의 안내를 거쳐 계약을 하고 모은 돈을 털어 이전 등기까지 마쳤다. 꿈꾸던 전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선, 부엌에는 오래된 싱크대를 화사한 색깔로 바꾸고 화장실에는 타일을 붙였다. 부엌 정리는 전문가의 손을 빌리고 타일은 직접 시공에 나섰다. 처음 하는 일이라 속도가 느리다. 영상 검색과 어쭙잖은 지식으로 몇 번의 시도 끝에 벽면이 채워진다. 욕실 문도 높이를 키우고 문짝만 구입하여 마무리를 한다. 무계획이 계획이 되었다. 별채는 황토 방이라 벽면에 편백 조각을 두른다. 성인 어깨 높이에 맞춰 네 면 벽에 편백나무를 세워 황토 흙이 묻어나지 않게 만들었다. 시작이 반이다. 집이 하나 둘 꾸며진다. 아내의 꿈이 완성 되어간다.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나무 그네를 주문해온 재료로 조립하여 세운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네에 몸을 맡긴 채 부부가 차 한 잔 마시는 운치를 노려본다.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탁구대를 들여놓고 산책이 어려운 날은 네트를 넘기는 팔 운동을 시작한다. 강변까지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경제적인가. 아들과 며느리까지 방문해 합세할 때면 강력한 복식 경기가 흥을 올린다. 아들과 한 조가 되기도 하고 며느리와 한 조를 이룬다. 가족 간에 멀어진 틈을 메울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다. 결혼한 지 몇 개월 밖에 안 된 며느리와 손 바닥을 마주치며 경기를 앞서가는 기쁨을 나눈다. 아내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아들과 포옹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세대를 이어 주는 도구가 되었다. 경기가 패배로 마무리되자 며느리가 한마디 건넨다. 다음번 올 때는 열심히 배워 기어코 이기고 말 것이란다. 아내의 역할이 크다. 우리 집을 이끌고 이만큼 윤택한 생활을 만든 주인공이다. 한 집에서 이불을 같이 덮고 지내는 사이로 지낸 지 삼십 오 년째다. 건강한 몸으로 지금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부부의 즐거움에 이어 자식들의 행복을 지켜나간다. 가족 단톡 방은 늘 답장 올리기에 손가락이 바쁘다. 이틀이 멀다고 영상 통화로 손주의 재롱을 보는 재미를 더한다. 기분 전환이 따로 없다. 생활의 활력소이자 웃음의 샘터다. 서로 건강을 지키고 지나온 날과 살아갈 날을 헤아려 보며 내가 더 아껴 주는 남편으로 살아가련다. 고맙고 고맙소. 여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