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포를 찾아서
(장승포 1구 입좌촌)
거제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서는 약 1 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부터라고 추정된다. 기록으로는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의 한조에 따르면 삼한은 마한54개국, 진한12rto국, 변한12개국 등 78개국으로 기원전 2-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 우리 거제도는 변한12개국중 독로국(도로국) 또는 주노국이라 일컷는 작은 土侯國으로 등장하였다. 그 뒤 거제, 상궁, 상주군, 거제군, 기성현, 거제현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거제시로 불리어지고 있다.
거제도는 일본과 인접한지라 각종진지와 성터 그리고 유적과 유물이 많다. 그러나 유독 장승포에는 그러한 흔적이 없으니 특이할만하다. 거제도는 수난의 역사이다. 아주 옛날 삼국시대에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 신문화를 받아들이는데 큰 장애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는 자즌 왜구의 침입으로 섬주민들은 일본군과 싸우느라 문화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런 이후에도 임진왜란으로 초토화 되었으며, 다시 1910년 한일합방으로 고초를 꺾었다. 그 뒤에도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민 홍수로 거제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053. 거제군이 환군되면서 본 괘도에 오르게 되었다.
☻장승포 연혁
-757년 신라 35대 경덕왕 아주현 소속
-1769년 영조 45년 장승거리방 ( 도모고개에 장승이 있어 장승거리라함)
-1895년 고종 32년 장승포리
-1914.3.1 통영군 이운면 소속
-1953.1.1 거제군 환군 (장승포에 청사 둠)
-1989.1.1 거제군에서 분리 장승포시로 승격
-1995.1.1 거제군과 통합하여 거제시 장승포동으로 됨. (장승포동/마전동/능포동/아주동/옥포 1,2동)
☻ 장승포 문화유적
♠거제문화예술회관: 2003년 10월21일 개관. 장승포항과 우우러진 최현대식 공연장을 거제도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함.
♠장승포항: 거제도 동단에 위치한 장승포항은 해상교통과 무역항으로 거제시 발전에 기여하며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애광원: 6.25사변이 일어나자 고아들을 수용할 영아원설립(1952.11.27), 현재는 지적 장애인시설로 전환. 장승포 항구에서 바라보면 문화예술회관과 어우러져 멋진 장면을 연출함.
♠일본인 어업이주촌인 이리사촌(入佐村): 장승포 1,2구에 위치했던 어업전진기지
☻ 장승포 지명
♠구촌(舊村)마을 :장승포항(長承浦港)의입구에 위치하여 본래의 갯마을이고 제주도(濟州島) 해녀(海女)가 입주한 곳으로 장승포리(長承浦里)의 1구(區)였는데 본래의 구촌(舊村)으로 하였다.
♠신부동(新富洞)마을: 구촌(舊村)마을 위에 고종(高宗)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이 입주(入住)하여 입좌촌(入佐村)이라 하고 우편소(郵便所)와 시장(市場)이 형성되었고 1930年 방파제(防波堤)를 축조하여 장승포리(長承浦里) 2구(區)라 하였는데 광복후(光復後) 신부동(新富洞)이라 하였다.
♠중앙(中央)마을: 장승포리(長承浦里)의 5구중(區中) 3구(區)라 하였으니 중앙(中央)이라는 뜻이고 초.중학교(初.中學校)가 있으며 1953年 5月 27日 거제군청(巨濟郡聽)과 교육구청(敎育區聽)의 소재지로 중앙(中央)이라 하였다.
♠장승(長承)마을: 본래 두모고개 장승거리 밑으로 장승포리(長承浦里) 4구(區)였는데 장승거리(長承巨里)의 뜻으로 장승(長承) 마을이라 하였다.
♠신부동(新富洞)마을: 장승포 수협주변의 1,2구를 신부동이라 한다.
♠마전(麻田)마을: 본래 삼밭이라 하였고 장승포리 5구로 마전이라 하였다. 최근에 대우조선소 배후지역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마전동으로 분리되었다.
