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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13일
직선의 세상에선 직립이 정설이다
모든 길과 건물, 사는 것이 직선으로 통한다
우리의 몸뚱아리를 제외하면 직립이다.
그들의 사담과 목 매인 이론들도
서정성과 현실참여 흑백논리에 불과하다
내변산 산길 오르다보면 직립은 가설이다.
물줄기는 똑바로 떨어진다 생각하지만
우리네 삶처럼 직립이란 고립된 섬
그 섬에 맴도는 철새처럼 세상은 곡선이다.
투명하고 영롱한 이슬빛의 물방울들
추락하는 게 아니라 이승을 떠도는 섬
당당한 직립의 폭포는 여전히 곡선이다.
-이재창 시인의 「직소폭포 - 年代記的 몽타주․17」 전문
“나라의 기둥이요 희망인 우리 젊은이들이 낙심하면 민족은 살아날 수가 없소.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시오.”-도산 안창호(1913년 오늘 미국에서 흥사단 조직)
* 칵테일이야기 ; 한 남자가 수탉 꼬리털로 술을 저어 마셨다 해서 불리게 된 칵테일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건 1860년5월에 발간된 미국잡지 「밸런스」인데 “칵테일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음료로서 선거운동용의 묘약”이라고 정의, 20세기 중반에 가장 많이 팔린 칵테일인 ‘드라이 마티니’에 대해 어느 기자의 질문을 받은 제임스 서버가 남긴 말은 “한 잔이면 딱 맞고, 두 잔은 너무 많지만, 세 잔은 부족하다.”
*로투마 데이: 로투마섬
*애견의 날: 일본
978년 신라의 경순왕 작고.
1110년 [음]예종(睿宗) 5년, 재상들이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고 출근하지 않음
ㅡ신해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조회(朝會)를 보았다. 재상 최홍사(崔弘嗣)와 김경용(金景庸)이 대간(臺諫)과 함께 상소하여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 등이 패전한 죄를 문제 삼았다. 왕이 듣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자, 최홍사 등은 중광전(重光殿)의 동자문(東紫門)으로 나아가 해질 때까지 완고하게 요청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재상과 간관(諫官)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출근하지 않아서 관청이 텅 비자, 왕이 평장사(平章事) 이오(李䫨)와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덕우(李德羽) 등을 불러 관청의 숙직을 서게 하였다. 최홍사 등이 수십 일 동안 출근하지 않자, 왕이 근신을 보내 성심껏 타일러 다시 나오게 하니 간관들 역시 출근하여 일을 보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었다
1280년 [음]세조(世祖)8, 기근으로 원에 곡식을 빌림
1325년 [음]충선왕(忠宣王) 5년, 상왕(충선왕)이 연경의 자택에서 사망함
1440년 [음]세종 22년, 종루(鍾樓)가 완공됨
1476년 [음]성종 7년, 명에 갔던 사신 사은사(謝恩使) 정효상(鄭孝常)·박양신(朴良信)이 《주자어류(朱子語類)》·《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져옴
1502년 [음]연산 8년, 하삼도 주민 2만 1,061명을 평안도 등지로 이주시킴
ㅡ삼도(三道)의 입거(入居) 사무를 맡은 도순찰사(都巡察使) 박숭질(朴崇質)이 돌아와 복명(復命)하고 초정(抄定)한 호수(戶數)를 써서 아뢰니, 전라도에서 입거시키기로 초정한 호수가 평안도에 4백 50호, 황해도에 40호, 함경도에 1백 50호이고, 경상도에서 입거시키기로 초정한 호수가 평안도에 4백호, 황해도에 40호, 함경도 2백 호이고, 충청도에서 입거하기를 초정한 호수가 평안도에 2백 50호, 황해도에 20호, 함경도에 50호로 합계 1천 6백 호인데, 장정·노인·어린이·남녀를 합하면 2만 1천 61명이었다.
