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한뿌리였다가 후세에 영산과 영월로 본관이 나뉜 것입니다.
영산(지금의 창녕)에 시조인 신경(辛鏡)이 정착하면서 신씨의 시조가 되었고
후에 자손들이 서로 분관하면서 영산신씨와 영월신씨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즉 신경의 8대손 신지화의 아들대(代)에서 상장군파(上將軍派), 덕재공파(德齋公派), 초당공파(草堂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로 갈립니다.
이중
상장군파, 덕재공파, 초당공파는 영산신씨,
부원군파, 판서공파는 영월신씨입니다.
신(辛)씨의 조상과 유래
신씨의 조상은 중국 용서성(朧西省) 출신인 신시랑(辛侍郞)이 당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742∼755)에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것으로 전하나 확증할 자료는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씨의 본관을 60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영산(靈山)과 영월(寧越)을 제외한 본관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 인종 때의 신경(辛鏡)으로,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유현(大庾縣)과
산세가 비슷한 창녕(昌寧)의 영취산(靈鷲山)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신씨의 시초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에서 영월 신씨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영산, 영월 신씨동보'나 '영월신씨세보'에 의하면, 그 시조는 고려 인종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신경으로, 고려 고종때 송나라 과거에 급제,
한림학사, 예부원외랑으로,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원종때 귀국하여 추밀원사, 보문각대제학을 지낸
제 8세 신지화의 아들 4형제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영산이라는 지명에 대해
고대
신라 때는 서화현(西火縣).
757년(신라 경덕왕 16), 상약현(尙藥縣)으로 개칭.
고려
940년(태조 23), 영산으로 바꿈.
조선
1631년(인조 9), 창녕현을 합침.
1637년(인조 15), 창녕현을 다시 분리.
근대
1895년(고종 32), 경상남도 영산군이 됨.
1914년, 창녕군으로 편입됨.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지역.
본관은 영산(靈山) ·영월(寧越)의 2본이며, 양쪽이 같은 연원의 분파로서 영산신씨가 큰 집으로 알려져 있다.
도시조는 고려 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鏡)이며,
그의 선대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현종(玄宗) 천보연간, 즉 신라 경덕왕 때 신라에 귀화하였는데,
그 뒤 경이 다시 와서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씨의 세계(世系)는 경의 8대손에서 상장군파(上將軍派) ·덕재공파(德齋公派) ·초당공파(草堂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의 5파로 갈리는데, 앞의 3파는 영산신씨, 나머지 2파는 영월신씨이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만 5753가구에 인구 8만 9429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45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수 13만 7839명, 전국 가구 구성비 0.3%로 274성 중 제47위였다.
- 이의제기 내용추가
- 2005.01.31 12:01 추가
- 굉장히 자세하게 이의제기를 하시고 설명을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들어온 이의제기 내용입니다.
신(辛)씨의 본관에 관한내용 해설 신시의 본관의 설명중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는 - 경자조(鏡子祖)께서 중국에 살든곳의 산이 경남 창영군 영산면에 있는 영취산(靈鷲山)과 비슷하여
- 영산에 자리잡고 살면서 본관을 영산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나
- 이는 근래에 나온말로써 근거나 고증(考證)이 되지않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 지금부터 약 200여년전에 발행된 각종 신씨 족보의 기록을 보면 경자조(辛씨 시조)께서
- 고려시대에 고급관리인 시중(侍中) 으로서 지금의 개성에서 살으셨고
- 사후묘(死後墓)가 개성부 서화담리(開城府 西花潭里)에 모셔져 있다고 영산 영월 각종족보에
- 기록되여있고 당시 교통이 극히 불편한 먼곳인
- 경상도 영산까지 개성에서 내려가셔서 살으셨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수 없읍니다.
- 辛씨가 영산에 거주하게 된것은 鏡시조의 5世 4형제중 막내인 고려때 상장군 벼슬을 하신
- 주계(周繼)선조의 후손들이 영산에서 살게되어 영산을 관향지로 삼게된것입니다.
- 또한 경(鏡)자 시조의 증손이신 몽삼(夢森)祖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 되었는데
- 이 지석에 영주(寧州)신공 몽삼지묘 라고 기록되여 있는것으로 보아
- 원래의 辛씨의 본관은 영주(寧州)임이 확인 돼여 영산과영월 양본관을 영주로 통합하자는
-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읍니다.
- (1979년족보 편찬시부터 2002년 수보시) 또 辛씨의 각종 족보에 신시랑,엄시랑에 관한기록이있고
- (엄씨사당이 영월에 현재 존재함) 신시랑과엄시랑이 신라시대에 중국에서
- 사신(使臣)으로 입국하여 강원도 영월에 살으시면서 본관을 영월로 하였다고 기록하고있고
- 각종 족보 머리에 신라시대의 관직을 가지고 살으셨던 오세 팔공 열록(五世 八公 列錄)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 이분들은 鏡선조(先祖)의 선대(先代)시조들 이십니다.
- 시조 경(鏡)조의 비석에도 본관이 영산이라는 기록은 없으므로 鏡시조 부터의 본관이 영산이라는 내용은 근거가 없읍니다. 또 鏡시조 로부터 四세 몽삼(夢森)조의 비석에는 영주(寧州)로 써 오다가 九세때에
- 영산과영월로 분관 되었음이 영산영월 각종 족보에 기록되어 이를 입증 하고있읍니다.
-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각종 문헌에 통일신라시대의 辛씨들의 활약상으로 보아도
- 신라시대에 辛씨가 중국에서 입국하여 영월에 거주하면서 본관을 영월로 하게된 내력이 있읍니다.
- 그래서 辛씨의 본관은 관향지인 거주지에서 유래되었다고 봅니다.
- 근래에 辛씨시조에 대해 고증(考證)이 제대로 돼지않은채 기록된 성씨보감,
- 관향록등의 내용은 辛씨시조 설명부분이 틀립니다.
- 참고문헌:삼국사기, 삼국유사 ,기타사서(史書) 영산영월신씨 신유대동보,영산영월신씨2002년보첩
- 영월신씨정묘보, 갑인보 ,을해보 ,영산영월신씨문종 공파보, 정미보 ,시조 경(鏡)정의공
- 신도비명 태사(太師)몽삼 영원부원군 신도비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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