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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아버지와 형을 속였습니다. 형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죽을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형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만 잠시 고향을 떠나서 피해 있기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가 아니라, 아버지와 형이 아니라 스스로 고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했습니다. 고향으로부터 자신을 내뱉었습니다. 고향으로부터 자신을 토해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스스로 귀리를 자초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토해버립니다. 내뱉어버립니다. 상황은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하란에서 지내는 동안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늘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외로울 때면 더 더욱 사무쳤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꿈속에서도 그리워했었던 고향이었습니다. 고향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기쁘고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에 무거웠습니다. 한 사람이 걸렸습니다. 자신을 죽이기 전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형이었습니다. 좋은 대책은 없는지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종들을 형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귀향 소식을 알리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형의 마음이 어떤지 헤아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신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죽이고 말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발 마음이 정리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종들은 형에서를 만나지도 못하고 지레 겁을 먹은 상태에서 돌아왔습니다. 형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들과 함께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사백 명은 조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그돌라오멜 연합군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동원했던 삼백열여덟 명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쉽게 갖추기 어려운 대규모의 병력이었습니다. 화해보다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 과시처럼 보였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떨렸습니다. 맥이 완전히 풀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어떤 설명도 첨부되어 있지 않습니다. 형에서가 종들이나 야곱의 판단대로 화해를 원하지 않았었는지 또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었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동생 야곱이 20년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이 너무 반가워서 말을 세게 몰았는지도 모릅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침 400명의 군사들과 함께 광야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환영하기 위해서 같이 달려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삼촌 라반이 쫓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에서에게도 야곱의 몸에 손 하나 대지 말라고 미리 경고하셨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관점 또는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 가운데 제대로 확인할 방법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대규모의 군사들이 빠르게 말을 몰며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는 현실 상황에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갈팡질팡했습니다. 안절부절 했습니다. 치기어린 행동이 낳은 결과 앞에서 이만저만 낙심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어떻게든 해야만 했습니다. 순간, 그가 이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또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지극히 이기적인 기질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가족들과 종들은 물론 짐승들까지 모두 다 포함해서 두 떼로 나눴습니다. 형으로부터 한 떼만이라도 지켜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또 여호와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믿음으로 여호와를 찾았는지, 궁여지책으로 찾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방법만으로는 현재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상황이 너무 두렵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다던 약속을 지켜달라고 외쳤습니다. 형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외쳤습니다. 기도만으로는, 여호와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형을 위해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뇌물을 준비했습니다. 네 떼로 나누었습니다. 떼와 떼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에서가 물으면 자신이 형에게 드리기 위해서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각 떼를 몰고 가는 모든 종들에게 똑같이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뒤따라오고 있다는 말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형의 마음을 풀어보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종들을 먼저 보낸 그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 이튿날,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가족들을 떼로 나누었습니다. 첩들과 그들로부터 낳은 아들들을 앞장 세웠습니다. 레아와 그로부터 낳은 아들들이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라헬과 그로부터 낳은 아들 요셉은 맨 뒤에서 따르도록 했습니다. 아내들과 아들들은 이런 야곱의 행동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가 막히지 않았을까요? 대단히 실망하지 않았을까요? 장자가 아버지의 서모를 범하는 파렴치한 죄를 범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가족들을 앞장세운 그는 혼자 남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모두 취해 보았지만,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문제 앞에서 지극히 무기력한 자신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도움을 구했던 여호와마저 잊고 있었습니다.
그때, 벧엘에서 그를 만나주셨던 여호와께서, 삼촌 라반의 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셨던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그를 다시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천사를 필사적으로 붙잡았습니다. 밤새도록 씨름했습니다. 해석하기 어려운 표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통 너무 급박했던 야곱이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해석합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는 방법으로 대책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는 형에서를 만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신만의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떼를 몰고 가는 종들이 에서를 만나면 반드시 잊지 말고 해야 할 말을 집요하게 반복해서 가르쳐 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주도면밀한 사람이,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상황이 나빠지자 갑자기 돌변해서 여호와의 천사와 동이 트기 전까지 밤이 새도록 쉬지도 않고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은 아무리 양보해서 생각해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평소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행동을 보이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여호와의 천사가 야곱을 이기지 못해서 환도 뼈를 치고 말았다는 표현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사람 하나 이기지 못해서 반칙하고 말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속사적인 입장에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얍복 나루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였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주시마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과 이방인의 땅을 나누는 경계였습니다. 또 가나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들어가는 방법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에게 이것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탁월한 지식과 해박한 신학과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만으로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야곱을 막아서셨습니다.
믿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씨름하셨습니다. 야곱 역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항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씨름은 동이 틀 때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이제 씨름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순간, 여호와의 사자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허벅지 관절은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서 하란으로 떠나는 종의 허벅지 관절에 손을 넣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야곱 역시 자신의 시체를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요셉의 허벅지 관절에 손을 넣었습니다.