1503년 [음]연산 9년, 경주에서 마노석(碼碯石, 석영)을 바침
1509년 [음]중종 4년, 전라도 조운선 40척이 떠내려가거나 침몰하여 많은 사람이 죽음
1607년 [음]선조 40년, 서애 유성룡 사망(1542-1607)
ㅡ사신은 논한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義理)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으나 힐난(詰難)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그에 의지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인홍이 매양 공손홍(公孫弘)이라 배척 하였고, 성룡 역시 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 같았다. 성룡은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慷慨)해 마지 않았는데 지난해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絶交)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는다.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상의 권우(眷遇)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규모(規模)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의 변에 권간(權姦)이 화(禍)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逆獄)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山林)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君臣)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千古)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해 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신구(伸救)하는 상소 가운데 ‘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器局)이 부족하고 대신(大臣)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무술년 겨울에 변무(辨誣)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사피함으로써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었고, 상이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1618년 [음]광해 10년,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 작고
ㅡ50년 절친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 권율의 사위, 1580년 문과급제 1589년 정여립모반사건 수습해 평난공신, 1617년 붕당간의 세력다툼에 관련되어 유배된 북청에서 세상떠남
ㅡ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 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1618년 5월 13일 유배지 북청서 향년 64년의 나이로 별세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하면서 왕조의 위기를 넘긴 충신이었다. 그는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했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회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 나라의 어려운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
임진왜란 때는 장인인 도원수 권율 장군을 거느리고 병조판서의 소임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백사 이항복의 진면목은 환갑을 넘어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몸으로 임금(광해군)에게 패륜의 잘못을 직언, 젊은 후학들에게 용기와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1617년 폐모론이 제기됐을 때, 그는 병석을 털고 일어나 비장하게 임금의 패덕을 비판하고 폐비의 불가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반신불수로 쓰러져 누워있는 이항복의 상소문…, 상소 내용이 알려지면서 백관들 사이에는 다시 동요가 일었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폐모론의 주동자이자 권력의 핵심들은 재빨리 3사의 언관들을 동원하여 이항복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결국 이항복은 유배형을 받았고 유배지인 북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ㅡ전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유배지에서 졸하였다. 이항복은 호상(豪爽)하고 풍도(風度)가 있어 어려서부터 이덕형(李德馨)과 명성을 더불었으며, 과거에도 함께 합격했다. 문학으로 현달하여 정철(鄭澈)과 항상 기린과 봉황에 비유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병조참판으로 발탁되는데 이르렀고, 공로가 가장 컸다. 평생 청탁하는 글을 짓지 않았으며 뇌물을 받지 않았는데 지위가 재상에 있으면서도 집안은 가난하여 한사(寒士)와 같았다. 무신년(1608년) 초정(初政)에 민간에는 임해군(臨海君)이 변을 일으키고 조정이 먼저 움직여 이덕형 또한 처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항복만이 진중하게 뇌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훈련도감 도제조였는데 혹자는 그에게 은밀히 군사 대비를 명령하라고 권하였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그 후 일찌기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伸冤)되는 때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그는 편당을 주장하지 않았는데도 세류를 따르다 화를 만났으니 사론 중 혹자는 그의 익살과 구용(苟容)을 그 원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론(大論)을 수의(收議)할 때에는 마침 교외에서 대죄할 때이고 국사를 듣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의견을 적어 내는데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큰 절개를 빼앗을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1647년 [음]인조 25년, 소현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귀양 보냄
ㅡ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인 이석철(李石鐵)·이석린(李石麟)·이석견(李石堅)을 제주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의금부가 석철은 제주에, 석린은 정의(旌義)에, 석견은 대정(大靜)에 유배하자고 청하였다. 당시 석철은 12세, 석린은 8세, 석견은 4세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한 곳에 정배하여 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內官)과 별장(別將) 등을 교대로 지정해 보내 외부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정배(定配)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 하였다. 이에 홍무적은 남해현(南海縣)으로, 신득연(申得淵)은 진도군(珍島郡)으로 이배하였다.