♠장승포항(長承浦港): 장승개 앞바다를 장승포만이라 하였는데 고종 26년(1889)한일통어장정이후 일본어민의 이주로 이리사촌을 형성하고 어선단의 보호를 위하여 1930년 방파제를 축조하고 1935년 10월1일 二運面을 장승포읍으로 승격하여 하였다. 1965년 6월25일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도ldj 항만청, 세관, 검역소, 출입국 관리소를 두었고, 수산물 물양장과 여객선 터미널이 건설되었다.
♠거제대학교: 1990년 3월 거제전문대학으로 개교하여 기계,조선,선박 등의 중요학과가 있다.
장승포 1,2구 이리사촌(入佐村)
옛거제도의 중심지는 아주, 고현, 사등, 둔덕, 거제 등이 였으며 장승포는 예외지역이었다.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한쪽에 몰려있고, 일본과 인접해 있으며, 외해와 인접해 있어 파도가 심하고 육지와 연결되는 사등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렇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런 장승포는 고종(高宗)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이 장승포(長承浦) 항구(港口)에 입주(入住)하자 1910年 한일합방(韓日合邦) 되던 해 234호(戶) 1,893명(名)에 이르러 입좌촌(入佐村)이라 하였다.
이 동네는 전국에서 유명한 부자동네로 소문났고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1906년 7월 후꾸오까에서 선출한 조선수산조합 대의원 겸 동현 통어장려소장 오따가 자기 마을의 주민 14가구와 더불어 이주하여 점 차 마을의 기초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1월 현재의 “내지인 (일본인) 어업자이주어촌자(內地漁業者移住漁村者)”에 의하면 이리사무라의 일본인 어민의 가구수은 152호 641명으로, 조선 전체 9도 59어촌(단체이주 15촌)에 980가구, 3,900명인 것을 비추어 보면 최대의 어촌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1년 말에는 이주 가구수 138가구, 인구 약 700명이며, 그 중 어업자가 73가구이고 상업이 37가구이며, 그 외 각종 직업의 이주자를 망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이리사무라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이곳은 “관서, 구주지방의 어촌인데 잡화상, 음식점, 목욕탕, 식료품상, 고리대금업 등 대개의 기관이 갖추어져 작은 불편도 없다. 의사가 있고(수산조합의 촉탁이다.) 이리사무라 일본인회(1907년 5월 29일 창립), 이리사무라 심상 고등학교(1906년 7월 1일 설립), 장승포 수산물시장(1907년 10월 1일), 우편취급소(1876년 12월 1일), 장승포순사주재소(1906년 6월 5일 설치) 등이 있다. 일본인회는 매장, 식림, 어업개량 등의 경영을하고 있다.”라고 『한국수산지』는 기록하고 있다.
또 하나 이리사는 일본 어민의 신앙을 위해 콘피라 신사의 건립(1925년 10월에 건립하여 매년 5월마다 콘피라 축제를 열었고 1935년 3월 1일부터는 황국신민화의 교육장으로 이용되었다.), 이리사무라 병원, 요리점, 상점 등을 개업하여 전국 3위의 일본이 자본가로 눈부신 변신을 시도했다.