특히, 성경은 “허벅지 관절”이라는 뜻의 히브리어ירך(야레크)가 아니라 “우묵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כ(카프)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역 본들이 “가랑이의 움푹 들어간 곳hollow of his thigh”(KJV), “엉덩이의 우묵한 곳socket of Jacob's hip”(NIV), “가랑이의 우묵한 곳socket of his thigh”(NASB) 등으로 번역하는 이유입니다. 또 “허벅지 관절을 쳤다”라는 구절에서 “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גע(나가)의 뜻은 “손이 닿다”입니다. “만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야곱의 가랑이 우묵한 곳에 있는 성기를 만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동시에 야곱은 할례 언약을 떠올렸습니다. 여호와의 언약이 서려 있는 가나안 땅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수고와 노력과 애씀과 지식과 신학과 지혜 곧 지극히 인간적인 조건을 통해서 들어가려고 몸부림쳤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천사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여호와 하나님까지 이겨 먹으려고 몸부림쳤던 그가 이겼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형 에서와 화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했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는 뜬금없이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이다.”(창32:28b)라고 외쳤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Israel”은 “투쟁하다, 애쓰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Sarah와 하나님God을 뜻하는 명사El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다God Rules, 하나님이 명령하다God Commands, 하나님이 이기다God Prevails” 등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다스리신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명령을 내리신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이기신다.” 등으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인생의 주인은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한 완벽하게 무기력한 야곱을 완전히 차압差押해 버리셨습니다. 압류押留해 버리셨습니다. 소유해 버리셨습니다. 당신의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다스려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이기셨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그를 위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조금도 흠을 찾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이루어주셨습니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주실 때마자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단 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단 한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환도 뼈가 완전히 위골되는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조상으로 거듭났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은혜까지 누렸습니다. 형 에서와의 화해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그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은혜까지 누렸습니다.
당연히 그를 완전히 차압하시고, 압류하시고, 당신의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다스려 주시고, 그에게 때에 맞는 명령을 내리시고, 그가 아무리 탁월한 능력으로 무장했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이기시는 여호와께서 값없이, 일방적으로, 넘치도록 부어주셨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고 누렸으니 이제는 꽃길만 열릴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형 에서와 너무나 쉽게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도무지 해결할 수 없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었을까요? 두려운 대상이 없어진 상태에서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요? 이후, 그는 여호와와 맺은 거룩한 약속이 서려 있는 가나안 땅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로 거듭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책임지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까지 받아놨기 때문에 탄탄대로의 꽃길만 예비 되어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삶에 다시 도무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폭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이방인들의 문화를 절제하지 못할 정도로 무분별하게 좋아했던 딸은 겁탈을 당했습니다. 아들들은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순식간에 살인자와 도적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가문의 위엄과 영광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야곱은 제발이 저렸습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평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제까지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주변 족속들이 원수를 갚기 위해 서로 연합하여 자신을 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할지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두 손을 놓은 채 안절부절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차압하신, 압류하신 다스리고, 명령하시고, 이기시는 여호와께서 다시 개입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당신께 집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입니다. 차압당한 여호와 한분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오랫동안 머물고 있던 지역을 도망치듯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배후에서 역사해 주셨습니다.
주변 족속들을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절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어 버리셨습니다. 약속대로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아니 천지를 창조하기 전부터 당신의 약속이 서려있는 거룩한 땅까지 이끌어주셨습니다. 당신을 불가능이 전혀 없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한 번 작정한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주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차압해 버리신 여호와는 전능하십니다. 불가능이 전혀 없으십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는 거룩한 후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거룩한 약속이 서려 있는 가나안 땅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기업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바로 그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던 라헬이 출산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습니다. 슬픔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첩 빌하를 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근친상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완전히 땅에 짓밟아버리는 패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명예로운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수치스럽고 파렴치한 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극도로 마음이 상했습니다. 도무지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 “나그네처럼 살아온 세월이 130년이 되었습니다. 내 조상들의 나그네 생활에 비하면 내 나이가 얼마 되지 않지만 정말 고달픈 세월을 보냈습니다.”(창47:9b)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고난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형통과는 거리가 먼 힘겨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한편, 창36장에는 형에서 곧 에돔의 족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지극히 육신적이었습니다. 정욕적이었습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했던 장자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정도로 즉흥적이었습니다. 매사에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세 명이나 되는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와 거룩한 언약으로 맺어진 가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이면서도 불신앙적인 삶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언제나 근심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창36:6-8)라고 이어집니다. 에서는 여호와와 아주 담을 쌓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유가 풍부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굳이 비좁은 땅에서 동생 이스라엘과 함께 머물러야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즉시 서둘렀습니다.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일찍부터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독립해서 현재까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세일 지역으로 아주 떠나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약속이 서려 있는 거룩한 땅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작은 미련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그의 몫이었던 장자의 명분은 동생 이스라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주권 역시 이스라엘에게 아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창28:13), “나는 세일산지를 에서의 몫으로 주었다.”(신2:5)라는 증거대로, 여호와께서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신 일이었습니다. 세일 지역으로 들어간 에서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습니다. 많은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창36:12a)라는 말씀에 따르면,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괴롭혔던 아말렉 족속이 떨어져 나올 정도로 확대되었습니다.
