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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어머니 레아가 유다를 낳고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하여도 그래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네 번째의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유다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우리 말의 찬송이라는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네 번째의 아들로 태어 났지만 형제들 간에 있어서는 네 번째 답지 않게 형제들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있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창세기 37장에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다가 자기들을 향해 오는 동생 요셉을 보고 무엇이라고들 했습니까?
창37:19-20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이 꾼 꿈에 대한 트라우마가 형제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요셉만 보면 꿈 생각이 나서 미칠 지경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창세기 방금 읽은 말씀은 누가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도착합니다.
형제들이 그를 잡아서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구덩이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앉아서 요셉이 가져온 음식을 먹다가 한 무리의 이스마엘 상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유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창 37:26-27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을 구덩이 속에 있었던 요셉이 들었겠죠.
팔아서 돈 챙기고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요셉을 영원히 보이지 않을 곳으로 옮기려는 형들의 수작이 보입니다.
유다는 그런 일에도 형제들의 대표자처럼 행동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좋은 성격입니까? 그런 성격이 나쁘게 발달 되면 한 없이 나쁘게 발달될 수 있고요.
또한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면 한 없이 좋은 모습으로 변화 될 수 있는 성경이 그런 성경이라 생각합니다.
그 후 유다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을까요?
예 나쁜 모습으로 변화 되었다면 오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없겠죠?
르으벤처럼 시므온과 레위처럼 저주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을텐데.
우리가 읽은 유대의 축복을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시는 분들은 다 장자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유다가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
요셉 사건이 있은 후 흐르는 시간에 따라 유다의 모습은 점점 예수님 닮을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저는 유다의 변화의 동기를 창세기 38장의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창세기 38장은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는 사건과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는 사건 가운데 삽입되어 있는 유다의 행적에 관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또 다르게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유다의 변화를 38장의 사건으로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38장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1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8:1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그 후라는 말씀은 37장에 나오는 요셉을 팔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팔고 난 다음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라는 사람과 가까이 합니다.
정확한 것은 잘 몰라도 표현 상으로 유다가 하나님을 떠난 듯한 모습으로 기록되었고요, 그리고 그곳에서 수아라고 하는 가나안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수아는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라고 하는 아들 3명을 낳고요.
그리고 맏아들 엘이 장성하여 장가를 보냅니다.
그런데 무슨 잘못을 범하였는지 성경에는 자세하게 언급은 없지만 악하므로 그를 죽이신지라라는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을 죄를 지은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성경에는 형이 죽고 후사가 없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를 들어 그 첫 아들을 형의 명의로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비록 형제를 떠난 생활이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 왔던 풍습은 그대로 지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과 결혼을 하고요.
그 둘째 아들도 악한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고요, 그래서 그도 죽이시니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내 아들을 며느리에게 주면 그도 죽을 것을 염려한 유다는 막내가 어리다는 핑계로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유다의 아내 수아가 사망을 합니다,
그리고 양 털을 깍을 때가 되어서 딤나라고 하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딤나는 며느리 다말이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곳이고요.
누가 다말에게 이야기를 해 줍니다. 네 시아버지가 양털을 깍으로 딤나에 왔다고요.
그 소리를 들은 다말의 행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8: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막내가 다 장성하였음에도 막내와 결혼을 시키지 않는 것은 시아버지가 막내를 줄 의향이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당시 그런 풍속이 있다 하여도 자식을 주지 않는다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동침하려 합니까?
다말이 문란한 여인처럼 보이죠? 가치없고 쓸모없는 그런 여인처럼 비취지 않습니까?
가나안 족속들이 다 그러한 족속들입니다.
이후 400년이 흘렀을 때는 그런 성적 문란함 때문에 그 땅이 그들을 토하여 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여인인 이 여인 다말도 그렇게 취급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한번 말씀 드린일이 있죠?
비록 가나안 여인이라 할찌라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시어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알고 있었던 여인으로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집안을 통하여 주어질 것임을 다말은 믿었다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믿음의 여인들이 바라고 있었던 그 소망을 다말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유다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자식 없이 남편이 죽고요.
두 번째 남편도 죽고요, 막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아버지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고 판단한 다말은 이스라엘 집안의 씨를 받아 여인의 후손을 안고 싶은 선한 욕심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욕심은 유다의 할머니 리브가도 가졌었고요.
유다의 어머니 레아도 가졌던 소망이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그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이렇게 지나가도록 다말은 그렇게 포기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잃고 외로움 가운데 있었던 유다를 유혹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로 인하여 다말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 졌을 때 유다는 아마도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를 끌어내어 불로 태워 죽이라고 말을 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숨기고 죄를 지은 며느리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말은 끌려 가면서 유다와 동침하기 전에 그에게서 받은 약조물을 보여줍니다.
