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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295
양반전
'양반'은 사족(士族)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질면서도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그 집에 몸소 나아가서 경의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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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살림이 가난해서, 해마다 관가에서 환자를 타 먹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쌓이고 보니, 천 석이나 되었다. 관찰사가 여러 고들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관청 쌀의 출납을 검열하고는 매우 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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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을 이렇게 축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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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내려 그 양반을 가두게 하였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길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겼다. 차마 가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두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양반은 밤낮으로 훌쩍거리며 울었지만, 아무런 대책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렇게 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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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한평생 글읽기를 좋아했지만, 관가의 환곡을 갚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구려. 쯧쯧, 양반 양반 하더니 한푼 어치도 못 되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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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의 부자가 가족들과 서로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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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언제나 높고 영광스럽건만, 우리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언제나 낮고 천하거든. 감히 말을 탈수도 없고, 양반만 보면 저절로 기가 죽어서 굽실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뜰 밑에서 절해야 하지.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면서, 우리네는 줄창 이렇게 창피를 당해야 하거든. 마침 저 양반이 가난해서 환자를 갚지 못해 몹시 곤란해질 모양이야. 참으로 그 양반이라는 자리도 지닐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 내가 그것을 사서 가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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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곧 양반의 집을 찾아가서 그 환자를 대신 갚겠다고 청하였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그래서 부자가 곧 그 곡식을 관가에 보내어 갚았다. 군수는 매우 놀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직접 양반에게 찾아가 위로하면서, 환자를 갚은 사정을 물으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은 벙거지를 쓰고 베 잠방이를 입은 채로 길바닥에 엎드려, '쇤네'라고 칭하면서 감히 올려다보지를 못하였다.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그를 부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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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어찌 이다지도 스스로를 욕되게 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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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양반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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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하옵니다. 쇤네가 감히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쇤네는 벌써 스스로 양반을 팔아 환자를 갚았으니, 마을의 부자가 바로 양반이옵니다. 쇤네가 어찌 다시금 뻔뻔스럽게 옛날처럼 양반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 높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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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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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답구려 부자시여. 양반답구려 부자시여. 부유하면서도 아끼지 않으니 정의롭고, 남의 어려움을 돌봐 주니 어질도다. 낮은 신분을 싫어하고 높은 자리를 그리워하니 슬기롭도다. 이야말로 참된 양반이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소송이 일어날 꼬투리가 되리다. 내가 그들과 더불어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증인을 세운 뒤에, 증서를 만들어 주리다. 군수인 내 자신이 마땅히 서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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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가 곧 동헌으로 돌아와서 온 고들 사족과, 농민, 공장(工匠), 장사치까지 모두들 불러 뜰에 모았다.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쪽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세운 뒤에, 바로 증서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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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乾隆) 10년 9월 몇 일에 아래와 같이 문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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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을 팔아서 관가의 곡식을 갚은 일이 생겼는데, 그 곡식은 천 섬이나 된다. 이 양반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통틀어 '양반'이라고 한다.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 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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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정신을 가다듬어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동래박의"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굶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디며, 입에서 가난하다는 말을 내지 않아야 한다. 아래 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세수 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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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종들이 잘못하더라도 족쳐 죽이지 말해야 한다.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하면서 종을 불러다 재(齋) 들이지 말아야 한다.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돈치기 놀이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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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부자가 한 가지라도 어기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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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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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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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치자, 부자가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있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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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 겨우 요것뿐이란 말씀이오?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것뿐이라면, 너무 억울하게 곡식만 빼앗긴 기지유.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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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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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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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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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남인(南人)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해쓱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되는 법니다. 방안에서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을 쌓아 학을 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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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렇지 못해서)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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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그 증서 만들기를 중지시키고, 혀를 빼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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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두시오. 제발 그만 두시오. 참으로 맹랑합니다 그려.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는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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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머리채를 흔들면서 달아났다. 그 뒤부터는 죽을 때까지 '양반'이란 소리를 입네 담지도 않았다.
