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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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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불교 게 시 판 스크랩 세상에 이런일이~돼지로 전생(轉生)한 실제사건
다람쥐 추천 0 조회 91 13.01.11 22:47 댓글 25
게시글 본문내용

人转世为猪的事件

原文标题:1923年上海发生一起真实“人畜轮回转世”事件

来源:网络论坛

 

 

돼지몸 사람손~!!!

 

 

 

     중화민국(中華民國)12년~(서기1923년)

 중국대륙 강북의 태흥(泰興)고장에 시경종(施慶鐘)이란 악명높은 백수건달이 있었는데,

                                  그해에 갑짜기 원인모른 중병에 걸려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다...

                                                        마침 이 고장을 지나가는 어느 행각승(行却僧)이

               소문듣고 그의 병상에 다가와 :[당신은 평소에 악업을 너무 많이 쌓여기때문에 이제 그 인과응보을 받아

                              돼지으로 전생(轉生)하게되니 속히 부처님에게 참회하고 죄을 뉘우쳤라~]라고 하였다...

 

                    그 때 시경종(施慶鐘)의 병세는 이미 등전풍화의 상태인데 이 말 듣고 너무도 경악하고 무서워했다..

                         지난 날 저짓른 악행들때문에 다음생에 돼지(蓄道)으로 태어나야하니 원통하고 후회막심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누운체로 왼손을 가슴앞에 간신히 내밀어 부처님에게 예를 올렸다...

 

                          옆에 지켜보고 있는 행각승이: [나무아미타불~! 아깝도다...당신이 한손만으로 예불하였으니 이 한손만은

                                        돼지의 형체를 면할 수 있지만 돼지로 태어날 운명은 면치못하는구먼...

                                     그러나 도살 당하지않고 목숨만큼은 보존하게 될것이야...]하고 탄식하였다.

 

                                                                                    얼마 후에...

                                          시경종(施慶鐘)이 죽고 일주일되는 날에 옆집 채대주(蔡大柱)네 집에

                                                   어미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 한마리의 왼쪽앞발는

                                                족발아닌 인간의 손처럼 다섯 손가락의 길이와 손톱도 똑 같았다.

 

                                        이 기의한 괴소문이 순식간에 이 고장에 퍼졌나가자 시경종(施慶鐘)네 가족이

                                               채대주(蔡大柱)네 집을 찾아와 아주 비싼가격으로 이 돼지새끼를

                                                          매입하여 상해(上海) 보화사(寶華寺)안에

                                                                  있는 방생원(放生園)에 탁양(托養)하였다.

 

                                                     나는 우연찮게 이절에 가서 예불하여 이 기이한 사연을

                                                                  알게된것이 벌써 10년이 지난 후 였다.

                               진상을 확인하기위해 스님에게 부탁해서  방생원에 가서 이 "사람손 돼지"를 직접 보았는데

                             사람만나기가 창피한듯 고개를 자꾸돌려 무리속으로 숨어려고 앞으로 나오기를 꺼렸했고

                                             왼손은 시종 바닥에 닿지않고 반합장(半合掌)의 자세를 취하였다...

                                                                   순간...나는 부처님의 교리를 불신한

                                             우둔한 중생에게 육도윤회인과응보의 좋은 본보기으로 남기위해

                              당시 상해(上海)시내에서 영업중인 경화(鏡華)사진관를 불러 사진을 찍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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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12 01:43

    첫댓글 이거 재생연결식이죠?
    이 온에서 저 온으로 식이 전생하여 업에 따라 윤회한다는...
    아트만하고 뭐가 다른지 한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른지요?
    아트만도 업따라 이 몸 저 몸 받는다고 하네요.

  • 작성자 13.01.12 08:46

    저는 용어에 대해서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영(?)의 상태에 따라서는,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그리고 전에는 마음을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가르침에 의하면, 마음도 그림자라고 하여서 그런 측면에서는 윤회를 달리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윤회를 끝낸다는 것은 선불장에 통과하여야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안된다는 게 아니라 투철하지 않고서는,,()()

  • 작성자 13.01.12 08:57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 물질이 있다. 분명히 있다 2, 마음 뿐이다. (만법유(오로지 유)식識ㅡ(알식) 이라는 말이 있지요ㅡ쓰고 보니 좀 다른 것도 같은데,,,)3, 마음은(도) 그림자이다 4, 자유자재이다( 추정) /제가 공부한 것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 13.01.12 09:43

    지금 말씀하시는 게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객관도 주관도 아닌 연기가 법계의 진실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식의 인연은 100% 십이처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문제삼는 것은 십이처를 의지하지도 않는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입니다.