1649년 [음]효종(孝宗)이 즉위함
1656년 [윤]효종 7년, 판중추부사 김집(金集) 죽음
1658년 [음]효종 9년, 인평 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 이요(李㴭)가 죽음
1671년 [음]현종 12년, 허적이 영의정, 송시열이 우의정이 됨
1689년 [음]숙종 15년, 희빈 장씨(장옥정)가 왕비가 됨
1725년 [음]영조 1년, 전결(田結)을 사사로이 쓴 수령에 대해 연한(年限)을 정하는 금고법(禁錮法)을 제정함
1751년 [음]영조 27년, 원손(元孫) 이정(李琔)이 왕세손이 됨
1762년 [윤]영조 38년, 세자(뒤에 사도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엄히 가둠
1762년 사도세자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굶어서 세상 떠남
1769년 [음]영조 45년, 임금이 지은 《속유곤록(續裕昆錄)》을 간행하게 함
1786년 [음]정조 10년, 임신년(1752)에 간행된 《상례보편(喪禮補編)》은 세초하고 무인년(1758) 간행본을 사용하게 함
1834년 [음]순조 34년, 도성에 전염병이 심하여 여제(癘祭)를 지내게 함
1847년 [음]헌종 13년, 수령의 탐오를 엄히 단속함
1883년 (고종20)루시우스 푸트 초대 주한미국공사 부임
1902년 마산 70만 평, 일본 거류지로 허가
1902년 원산에 협무회사 설립
1906년 소설가 현민 유진오 출생
1913년 흥사단 조직-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모여 조직
ㅡ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이 도산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다.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일제하에서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을 강조하다 보니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흥사단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을 묵묵히 지켰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두 단체는 이후 수양동우회(1925년)로 통합됐다가 다시 동우회(1929년)로 개칭됐으나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강상호 등, 백정 해방 목적으로 형평사 연맹 총본부 조직
1926년 조선박람회 열림
1944년 대한민국의 배우 손숙 출생.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한성수 작고.
ㅡ한성수(韓聖洙, 1920년 8월 18일~1945년 5월 13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용천 출생이다. 한성수(韓成洙)라고도 하며, 광복군에서는 이상일(李相一)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했다가 1944년 태평양 전쟁 학도병에 징집되자 중국에서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했다. 이후 광복군 제3지대 화남지역 책임자로 제3지대장인 김학규의 휘하에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3월 13일 밀고에 의해 상하이에서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한성수를 밀고한 사람은 상하이 거주 조선인 부호인 손창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홍순명, 김영진, 허암, 박윤석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2명 등 7명이 함께 체포되었다.
한성수는 군법회의에서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5월 13일 난징의 난징형무소에서 참수 당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47년 〈보통 선거 법안〉 입법 의원 상정
1947년 전국 불교 총연맹 창립
1949년 국군 함정 제508호 월북
1950년 이승만 대통령, 창경원 폐쇄하여 시민 휴식 공간 박탈 논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로 비구승과 대처승 분쟁 표면화
1961년 민자통 주최로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개최
1964년 경향신문 특집기사 필화로 편집국장 등 7명 구속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실시(공화당 박정희후보 당선, 7월1일 취임)
1970년 노동청, 1969년 전국 근로자 66만 1,091명 중 21만 4,545명이 재해 질병자로 집계
1970년 정경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
ㅡ정경화는 서울에서 태어나 5살이던 1953년 바이올린을 시작해 한국방송교향악단, 서울심포니 등과 협연했다. 이화여중에 재학 중이던 1961년 2월 언니 정명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수학했다. 1964년 카네기홀에서 독주를 하고 1965년 메리위도 포스트 국제청소년 콩쿠르에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정경화는 1967년 5월 16일 카네기홀에서 열린 레벤트리트 콩쿠르 결선에서 뛰어난 연주 실력을 발휘해 동갑내기 유대인 연주자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콩쿠르 27년 역사상 공동 우승은 처음이었다.