아직도 이곳은 이리사무라의 주변에는 일본인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장승포 중앙동 뒷산에는 일본인 납골당과 납골단지 30여 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일본인 가옥과 정원, 도로망 등은 그대로 있으며, 망월루, 명월루 등으로 대표되는 유곽을 만들어 조선인과 일본인 기생들을 데려다 일본인 어민들의 노리개로 이용하였다. 옛 망월루 건물은 지금도 여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심지어 신부동 망산에는 일본 장승포신사터와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그 당시를 생각하게 한다. 신사는 초기에 일본어민들이 숭배하는 바다신을 모셨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과 더불어 황국신민화 교육과 신사참배를 일삼은 치욕스런 장소였다. 그곳은 지금은 시에 의하여 부분 철거되어 있는 상태이다. 신사의 철거로 치욕스런 과거를 묻어 버리는 것보다는 복원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 시민의 교육장으로 이용함은 어떨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본식 건물이 보였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한 두 채 밖에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에 나는 장승포에 쌀 팔려 간적이 있다. 신부시장 주변에서 쌀을 팔고 고무신 한 컬레를 사 가지고 온 적이 있다. 그때 거제도의 중심지는 장승포였다. 물론 일본인들이 떠난 후라 하여도 바다를 중심으로 한 발전이 타 지역보다 월등히 좋았다. 1953년 복군이 되고 모든 관공서가 장승포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승포 태생이 아니라 장승포에 대한 옛 추억은 그 정도이다. 퇴임을 하고 장승포를 자주 찾았다. 그 이유는 지심도를 가기 위함과 장승포 일구의 일제 잔존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보존하려는 주민들의 관심이 미미하여 옛것을 되살리기에 어려움이 있다.
☻ 장승포 1,2구 (신부동) 중요 건물
-장승포 등대 : 장승포 1구와 5구 양쪽에 있으며, 낚시가 잘되고 사진촬영에 멋을 더해준다..
-거제수협 : 장승포 우체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장승포와 거제어업의 산실이다.
-장승포 우체국 : 1876년 우편취급소가 있었으며 장승포 우체국의 주줏돌이 되었다.
-총명사 : 신부마을 뒷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25년 일본인 이라사가 총명사 폐찰시키고 콘피라신사를 건립하였다. 1962에 창건함.
-콘피라신사터: 이 신사는 1907년 콘피라신사(바다신)로 출발하여 1925년 10월 건립하면서 가을 축제를 열었다. 1935년 이후 정식 신사로 인가를 받으면서 조선인들도 참여하는 황국신민의 교육장으로 이용되었다.
-거제도 비취호텔: 대우조선해양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호텔로 전망이 좋으며 식당과 레스또랑을 겸비하고 있다. 전망이 끝내준다.
< 장승포 1,2구 식당>
-평화식당: 신부시장내 물메기탕, 대구탕
-함흥냉면: 전통 전통냉면집 (681-2226) 우체국 옆
-천화원 : 전통중국집 (681-2408) 우체국 옆
-항만식당: 해물뚝베기 (682-4369) 수협 옆
-가미 :매운탕, 해물탕 (681-0670) 수협 100m 거리
-박가내 : 생선회, 전복 ( 681-5771) 수협 100m 거리
-장어.문어 도매: 도매상 (682-3025)
-해녀의 집 : 해산물 도매 (682-0689)
-미조장어구이 : 장어의 참맛 (681-2422)
-총바우횟집 ; 자연산 횟집 (682-1220) 일구 바닷가
-부일횟집: 자연산 횟집 (681-3324)일구 바닷가
-장승포 횟집: 자연산 횟집 (681-2818) 일구 바닷가
-청포횟집: 자연산 횟집 (681-9000) 일구 바닷가
-명가장어구이: 장어 일번지 ( 682-0092) 비취호텔 가는 길
-장승포비취호텔과 식당,레스드랑:숙박, 식당, 목욕탕( 682-5161)
장승포 5구에서 바라본 일구 전경 (입좌촌)
거제문화예술회관 주변 전경
일구 바닷가 횟집촌
멸치잡이배의 귀항
입좌촌(신부마을)에 있는 총명사의 부처
6.25전쟁 시 생긴 냉면집
거제도 최초의 우체국의 현재 모습
거제 관광객이 자주 찾는 항만식당
현재 남아 있는 일본식 건물--일본식 건물은 창문이 많고 지붕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장승포 1구 바닷가
십년전의 모습 현재는 조금다르다.
나라를 잃은 민족은 서렵다.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시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어가는 모습
일제 강점기시대 장승포항, 엄청 배가 많내요.
일본 신사가 있었던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