  • 작성자 13.01.13 08:39

    십이처를 의지하지 않는 재생연결식이 무슨 뜻인지요,,,십이처를 의지하지 않는다 함은 십이처와 관계없는, 즉 십이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라는 뜻인지요?

  • 작성자 13.01.16 19:22

    연기하고는 다르게 보는 데 확실치는 않습니다.()그리고 어째서 십이처를 의지하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 작성자 13.01.13 08:48

    어느 시점에서 윤회와 관계가 없는지, 그걸 이론적으로 분명히 짚고 싶으신건가요?()

  • 13.01.13 12:21

    식이란 발생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난해한 것이 식을 정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식은 명색을 아는 그 자체가 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아는 것이 아닌 그냥 앎일 뿐입니다. 그냥 '앎', 그냥 앎이 식입니다.
    범부중생은 '자아'가 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업보는 있지만 작자(주체, 주어)는 없다 입니다.
    상좌불교는 식을 알아챔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발생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일정한 패턴을 갖고 일어납니다.
    색과 함께 일어나지만 색으로 끝나질 않고 명이라는 보이질 않는 또 다른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명색인데, 명색은 식이 의지하는 주처입니다.

  • 작성자 13.01.16 19:23

    한 생각이 식이라는 것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너무하다면 너무하고, 그러나 고도의 압축된 무엇이 있다고 봅니다.

  • 작성자 13.01.16 19:23

    마음은 어디까지, 발생일까요? ()

  • 작성자 13.02.13 08:44

    식이 의지하는 주처가 명색이라는 것은 범부의 경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도 범부입니다.^^)()
    뭔가 미진한 부분이 느껴집니다.주처,,,그렇다면 식의 비중은 어느정도일까요,,,()

  • 13.01.13 12:54

    여기 컴퓨터가 있지만 사실 이 컴퓨터는 명색이 아닙니다. 이 컴퓨터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명색입니다.
    드러남은 마음을 말합니다. 이 드러남을 보고 명색이라 하고 명색을 보면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윤회에서는 죽음이란 없다는 말이 됩니다.영원히 이어지는 오온, 명색의 현상만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전생 현생 내생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누구의 生일때만이 구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회에서는 죽음이 없기에 눈 한번 깜빡이고 나면 그 자체가 윤회일 수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재생연결식이라는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인위적으로 윤회를 이론구성한 것이란 느낌이거든요..

  • 작성자 13.01.15 05:14

    우선 무엇부터 말해야할까요? 영원히 이어지는 오온, 명색의 현상은 아니라고봅니다. 그것이 윤회 아닐까요? 그래서 무념을 말했겠지요. 무념의 연속!()이 중요,,,잠잘 때도 꿈이 없고,,, 몽중일여 등등. 한 생각 일어나면,생이고 한 생각 일어나면, 사라고 하는 법어가,,,제가 단정적으로 얘기해야 말이 되겠지만,그럴 수련이 부족하네요,,,그리고, 사성제 고집멸도는 받아들이십니까? 고통이라는 대전제하에 명색을 씨름하는 것 아닌가요? 컴퓨터와 명색은 어떤점이 ,,,(다를까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주체는 누구인가요? 컴퓨터를 누가 바라보는지요? 내가 바라봅니다. 내가 바라보지 않으면, 컴퓨터가 문제가 될게 없다고 봅니다.()

  • 작성자 13.01.15 05:30

    컴퓨터와 명색의 관계에서, 컴퓨터가 컴퓨터일 수도 있지만, 버터가 컴퓨터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컴퓨터를 보고, 버터라고 부른다면, 컴퓨터는 버터가 되고 그래도 내내 버터든 컴퓨터든 그 물체를 지칭하겠지요.뭔가 그런 점을 말하고 싶네요. 여기서 컴퓨터다 버터다 하는 것은 이름이기도 하고 실체이기도 하지요.그러니까 이름과 실체가 동일하다는 전제하에서 컴퓨터는 컴퓨터가 되겠지요,,,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저도,,,^^