1970년 5월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직전에 연주를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비상이 걸린 런던교향악단은 정경화를 급히 섭외했다. 22살에 불과한 가냘픈 아시아 여성 연주자가 리허설 무대에 올라오자 단원들은 골려줄 심산으로 당초 예정되어 있던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대신 까다롭기로 유명한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이 사실을 몰라 당황해 하던 정경화가 곧 반사적으로 연주를 시작하자 단원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역력했다. 그렇게 신고식을 마친 정경화는 1970년 5월 13일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교향악단과 차이콥스키 협주곡 협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1971년 통혁당 재건기도 간첩단 11명 검거
1975년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9호 선포, 헌법 비방 반대 금지
ㅡ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9호` 일명 긴급조치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겪을 시련을 의미했다.
4월 17일 크메르가 공산 게릴라에 항복하고, 4월 30일 월남이 공산화되자 박 정권은 고조된 안보 위기의식에 편승,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긴급조치9호를 선포, 5년7개월에 걸쳐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긴급조치9호는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없는 학생시위ㆍ집회 금지 등을 주요 골자로 이전의 긴급조치1호에서7호까지의 내용을 거의 포괄하고 있었다.
긴급조치9호가 시행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체제로 진입했다. 박 정권은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했고 조치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할 수 있게 했으며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긴급조치9호 발동 후 그 강압적인 기세에 눌려 반정부운동이 잠시 잠잠지는 듯 했으나 같은 해 5월 22일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주동으로 시작된 학생시위를 기점으로 민주 인사들의 ‘민주구국선언’ 등을 통해 다시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결국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같은 해 12월 8일 0시를 기해 해제됨으로써 끝이 났다. 5년7개월간에 걸쳐 시행된 이 조치로 1천20명이 연루됐고 이 가운데 5백30명이 구속됐다.
1976년 북한 국제채무불이행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름
1979년 청소년들의 접착제 흡입이 사회 문제화
1980년 연세대를 비롯한 6개 대학생 2500명이 광화문 에서 시위.
1983년 정부, 석탄값 평균 4.1% 인상
1983년 정부 수도권정비 기본계획 시안 공개
1984년 병든소 도입 파문-83년 도입2만여마리 12% 병들어
1985년 제12대국회 개원, 제125회 임시국회 개회 의장에 이재형, 부의장에 최영철·김녹영 선출
1987년 정부, 88년 2월까지 남극기지 건설키로 확정
1988년 행정개혁위원회(위원장 신현확 전 총리) 발족
1988년 일,오쿠노장관 망언 해임-일본 침략사 부인-군국주의 망령
1988년 가락동 농수산물 직판장 개장
1989년 광주서 전민련 주최 3만여명 야간시위, 전남대 병원앞 점거. 큰 충돌없이 밤늦게 해산
1990년 `5.9사태` 배후혐의로 김근태씨 검거
1991년 서울 중부경찰서, 시위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진 S공고 3년 南모군(18)을 구속. 고교생 첫 구속.
1992년 북한, 한국전쟁중 실종 미군유해 13구를 비무장 지대 공동경비구역 판문점에서 유엔軍 사령부측에 인도.
1992년 전경련,「93년 재정운영방향」의견서- 軍 인력을 산업체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대폭 확대해야 주장
1992년 북한 한국전쟁중 실종된 미군유해13구 판문점에서 유엔사령부에 인도
1992년 대우그룹 대북교역 발표, 신성통상 통해 북한에서 의류 16,726벌 817,456$에 반입
1993년 김영삼 대통령, 12·12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인 사건'으로 규정.
1993년 서울지검, 서울시경 3부장으로 재직중 슬롯머신 업소 15곳을 신규허가 한 千基鎬치안감 구속.
