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쓴 시
이승은
햇살의 고요 속에선
ㅉㅉㅉ, 소리가 나고
바람은 쥐가 쏠 듯
ㅅ ㅅ ㅅ, 문틈을 넘고
후두엽 외진 간이역
녹슨 기차 바퀴 소리
* 후두엽 : 주로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대뇌의 맨 뒷부분.
<작품 이해>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소리들이 존재합니다. 귀뚜라미의 울음에서 쓸쓸함을 느끼고 천둥소리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소리들에 정서적으로 반응합니다. 자연이나 사물의 소리에는 어떤 독특한 인상과 느낌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언어도 그것의 의미와는 별도로 소리 자체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센소리는 거칠고 억센 느낌을, 된소리는 경박하고 강한 느낌을 주는 반면, ‘ㄴ, ㄹ, ㅁ, ㅇ' 등의 유음은 부드럽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양성모음은 밝고 작은 인상을, 음성모음은 어둡고 큰 인상을 주지요. 한편 어떤 낱말은 소리의 유사성이나 연상 작용 때문에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말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평소에는 주목하지 않는, 언어의 이러한 소리 특성을 적극적으로 발견하여 시에 활용합니다.
이승은의 시는 제목부터 우리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손으로 쓴 시도 아니고, 머리나 가슴으로 쓴 시도 아니고, 귀로 쓴 시라니요? 시를 읽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시인은 햇살과 바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귀의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ㅉㅉㅉ”이나 “ㅅ ㅅ ㅅ”는 모음이 없어 그 자체로 발음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귀에 들리는 인상대로 오롯이 받아 적은 ‘귀의 언어’이지요. 발음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햇살의 고요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입니다. 하지만 고요한 한낮에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의 따갑고 쨍쨍한 느낌은 자음 ‘ㅉ’의 인상과 통합니다. 바람이 문틈을 넘는 소리는 ‘ㅅ'에 어떤 모음을 넣어 발음해 봐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스스스”, “솨솨솨”, “소소소”, “슈슈슈”. 시인의 재미있고 독특한 상상 덕분에 여러분의 귀가 쫑긋해지지 않나요?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소리를 상상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후두엽 외진 간이역”은 어디일까요? 뒤통수 쪽, 작고 외진 간이역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버려진 마음, 외로운 화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저 뒤통수 아래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쓸쓸함의 소리를 시인은 “녹슨 기차 바퀴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ㅉ'도 아니고 ’ㅅ'도 아닌, 이 세상 어떤 자음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그 마음의 소리가 이 시를 읽는 우리의 뒤통수 쪽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외진 간이역의 마음, 쓸쓸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던 마음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활동>
귀로 쓴 시에서 외롭고 쓸쓸한 마음의 소리를 왜 “녹슨 기차 소리”라고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수록 교과서 《비상》Ⅱ
* 출처 :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시 필수편 / 오연경, 이삼남, 전현철, 표영조 엮음 / 창비 145쪽
* 추신 : 2011년 12월에 창비에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총 10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시는 필수편, 심화편 2권, 소설은 필수편, 심화편 총 4권, 수필․극은 필수편, 심화편 2권, 고전 필수편, 심화편 2권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2012년 고등학교 검정 『문학』 교과서 14종에 수록한 필독 작품을 모은 것입니다. 이승은 시인의 「귀로 쓴 시」는 《비상(박영민) Ⅱ》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참고하세요.
첫댓글 재밌고 참신한 시에요 ^*^~ 잘 보고 갑니다 ~
바람은 쥐가 쏠 듯
ㅅ ㅅ ㅅ, 문틈을 넘고---- 저도요! 귀로 쓴 시 내 앞길을 터득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