허생전
허생은 묵적골(墨積滑)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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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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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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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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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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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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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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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장사는 못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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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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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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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장인바치 일도 못한다,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못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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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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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내가 당초 글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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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획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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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雲從街)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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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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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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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나 하니, 만 냥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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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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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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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당장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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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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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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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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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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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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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安城)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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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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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칼, 호미, 포목 따위를 가지고 제주도(濟州島)에 건너가서 말총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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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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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망건 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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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늙은 사공을 만나 말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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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밖에 혹시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없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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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지요. 언젠가 풍파를 만나 서쪽으로 줄곧 사흘 동안을 흘러가서 어떤 빈 섬에 닿았습지요. 아마 사문(沙門)과 장기(長岐)의 중간쯤 될 겁니다. 꽃과 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여 과일 열매가 절로 익어 있고, 짐승들이 떼지어 놀며, 물고기들이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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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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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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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니, 사공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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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람을 타고 동남쪽으로 가서 그 섬에 이르렀다. 허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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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천 리도 못 되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으니 단지 부가옹(富家翁)은 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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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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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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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 있으면 사람이 적고 모인다네. 덕이 없을까 두렵지,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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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변산(邊山)에 수천의 군도(群島)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서 군가를 징발하여 수색을 벌였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군도들도 감히 나가 활동을 못해서 배고프고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군도의 산채를 찾아가서 우두머리를 달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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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이 천 냥을 빼앗아 와서 나누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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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인당 한 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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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내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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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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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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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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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잇고 처자식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괴롭게 도둑이 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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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다면, 왜 아내를 얻고, 집을 짓고, 소를 사서 논밭을 갈고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도둑놈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집에는 부부의 낙(樂)이 있을 것이죠, 돌아다녀도 잡힐까 걱정을 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을 누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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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돈이 없어 못 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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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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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흔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바다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돈을 실은 배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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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군도와 언약하고 내려가자, 군도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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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군도들이 바닷가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허생이 삼십만 냥의 돈을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大警)해서 허생 앞에 줄지어 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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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장군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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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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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군도들이 다투어 돈을 짊어졌으나, 한 사람이 백 냥 이상을 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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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힘이 한껏 백냥도 못 지면서 무슨 도둑질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양민(良民)이 되려고 해도, 이름이 도둑의 장부에 올랐으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사람이 백 냥씩 가지고 가서 여자 하나, 소 한 필을 거느리고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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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의 말에 군도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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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몸소 이천 명이 1년 먹을 양식을 준비라고 기다렸다. 군도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배에 싣고 그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도둑을 몽땅 쓸어 가서 나라 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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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를 엮어 울을 만들었다. 땅기운이 온전하기 때문에 백곡이 잘 자라서, 한 해난 세 해만큼 걸러 짓지 않아도 한 줄기에 아홉 이삭이 달렸다. 3년 동안의 양식을 비축해 두고, 나머지를 모두 배에 싣고 장기도로 가져가서 팔았다. 장기라는 곳은 삼십만여 호나 되는 일본(日本)의 속주(屬州)이다. 그 지방이 한참 흉년이 들어서 구휼하고 은 백만 냥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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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탄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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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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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이에 남녀 이천 명을 모아 놓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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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부(富)하게 한 연후에 따로 문자를 만들고 의관(衣冠)을 새로 제정하려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이 좁고 덕이 엷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이리들을 낳거들랑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이 먼저 먹도록 양보케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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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배들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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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으면 오는 이도 없으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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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돈 오십만 냥을 바다 가운데 던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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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마르면 주워 갈 사람이 있겠지. 백만 냥은 우리 나라에도 용납할 곳이 없거늘, 하물며 이런 작은 섬에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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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리고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함께 배에 태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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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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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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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은이 십만 냥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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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변씨에게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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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가서 변씨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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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보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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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자, 변씨는 놀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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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만 냥을 실패보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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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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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만 냥이 어찌 도(道)를 살지게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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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십만 냥을 변씨에게 내넣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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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읽기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만 냥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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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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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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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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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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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남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초가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우물 터에서 빨래하는 것을 보고 변시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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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조그만 초가가 누구의 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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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생원 댁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제사를 지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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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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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 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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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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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했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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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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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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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변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였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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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서,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무릇, 천 냥은 적은 돈이라 한 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열로 쪼개면 백 냥이 열이라, 또한 열 가지 물건을 살 수 있겠지요. 단위가 작으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물건에서 실패를 보더라도 다른 아홉가지의 물건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장사치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만 냥을 가지면 족히 한 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레면 수레 전부, 배면 배를 전부, 한 고을이면 한 고을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훑어 내듯 할 수 있지요.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면, 한 가지 물종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될 것이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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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내가 선뜻 만 냥을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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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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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만 냥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백만 냥을 빌린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큰 부자가 되게하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만 냥을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104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105
"방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106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졸수재 조성기 같은 분은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건만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반계 거사 유형원 같은 분은 군량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적히 구왕의 머리를 살 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107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108
변씨는 본래 이완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이나 여염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109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110
하고 묻는 것이었다.