이 물건의 주인으로부터 임신하게 되었다고요.
그 물건을 본 유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나보다 어떻다고요? 옳도다.
이곳에 사용된 옳도다 라는 용어의 히브리어는 의로움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로서 다른 곳에서 번역될 때는 의롭다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의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특히 신약성경에서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다가 무엇을 깨닫았다는 것입니까?
잊고 있었던 구속의 경륜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여자의 남은 자손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았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유다가 그 순간에 구속의 경륜을 깨닫았는지는 몰라도 제가 성경을 볼 때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다말로 인하여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성경에 정확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대상 4: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의 기도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4장 1절에 보면 유다의 소생들의 이름들이 열거 되면서 9절에 야베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야베스라고 하고는 수고로이 낳은 아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정확한 것은 잘 모르지만 저는 다말이 야베스의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인 아들을 안고 싶은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수고 하였습니까?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들을 낳는 것 어떤 면에서 여인의 수치입니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을 누가 하였다고요 다말이 하였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려는 그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들의 믿음 본 받을 만 합니까?
우리 청년때 이웃 마을의 한 청년이 성경과 찬미 책을 꼭 교회에 두고 다녔습니다.
저는 교회 다닐 때 성경찬미를 들고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았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을 들고 다니라고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챙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들고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교회 다니는 것이 챙피합니까? 부끄러운 것입니까?
그렇다 할찌라도 구원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다 하여도 예수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수치 스러움을 무릅쓰고 구속의 경륜에 참여하고자 하였던 다말에 대한 기록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마 1: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기록은 누구의 족보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 기록에 유다는 누구에게서 헤스론을 낳았다고 합니까? 다말에게서.
그 자손에서 예수의 보호자 아버지 요셉이 태어 났고 마리아가 태어 났습니다.
큰일 날 뻔 했습니까?
그 일을 위한 계획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탄은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다말을 유다의 집에서 나가도록 하였지만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십니다,
끌려나오는 다말을 통해 유다가 무엇을 깨닫았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관심을 끄고 있었던 구속의 경륜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았다.
그리고 유다는 완전 변화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후에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갔다가 요셉에 의하여서 베냐민을 데려 오라 하여서 데려 왔고 그리고 요셉의 꽤에 빠져서 온 형제들이 종이 될 운명이 놓였을 때 유다는 요셉앞에 요셉인줄 모르고 무릎을 꿇었을 때 그의 동생 베냐민을 위하여 이런 감동적인 간증을 합니다.
창 44: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형들을 만나 아직도 옛 기질들이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던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자신을 들어 낼 수 밖에 없도록 한 유다의 간증입니다.
아이 대신에 내가 종이 되어 섬기겠다.
이 간증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유다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유다의 간증처럼 사셨습니다.
지금 자식들의 앞날을 내다 보면서 축복하는 야곱의 눈에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다 보게 하셨습니다.
창 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유다가 없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요셉을 구덩이에 넣을 때도 팔 때도 앞장서서 그런 일을 했던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될 수 있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장유교회의 찬송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할 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게 될 때,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된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요.
그럼 우리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될 것이다 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장유교회의 찬송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사자 새끼라고 하죠?
아무것도 못하는 젓 빠는 어린 새끼 사자가 어니고요 어떤 짐승도 그를 해칠 수 없는 젊은 사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사자로 오셨습니까?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로는 연약한 존재로 오셨지만 패한 것 같은 십자가가 승리의 깃발이었습니까? 승리의 깃발이었죠.
우리까지 그 편에 서 있으면 이김을 주시는 영원한 승리의 깃발을 갈바리산 골고다 언덕에 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래 있기만 하면 이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치리자의 지팡이 규, 실로 모두가 다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포도즙은 예수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을 상징하는 말씀이고요.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라는 말씀처럼 지구의 모든사람들이 다 빨아도 모자라지 않는 포도즙의 샘물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오늘 아침에도 그 포도즙에 여러분들의 옷을 빠셨습니까?
오늘 저녁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여러분들의 옷을 다 그분의 포도즙 웅덩이에 넣으서 깨끗하게 빠시고 잠자리에 들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오시는 날 그 주님의 포도즙 웅덩이에 옷을 빤 자들이 설 때 우리 장유교회의 모든 성도님들 한분도 이탈되지 않고 주님앞에 서게 되길 호소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렇게 소원하였던 가나안 여인 다말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향하다고 돌아선 유다도 요셉도 야곱도 아브라함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자리에 꼭 참여하게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