1993년 간첩활동으로 수감 중인 황인욱씨, 다른 조직원 통해 비밀문건을 밀반출 하려다 적발
ㅡ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자신의 간첩활동을 참회하는 장문의 반성문을 제출했던 황인욱씨가 영등포 교도소에서 풀려나는 조직원을 통해 안기부의 수사기밀 등을 담은 비밀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됐다.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 중인 황씨가 1993년 5월 13일 밤 10시쯤 함께 수감 생활을 하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되는 조직원 황한석씨(27)의 항문 속에 비밀문건을 넣어 몰래 반출하려다 출감 절차과정에서 적발됐다. 이 문건에는 황씨가 작년 안기부 수사 당시 신문 과정에서 알게된 간첩수사 방법을 비롯, 수사 당국에 적발되지 않은 조직원들에 대한 지령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주요 사건 관련자 7~8명을 거명, 안기부가 내사중이라며 행동에 조심하라는 경고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황씨는 1987년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2년 간 복역한 뒤 자신의 형인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에게 포섭돼 중부지역당의 편집국장을 맡는 등 핵심요원으로 활동하다 구속 기소됐다.
1994년 5·18민중 운동 연합 등 5·18관련자 35명을 내란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
1996년 이수성 국무총리, 폴란드 방문중 치모세비치 총리와의 회담
1997년 북한 안선국, 김원형 두 가족 서해 귀순
ㅡ북한 주민 두 가족 14명이 어선을 이용해 북한을 탈출 1997년 5월 13일 새벽 3시36분 인천항을 통해 귀순했다. 국방부는 이들이 평안북도 신의주를 출발 선박을 타고 남하하다 12일 오후 4시30분쯤 서해안 백령도 서남방 5.7마일 해상에서 표류중 초계중인 우리 해군에 의해 발견돼 13일 새벽 인천항으로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북한 주민들이 배를 이용해 북한을 탈출 우리측에 바로 귀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순자들은 이 배의 선장인 안선국(49)씨 가족 6명과 기관장 김원형(57)씨 가족 8명이며 성인 남자 5명, 성인 여자 5명과 아이들 4명이다. 이들은 안씨 가족이 먼저 지난 5월 9일 오전 선박을 이용해 신의주를 출발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5월 11일 오후 평북 철산군 통천리 부두에서 김씨 가족과 합류했고, 이들이 타고 온 배는 32t 목조어선으로 귀순을 숨기기 위해 중국 어선군에 섞여 남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선박을 이용해 우리나라로 직접 귀순한 첫 `보트피플`로 꼽히게 됐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대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적극 지원 발언
2001년 수원월드컵경기장이 개장
2001년 인기 댄스그룹 H.O.T. 사실상 해체
ㅡ인기 댄스그룹 H.O.T. 가 멤버 가운데 세 명이 그룹을 탈퇴, 사실상 해체됐다. H.O.T. 멤버인 토니안(안승호), 이재원, 장우혁은 2001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끝나 5월 11일 ‘예전미디어’와 전속계약을 맺었다”면서 “팬들과 함께 영원히 H.O.T. 로 활동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로써 H.O.T. 멤버는 강타, 문희준 2명만 남게 됐으며, H.O.T. 는 1996년 9월 데뷔 이후 4년 8개월 만에 사실상 해체됐다.
H.O.T. 의 해체는 그동안 재계약을 둘러싼 잡음이 커지고 강타와 문희준이 솔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문만이 무성했으나 이날의 발표로 해체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한편 H.O.T.의 남은 멤버 강타와 문희준도 6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8월과 10월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각각 솔로 앨범을 낸다”고 발표함으로 이들의 재결합에 대한 일각의 기대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2005년 친일파 송병준 후손의 땅 소송, 대법원에서 패소
2005년 신세계 이마트, 비정규직 노조 결성한 여성 노동자 전원 해고
2006년 '한국의 햄릿'으로 불린 배우 김동원씨 별세
ㅡ‘한국의 햄릿’으로 불린 배우 김동원(金東園.90) 선생이 2006년 5월13일 오후 6시25분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2004년 6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해왔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2년 연극 ‘고래’(연출 유치진)로 데뷔한 김동원 선생은 1994년 ‘이성계의 부동산’(연출 김도훈)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62년 동안 30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한국 현대극의 역사였다.