111
"소인이 그분과 상조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112
"그인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113
밤에 이 대장은 구종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114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115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116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117
"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118
"대장이오."
119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을 받는 신하로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 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
120
이 대장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121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122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을 모른다."
123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대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124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125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126
"어렵습니다." 했다.
127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128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129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의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깍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 중 선비는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또 서민은 멀리 강남(江南)에 건너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 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130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131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 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132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133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니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寧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134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135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예덕 선생전(穢德先生傳)
2
선귤자의 벗 가운데 '예덕선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았는데,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똥을 져 나르는 것으로 직업을 삼았다. 늙은 일꾼을 '행수(行首)'라고 불렀는데, 그의 성이 엄(嚴)이었다. 어느 날 자목이라는 제자가 선귤자에게 물었다.
3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를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同氣) 아닌 아우다' 하였으니, 벗이란 게 이처럼 소중하지 않습니까? 온 나라 사대부들 가운데 선생님의 뒤를 따라 하풍(下風)에 놀기를 원하는 자가 많건마는,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향수'라는 자는 시골의 천한 늙은이로 일꾼같이 하류 계층에 처하여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자꾸 그의 덕을 칭찬하면서 '선생'으로 부르고, 마치 머지 않아 벗으로 사귀고자 청하시려는 듯합니다. 제자인 저로서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오니, 이제 선생님 문하를 떠나려 합니다."
4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5
"가만 있거라. 내가 네게 벗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리라. 속담에도 있지 않더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춤 못 춘다.'는 격으로, 사람마다 저 혼자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서 남들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딱하게도 그의 허물을 찾으려고 애쓴단 말이야. 그러나 부질없이 그를 칭찬하기만 하면 아첨에 가깝기 때문에 멋이 없고, 오로지 그를 헐뜯기만 한다면 마치 잘못된 점만 꼬집어 내는 듯해서 비정스럽거든.
6
그래서 그의 아름답지 못한 점들부터 널리 들어가서 그 가장자리에나 어정거리되, 깊이 파고들진 않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그를 크게 책망하더라도 그는 노여워하진 않게 되거든.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자기가 가장 꺼리는 곳을 꼬집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그가 좋아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 마치 어떤 물건을 점쳐서 알아낸 듯 마음속에서 느낌이 오는데,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되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에도 방법이 있거든. 잔등을 어루만지되 겨드랑이 까진 이르지 말 것이며, 가슴팍을 만지더라도 목덜미 까진 침범하지 말아야 돼. 그래서 중요치 않게 이야기가 그친다면, 그 모든 아름다움은 저절로 내게 돌아오는 법이지. 그도 기뻐하면서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고 말할 거야. 벗이란 이렇게 사귀면 되는 거지."
7
이 말을 들은 자목이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면서 말하였다.
8
"선생님께서는 제게 시정 잡배나 머슴 놈들의 행세를 가르치시는군요."
9
선귤자가 말하였다.
