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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무예 여행 스크랩 고려왕검 연구소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131 13.08.31 11: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왕검연구소?

문경시 농암면의 한 폐교에는 아이들이 노니는 소리 대신 뚱~땅~ 쇠를 벼려내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51)씨. 잘 정돈된 운동장과 작업장에서 주인의 맑음이 투영된다. 한때는 교실이었을 한 켠에 마련된 공방에는 화덕, 풀무, 망치 등이 자리하고, 다른 한 켠에는 그동안의 작품이 잘 정돈되어 있다. 많은 이들에게 도검을 가까이 느끼게 해 주려는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큰 형님이 전주이씨 제관이셨어요. 어느 날 우연히 덕수궁에서 제사 지내는 날 따라갔다가 왕검을 보게 됐죠. 그때부터 그걸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 몸살을 했어요.”

열 살을 갓 넘긴 즈음, 그 날 이후 그는 집안 곳곳에 있는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모아 칼을 만들었다. 시골 여느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칼이나 총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남달랐다. 그러나 사실 자신조차도 여기까지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그는 조선조 양녕대군 18대손으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학업을 접고 도검에 매달렸다. 공부가 싫었던 탓도 있지만 어린 시절 한 때 열정이나 놀이가 아니라 도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에서 시작된 선택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대장간이며, 청동·함석 등을 다루는 공장, 장신구를 만드는 금속공예를 하는 공방, 은장도 공방, 주물공장 등을 전전하며 칼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하나씩 습득해 나갔다.

 

“칼은 종합예술품이죠. 하나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금속공예는 물론이고, 칼집을 만들고 장식하는 목공예, 가죽을 이용하는 가죽공예, 손잡이에 술을 다는 매듭공예까지 다 들어가거든요.”

칼 만드는 기법은 하나의 기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사사받거나 전수받기 힘들다. 함석이나 주물공장에서의 금속공예, 은장도 공방에서의 조각기법, 대장간에서의 칼날벼리는 법 등 공방을 옮겨 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운 그가 자신의 칼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꼬박 10년 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특별한 스승이 없었던 그라고 하지만 ‘어깨 너머로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가르침’ 이었다고.

인천에 처음으로 가진 작업장 ‘태극공방’

86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공방을 갖게 된다. 그러나 12cm가 넘는 칼은 모두 도검제조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어려운 제조허가를 얻어내지 못해 칼의 부분제작들만 해 오다가 91년 정식 허가를 받고 본격적인 도검 제작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도검이란 베기에 편리한 날이 한쪽에만 있는 도(刀)와 찌르기에 편리한 양날이 있는 검(劍)을 합한 말로, 이상선씨의 공방에서는 두 가지 모두를 제작해 냈다.

 

“일본도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검으로 제작되는 것이라면, 한국의 전통 검은 철저한 방어용이었어요. 생김새만 봐도 알 수 있죠. 우리의 전통 검은 나라를 지키고 사람을 살리는 검이에요. 중국의 화려한 검과, 일본의 세련된 검이 있지만, 정신에 있어서는 우리 것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내가 죽어도 영원히 남게 되는 것.’ 그는 작품 만들기에 열중했다. 임금의 사인검, 이순신 장군의 지휘도, 환두대도 등 많은 것들을 만들었지만, 지난 99년 경기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게 된 작품들을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는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해 낸 27여 가지의 철퇴, 창, 검 등은 궁중유물들을 찾아보고, 직접 고전 자료를 수집해 가장 정성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칼에 대한 문헌이 크게 부족해 많이 힘들었다고. 제작기간만 3년여였다고 하니 그의 혼이 얼마나 많이 깃들었을지 조금 알 것 같다.

도검 복원작업을 거치며 그가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것은, 우리의 도검과 검법, 도법의 문화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전해져오는 일본의 칼 역사란 것은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서 강인한 그들의 정신력을 일구는데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도검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5000년 역사. 외세의 침략 속에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칼의 역사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조상들의 빛나는 칼의 역사는 외세침략에 의해 사라져가고 남은 것이라곤 병사 훈련용 책 몇 권이 남아 있을 뿐 우리들의 유구한 칼의 역사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음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임금의 사인검(四寅劍)

많은 혼을 기울인 박물관 재현 작품이 끝나자 그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찾아낸 곳이 이곳 문경 농암. 부인과 함께 직접 농사도 짓고, 원하는 도검도 제작하며 마음이 여유로워져 좋단다. 인천에 처음가진 태극공방에서 조선왕검으로, 다시 「고려왕검연구소」로 태어난 이상선씨의 공간. 대한, 전통, 충무, 세현왕검 등 전국에 여러 이름을 가진 공방들이 있지만, 전통검에 대한 보다 올바른 재현을 위해 지은 이름이란다. 이제 이곳에서 그는 임금의 검, 사인검(四寅劍) 제작에 다시 몰두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여러 검이 있어 왔지만, 왕의 칼인 사인검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신성함을 지닌 상징물 이지요.”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힘쓰는 사인검(四寅劍)제작. 그는 사인검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다.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寅이 네 번 겹쳐지는 때, 즉 호랑이의 해(寅年)에 호랑이의 달(寅月), 호랑이날(寅日) 호랑이 시(寅時)에 만들어지는, 60년 만에 한 번 제작되는 귀한 검이다. 이 검은 한 면에는 각종 별자리 모양, 다른 면에는 칠성문(七星文)이라 불리는 27자의 한자가 상감기법으로 새겨진다. 외적의 침입과 재앙 뿐 아니라 내부의 악도 베어내겠다는 뜻이 간직되어 있다. 오는 2010년이 그런 해 라고 하니, 평생에 한 번 오는 이 시간을 설렘 속에 기다리고 있단다.
세련되고 가벼운 요즘의 검에 비해 그가 만드는 검은 둔탁하며 무겁다. 요즘의 도는 일본의 것을 모방하여 많이 나오지만, 이상선씨가 만드는 검은 둔탁한 된장 맛이 나는 우리의 것 그대로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진짜 도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상선씨가 제작하는 도검의 진면목을 알 수 있으리라.

 

“국가와 사회에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전통 검에 미쳐 전국을 돌아다니던 세월동안 수많은 오해와 서러움을 당했지만 소명이라고 생각했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한 길만 걸었어요. 비록 작은 폐교지만 이곳을 제대로 된 전통 검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이 마지막 소망입니다”

영혼의 무게

영웅이 가진 무기 중에는 신비한 마력은 없어도 그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들이 있다. 신과 고대의 영웅들이 활약하던 전설의 시대가 지나가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무기를 만드는 장인의 기술은 여전히 신성시되었다. 이러한 장인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바로 명검이다.
빼어난 경지에 달한 명인의 기술은 마침내 신의 영역에 닿는다. 그리고 그 명검의 이름은 그 위력에 실린 공포와 함께 널리 세상에 알려진다. 실제로 사용되었던 검  보다도, 의미와 상징을 가진 검이 더욱 많았으니 도검은 그 상징만으로 큰 의미가 부여됨을 알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둔탁하고 무거운 도검의 무게는, 그의 영혼의 무게다. 영혼이 실린 그의 도검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리라. 명검이란 검을 쥐는 주인의 마음과, 검에 담긴 영혼이 함께 힘을 발휘하는 것. 자신의 몸처럼 검을 아꼈던 옛 무사들의 마음처럼, 잊혀져가는 도검의 맥을 잇는 그의 영혼을, 그가 만들어 낸 도검의 정신을 아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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