2012년 애국지사 태윤기 변호사 별세
ㅡ애국지사이자 법조계 원로인 태윤기(太倫基·94) 변호사가 13일 오후 9시 57분 별세했다. 함남 풍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나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특별간부훈련반을 수료했다. 1945년 한미합작 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서 교육을 받은 뒤 국내정진군 함경도반 1조에 배속돼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5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군사독재시절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진보당 사건, 10·26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을 맡았다.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한국광복군동지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건국훈장 애족장과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2012년 ‘바이올린 명장’ 재일 한국인 진창현씨 별세
ㅡ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진씨는 메이지(明治)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영어 교사가 되려 했지만 재일 한국인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방황하던 그는 우연히 한 강연에서 “20세기 최첨단 기술로도 300년 전 바이올린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자극받아 바이올린 제작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재일 한국인이란 이유로 제자로 받아주는 스승이 없어 막노동을 하며 귀동냥과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 기법을 익혔다. 돈이 없어 건설 현장 폐자재로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당시 일본의 3대 바이올린 연주자로 꼽히던 시노자키(篠崎弘嗣)가 사용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安益泰) 선생도 일본에 연주여행을 올 경우, 진씨의 집에서 머무는 등 교분을 맺었다.
고인은 1976년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 금메달을 받았으며,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감독 및 검사 없이 바이올린을 제작할 수 있다는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획득했다.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는 세계에 5명밖에 없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렸다. 정경화와 강동석, 아이작 스턴, 헨리크 셰링 같은 세계적 명연주자도 그의 바이올린을 애용했다.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 후 고향인 김천을 방문했다고 간첩혐의로 조사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진씨는 끊임없이 국적 변경을 권유받았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너는 재일 한국인이다”라는 점을 계속 주지시켰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2014년 북한 평양 23층아파트 건설중 붕괴
ㅡ평양 아파트 붕괴사고는 2014년 5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평천구 안산1동에서 미완공 23층 고층 아파트가 붕괴된 초대형 사고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중앙통신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5일이 지난, 동년 5월 18일 처음으로 수백명 이상의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붕괴의 구체적인 발생경위와 피해규모는 발표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통일부 관계자는 "오후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1동의 23층 아파트가 붕괴됐다"며 "북한에서는 건물 완공 전에 입주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아파트에도 92세대가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2015년 서울 내곡동 예비군훈련장에서 총기사고 사망3명 예비군도 목숨끊음
ㅡ5월13일 오전 10시53분쯤 서울 서초구 내곡동 육군 52사단 211연대 예비군 훈련장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 최모(23·서울 송파구 거주)씨가 K2 소총을 난사해 최씨를 포함해 3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총기를 난사한 최씨는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사건은 예비군들이 실탄 10발이 든 탄창을 지급받아 축소사격이 시작된 직후에 벌어졌다. 최씨는 이중 1발을 발사한 뒤 돌아서서 8발의 실탄을 난사했다. 2, 3, 5사로에서 ‘엎드려 쏴’ 자세로 엎드려 사격을 하던 예비군과 옆에서 사격을 돕던 부사수 예비군들이 총탄에 맞았다. 이날 밤 ‘다 죽여버리고 나는 자살하고 싶다’고 쓴 최씨의 유서가 최씨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최씨는 군 복무 시절 B급 관심병사로 분류돼 부대의 중점 관리를 받았고, 그의 이웃들도 최씨가 평소 동네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고 증언해 이날 사건이 정신적 문제를 겪던 최씨가 저지른 계획범죄라는 분석이 나왔다.