  • 작성자 13.01.15 05:26

    이런 작업을 밝히는 것이 아시다시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뭔가 밝히고 싶은 욕구(?)는 꽉차있지만요,,,어찌보면(?) 실력이기도 하겠지요,. 철학과 선정력과 표현력이 망라되어야하는,,작업!!
    고통의 주체가 있을 때가 시작이고, 도대체 무엇을 고통스러워 하는가에서, 명색이다. 수상행식이다가 나오는 것 같아요.우리가 타인이 있다해도, 타인을 느끼는 것이지요. 타인의 마음이 그렇게 분명히 잡히는 것은 아니지요. 결국 명색이고 수상행식이고 그것도 아니면, 공감, 공감력,,, 상대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타인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을 모른다면, 타인은 나에게 점점 물체로,,,여기서 명색과 타인은

  • 작성자 13.01.16 19:15

    어떤 관계일까요,,, 저도 더 알아봐야겠습니다()()제가 생각해보니, 명색과 수상행식이라고 (부처님이) 하셨다면, 그대로 그뿐이겠다 싶습니다. 그러니까 타인도 그렇게 되겠다 싶습니다.()

  • 작성자 13.01.15 05:10

    여기서 주체가 아我냐 무아냐 진아냐 하면은? 흔히 주장하는 아 즉 나는 없다. 라고 하는데, (답은 나와 있는데)동의 하십니까?저는 큰 줄거리 이론에는 동의 합니다. ()부처님이 생노병사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하셨는데요,,,정글의 왕님은 생노병사가 문제가 되십니까? 나무아미타불

  • 13.01.15 08:27

    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절거릴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거지요.
    그저 법을 의지해 보는 것 만큼만 볼 뿐입니다.
    촉이 원래 삼사화합인데 소위 일체라는 십이처와 식이 화합하면 촉이라 합니다.
    촉은 존재를 말하거든요. 뭔가 실체들이 서로 접촉하는 것을 말하죠. 단 육식과 화합할 때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화엄의ㅡ일체유심조 사상입니다. 대단한 사상입니다. 불교의 정수입니다.
    세간에서는 명색은 존재인 대상을 지칭하지만 불교집안에선 그대로 하나의 의식의 집기(集起)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식연 명색입니다. 상좌부는 삼세설의 근거로 식의 명색에 대한 입태로 이해하지만,,

  • 작성자 13.01.16 19:19

    여기서 촉은 존재다 했을 때 촉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있기도 없기도 한겁니까? 그게 여러 쌍이 있더군요,,, 저는 왜 그렇게 갈래가 많은가 첨에 의아했습니다^^나무아미타불

  • 작성자 13.01.16 19:12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제가),,, 식의 제로지대가 가능하다고 봅니까? 가능하다면 어떤 양태일까요? 그리고 제로지대는 필요할까요?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 13.01.16 19:31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 것, 저는 인정하고, 마음으로는 조금 알고 있지요,,,그런 방향에서 참선이나 염불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을 떼어 놓고서는, 어떤 식으로 얘기가 전개될까요? 고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얘기만, 무성하게 되는 것 아닌지요,,,그렇게 되면, 아니될 것 같습니다. 고통을 전제하지 않은 모든 교리나 토론은 허황되다고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 13.01.16 21:25

    우리의 식은 한 번에 한가지만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저러한 잡다한 생각(의식의 일종)을 하다가
    갑자기 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잡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주의는 온통 깨진 그릇 소리(이식)에
    집중이 되며 '무슨 일이 일어나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은 이처럼 순간 변해버립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생각들이 점령을 해버리곤 하지요.
    만약 잘못된 내적 과정들(산냐, 想)과 그로 인한 잘못된 의도로 신구의 3업의 노예가 된다면 마음은 늘
    괴로움을 면하기 힘들 것입니다.
    본인은 자신의 괴로움이 무엇이지를 잘 압니다. 그 원인이 무명과 갈애지만, 먼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고요,,

  • 작성자 13.01.17 12:04

    저는 관찰보다 그 갈애에 대해서 탐구하는 편입니다.그리고 갈애를 무엇 무엇 하고 싶다로 파악합니다.그리고 속세와 출가를 구분하였고요. 속세에서의 상식을 주장하고 요구했지요.그런 모든 구분이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소통에서 무용지물이었지요. 할 수 없이(?) 제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래야 좀 더 실제적으로 얘기가 갈 것 같아서요!!^^()

  • 작성자 13.02.13 08:40

    명색과 번뇌와 소통과 불일치!!의 연관관계,,, ()
    무엇에 대한 갈애일까요?,,,()()
    고통의 근원 ㅡ갈애 ㅡ집착()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 13.02.13 08:47

    보통(인간) 식이 전부이고 주처가 명색이고 그것은 외부에 의존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해보자는 것입니다!!)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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