10
"그렇다면 자네는 이런 것은 부끄러워하고, 저런 것은 부끄러워하지는 않는군. 시정 잡배의 사귐은 이익으로써 하고, 얼굴의 사귐은 아첨으로 하는 법이거든.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사일지라도 세 번만 거듭 부탁하면 틈이 벌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오래 묵은 원한이 있더라도 세 번만 거듭 선물하면 친절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지. 그러기에 이익으로서 사귀는 것은 계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써 사귀는 것도 오래 가지는 않는 법이야. 대체로 커다란 사귐은 얼굴빛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벗은 친절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 오로지 마음으로 사귀면 덕으로 벗할지니, 이게 바로 '도의(道義)의 사귐'이야. 그러면 위로는 천 년 전의 사람을 벗하더라도 멀지 않을 것이며, 만 리 밖의 떨어져 있더라도 소외되지 않게 되지.
11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이는 일찍이 나에게 지면(知面)을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칭찬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네. 그의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 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수룩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 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 개, 거위 따위의 똥이나, 입회령( :돼지똥), 좌반룡(左攀龍:사람똥), 완월사(玩月砂:토끼똥), 백정향(白丁香:참새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지. 그래도 그의 청렴한 인격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뿐더러, 혼자 그 이익을 차지하면서도 정의에 해로움이 없었으며, 아무리 탐내어 많이 얻기를 힘쓴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더러 '사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거든.
12
이따금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가래를 휘두르는데, 경쇠처럼 굽은 그 허리가 마치 새 부리처럼 생겼더군. 비록 찬란한 문장이라도 그의 뜻에는 맞지 않고, 아름다운 종이나 북소리도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어. 부귀란 것은 사람마다 모두 원하는 것이지만, 그리워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남들이 자기를 칭찬해 준다고 해서 더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자기를 헐뜯는다고 해서 더 욕되게 여기지도 않는 거지.
13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 연희궁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인(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上)의 상을 골라 쓰되,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기름지고 살지고 평평하고 풍요러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거야. 그렇지만 엄 향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한 그릇 뿐이지. 남들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목구멍에 내려가면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른데, 왜 맛있는 것만 가리겠소?'하면서 사양했다네. 또 남들이 새 옷을 입으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 옷을 입으면 몸에 익숙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 못할 게 아니오?'하면서 사양했다네.
14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었지.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리고, 다시 돌아와 옛 옷을 찾아 입더군.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향수야 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옛 글(논어)에 이르기를 '본래 부귀를 타고 난 사람은 부귀를 행하고, 빈천을 타고난 사람은 빈천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네. 이 말에서 '본래'란 하늘이 정해 준 분수를 뜻하는 거지. 또 {시경}에 이르기를
15
아침부터 밤까지 관청에서 일하시니
16
타고난 운명이 나와는 다르다네
17
하였으니, '운명'이란 것도 분수를 말한다네. 하늘이 만물을 낳으실 때에 제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었으니, 운명은 본래 타고난 것인데 그 누구를 원망하랴. 새우젓을 먹을 때에는 달걀이 생각나고, 굵은 갈옷을 입으면 가는 모시를 부러워하는 법일세. 천하가 이래서 어지러워지는 법이니, 농민이 땅을 빼앗기면 논밭이 황폐해지게 마련이지. (진시황의 학정에 반대하고 일어선) 진승, 오광, 항적의 무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의 뜻을 호미나 고무래 따위에 두고 어찌 편안히 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짊어진 사람이 수레에 탄다면 도둑에게 빼앗길 것이다'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라네. 그러므로 정의가 아니라면 비록 만종(萬鍾)의 녹이라도 조촐하지 않을 것이요, 힘들이지 않고 재산을 모은 사람은 소봉(素封:부자)과 어깨를 겨눌 만큼 부유해지더라도 그의 이름을 더럽게 여기는 이가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사람이 죽을 때에 구슬과 옥을 입에다 넣어 주는 것은 그의 깨끗함을 밝히는 거라네.
18
엄 행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 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抗)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먹다가 차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차려졌을 때에는 반드시 나보다도 못한 사람을 생각했다네. 그런 엄 행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견디지 못할 게 없겠지.
19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 행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선비의 얼굴에 가난한 기색이 나타나면 부끄러운 일이거든. 또 뜻을 얻어서 영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교만이 온 몸에 흐른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 그들을 엄 행수에게 견주어 본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드물 거야. 그러니 내가 엄 행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고 호를 지어 바쳤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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