사격 당시 현장에 있던 통제 장교 3명과 조교 역할을 맡은 사병 6명은 대피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교들은 최씨가 총을 쏘자 사격장 아래 언덕으로 몸을 던져 피했고, 통제탑 반대편에 몸을 피해 있던 중앙통제관은 난사가 끝나고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사태 수습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천주교 전주교구 제8대 교구장 김선태 주교의 주교 서품 및 착좌 미사가 거행
2021년 계열사 부당 지원 박삼구 금호 전 회장 구속
2021년 5.18조사위 “계엄군, 옥상서 M60기관총.M1소총으로 조준 사격”
2022년 윤대통령, 청장.차관급 21명 인선
2022년 소상공인에 최대 1천만원...尹정부, 사상 최대 59조원 추경
1127년 북송황제 휘종 금나라 군대의 포로가 됨
1655년 교황 인노첸시오 13세 출생.
1717년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출생.
1792년 교황 비오 9세 출생.
1832년 프랑스의 동물학자 퀴비에 사망
ㅡ퀴비에는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확립한 사람이다. 비교해부학은 여러 동물의 형태나 구조를 서로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고, 고생물학은 화석을 통해 고생물의 구조, 생리, 생태 등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퀴비에는 1795년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비교해부학 교수를 지냈고, 1799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박물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또 그는 나폴레옹1세의 신임을 얻어 장학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817년 저술한 `동물계`에서 퀴비에는 동물이 척추동물, 연체동물, 관절동물, 방사동물로 나뉘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E.G.생틸레르는 동물계 전체를 한 형으로 보아서 과학아카데미에서 퀴비에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퀴비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한 천변지이설을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화석이 지층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고 지질시대에 천변지이가 되풀이되어 생물군이 절멸되고, 살아 남은 것이 번식하여 지구상에 분포된다는 허술한 이론이다.
1840년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 출생.
1856년 사진미학의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출생
1857년 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출생
1882년 입체파 발전에 공헌한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 출생
1888년 지구의 내핵을 발견한 덴마크의 지진학자 잉에 레만 출생.
1903년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겸 초대 총리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작고.
1905년 인도의 대통령(1974-1977) 아메드 출생
1907년 스웨덴 보통선거 실시
1914년 미국의 복싱 선수 조 루이스 출생
1915년 러시아의 정치인 세르게이 비테 백작 작고.
1918년 세계최초의 항공우편 우표, 미국에서 발매
1920년 노르웨이탐험가·외교관·국제연맹 난민고등판무관 프리드쇼프 난센 세상떠남
ㅡ“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때때로 고독과 사색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분주한 문명의 중심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외로운 장소에서만 찾아온다.” 난민구조활동과 난민을 위한 최초의 여권(난센여권, 국제연맹이 발행) 만들어 1922년 노벨평화상 받음
1930년 일본 소설가 다야마 가타이 사망
1937년 미국의 환상소설가·과학소설가 로저 젤라즈니 출생.
1940년 근대 헬리곱터 원조인 시콜스키 VS300 첫 비행 성공
1940년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총리로 취임 후 3일만에 의회에서 첫 연설
1950년 오늘 미국 시각장애인가수 스티비 원더 태어남,
ㅡ태어날 때부터 눈멀었고, 23세에 자동차사고로 후각 잃었지만 모든 감각 발휘해 슈퍼스타가 됨, 무슨 얘기든 한번 들으면 금방 노래로 만들어 부름, ‘식물들의 신비한 생활로의 여행’=『식물들의 신비한 생활』을 점자로 읽고 감명받은 느낌으로 만든 두 장짜리 앨범
1951년 중국의 종교인, 파룬궁 창시자 리훙즈 출생.
1954년 미국 수폭실험 완료 발표
1958년 알제리 시민들 완전독립을 요구하며 프랑스 정청 습격
1961년 미국의 배우 게리 쿠퍼 작고.