본문은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창36:15)라고 이어집니다. “족장”은 한 공동체의 통치권을 가진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초기에는 주로 순수한 혈통적 개념에서 한 가문의 최고 어른을 일컬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혈통의 개념을 떠나서 부족 또는 집단의 지도자급 인물을 가리켰습니다. 에서의 후손들 가운데서 세 명의 아들과 열 명의 손자 곧 모두 열세명의 족장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들은 씨족 또는 씨족에 버금가는 집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세일 지역을 여러 개 구역으로 분할分轄해서 다스렸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 하니라”(창36:31)라고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에서의 후손은 이미 독립된 국가로서 그럴듯한 왕정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곽에서 감시할 수 있는 마을, 군사 주둔지, 농토 등을 두루 갖춘 도시 국가 형태의 큰 성읍도 갖췄습니다. 왕권은 혈연에 의해서 세습되지 않고, 족장들에 의해서 선출 계승되었습니다. 왕이 통치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라기보다는 왕과 족장이 함께 통치하는 지방 분권적 군주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후미를 치고 빠지기에는 안성맞춤인 체제였습니다.
본문은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창36:40-43)라고 마무리됩니다. 앞서 소개된 족장들의 뒤를 이어서 세습한 족장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일 산을 중심으로 서로 지역을 나눠서 다스렸습니다. 안정된 삶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습니다.
바로의 학정 아래서 하루하루 힘겨운 노예 생활을 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소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형통을 누렸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할지라도 버림받은 족속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끌어 가는 역사의 주역은 언약에서 제외된 그들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힘겨운 종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후손들이었습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희망과 미래 역시 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후손들의 몫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후, 에서의 후손에 대한 빛나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던 이스라엘의 후손을 괴롭히다가 멸망해간 슬프고 어두운 역사만 조금 더 기록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후손은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책임지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는 복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은 약속의 후손이 고난을 받고, 약속에서 제외된 후손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Fanny Crosby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어느 날, 5달러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일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와주심을 구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혹시 크로스비가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혹시 찬송가를 작사한 그 분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크로스비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들렀다고 말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악수를 청했습니다.
손을 뗐을 때, 크로스비의 손에는 5달러 지폐 한 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즉시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채색 옷이 벗겨졌습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종으로 팔렸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거기서도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자신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도움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반드시 기억하고, 억울한 자리에서 건져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잊혀 졌습니다.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2년이라는 긴 세월을 무기력하게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고 또 낮아졌습니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지워지는 절대 절망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 “(여호와께서 당신이 창세전부터 작정한) 사람 하나를 먼저 (이집트로) 보내셨으니 곧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다.”(시105:17)라고 증거 합니다.
채색 옷을 벗기신 분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지신 분도, 미디안 상인에게 팔리게 하신 분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이집트로 들어가게 하신 분도, 보디발에게 팔리게 하신 분도, 억울한 누명을 쓰게 만드신 분도, 지하 감옥에 들어가게 하신 분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을 도와주게 하신 분도, 완전히 잊혀 지게 하신 분도,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게 만드신 분도, 그를 완전히 지워버리신 분도, 그가 당했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분도 여호와였다고 증거 합니다. 여호와께 완전히 차압差押당한 삶 곧 압류押留당한 삶이 형통이라고 증거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이삭이 그랬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시인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여호와께 완전히 차압당한, 압류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책임지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형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무덤에 장사가 되셨습니다. 살아온 삶은 물론 존재 자체까지 완전히 삭제가 되셨습니다.
완전히 지워지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완전히 차압 당하셨습니다. 완전히 압류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완전히 차압당하신, 완전히 압류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로, 진리로, 생명으로 세우셨습니다. 세상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과학문명이든, 산업문명이든 모두 다 자아 숭배교로 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깊은 밤의 어두움 속으로부터 빛으로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Basil of Caesarea는 오랫동안 견디기 힘든 심각한 두통을 앓았습니다.
두통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두통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두통이 물러가고 건강을 되찾은 후,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강력한 성적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괴로웠습니다. 두통으로 고생할 때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고민과 갈등이었습니다. 건강해서 죄를 짓는 것보다 두통으로 고생하는 것이 좋으니 다시 두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고난은 타락한 저와 여러분의 탐욕과 죄를 억제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또 고난은 저와 여러분을 거룩한 당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의 과정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무기력한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는 겸손을 배우고,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 한 분만 온전히 바라보고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신앙과 인격을 가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제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형들이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뭇 백성을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들과 어린자녀들을 돌봐 드리겠습니다.”(창50:20b-21)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지극히 외롭고 고독하며 견디기 힘든 지독한 고통까지 당해야 하는 환경 속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던 사람들을 얼마든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그들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의 삶까지 책임져 줄 수 있는, 이전에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 삶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악 된 실체가 조금도 감춰지지 않고 적나라하게 폭로될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저와 여러분을 완전히 차압하신, 압류하신, 소유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장래까지도 맡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소서, 여호와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여호와여, (진짜) 형통을 주소서.”(시118:25)라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을 차압하신, 압류하신, 소유하신 여호와께서 이루어주실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창세전 작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