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탈해왕릉(慶州脫解王陵)
탈해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지 면적은 3만 7,993㎡이다. 위치는 경주시의 북쪽을 건너 약 1㎞ 가량 떨어진 곳으로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의 남록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왕릉은 20세기 초에 석씨 일족이 석탈해의 능으로 비정함으로써 현재까지 탈해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탈해왕의 성은 석씨(昔氏), 이름은 탈해(脫解, 혹은 吐解)라고도 하며, 제3대 유리왕(유리이사금)의 유언으로 왕위에 올라 62세에 왕이 되었다.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서기 57년에 왕이 되어 80년에 승하하였으며 죽은 뒤 경주에 있는 양정(壤井)의 언덕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왕릉의 외부 모습은 원형봉토분이다. 밑지름은 14.3m이고, 높이는 4.5m인데, 비교적 작은 형태의 무덤에 속한다. 그리고 왕릉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과 표식물이 없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1974년 12월 31일 도굴당했는데, 그 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었음이 밝혀졌다. 능 앞에 마련된 잘 다듬은 돌은 후대에 설치한 혼유석(魂遊石)이다.
■경주표암(慶州瓢巖)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41,168㎡. 동쪽으로는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은 남산, 서쪽은 선도산(仙桃山), 북쪽은 소금강산(143m)의 전형적인 분지형태로 이 산은 본래 북악으로 불리던 명산이다.
신라의 4영산중의 하나이며, 산의 정상에는 이차돈(異次頓)과 관계있는 백률사(伯栗寺)가 있으며, 서쪽에는 굴불사지석불상이 있다.
이 산의 동쪽과 서쪽에는 석탈해왕릉과 고분군의 동천동지구, 소금강산의 서북과 용강동 평지에도 신라시대의 석실고분군이 있는 용강동지구로 개발계획이 있다. ‘박바위’ ‘밝은바위’를 뜻한다.
이곳은 신라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밑돌부라는 부명이 붙여진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 알평공(謁平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서기전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서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건국을 의결했으며, 그 뒤 서기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표암은 경주이씨의 혈맥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로서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의 발상을 보인 상서로운 곳이다. 1806년(순조 6)에 유허비가 세워졌고 1925년에는 표암재가 건립된 뒤 매년 3월이면 중정에 향사를 하고 있다.
♧경주에서 포항으로 오는 국도변(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탈해왕릉은 그동안 수십번, 아니 어쩌면 수백번을 지나 다니며 봐 왔던
곳으로 저곳은 어떤 문화재 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여태 한번도 둘러보지 않은 미답지였다.
오늘 불국사에 겹벚꽃이 피었다고 아내가 같이 가보자고 해서 동행 했었는데 아직 완전 개화가 되질 않아 사진 몇장만 찍고 돌아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에 이곳 탈해왕릉과 표암을 둘러보면서 담아본 풍경이다.
■불국사 겹벚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