1965년 동부 파키스탄에 태풍 12,000여명 사망, 이재민 10만
1972년 일본 오사카서 백화점 화재 118명 사망
1979년 이란회교법정 팔레비 전 국왕 암살령 선언
1979년 이란 혁명 최고재판소 전 팔레비 국왕에 사형선고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ㅡ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출신 극우 테러리스트 메흐멧 알리 아자가 쏜 2발의 총격을 받고 부상했다. 교황은 5시간 반의 긴급수술을 받고 회복됐다.
아자는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됐다.
그는 기독교 세계를 저주하는 회교 광신도적 정신상태에서 범행을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과 황폐한 현대문명에 대한 경종이 되었다.
아자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후 교황이 그를 방문, 용서해 주었다.
1984년 폴란드계 미국인 수학자 스타니스와프 울람 작고.
1991년 미국 화학무기전량폐기 선언
1993년 독일, 1955년 연방군창설이래 처음으로 유엔소말리아 전후복구작전에 파병개시
1993년 일본 사회당, 사회주의노선 포기하고 한국정부의 미-일 안보조약 인정하는 획기적 내용의 당강령 개정초안 마련
1994년 헬륨원소보다 2.5배 무거운 `헬륨10` 세계 최초 발견
일본 이화학 연구소는 질량이 통상적인 헬륨원소의 2.5배로 헬륨의 동위원소로는 가장 무거운 헬륨10 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1994년 5월 13일 발표했다.
이 헬륨의 원자핵은 + 전기의 양자 2개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 8개로 구성돼 있다. 보통의 원자핵과 달리 헬륨10은 중성자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것이 특징이다. 자연계에는 헬륨4, 극미량의 헬륨3이 대기 등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공 동위원소로 헬륨6과 헬륨8이 발견돼 있다.
우주에 있는 항성의 수명이 다하면 초신성 폭발을 일으켜 중성자성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중성자성의 지각 부분에는 양자가 약간 남아 있어 헬륨10 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돼 왔었다. 연구팀은 헬륨10의 수명은 1조분의 1초를 다시 1억분의 1정도로 쪼갠 만큼 짧다고 밝혔다.
1996년 강력한 뇌우에서 생겨난 토네이도로 방글라데시에서 6백명이 사망
199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인종폭동이 발생,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소유한 상점에서 약탈과 강간이 자행
2001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야당 승리
ㅡ5월 13일 집권 중도좌파 동맹인 `올리브 나무`와 중도우파 야당연합인 `자유의 집`이 맞붙은 이번 총선에서, 언론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64)가 이끄는 야당 측이 프란체스코 루텔리(46) 전 로마시장이 이끄는 집권중도좌파에 승리를 거두고 7년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집계 결과 상원은 베를루스코니측이 315석 가운데 177석을 획득했고, 프란체스코 루텔리 전 로마시장측은 125석에 그쳤다.
2008년 인도 자이푸르 힌두사원 인근 시장에서 7차례 연쇄폭탄테러 사망80명
2011년 캐나다의 사업가, 매케인 푸드의 공동 설립자 월러스 매케인 작고.
2014년 터키 서부 소마 시 탄광폭발 사망301명 부상486명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흘째 무력 충돌...사망자 최소 62명
2022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벤 로위 모텔손 작고.
ㅡ원자핵의 비구형 기하학에 대한 공헌으로 197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계 덴마크인 핵물리학자이다.
그는 시카고의 일리노이에서 출생했고, 퍼듀 대학교에서 1947년에 학사학위를 받은 후 1950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1950년에 핵물리학과 학위를 받았다.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 (당시에는 Institute for Theoretical Physics, 이론 물리학 연구소) 로 유학을 간 그는 노르디타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1971년에 덴마크로 귀화했다.
2022년 아랍에미리트의 제2대 대통령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작고.
2022년 우리은하 블랙홀 이미지 첫 포착...과학사에 남을 성과
2022년 인도에서 합의가 된 국가가 아닌 모든 국가의 밀 수출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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