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밀양아리랑>의 수수께기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섯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이재욱의 <영남전래민요집> 청송지역 조사에서 ‘날좀 보소···’를 <경북아리랑>이라고 표기했고, 밀양에서는 어떤 아리랑도 조사되지 않았다. 오늘의 자료에서는 이 사설이 <밀양아리랑>에서 불려진다. 그러므로 1930년 조사 당시 영남에서는 오늘의 <밀양아리랑>은 유행되지 않았고, 또한 이 사설은 이미 영남지역에서 다른 아리랑 사설로 불려지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밀양아리랑>이 아주 오래전부터 불려온 아리랑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의외의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밀양지역의 한 권번 운영자인 박남포(작곡가 박시춘의 부친)가 서울에서 아리랑이 유행하자 밀양 지명을 쓴 아리랑을 구성하여 음반으로 발매, 불려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이 <밀양아리랑>이 아주 오래전부터 불려온 노래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2007년 5월, <밀양아리랑제>를 참관한 후, 대나무에 둘러싸여 도도함을 뽐내는 영남루에서 남천강물을 바라보며 정리한 것인데, 바로 다음과 같은 원귀설화(寃鬼說話)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곧 ‘아랑처녀의 정절’로 요약되는 이런 줄거리이다.
조선조 명종 때 밀양 윤부사의 무남독녀 외동딸 아랑을 관노인 통인이 뜻밖에도 흠모하여 유모를 돈으로 매수하니, 달이 밝은 날 영남루 대숲에서 통인과 만나게 하였다. 이 때 통인이 고백을 했으나 완강히 거절하자 통인은 숨겼던 칼을 빼들어 아랑의 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결국 아랑은 죽음으로서 정절을 지켜낸 것이다. 대숲에 아랑의 죽음을 모르게 처리하였고, 부사는 딸을 찾지 못한 채 서울로 이임하고 말았다. 그 후 계속해서 신임 부사가 부임하면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자 나라에서는 급기야 누구든 부사로 발령을 내겠다고 방을 붙였다. 그러자 담대한 이상사가 평생소원인 부사나 한번하고 죽자는 마음으로 자원했다. 그래서 첫 날밤 곳곳에 불을 밝히고 있노라니 머리를 산발한 처녀 귀신이 나타나서 자신의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말하였다. 부사는 즉시 통인과 유모를 벌하였고, 묘를 쓰고 아랑의 한을 달랬다.
이후 밀양지역 사람들이 정절을 지킨 아랑을 추모하여 매년 음력 4월 16일 제(祭)를 지내주었고, 이때 추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밀양아리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원귀설화가 배경이 되어 언제부터인가 그 역사를 조선 중기로까지 끌어 올려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